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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 선생은 1900년 평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안이고 호는 화강이며, 이명으로는 이웅, 임병웅, 왕중일, 증손, 진탁, 휘석 등이 있다.
선생의 가계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준식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어 독립전쟁에 투신하기로 뜻을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목도하면서 기울어가는 나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체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경술국치 후 조국의 독립에 자신의 한 몸을 던지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적지 않은 한인 청년들이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교하였다.
한인 청년들의 조직적인 입교는 1910년대 후반 이후 중국 군벌정권의 군사학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7월 3·1운동 직후 이준식 선생은 중국의 군사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상해는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로서 열강의 조계가 있어 약소민족의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이 상해에 도착한 시점은 이미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3·1운동 직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중국 군관학교 입학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소개와 주선이 있었다.
이준식 선생이 입교한 군관학교는 중국 운남성 곤명에 있는 운남강무학교였다.
운남강무학교는 1909년 중국 군벌 당계요가 설립한 군사학교였다.
주로 운남, 귀주성에 주둔 중인 청조 신군 소속 각급 군사간부 양성이 목적이었고, 손문이 주도하는 동맹회의 영향 하에 신해혁명과 원세개 토벌운동에 참여한 초급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1910년대부터 많은 한인 청년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는데, 한인 졸업생의 수가 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인 졸업생으로는 김홍일, 김훈, 최용건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의 군사인재들로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21년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
선생은 만주에서 자유시참변 이후 항일무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통의부에 가입했다.
통의부는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였다.
1920년의 경신참변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 이래 침체된 만주의 독립군은 독립전쟁 전선의 재정비와 투쟁역량의 강화를 위하여 연합적인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22년 6월 환인현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군 단체 대표가 모여 통합조직체인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6월 3일 개최된 중앙직원회에서 통군부를 개방하여 다른 독립군 단체와 무조건적으로 통일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 후 각 단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교섭하였다.
그 결과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통합기구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결성 초기 중앙본부는 마권자에 두었으며, 조직체계는 총장제로서 총장 아래에 민사부·교섭부·군사부·법무부·재무부·학무부·실업부·권업부·교통부·참모부 등 10개 부서를 설치하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둠으로써 민정과 군정을 겸비한 군정부 형태를 갖추었다.
주요 간부로 총장 김동삼, 부총장 채상덕을 선출하였다.
지방행정조직은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고 총관 이하 참사·서기·검무감·검무원·통신원 등 임원을 두었는데, 1923년까지 통화현·환인현·집안현·관전현·흥안현·유하현·임강현·장백현 등에 총관사무소 26개를 설치하였다.
의용군 조직은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 헌병대의 7개 중대로 800여 명이 소속되었다.
활동은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과 부일배 응징, 일본 영사관·경찰서·주재소·남만철도 등의 일제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외에도, 광동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 『대한통의부공보』 등을 발간하는 등 교육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과 지도이념의 차이 등에서 오는 갈등으로 1923년 2월 전덕원 계열의 의용군이 이탈하여 의군부를 결성하였다.
의용군 1·2·3·5중대가 그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고, 1924년 11월 정의부가 조직되었다.
통의부는 참의부·정의부에 흡수되었다.
이준식 선생은 이때 조직된 정의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하나의 독립군영을 조직하기 위한 혁명거두회의에서 조직되었다.
길림민회·서로군정서·의성단·독립군단 등 12개 독립군단체를 통합했으나 주로 통의부를 토대로 개편되었다.
참의부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정의부는 봉천성과 길림성을 세력 범위로 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산업·교육에도 힘썼다.
장교 중에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광동의 군관학교에 파견·유학시켰으며, 각지 한인부락에는 소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했다. 언론기관지로 『전우』, 『대동민보』를 발행하는가 하면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액목현 등 3곳에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정착하게 하고 청년훈련소를 각 중요지대에 설립했다.
후일 3부 통합운동으로 국민부 조직에 통합되었다.
선생은 정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오동진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후임으로 정의부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정의부 군사위 대표로 길림성 신안둔에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28년 이준식 선생은 3부가 통합하여 조직한 국민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민부는 1927년 4월 15일 제1회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만주지역에서 활발하게 조직·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회의가 성공하지 못하고 분열된 결과로 조직되었다.
재만 조선민족의 문화양상·사업발전·공안유지, 재만 조선민족의 단일자치기관의 실현, 한중 양 민족의 혁명적 협동작업을 목적으로 했다.
이를 위한 교육·선전활동의 일환으로 남만학원을 설립하고 기관지 『조선혁명』을 발행했다.
재만 한인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농민들의 경작권 옹호운동과 1925년 6월에 체결된 미쓰야 협약으로 제약받게 된 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도 전개했다.
또한 반 국민부파와 일제 앞잡이 제거, 군자금 모집 및 독립군의 모병을 위한 군사 활동을 했다.
1934년 말 고이허를 통령으로 하는 조선혁명군정부에 흡수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준식 선생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1929년 12월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한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조직되자, 조선혁명당 중앙위원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했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분리된 후 국민부가 조직한 남만주의 유일당이다.
1929년 4월 남만주 일대의 군소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해 국민부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9월 국민부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혁명과 자치를 분리해 혁명 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위임하고 국민부는 자치 행정만 전담할 것과 군사부를 폐지하여 조선혁명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속하도록 결정했다.
12월 20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발전적 형태로서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력한 정당으로서 독립운동 사업을 완수하는 것을 당면 임무로 설정했다.
1935년 일·만 군경의 주민 분리 정책과 초토화 작전으로 항일무장투쟁은 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조선혁명당의 무장 항쟁도 약화되었다.
이준식 선생은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 산하 무력단체인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도 활동했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 3월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 거리의 국민부 사무소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남만주일대의 유일 혁명군정부인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의 당군으로 1938년 9월까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1920년대 후반부터 당시 만주에 널리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과 방략을 수용하였다.
1930년 선생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입당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설위 만주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만주에서 한인 사회주의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1926년 길림성 영고탑에 설치되면서였고, 특히 1930년 이후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5.30 폭동’을 계기로 그 세력은 크게 확산 되어갔다.
남만주 지방에서는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가 건립되고, 10월 하얼빈의 중국공산당 만주임시성위원회가 건립된 이후부터 사회주의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만주의 민족주의자들 가운데도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고 전향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리하여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내부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반국민부(반조선혁명당.군) 계열의 인물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부 창건 초기의 조직은 1930년 8월 8일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소집을 계기로 한 당내 좌·우파 갈등에 의해 큰 변화를 맞이하다.
내부의 좌파세력들은 그들의 배후조직이었던 ‘조선공산당재건설 만주부’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와 연계되어 국민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민중조직 건설과 중국공산당 가입을 주장하였다.
만주의 한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 데는 사회주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중국에 있는 한인들은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국민부 내 사회주의자들이 국민부를 반대한 이유는 국민부가 “민중을 떠난 반동기관”이며, 한인을 압박·착취하는 이중통치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력적 대립은 국민부를 반대하는 인사들에 의해 먼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1930년 8월 흥경(신빈) 북방의 황구에서 농민 100여 명을 동원하여 8월 20일 국민부 소재지인 흥경현 왕청문으로 항의하러 갔다.
국민부 옹호파들은 이들의 소행을 관헌에 알려 이동림 등을 체포하고 농민들을 탄압했다.
또 국민부 측은 10월 초순 왕동헌과 국민부의 김학규·장신규 등을 봉천성 당국에 파견하여 공산당 타도를 위해 중국 당국과 협의했다.
9월 20일경에는 조선혁명군을 동원하여 국민부 반대파 주하범·김창룡·김이택 등 3명을 암살하였으며, 이에 국민부 반대파는 10월 4일 왕청문의 국민부 근거지를 습격하여 간부 김문거를 총살 보복하였다.
양 세력의 이러한 무력충돌은 심화되어 같은 달 하순에는 좌파의 이진탁이 사살되고 현정경이 체포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특히 이때 현익철 등 국민부 옹호파는 당시 중국 동북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장학량 군벌정권과 결탁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결국 이들은 조선혁명당·국민부·조선혁명군 등 일련의 민족운동조직을 좌익 또는 새로운 대중조직으로 개편하고자 도전했던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정하게 좌·우파 연대조직의 성격을 띠었던 국민부 조직도 민족주의 우파 위주로 구성되는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국민부 내 우파의 좌파에 대한 축출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설위 만주부 간부로 활동하던 선생도 탄압 받았다. 그 결과 선생은 조선혁명당(군) 내 민족주의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관내지역으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 때가 1930년 10월이었다.
선생은 상해로 갔다.
상해는 선생이 1919년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면서 활동했던 곳이었다.
또한 선생이 상해로 오게 된 데는 사전에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해 임시정부로서는 선생과 같이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한 풍부한 경험이 있는 군사지도자가 필요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였다.
관내지역에서의 선생의 행보를 볼 때 어떤 계기인지는 몰라도 만주를 떠나면서 선생은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9.18사변 즈음 선생은 상해에서 김철, 박창세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한국군인회는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일본천왕을 폭살하려던 작탄 항일투쟁에 고무되어 조직되었다.
선생은 한국군인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 밖의 간부로는 김철, 박창세, 그리고 문일민, 김홍일 등이 있었다.
한국군인회는 간장도 발표하였다.
선생은 김구와 연결되어 작탄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립투쟁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안되며 투탄항쟁방법을 취하여야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국내외로부터 상해 등지로 찾아온 유능한 청년을 한인애국단에 소개하였다.
선생의 무장항쟁계획과 그 활동이 일본 영사관과 경찰에 알려져 항상 감시를 받던 중 윤봉길의 훙커우공원의거가 성공하였다.
이때 선생은 상해를 탈출하였다.
선생은 그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중국군에서 복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은 광동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경 김병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30년대 후반 광동에서 중국군 보병소좌로 활동하면서 광동에 있던 한인 청년들에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7년 일제의 전면적인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임시정부가 장사, 광주 등지로 이전하게 되자 선생은 중국군 고급장교로서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데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39년에는 중국군에서 자진 예편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중국령 대표의원에 선출되었다.
선생은 조성환, 황학수 등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 지구 특파단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선생은 귀국해 민족청년단 부단장을 맡았다.
국군 창설에 힘써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뒤 대령에 임명되었다가 사단장·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재향군인회 회장, 광복회 회원, 한국전력주식회사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군인의 일생이었다.
1919년 중국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독립군, 광복군을 거쳐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국군 장령으로서 40여 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일평생을 무관으로 초지일관한 영원한 항일 군인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에는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독립운동가 이준식 장군(1900.02.18 ~ 1966.04.05)|작성자 지족원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