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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정 |
교 통 |
내 용 |
식 사 |
숙 박 |
D1:5월3일 (수) |
OZ349
관광버스 |
한국출발 남경 록구공항 도착 구화산 향발(약4시간) 구화산 도착 석식 후 휴식 |
점심: 기내식
저녁: 호텔 |
구 화 산 취룡호텔 |
D2:5월4일 (목) |
케이블카
모노레일카 |
天台正頂、古拜經台、地藏王大脚印等순 례 조식 지장왕보살 성지 참배, 육신보전 참관 중식 无暇肉身、五百羅漢堂、回香閣通慧총林 참배 세계 불교사 중 유일한 비구니진신 참배 석식 후 휴식 |
아침: 호텔
점심: 호텔
저녁: 호텔 |
구 화 산 취룡호텔 |
D3:5월5일 (금) |
관광버스
케이블카 |
조식 방장스님 친견(감사원 불자 특별법회) 구화산 출발(약4시간) 황산태평 도착 후 중식 태평 북대문 에서 황산 등정, 배운정, 몽필생화, 시신봉 등 산행 황산 정상에서 석식 |
아침: 호텔
점심: 태평
저녁: 배운정 |
황 산 배운정 호 텔 |
D4:5월6일 (토) |
케이블카
관광버스 |
조식 단결송, 영객송, 기송, 괴석, 운해 광명정, 등 황산절경 감상 중식 남경향발(약5시간) 남경 도착 후 석식 부자묘 야경관광, 발마사지 |
아침: 배운정
점심: 태평
저녁: 남경 |
남경호텔 |
D5:5월7일 (일) |
관광버스
OZ350 |
조식 명효릉, 남경대학살 현장 중식 남경 록구공항 도착 귀국 (17:50 인천공항도착) |
아침: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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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휘성(安徽省, Anhui, 수도 = 허페이(合肥-Hefei))
중국의 23개 성(省) 가운데 면적이 적은 편에 속한다. 면적 13만 9,900㎢, 인구 5,100만, 성 안에는 양자강과 회하, 2개의 강이 흐르고 중앙부에는 방대한 전원지대를 이루며, 기후는 온난습윤(溫暖濕潤)하여 4계절의 구별이 뚜렷하고, 평균기온은 1월 2.7℃, 7월 27.9℃정도이다. 북부지방에서는 강수가 여름철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종종 범람하고, 봄에는 가물지만 지금은 대규모의 회하강 치수공사로 피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안휘성은 화중지방(華中地方)의 중요한 농업지대로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며, 남부의 양자강 차오후호(소호, 巢湖)의 평야에서는 쌀․보리 2모작, 또 북부의 회하강에서는 밀․참깨․수수 등 밭작물이 풍작이다. 그 밖의 남쪽에서는 차(茶)가 많이 생산된다. 광산자원으로는 회남(淮南)의 석탄․구리 등이 생산되며, 종이․먹 등 경공업을 주로 하여, 수운 외에 천진, 회남, 남경에서 출발하는 철도와 7,000여㎞에 이르는 자동차도로가 있다.
안휘성을 대표하는 것은 당연 황산(黃山)과 구화산(九華山)이다. “천하의 명경(明景)은 황산에 모인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산은 그 아름다움이 유명하고, 구화산은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더불어 4대 불산(佛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차의 명산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산지와 구릉에서는 산꼭대기까지 계단을 형성하며 올라가는 차밭을 볼 수 있다.
제 1일 2006. 5. 3(수) 맑음 |
설레는 마음으로 쉐라톤워커힐에서 인천공항 행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싣고 중국성지순례 길(5번째)에 오른다.
특히 여행 목적지가 구화산과 황산이라는데 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은
첫째 : 구화산은 신라국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중국 구화산에 온 김교각이 불교성지를 이룩하여 “지장보살님”의 현신이라고 세간에 믿음을 줌으로써 세계적으로 이름난 곳이고
둘째 : 황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을 볼 필요가 없다는 천하절경의 명산이므로 평소 동경하고 있었기에 출발시점부터 마음이 설레 인다.
인천공항에 도착(09:00)하니 작년까지 같이 성지순례를 다녔던 한국공무원불자연합회 일행도 있었지만 이번은 감사원불자회가 우리 몇 명만 초청하여 여행 단이 구성(39명)되었다.
탑승수속을 마친 후 면세점 코너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아시아나항공(OZ349기)편으로 이륙(12:10)하였다. 시속 800㎞, 고도 7,000m, 광활한 영공을 가르며 서북쪽 중국 남경을 향하는 동안 상념에 잠긴다.
구화산 불교성지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동안 중국성지순례(제1차:2002년도, 북경→운강석굴→법문사→서안→오대산, 제2차:2003년도, 성도→아미산→낙산대불→대족석각→중경 양자강 삼협→무한→상해, 제3차:2004년도, 성도→구채구→황룡사→티베트, 제4차:2005년도, 우루무치→투루판→돈황 막고굴→양관)를 통하여 중국 불교의 발전상을 살펴보았지만 구화산과 황산의 규모와 모습들은 어느 정도일까?
남경 록구(綠口)공항에 도착(13:20 한국보다 1시간 늦음) 조선족 가이드 이문순(李文順)이 우리를 반긴다. 그는 원래 가이드가 아니고 중국 심계서(한국 감사원과 같은 국가기관) 과장의 부인이며 북경 국제무역공사 부총경리(副總經理)로 근무하고 있는데, 한국 감사원 일행이 온다하여 북경에서 8시간 자동차를 타고 남경까지 왔으며, 부모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이고 본인은 평양에서 출생하여 남경의 우정대학교(郵政, 정보통신부)를 졸업했다. 또 현지가이드인 리서취를 소개했는데, 그 역시 중국 심계서 국장의 생질이다. 보조 가이드 1명은 상해에서 대학을 다니며 가이드 생활을 하는데 우리 일행을 위해 출동되었으니 3명의 가이드와 안홍부 국장까지 합치면 총 4명이 된다.
안 국장은 우리들의 가이드를 하기위해 중국 유학시절 얻은 지식과 전문서적을 참고하여 열심히 자료를 챙겼다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 든든했다.
차량 또한 중국 청년여행사 45인승 최신형버스로 고급이라 한다.
자동차는 구화산(九華山)을 향해(13:40) 고속도로를 달린다. 과거 비포장도로일 때는 8시간이상 걸렸지만 현재(약 5시간으로 추정)는 왕복 4차선도로가 포장도 잘되어 있고, 중앙분리대는 회향목 같은 나무가 기둥처럼 빼곡하게 심어져 있으며, 좌․우로 전개되는 논에는 벌써 벼를 심어 검푸르게 자리를 잡는 등 우리나라보다 20일~30일 정도 빠른 감을 준다.
안 국장이 차내에서 이곳 정보를 알려준다. 중국은 1월 1일(설날), 5월 1일(노동절), 10월 10일(쌍십절)을 1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삼고 각 1주일간씩 휴무 제를 실시함으로 오늘도 연휴로 인해 관광지마다 국내 여행객들로 혼잡스러우니 여권 등 각별히 주의할 것을 촉구한다.
선물은 구화산에서 생산되는 3가지 토속산품이 있는데, ①차(茶) 재료 ②석이(돌) 버섯 ③황정(생강 같은 모양, 심장․혈압․노쇠 방지) 등이라 한다. 또한 남경에서는 ①공자 묘 일대에서 판매하는 토산품과 기념품 등 ②술은 시내 면세점에서 구입하면 가격도 정찰제이고 비행기 안으로 휴대는 못하니 짐칸에 화물로 운송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휴게소가 없어 고속도로에서 일반 국도 변에 위치한 호텔(남릉 대 주점, 16:30~16:50)에서 휴식을 취하고 달리는 차내에서 안 국장의 소개는 계속된다.
구화산을 연화 불국토(蓮花 佛國土)라고 믿는 것은 우담바라 꽃이 핀 곳이고, 가는 곳마다 연꽃이 많아 불교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국의 왕자인 김교각(金喬覺)이 비단 옷을 먹물 옷(布衣)으로 갈아입고 당나라(삼국통일 후 당진)부두에서 구화산까지 2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이곳에서 수도생활 중 “배고파 굶은 실상을 황정으로 밥을 대신했다. 1,000년 후에는 신라로 귀국하겠다.”는 내용으로 오용지에게 보낸 시를 태을암에 새겼음으로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타국(신라)에서 온 김교각이 사찰 창건을 하게 된 동기는 구화산 원주민인 민(閔)씨의 도움이 컸다. 그 결과 중국불교 4대 명산으로 지정 받는데 최우수점수(AAAA)를 받아 최고 명산으로 인정받음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김삿갓(金笠), 이태백(李太白) 등 유명한 시선(詩仙)들이 이곳에 와서 남긴 시들이 넘쳐흐른다.
구화산 출입문에 도착(18:10)하여 중형버스(길이 좁고 커브가 많아 대형버스 통과 불가)로 바꿔 타고 구화산 입구 마을로 향(18:35)한다.
이곳부터는 지장왕 보살(김교각 스님)의 성지(聖地)라 부르고, 믿고, 생활한다. 길거리 마다 향․기념품 서적 등을 판매하고 불교성지의 특색 있는 물품들이 다양하고 토산품도 많이 진열해 놓았다. 그 중 차(茶) 도․소매상도 많고 음식점․숙박시설도 많다.
숙소에 도착(聚龍大酒店, 19:00)한 후 만찬장(호텔 1층 鳳凰廳食堂)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한국식 김치도 선을 보여 한국관광객이 많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고, 정통 중국음식에도 향료를 적게 넣고 요리한 것은 한국인 입맛에 맞추느라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식당(취룡청․백세청․감로청․귀빈루․객방루) 및 화장실(세수간) 등의 이름을 ①한문 ②영어 ③한글로 각각 표기했다는 점이다.
식사 중에 김목동 술(金牧童酒, 500㎖, 45℃)과 중국산 남경(南京) 담배를 테이블 당 2개씩 분배했는데 중국 모 기관 관계자의 친구가 직접 와서 반갑다는 인사말과 함께 선물을 하였다. 이 술은 구화산에서 생산되며, 매우 고급스럽고, 술도 2병, 담배도 2갑씩 주는 것은 ‘존경의 예’라는 것이다.
구화가(九華街)의 야경을 돌아보고자 거리로 나와 보니 모든 상점(茶屋, 飮食, 保健按摩, 足浴, 紀念品, 슈퍼 등)마다 관광객들이 왕래하고, 전상배 감사관은 ‘죽엽청차’도 구입, 호텔로 오는 길에 천마미토채관(술집)에서 맥주(11병, 168위안) 한잔하며 깊어가는 구화산 자락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과거 성지순례 때와 이번과의 비교, 감사원 불자회 단독으로 오게 된 동기, 특히 전상배 감사관의 미국유학(2년 전) 송별 후 처음 갖는 파티 등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호텔(2111호)로 와서 첫 밤을 보낸다.
제 2일 2006. 5.4(목) 맑음 |
오늘은 황산의 천태경구 성지(天台景區 聖地)를 순례해야 함으로 시간이 지체되면 케이블카를 타는 데만 2~3시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새벽(05:00 기상, 05:30분 출발)부터 서둘렀다.
천태경구는 당초 재벌의 소유(민양화, 閔讓和)로 매년 스님을 모셔 설법과 제를 지내는 전통이 있다.
봉황송정차장(鳳凰松停車場, 05:50)에 도착 후부터는 도보로 구화산색도(九華山索道)를 지나 케이블카를 타는데 관광인파가 적어 기다림 없이 쉽게 타고 올라갔고, 990계단을 올라(06:50), 천태사(天台寺) 대웅보전(3세 불로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우측엔 미륵불, 좌측엔 아미타불, 3존 불이 아님)에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각자 구입한 향을 전각 앞마당의 대형 향로에 사른다. 전각 내부에서는 향을 피울 수 없다.
천태사는 천태봉(천태정정(天台正頂, 해발 1300m) 일명 지장선림이라고도 하고, 명조 때 창건, 사원 안에는 주불을 모시고, 우측엔 약사여래불, 좌측엔 미륵불을 모셨으며, 일만(一萬)의 부처님을 모신 만불루(萬佛樓)가 있다.
대웅전 밑에 구화정사(九華精舍)에는 지장왕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민씨의 부자가 협시하고 있어 지극하고 자애로운 인상을 갖게 한다.
고배경대(古拜經臺, 07:00)는 지장왕보살이 참선 수행했던 토굴(지장고동, 암자)로 앉고 서서(坐立), 기도 정진했던 돌에 그의 발자국이 움푹 패여 있어 우리도 그 발자국 위에서 참배를 올렸다.
천태산의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 시왕봉이고 정상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다. 이곳은 해발 1,306m로 3번째 봉우리이고, 청룡의 척추 등어리 부분이며, 정상은 봉1정이라 해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해를 등지고 앞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그림자가 부처님 상호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며, 밑으로 2개의 바위틈이 일선천(一線天)이라 해서 하늘이 실오라기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관음각에서 주위의 산과 구화가 일대를 내려다보니 동서남북의 산이 한 폭의 병풍 같이 에워싸고, 평화로운 마을이 군집하고 있는 것이 마치 그림같이 전개되어, 보는 이의 마음에 경이로운 느낌은 들겠지만, 한편 이역만리 타국 땅 높고 험한 이곳에서 독자적인 수행 정진한 스님의 숭고한 일념이 오늘날 이 지역을 불국토로 만들었다는 것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고, 또한 고국의 황후인 어머니가 삼촌(2명)을 보내 마음을 달래서 신라 국으로 데려오라는 엄명을 받고 왔다가 그들도 수도의 길을 택했다니 스님의 굳은 결심을 가히 짐작 할만 하다.
77세 노인이 매년(5㎏ 상당의 공양물지참) 이곳에 와서 일심으로 기도하여 그의 소원을 100% 이루었다(대학 입학, 미국유학 등)는 분을 만나 우리 일행은 박수를 보냈다.
천하명산이요, 중국 4대 성지다운 웅장․기암괴석․높은 기상 등 진정으로 이번 순례의 길이 나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찬사를 보내면서 하산(07:45)하려니 섭섭해서 발걸음이 무거워 진다.
올라갔던 케이블카로 다시 내려와 천대봉황주차장(天臺鳳凰駐車場, Tian Tai Station, 08:20)까지 걸어 내려오는데 케이블카를 타려고 서있는 인파의 끝이 안 보인다. 추측이지만 최소한 3시간은 저렇게 서서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새벽에 일어나기 귀찮았던 생각이 싹 가신다.
호텔에 도착(09:00), 아침식사를 마치고 구화가(九華街) 시내(호텔의 건너편에 위치)에 있는 기원선사(祇願禪寺, 규모가 매우 웅장, 長生․龍庵, 山門 行願無盡이라는 현판)의 미타전(彌陀殿)으로 들어가는데 중간의 문은 국가주석 왕림 시에만 문을 열고 일반인은 좌․우측의 계단을 사용 한다.
육신보전(肉身寶殿)까지는 400여 개의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이 3개의 무늬로 구분되어 깔려있다. 즉 좌측은 벼슬 길, 중앙은 평안 길, 우측은 재물 길이라 하여 각자 취향대로 위치를 잡았으면 그 길로만 올라가야 하는데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되고, 앞만 보고 올라가야 하며, 중간에 쉴 수는 있으나, 마지막 99개의 계단은 쉬지 말고 한꺼번에 올라(왜냐하면 99라는 숫자는 김교각 스님이 99세에 입적했으므로 99의 숫자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야만 일생동안 평안하고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보전 앞마당에는 호국육신보탑(護國月(脫肉의 약자)身寶塔)과 김교각스님의 동상(9.9m)이 서있고 보전 앞 중앙에 향로가 설치돼 있어 준비해 온 향을 피웠다. 보전 내부에 들어서면 시계방향으로 4번을 돌면서 지장보살을 염송하고, 중앙에 육신불을 모셨지만 육안으로 볼 수는 없으나 3배의 예를 올리고 3회를 역시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한다.
안 국장이 준비해온 공양물은 “신라미(新羅米)․빵 그리고 대추 등”을 한국에서 가지고 와서 상단(上壇)에 올리고 일행 모두 예불을 올리고 참배한 후 공양물은 다른 참배객들과도 나누어 먹었다.
남문으로 하산(11:05)하여 구화가에 군집돼 있는 많은 사찰(大願寶殿 佛本中․大悲寶殿․天池古庵․百歲宮)들의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호텔에 도착(12:00)하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중식(12:30~13:30) 후 구화산 백세궁 람차(九華山 百歲宮 纜車, 케이블카 타는 곳)로 이동했다.
이곳은 명대(明代) 육신 무하화상(无瑕和尙)과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을 보기 위해 모노레일 카(버스모양, 정원38명)로 대성전의 대전(大聖殿의 大殿)에 오른다. 지형은 천태산에서 대각선상의 하부지점에 외딴 건물이 장엄하게 서있는 건물이므로 모노레일 카로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막상 올라와 보니 천마령(天馬嶺, 산의 이름)과 적성궁(밤하늘에 별을 딸만큼 높은 곳)이 조화를 이루어 천마를 타고, 별을 딴다는 상상과 함께 황홀감에 젖어든다.
적성궁(구화산 4대총림)에는 무하(无睱, 혜옥)선사의 육신보전이 있다. 오른 팔을 수평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고, 앉은 자세대로 금분 칠을 했다.
무하 스님은 26세에 북경 로구교에서 출가 후 도보로 7개월 만에 구화산에 와서 절을 짓고, 명대(明代) 본인의 혀를 찔러 나온 피를 찍어 화엄경 81권을 20년에 걸쳐 썼고, 110세 임종 시 제자의 부축을 받아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는데, 도자기 항아리에 모신지 3년 후인 1626년 그 항아리에서 큰 노을빛이 찬란하여 항아리를 열어보니 육신이 변하지 않고 영롱한 빛이 그대로이므로 육신보전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1630년 “백세궁(百歲宮)이라는 왕의 친서를 하사받아 절 이름도 개명했고, 청대(淸代) 한풍 3년에 이 백세궁이 화재가 나서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모시려 했으나, 육신불은 움직이지 않았고 화마가 육신불 가까이 접근하자 갑자기 장풍이 불어 불길을 막는 순간 하늘로부터 천둥 번개와 함께 비를 내려 화재를 진압한 결과 혈경(血經)도 현재까지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가 금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로 인해 법회에 참가하는 불자의 수도 많아졌고, 공양을 하려 해도 밥공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한 사람이 먹은 그릇을 다음사람이 교대로 먹어야 하는 실정인데, 갑자기 어느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밥공기 4,800개를 가지고 왔다. 그 연유를 물으니 “본인은 1개월 전에 스님이 3일 동안 집 앞을 배회하여 ‘왜 왔느냐’고 물은즉 ‘나는 백세궁의 화상인데 밥공기 1개에 백세궁 이란 글씨를 써서 도자기를 구워 달라’고 하여 완성된 도자기를 꺼내보니 1개가 아니고 4,800개가 되었기에 오늘 법회에 필요할 것 같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화마의 진압이나, 밥공기 사건(밥공기 일부가 남아있다) 등은 혜옥 스님의 사후에도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응신보살(應身菩薩)이란 현판 안으로 들어가면 500나한전이 있다. 당초 모셔진 이래 현존하고 있어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다. 나한전을 등지고 주변을 살피니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백색의 건물들은 주민들의 주택과 건물이고, 황색의 건물들은 모두가 사찰 건물로 민가와 사찰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연꽃에 앉아 있는 도시 같고, 사찰을 위해 민가들이 형성된 느낌을 준다.
사방(360도)을 돌아보아도 절경 아닌 곳이 없고, 웅장하면서도 봉화(峰花)들이 모여 불공을 드리는 것 같으며, 동쪽의 한 산봉우리는 형태가 부처님의 수면상 (睡眠像, 2000년도 중국의 운동선수가 발견) 같다고 하여 관계자들이 이곳에 와서 조망하면서 사진을 촬영했는데, 사진을 실체대로 보면 수면상이요, 세워놓으면 앉아계신 부처님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우리도 게시해 놓은 사진을 관람했는데 앉아계신 부처님의 눈․코․입․목 부분까지 선명히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위치한 ‘조교사’는 폭포 위에 다리를 놓고 절을 지었는데 조망만 하고 가보지는 못했다.
회향각통혜총림(回香閣通慧叢林)에는 비구니 스님의 육신불을 모신 곳이다. 주인공인 인의법사(仁義法師)는 1911년생 길림성 통화시(通化市) 사람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미모가 아름다우며 특히 발(足)이 아주 작았는데, 그 당시에는 전족을 단단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대학시절에 침구학을 전공하여 한국 동난 때는 자원하여 의무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성장기부터 불교사상이 돈독했으며 평소에도 육식을 멀리, 채식만을 섭취했다.
6.25 동난 후 고향의 재산을 팔아서 구화산으로 옮겨와 통혜암(通慧菴)절을 건축하고, 1995년 85세로 열반 후 1999년 1월에 도자기 항아리(절 입구에 비치 현존)에서 찬란한 빛이 발산했다.
세계 유일의 비구니 육신불로 가장 귀하게 여기는데 열반 후 기적으로는 가부좌 상태에서 입적했는데, 3년 후 항아리를 열었을 때는 침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친견할 수 있었다. 육신불의 옆에는 그가 80세 때 찍은 사진이 걸려있고, 중국 부주석의 딸이 보시해서 금박을 입혀 현재의 상태로 모셨고 34분의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정진 중에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덕분에 가는 곳마다 기다림 없이 구화산과 구화가 일대를 두루 살펴보았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함을 다시 느꼈고, 역시 중국은 대국(大國)이라는 실감이 났다. 또 수천․수백 년 전에도 그들의 넓고, 높고, 웅장함과 문화유산을 오랜 세월 보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다.
웅장하고 오묘하며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고 있는 구화산을 내려와 호텔의 마지막 만찬(18:00~19:00)을 즐긴다.
깊어가는 구화산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전상배 감사관, 채혜자 총무(감사원), 경기도청 조재형 사무관, 김영식 사장, 백영자 사무관(한국에서 가지고 온 술과 라면) 등과 우리 방에서 곡차 한잔에 이야기꽃을 피운다. 밤이 깊어(03:00까지)가는 줄도 모르고 구화산의 절경과 김교각 스님의 수행, 덕 높으신 큰 스님들의 행적들을 회고하며 우리의 신심과 수행생활에 많은 교훈이 되었고, 느끼는 바도 많았다.
제 3일 2006. 5. 5(금) 맑음 |
구화산을 떠나는 날이므로 아침(08:30 출발)부터 서둘렀다. 황산(黃山)으로 출발함에 앞서 구화가에 위치한 대산문연화불교천수천안법회(大山門蓮花佛敎千手千眼法會)에 참석(09:00)했다. 방장스님과 동석하신 스님 24분께 인사드리고 법회가 시작됐는데, 독경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같이 따라했고, 법당 출구 쪽에 보시를 하면 석판에 이름을 새겨주는 곳이 있다. 우리 부부 한문이름과 200위안을 주었더니 조각공은 내 옆에 서서 한 글자씩 옆으로 조각하여 우리가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섬세하고 능란한 솜씨(조각시간: 1분)에 참관하는 사람들도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법회를 마치고 화성사로 향(09:20)한다. 이곳은 화성봉 서남쪽 분지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구화가 중심지역이며, 우리가 숙박한 호텔에서도 가까운 거리(약 5분소요)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인도 스님이 이곳에 절을 건축했지만 그리 번창하지 못했는데 신라 스님(김교각)이 와서 지장도행을 실현함으로써 개산조사(開山祖寺)가 되었다.
역사문물관에는 영궁전(靈宮殿)이라 하여 대웅전과 같은 이름으로 길지(吉池, 4방에서 물이 모여든다는 의미)라 하고, 장경루(藏經樓, 佛光普照)에는 지장보살본원경 150부, 무하(혜옥)선사의 화엄경(血經)과 다른 경들도 소장하고 있지만 관람은 할 수 없고 사진만 볼 수 있다.
또한 이곳 소장품 중 특색이 있는 것은 ①방시보교(芳施普敎)라는 현판을 건륭황제가 하사한 것 ②구화성경(九華聖境) 현판도 왕의 하사품 ③동물상(개(선청)를 데려온 것이 화현된 듯) ④도롱용(구화산에만 서식, 살아 있는 모습) ⑤집신․장화․모자(김교각 스님이 평소 사용한 것) ⑥밥솥(김교각 스님이 사용한 취사용 솥) ⑦전면에는 삼존불을, 후면에는 관세음보살님만을 모신 것도 특이하다.
김지장보살왕(김교각)은 어머니를 기리는 효성으로 ①어머니를 생각하는 탑을 세웠고 ②우물을 파서 식수를 해결, 방화 및 방생용 연못(月夜池)도 만들었다.
호텔(10:00)로 다시 와서 짐을 챙겨 중형차편으로 이동(10:10) 황산입구 주차장에서 당초 타고 온 대형버스로 옮겨 황산을 향하여 구화산(10:30)을 떠난다. 멀리 산 중턱에 구름이 덮이고 뾰족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말없이 우리일행을 전송한다.
안 국장의 설명은 계속된다. 황산은 천하명산으로 봉우리․호텔․나무 등의 이름이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태백 등 천하 시선(天下 詩仙)들이 자주 방문하여 절경을 시로 표현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또 케이블카는 3,700m를 올라가는 거리이고 초고속으로 달려도 8분~10분이 소요되는 장거리이며, 북쪽 문으로 올라가서 남쪽 문으로 하산하게 되는데, 특별히 주의할 것은
첫째,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로 짐꾼들이 지나갈 때는 길을 비켜주라는 것이다. 셋째, 담배는 절대 금연이다. 만약 적발되면 상당히 많은 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 넷째, 물이 절대 부족하여 급수제한, 수량 부족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호텔이란 숙박시설도 산 위에 있어 모든 물품들이 그리 많지 않고 값도 5배정도 비싸기 때문에 준비할 물건들은 미리 사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호텔까지 높이가 1,000m로 심장질환자는 각별 주의를 요하고, 사진 촬영 시에도 꼭 기대어야 한다. 일곱째, 식사(보통 200명 상당)는 식당을 공동으로 사용하므로 시간을 엄수해야 하고 시간을 어기면 밥이 없다.
태평(太平) 지역으로 접근하니 비가 내린다. 휴대하고 온 우산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사용할 수 없어 우의를 일괄 구입하기로 하고 ‘오찬루 식당’에서 오찬(12:30~13:30)을 마친 후 우의를 일제히 입고 나니 꼭 우주 탐험대 같이 이색적이다. 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황산입구 케이블카를 타는 데까지는 불과 10분 만에 매표소에 도착(14:00) 후 6층으로 이동했는데, 관광객이 많고 정상의 기상이 너무 나빠서 원래 정원40명이지만 20명씩만 태우겠다는 안내방송, 어느 사람은 상하 우의를 입고 덧 신발도 신었으며, 배낭까지 덮을 수 있는 옷도 걸치고, 배낭을 상의 속으로 메니 아기를 업은 듯 한 모습이 있다. 모두의 차림이 이러하니 서로를 보면서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또 이곳의 우의(雨衣) 값도 우리가 구입한 가격보다 5배는 비싸다는 것을 실감했다.
드디어 우리가 탈 차례가 되어서는 바람의 강도가 약해져서 30명까지 탑승(14:35)했다. 1,000m 높이를 향해 3,700m 쇠줄에 걸친 통 안의 30명은 바람에 의해 서로의 몸이 부딪히기도 하고, 윙윙하는 바람 소리가 고막을 울려 공포분위기를 연출한다.
비는 내리고 운무가 꽉 차서 앞도, 엽도, 밑도 안보이더니 어느 순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숲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탄성이 터진다. 특히 밤나무가 많아 그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설악산의 케이블카를 탄 기분과 흡사했지만 워낙 고도가 높고 길어 그 웅장함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의 강도가 갑자기 세차게 몰아쳐 케이블카가 흔들리자 쇠줄에 매달린 둥지속의 30명은 비경도 잠깐, 초조와 불안감에 긴장한 표정들인데 차츰 바람이 잠잠해지니, 절벽의 나무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기암과석의 웅장한 실체를 드러낸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오묘함을 인간의 능력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 인생 백년이 순간에 불과한 것을 오늘의 삶을 누리는 인간들에게는 오만과 집착, 그리움과 미움의 연속선상에 하루를 허비하고 내일의 순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한 순간의 욕망에 매달려 있는가?”하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종점에 도착(14:45)했다.
비는 많이 내리지 않으나 바람까지 동반하니 을씨년스러운 기분으로 제 2진(15:00 도착)과 합류하여 산행이 시작된다. 숙소를 향해 20분정도 걸어 배운정(排雲亭)에 도착(15:20)하여 방 배정(4102호)을 받았다. 큰 짐은 방에 두고 산행을 나섰다. 비, 바람도 많이 줄었지만 주변의 운무만은 거치지 않아 멀리 있는 산들은 볼 수 없었다.
중국의 쉔환 황제가 황산에 올라 “5악을 보고나니 다른 산 보고프지 않더니 황산을 보니 5악도 별 것 아니더라”고 했다. 황산은 소나무(松)․운해(雲海)․비(雨)․바위(岩)․온천(溫泉)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소나무는 수백 년 나이를 먹어 군송(群松)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환영송(歡迎松)은 1,200년의 수령이며 이곳을 찾는 등산객을 환영한다는 뜻이 있고, 흑허송․연리송․용조송(黑虛松․連理松․龍爪松)은 검은 소나무와 그 뿌리가 용의 발톱과 같다 하여 뿌리가 밖으로 튀어나와있음을 볼 수 있다. 시신봉(始信峰)에서 절을 하면 신심이 저절로 나온다는 의미가 있다. 비를 맞으며 운해 속에 우뚝 서있는 봉우리들을 보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0년)받을만한 비경임을 음미하면서 배운정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식당에서 만찬(18:30)을 즐기고 남은 시간은 손승태 차장, 감사교육원 교수부장, 전상배 감사관, 이동규 감사관 등 10여명이 단합대회를 갖고 있는데 안 국장은 난방장치가 없는 방에는 밤공기에 감기들 것을 대비해서 꼼꼼히 체크하였다. 옷장 안에는 겨울용 잠바가 유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지만 춥지 않아 사용하지 않았고, 샤워시설이 되어있어 흠뻑 젖은 옷은 갈아입으면 됐는데, 신발만은 한 켤레밖에 없으니 집사람이 이를 말려주고픈 아름다운 마음에 감사하며 만류했지만 결과는 집사람 뜻대로 되었다.
발 맛사지도 1층에 마련되어 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라고 같이 즐기면서 황산의 정상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제 4일 2006. 5. 6(토) 비 ․ 맑음 |
날씨가 개이지는 않았지만 어제 같이 바람은 없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 가장 짧은 2시간 코스를 택했다. 말이 2시간이지 그리 간단한 산행은 아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처음부터 자가용(4명이 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손님을 태우고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우리 돈으로 5만원 받음)을 이용(3명)했고, 나머지 일행은 비로 인해 산길이 미끄럽지만 조심스레 하산을 시작했다.
아침(06:55)부터 비옷을 입고 운해를 헤쳐 가며 환영송․문필봉․흑허송․연리송․용조송 등의 전송 속에 광명정(07:35)을 거쳐 케이블카(50명 정원, 총 4,970㎏, 08:05)를 타고 옆과 밑으로 낙낙 장송과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바람도 불지 않고 밖의 상태가 좋은 편이라 종착지점에 도착(6분소요, 08:10)하니 비가 그쳐 비옷을 벗어 홀가분한 기분을 되찾았다.
청량곡(淸凉谷)은 무협극(武俠劇) 등을 촬영한 유명한 계곡으로 주윤발이 주연한 ‘정인곡(情人谷)’이 국제대상을 수상했다는 간판도 세워놓았다. 이 계곡에서 바라보는 황산의 미묘하고 웅장한 모습도 아주 좋은 인상을 갖는다.
황산 천하절경을 산위에서 보는 황산과 밑에서 올려보는 황산의 장엄함을 마음속에 담고 아쉬움 속에서 떠나(09:45)는데 우리 일행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 대나무 무리가 도로 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다.
태평을 경유하면서 오찬(陽光大酒店, 10:40~12:00) 후 남경을 향한다.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4시간 만에 남경시내로 접속(16:05)한다. 제일 먼저 성벽이 우리를 반긴다. 이 성(城)은 명대(明代)축조한 것이 현존하고 이 문을 청량문(淸凉門)․한중문(漢中門)․초장문(草場門)이라고도 부른다.
숙소인 호텔(南京飯店, 16:20)에 도착, 방 배정(2264호) 후 샤워 등 신변정리를 마치고, 만찬(18:00)을 위해 호텔에서 일찍 출발(17:30)했다. 오늘 만찬은 중국에서도 권력 있는 국가심계간부남경교육배훈기지(國家審計幹部南京敎育培訓基地, 한국의 감사원을 심계서 라 하고, 도청 단위의 지방청의 기능을 갖는 간부공무원 교육 수련기관) 의 기관장이 주관하므로, 시간을 지켜야 한국 공무원의 위상을 지킬 수 있고 예의에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현지에 도착(17:55)하니 몇 사람이 나와 우리를 안내하는데 이 건물 1층 VIP 식당이다. 기관장의 환영인사와 노옥섭 감사위원의 답사를 이문순 가이드가 통역을 한 후 간부 소개(손차장, 교수부장, 국․과장급 몇 명) 등으로 헤드테이블의 인사교류가 있은 후 식사가 시작됐다.
각종 요리가 다른 음식점보다 특색이 있는 것은 한국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흔적으로 향료와 기름이 적고, 김치도 나왔는데, ‘거북이 찜’은 작은 거북이 한 마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접시에 올라와 있어 측은하기도 하고 이를 깨물어 먹는다는 것이 성큼 손이 가질 않아 집사람과 같이 반품시켰는데, 이 거북이 찜이 기타 요리를 모두 합한 금액보다 더 비싼 고급요리라는 사실과 술도 양하남색경전(洋河藍色經典, 42% 480㎖)과 담배(南京, 고급)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답례품을 증정한 후 만찬을 끝냈다.
남경시내의 밤거리를 보기 위해 부자묘(夫子廟, 공자 사당 20:00)거리와 야시장을 구경했다. 공자사당 입구는 거대한 정문과 둘러쳐 놓은 담장의 화려한 색채가 돋보인다. 찾는 이의 편의를 위해 광장을 넓게 만들고 밑으로는 회하당이 있어 유람선을 탈 수 있으며, 건너편 벽에는 황용 두 마리를 그려놓고 조명을 비추니 화려하고 찬란한 빛이 조화를 이뤄 불야성을 이룬다.
주변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음료수, 술, 각종 기념품을 진열해 놓은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있고, 큰 길까지 나오는데도 각종 기념품 판매 상점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슈퍼에 들러 양주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가지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와보니 자동차가 없다. 기사도, 버스도 없어 발마사지 예약을 해놓고도 30분이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것도 중국기사의 횡포인지는 몰라도 너무하다는 감과 지루함을 감수했다.
발마사지를 하는 곳(敦煌(千子蓮)足浴, 21:30~23:00)에서는 우리를 위해 다른 손님을 일체 받지 않았고, 보통 US 1달러나 한국 돈 1,000원 정도인 팁도 사양하여 철저하게 교육받은 마사지 요원들이며 정문까지 나와 친절히 안사까지 했다. 호텔로 귀환(23:40)하여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제 5일 2006. 5. 7(일) 맑음 |
아침부터 서둘렀다. 조찬(조주원 潮州園, 호텔 식당, 07:00) 후 시내 관광으로 출발(07:30)했다.
명대(明代)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중식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귀국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남경 시내에 있는 성곽은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설하면서(북경을 점령) 성을 쌓은 것이 현존하고, 부분 보수는 했지만 보수내역은 만력연감(萬曆年鑑)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명효능(明孝陵, Xiaoling Yomb of Ming Dynasty 08:25)은 주원장(朱元璋, 명나라 초대 황제, 재위:1368~1398년, 재위연호에 의거 홍무제 라 한다)과 마황후를 합장한 묘소이고, 좌측에 있는 능은 주원장 큰아들의 묘소이다.
이곳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618m의 돌로 정교하게 깔려진 신도(神道, 총 1,800m)는 황제 사후에도 호위를 하고 있다는 길상의 표시로 좌․우로 6종류의 동물상(사자․해태(해치)․낙타․코끼리․기린․기린 등) 이 종류마다 네 마리를 좌우로 2마리씩 나누어 2마리는 서고, 2마리는 앉은 자세다.
그 다음 남북방향으로 문관․무관 각각 4명으로 2명은 서고, 2명은 앉아있다.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손권(孫權)의 묘소도 있다. 손권(182~252)은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초대 황제(재위222~252)이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시호(諡號)는 태황제(太皇帝), 208년에는 촉나라 유비(劉備)와 결탁하여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격파하여 강남의 지위를 확보했고, 219년에는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여, 위(魏)․오(吳)․촉(蜀) 3국의 영토를 확보한 인물이다.
명효능 입구에는 매화곡(梅花谷)이라 부르는 곳이 있고, 매실나무를 많이 심었으며, 자하호(紫霞湖, Purple Clouds Lake)가 있고, 정림산장(定林山庄, Dinglin Mountain Villa), 정기정(正氣亭)이 있다.
신도(神道)를 통해 매화산을 지나면 명효능의 중축선에 있는 능문(陵門), 비전(碑殿), 효능전(孝陵殿), 방성명루(方城明樓)와 보정(寶頂)이 있다.
능문은 문무방문(文武方門, 효능박물관)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은 능침의 첫 번째 문이고 그 위에 명효릉(明孝陵) 글자가 써있다.
비전(碑殿)에는 5개의 비석이 있는데, 중간에는 강희황제의 친필인 치륭당송(治隆唐松) 비석이 있다.
효능전(孝陵殿)은 향전(享殿)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제사 지내는 곳이다. 그 당시 아주 큰 건물로서 기둥이 56개가 되는 웅장한 건물이다. 실내 중간에는 주원장과 마황후의 위패가 있었고, 양측에는 함께 순장한 40여명의 비(妃)들의 위패를 진열했었다.
이 건물은 태평천국(孫文) 시 훼손되었고, 현재 건물은 1873년 청대(淸代)에 복원했는데 안내문도 없애버리고, 그 규모도 많이 축소시켰으며, 지금은 주원장의 화상만을 진열했다.
향전을 나오면 계단이 있다. 양측 계단 중간에는 그림을 조각한 큰 돌이 있다. 그 중앙에는 구름․용․매화․사슴들이 조각되어 있다. 당시 이 산에는 동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1,000마리의 사슴을 풀어 놓았다. 그 이유는 왕이 혼자 있기에 외로움을 생각해서라는 이곳 직원의 설명이 다.
그 뒤에는 성보(城堡)형 건물, 즉 방성(方城)이다.
진열실을 나와 뒤쪽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가게 되는데 계단에는 용 2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고, 천마 2마리가 태양을 향하고 있어 곧 하늘을 나를 기상을 하고 있다.
옥상에서 전경을 멀리 바라보면 동쪽은 중산능이고, 전면에는 매화산이며, 서쪽은 중산식물원이고, 북쪽은 보정이다. 보정은 직경이 400m 되는 산이고, 산 둘레는 돌로 쌓은 벽에 차산명태조지묘(此山明太祖之墓)라 표지판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주원장의 묘소이다.
천원지방(天園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方) 진다는 이 건물은 지상 17m, 지하 27m이다. 명루(明樓, 현존)에는 공사 시공자 성명도 성벽의 돌에 새겨져 있다. 건물의 외부는 주황색, 내부는 황색 칠을 한 것은 명대의 건축물과 청대에 보수한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명(明)의 황제 주원장의 묘소 입구가 명루(明樓) 지하 27m지점에 있는 것을 탐지는 했지만 사후에까지 영구보전을 위한 완벽한 공법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명효능 공원의 조감도를 통해 전체를 보면 명묘(明廟)․향루(享樓)․문무방문(文武方門)․금수교(金水橋)․근성문(根星門)․신도망주(神道望柱)․대금문(大金門) 등 유일하게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북두칠성 형태의 구부러진 모습은 ‘발을 직선으로 하면 복이 달아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이 묘를 보존하고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해 산 전체가 묘소인데, 자금성(紫金城 : 남북 1,000m, 둘레 760m 72만㎡)보다 더 큰 규모(6,000무 1무 666㎡=3,996,000㎡, 입장료 65위안)보다 훨씬 크지만 청대(淸代)에 와서 건물도 많이 철거했고, 교각도 3개(당초 5개설치) 뿐이고 그 당시의 모습을 음악당(공연 등 장소로 사용) 앞에 사진으로만 전시하고 있다.
남경시내에 있는 남경대학살 현장으로 향(10:00)하는데 현무호의 옆(호수 밑으로 지하차도가 있음)으로 질주하여 바다 같은 호수관람을 했다.
남경은 강소성(江蘇城) 관할로 농업도시이고 전력 등이 풍부하다. 우리나라 장동건의 무극영화, 이영애의 삼성 광고모델, 자동차(소나타, 리갈 등)도 볼 수 있었다.
화평대종도렴광장(和平大종悼念廣場, Peasebel Moyrn Square)은 남경시내중심부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문 입구에서부터 엄숙한 분위기로 으스스한 그림과 정적이 흐른다. 성벽에는 그 당시 상황을 ‘遇離者․VICTINS․遭難者=300,000명’이란 큰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띤다. 총탄, 부러진 칼, 잘려진 목, 피 묻은 칼, 그리고 해방 후 생존자의 발자국 220개가 보도의 동판에 새겨있다.
1937. 12. 13 당일에만 57,000명을 학살, 목․눈․손을 묶은 석상, 어린아이를 돌로 압사, 죽은 여인의 전 나체, 27,239구의 시신 명단을 돌에 조각, 유골을 진열실에 보관, 종이학을 접어 리본위에 놓고 물위에 띠워 제사를 지낸 제령천(祭靈泉), 축조 조감도에 표시로 남자(청색), 여자(홍색), 아동(황색)으로 구분하였고, 아동이 30여명이 한꺼번에 죽음, 68번(3세), 106번 아동은 다리․목 등 3곳에 쇠(鐵) 자국이 역역했다.
진열은 땅 바닥에서부터 7층까지 구분하여 진열했는데 우리는 1층의 참상만 봐도 짐작할 수 있고 일본에게 당한 국가이므로 더 볼 필요도 없이 진열실을 나와 전시실로 가는 길옆으로 작은 화단이 있다. 일본인 명심회(銘心會)라는 단체에서 물망국치(勿忘國恥)란 글을 쓴 팻말을 기념식수 앞에 세웠고, 일본 노인은 속매と위령(贖買と慰靈)이란 비석까지 세워 애도의 뜻을 남겼지만 일본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전시실에는 상해․남경지역에서 일본인들이 폭발하는 장면을 미국인이 촬영하여 보낸 사진을 진열했고, 중화서문(中華西門)으로 침투하여 개인별로 포살(抱殺)한 장면도 볼 수 있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면서 우리 국민을 노예처럼 무참히 짓밟았기에 조부님(상해임시정부 군자금모금 책임관,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을 비롯한 수많은 선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 또한 홍모(鴻毛)처럼 여겼던 암울한 역사가 있는데, 그때의 참상 또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중국인들의 대일본국관도 우리와 같은 심정이리라.
정문을 나오는 큰 길 중앙에 철제 아취를 세워놓고 당역사경종(撞歷史警鐘)․대세계화평(對世界和平)이란 글을 읽고 나오도록 크게 써 놓았다.
주차장(11:10)에 와보니 자동차가 안 보인다. 가이드가 휴대폰을 걸어도 통화도 안 되어 애를 태우던 중 건너편 주유소에 주차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차에 가보아도 기사는 없다. 30분 정도 경과한 후 겨우 휴대폰이 연결되었는데, 주유소 기사 대기실에서 신문을 읽었다며 전혀 미안한 표정도 없다.
오찬(11:35)도 늦게 도착하여 식사도 빨리 먹어야 했고 공항으로 서둘러 출발(12:30)했다. 차내에서 가이드와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이문순, 리서치 등 2명으로부터 고별사가 있었고, 안홍부 국장의 인사도 있었는데 우리는 감사의 박수와 함께 이문순 가이드의 치과 치료(명효릉에서 신도에 세워져 있는 동물상을 설명하던 중 넘어져 앞니(齒)를 다침)로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남경록구국제공항(南京綠口國際空港)에 도착(13:10)한 후 아쉬운 작별을 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이륙(아시아나 항공 OZ350기편 15:40)하여 인천국제공항에 도착(17:50)하여 4박5일간의 여정을 마무리 했다.
감사원불자회의 주관으로 중국 구화산과 황산의 성지순례를 다녀옴으로써 평소 꼭 가보고 싶었던 김교각 스님의 독행 수행정진으로 연화 불국토를 창조한 대 가람인 구화산을 순례함으로써 작은 불심에 큰 힘을 얻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천하의 절경인 황산은 일기상황이 좋지 않아 면면을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웅장하고 기괴한 형상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만한 천하의 비경을 일부나마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또한 안홍부 국장님은 우리를 위해 가이드로 해박한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준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이번 여행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됨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감사원불자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 부록에는 ①화중지방 소개 ②구화산 소개 ③황산 소개 ④남경 소개 ⑤중국의 행정구역 등을 별도로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佛紀2550年 6月
鄭鎭雄(金口) 金柱孝(空寂)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