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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송명복(요셉) 시인&수필가 입니다
아주 여러 차례 시도해왔고
지금도 가입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실은 청주 문인협회 카페에도 제 글이 (bok123)이라는 아이디로 제법
올라와 있습니다
청주 문인 협회 가입절차에
3명 이상의 추천인이 있어야 된다고 정명숙 회장님이
전화상으로도 알려 주시네요
현재 사정이 이를 충족하고 있지 못하니
한국 문인 협회 회원이면서도 충북 지회 회원이 아닌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어서 부득이 아래에 개인 프로필과
연락처 아울러 수상경력과 개인 시집 및 수필집
그리고 연락처와 함께 최근 제글을 게제합니다
추천인이 되어서 도와주실 분은 아래 연락처로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송명복(요셉) 시인&수필가
HP. 010-5657-1672
E-Mail. igig29@naver.com
등단 경로: (시부문) 계간 한양문학, (수필부문): 계간 문학시선
활동경력사항 :
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무역상무 전공 수료)
전 주성/김천전문대학 강사, 영동대학교, 숙명여대 강사
한국문인협회, 청옥문학, 글벗문학회,청주시문학회 회원
한국다향문학상(2019), 대한시문학 문학상(2021), 제4회 모산문학상(2023)
(개인 저서)
시집 : 내 마음의 오아시스(2017), 초록빛 눈맞춤(2020)
수필집: 흙 속에서 피는 꽃(2022)
시 부문
⓵ 설야(雪夜)의 여인
⓶ 봄이 오는 소리
⓷ 단양 구담봉(丹陽龜潭峰)
수필 부문
⓵ 고무신과 신발장
⓶ 영화 ‘설국열차와 러브레터’
시 부문
⓵ 설야(雪夜)의 여인
하늘빛이 하소연하듯 핏기 잃은 얼굴로 하염없이
휘어지는 그 먼 길 춤추며 좇아 오는 여정에
무슨 소식 전하려고 소리도 없이 내려오는
은빛 날개 번쩍이는 한 많은 여인의 몸부림인가
까만 밤하늘에 별빛 달빛 눈치 보며 멈칫멈칫
새하얗게 쏟아놓는 임이시여~
어떤 사연이길래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비치려고
사색 흐름이 생과 사로 한 끗 차이 세상이련만
새하얀 천사의
눈망울 춤추는 발길에 오는 길은 생이요
잠시 머물다가 찰나에 고개 넘어가면 사인 것을
설야 여인 부질없는 몸짓은 생으로 사를 덮으려는
허무한 속세의 탐욕과 오욕인 것을
어찌 가리고
감추려는 마음으로 이 밤에 세상을 흔들려는가
백색 여인 손길이 하얀 솜 방울 물결처럼 흐른다.
⓶ 봄이 오는 소리/송명복(요셉)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움직이는 발걸음 졸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 몽돌을 굴리며
콩닥콩닥 세월을 노래한다
화사하게 비쳐오는
햇살 아래 아장아장 뒤뚱뒤뚱
병아리 깃털이 먼 여정 투덜투덜
햇님 미소가 번쩍번쩍 깜짝
놀란 개나리꽃 활짝 피어오른다
⓷ 단양 구담봉(丹陽龜潭峰)/송명복(요셉)
하늘로 오르는 기암절벽 산봉우리 웅장하고
고요하니 두향 기녀 거문고에 시향이
울려오는 듯하고
구담봉 위에 높이 솟아 오고 가는 구름이
바라보니 신선이 오고 가던 칡넝쿨
그네 풍경이 언제인 듯한데
지난 세월 뒤엉켜 흐르는 맑고 푸르른
물결은 거울 속에 부용 형상( 浮龍 形像)
그려내는 세상이라
어둠 속에 부서지는 달빛은 물결 위에
깜박이는 거북의 눈망울 비추울까
수필 부문
⓵ 고무신과 신발장
신발장에 꽂힌 시선에서 피식 웃음이 난다. ‘아 그렇지! 신발장에 고무신이 없었지,’라는 엉뚱한 상상에서 벗어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지난밤 소설가 오영수 선생님의 ‘남이와 엿장수’를 읽은 영향인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특별한 느낌이 찾아오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우리 일상에서 만화 속의 한 장면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듯하다. 마치 외출하는 순간에 까맣게 잊혔던 추억 속의 고무신이 질문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혹시 그대는 그새 벌써 저를 잊으셨나요 라는 질문으로 고무신이 씁쓰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한 하루의 흐름이다.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소리 없이 차오르는 우습기도 한 일상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이 그러하다.
소설가 오영수 선생님의 ’남이와 엿장수‘는 ’고무신’이라는 바뀐 제목으로 교과서에 실렸고 그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봄날, 고요한 산기슭 마을에 엿장수가 찾아온다. 이때 남이가 식모로 있는 주인댁 아이들인 영이와 윤이가 남이의 옥색 고무신을 가지고 나가서 엿 바꿔 먹게 된다. 심지어는 남이가 엿장수에게 찾아가서 고무신을 내놓으라고 하는 영화 속 장면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하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 더욱 문제이다. 예전보다 엿장수가 마을에 더 자주 찾아오게 되고 엿장수와 남이는 서로 호감이 생기게 된다. 이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신랑감을 물색해 놓은 남이의 아버지가 남이의 결혼을 위해 주인인 철수의 집에 방문하게 되면서 심각해진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처럼 경제적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딸을 식모로 다른 집으로 보내는 일은 흔한 경우이기도 했었다. 결국 남이는 울음을 머금고 엿장수가 사준 새 옥색 고무신을 신고 아버지를 따라가고 엿장수는 울음 고개에서 남이의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어린 시절의 고무신 하면 기억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 있다. 어느 해 여름날이면 고무신에 땀이 차 신발을 벗을 때 발가락에선 시커먼 때가 나오기도 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어쩌다 놀다가 자신 앞으로 굴러온 축구공을 걷어찰 때가 문제였었다. 실제로 이쯤이면 공보다 멀리 벗겨져 나갔던 신발을 찾아야만 했던 기억도 우스운 일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비 오는 날이면 질퍽질퍽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피해 걸어야 했었던 복숭아뼈 아래의 단화가 아니었던가 싶다. 사실 요즈음 리듬체조의 한 장면이 펼쳐지곤 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남이와 엿장수‘의 한 장면처럼 오래 신고 다녀서 교체 시기에 해당하는 고무신은 찌그러진 냄비와 집 안팎의 쇳조각 등과 함께 엿장수 오는 날 물물교환의 해당 품목이기도 했었다. 소위 말하는 ’엿 바꾸어 먹었다‘가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였었다. 그렇지만 고무신과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이야기는 “고무신을 꺾어(거꾸로) 신는다.”라는 말인데 남자 친구가 군에 갔을 때 변심한 여성을 지칭한다. 여기에다 고무신은 막걸리와 함께 부정선거의 상징이기도 했으니 씁쓰름한 흔적이기도 했었다.
이 땅에 고무신이 등장하게 된 배경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고무신이 등장하는 시기에는 짚신보다 훨씬 질겨 오래 신을 수 있고 비가 내려도 물이 새지 않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호황을 누린듯하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남자용 짚신과 여자용 마른 신의 모양을 본떠 고무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쯤이면 느닷없는 고무신의 등장으로 찬밥 신세로 전락한 짚신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그 시대적 상황에선 얼마나 황당하고 쪽팔렸겠는가? 불과 100년을 조금 넘은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무신이 여기저기서 인기를 얻게 되자 일제 강점기인 1922년 8월 5일에 대륙 고무 주식회사라는 곳에서 ‘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검정 고무신을 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아주 눈에 번쩍 띄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이 회사가 당시에 내놓은 광고에는‘대륙 고무가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환께서 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여 여관 각 위의 애용을 수하야’라는 글귀가 등장했다고 한다. 이환은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인물이란 점에는 설마 하는 마음이다. 어떻게 임금님과 까만 고무신이 어울릴까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지난 세월에는 고무신이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산업이 개발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고무신 산업이 수출산업으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이키, 아디다스 등 스포츠화가 등장하면서 고무신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어느 한 개인은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지난날의 가치관을 쉽게 잊어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지난 시절 아주 작은 흔적으로 고무신을 바라보는 맘은 남다르다. 우리에게는 현대화, 도시화, 문명화, 기계화로 인간 존중의 가치관이 사라진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 생활 속에는 소박함과 순수함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요즘이기도 하다. 하루하루가 스쳐 가는 저녁 햇살에 삐죽이 솟아나는 풀 잎사귀를 바라본다. 샛별같이 앙증맞은 모습에 의지하는 듯한 가슴속 울렁임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⓶ 영화 ‘설국열차와 러브레터’
우리에게 봄은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롭다. 우리 주위에는 푸릇푸릇한 새싹이 숨겨진 봄빛이 스쳐 가고 있다. 지난겨울이 봄을 시샘하듯이 하얗게 휘감아 돌아가는 시절이 야릇하기도 하다. 모든 일에선 엉뚱함이 신비로운 창조의 시작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유달리 춥고 고달팠던 겨울철이었다. 지난 계절 속에 풍경이 한 장의 그림처럼 기억을 새롭게도 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벼르던 심술이 문제이다. 영혼 속에서 긁적이던 문제를 내놓은 순간이 야릇한 흥분으로 다가온다. 우리 내기 한번 하면 어떨까? 이번 달 안에 폭설이 내릴 것 같단 말이야. 아마 일 년 중에 오는 적설량 대부분이 이 시기에 쏟아진다는 게 내 예측이기도 하지. 만약 10센티 비슷하게 내리면 30만 원이 이 몸에 오는 거로 하기로 하지. 사실 봄기운이 완연해 가는 중인데 웬 궤변인가 싫을 것이다. 여하튼 자연은 통상의 인식을 바꾸어버릴 듯이 한 폭의 산수화를 선물하는 듯하다. 자연이 베푸는 신비한 설경 속에서 일상이 펼쳐가는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꼼지락거린다.
우리 집 주변이 지구 위에 세상을 하얗게 가려버린 듯한 설경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숨겨진 듯한 신비로움이 술렁이는 세계이다. 어떤 경우에는 가끔 현실과는 다른 세상의 징검다리를 만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런 이유인지 모든 일상생활을 영상화한 영화 속 이야기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오곤 한다. 인간 세상의 빈부 격차와 계층 간의 갈등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류가 산업화 속에 불러온 재앙인 하나의 빙하시대를 배경으로 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그러하다. 이 작품 속에선 뱀처럼 꿈틀거리는 쇳덩어리 열차가 성경 속 방주와는 또 다른 노아의 방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간이 불러온 제2의 빙하기에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년 내내 끊임없이 지구 위 궤도를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는 것이 유일하다. 심지어 이 영화 속에 열차는 17년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지칠 새도 없이 달려온 것이다. 이 얼마나 고달픈 여정 속에 삶의 연속인가 싶은 점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혹독한 악조건에도 인간의 악습이 재현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본 영화 설국열차 앞쪽 칸에는 선택된 사람들이 호화로운 객실에서 술과 마약 등 환락을 즐기는 세상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꼬리 칸에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생존의 공간이 있다. 이러한 계층 사이의 갈등과 대립 양상이 마치 평온한 시기의 인간들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설경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시대 영화 속에는 인간들의 험악한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주 서정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 새하얀 눈빛만큼이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아름다운 사랑의 러브스토리가 설원을 배경으로 인상적인 장면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아닌가 싶다.
인간의 순수한 본성은 새하얀 눈빛만큼이나 잔잔한 은빛 물결을 이루는 듯하다. 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속삭임이 담겨 있는 영상 속 이야기이다. 영화의 시작은 일본 오타와 지역의 설원을 배경으로 주인공 여자 배우가 생(生)을 달리 한 전 애인에게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오겡끼데스카, 와타시와 겡키데스!) (잘 지내나요! 저는 잘 지내요!)라는 유명한 대사로 시작되고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새하얀 눈 속에 가려진 세계와 같이 신비롭기만 하다. 사랑하는 전 애인이 등산하는 과정에서 깊은 골짜기로 추락하게 되고 실종되면서 ‘마츠다 세어 코의 푸른 산호초’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 속에서 쓸쓸하게 사망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 속에선 전 애인 후지이 이츠키를 그리워하는 것은 와다나베 히로코라는 여성이다. 우리의 현실에선 전 애인을 그리워하며 방황하는 여인을 폭넓게 감싸 안는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인상적인 것은 아키바라는 현재의 애인이 여인의 감성을 보듬는다는 점이다. 한때는 자신의 친구였었던 여성의 전 애인 ‘후지이 이츠키’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간청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기도 한다. 여기에다 또 다른 현재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여성이 죽은 남자 후지이 이츠키와 동명이인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점도 있다.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현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와다나메 히로코가 우연히 알게 된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현재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여인이 답장을 하면서 비롯되는 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후지이 이츠키가 중학생 시절 전학하게 되면서 현재의 후지이 이츠키를 닮은 와다나베 히로코를 사랑했었다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어떤 점에선 동화 속에 이야기요 가장 이기적이고 양다리의 끝판왕이라 할 만도 하다. 어쨌든 이 영화에는 새하얀 눈송이처럼 아름답고 극적인 상황이 환상적이다.
지금 창밖 어둠 뒤에는 수많은 사연이 오가는 새벽 공간이 흐른다. 새하얀 눈 속에 세계가 신비로운 것처럼 어둠 속에 가려진 수많은 이야기도 그렇지 않겠는가 싶다. 우리에겐 어둠이 벗겨지고 새로운 빛줄기 속에 희망과 아픔이 뒤섞이는 일상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흔히 새로움을 바라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인생이라 한다. 이런 삶 속에 맑고 소중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새기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새하얀 눈길 속에 굴리던 눈덩이가 어느새 눈사람이 되고 벗이 되어 추억을 남기는 세상이다. 하얀 눈 속 세상이 부끄러움이 아닌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맘이 꿈틀거리는 이유이다. 영화 설국열차 속에 다툼과 분쟁이 오가는 장면보다는 영화 ‘러브레터’의 아름다운 한 장면이기를 소망하면서 고요한 밤의 적막 속에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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