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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도권 산사랑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산가네
이번 휴일에는 남해바다로 여행 어떠세요?
빼떼기죽과 물메기탕 등 통영 별미와, 독특한 술문화 다찌도 즐기고~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와 해저터널도 구경하세요!
하늘과 바다와 섬이 어우러진 통영의 맛과 멋을 소개합니다~
틈틈이 변하는 바다도 점점이 떠있는 섬도 철철이 달라지는 산도 아니다.
가파른 고개와 가녀린 골목과 가난한 집들,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에서 눈부신 것들에 가려졌던 풍경들을 비로소 본다.통영의 딸 박경리 선생이 쓴 <김약국의 딸들>.
그 안의 자취들을 느릿느릿 쫓노라니 내 안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그리움의 이름으로 녹아
내린다.
어떤 풍경들은 눈이 아닌 가슴에 새겨진다.
꼬불꼬불한 골목 사이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다.
길은 삐뚤빼뚤하고 벽은 우툴두툴하다.
모든 것이 반듯반듯한 '직선'의 세상에서 굽이굽이 휘거나 얼기설기 얽힌 풍경을 만나는 일.
낯설게 느껴져야 마땅할 터인데, 반갑고 정겹고 고맙다.
그 이유가 이곳이 소설의 무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래 전 우리가 살았던, 그러나 어느덧 사라져가는 '골목'이라는 이름의 추억 때문이다.
골목은 '길'이기 전에 '마당'이다.
평상이나 의자를 놓고 어른들이 동네 소식을 나누던 곳이기도 하고, 숨바꼭질이나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꼬마들이 유년의 추억을 쌓던 곳이기도 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말갛게 되살아나는 곳. 여기가 바로 거기다.
충렬사 주차장 건너편, 한 사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골목길이 서문고개다.
통제영 서문에 이르는 가파른 고개라 해서 토박이들은 '서문까꿀막'이라 부르던 언덕길이다.
"가자. 죽으나 사나 가야제."
소설 속엔 '용란이 친정으로 올 때마다 이 고개를 울먹울먹 되넘어가는 한실댁'의 모습이
처연하게 묘사돼 있다.
어디 한실댁뿐일까.
자식 걱정에 한숨 잘 날 없는 이 땅의 모든 '친정 어매'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그녀들이 한실댁의 모습에 겹쳐져 '딸년'이란 이름의 여행자를 먹먹하게 한다.
고갯길 위편에 있는 뚝지먼당에는 박경리 생가가 있다.
집주인과 집 모양만 바뀌었을 뿐, 작가가 태어난 집은 8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생가라꼬 나라에서 쌀을 주나 밥을 주나. 내사 마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엄따."
이 집에 산 지 50년쯤 됐다는 김용애 할머니.
그이가 자신의 집이 박경리 생가임을 알게 된 건 불과 5, 6년 전 일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런 인물이 내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할머니는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친다.
"내 이름 들으면 놀랄 낀데."
앞집에 사는 이승만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유머' 소재로 삼을 만큼 재미있는 분이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쥔 이승만 할머니와 양손으로 뒷짐을 진 김용애 할머니가 뚝지먼당 꼭대기로
'마실'을 간다.
'마주보고' 살아온 세월이 자그마치 50년이다.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골목길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정이 샘물처럼 솟는다.
간창골은 김약국의 딸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곳 골목도 좁고 가파르긴 매한가지.
담장을 두르고 있어도 서로의 살림이 훤히 보이고 대문을 닫고 있어도 서로의 처지가 빤히 읽힌다. 뉘 집 빨랫줄에서 색색의 옷들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동안 뉘 집 처마에선 주황빛 땡감들이 곶감
으로 변해간다.
단 한 줌의 햇살도 이곳에선 퍽 귀한 대접을 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골목은 차가 드나드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은은한 햇살이나 고고한 달빛은 받아줄지언정 자전거나 오토바이 이외의 탈것은 일체
품어주지 않는다.
사람이 '주인'인 곳으로 오니 처지던 어깨도 꺾이던 무릎도 제자리를 찾는다.
간창골 꼭대기엔 세병관이 있다.
조선 통제영의 중심건물인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건물로 쓰였던 곳이다.
박경리 작가가 이 학교를 다녔다고 전해진다.
뚝지먼당에서 서문고개를 내려와 간창골을 지나 세병관으로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녀가 저기
보일 듯하다.
소설 속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 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 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지만 현실의 충렬사는 아직 핏빛 같은 동백꽃을 피우지
않았다.
대신 동백 나무의 초록 잎사귀들이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거린다.
잎도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충렬사 앞 명정골 우물(정당샘)도 작품의 주요 배경지다.
소설에는 그 우물과 관련된 아주 슬픈 '소리'가 등장한다.
집을 뛰쳐나온 넷째 딸 용옥이 충렬사 동백나무 아래서 듣는, 명정골 우물에 각시들이 물 길러
오는 소리. 각시들의 명랑한 발소리 때문에 오갈 데 없는 용옥의 가슴은 더 아렸을 것이다.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불행을 커 보이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김약국의 딸들> 같은 비극에서 적잖은 '위로'를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터이다.
"시어머니가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했다
아이가. 정당샘에서 새벽마다 물을 긷던기 똑 어제일 겉다." 명정동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
하는 곽경자 아주머니에겐 명정골 우물에서 새벽마다 물을 긷던 '새댁시절'이 있었다.
함께 물을 긷거나 함께 빨래를 하던 동네아낙이 있어 힘들어도 웃을 수 있었던 날들.
추억은 늘 이렇게 '사람'을 타고 온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두 개의 우물 앞에서 날마다 쑥쑥 자라나는 꼬마 두 명을 만난다.
충렬초등학교에 다니는 한희성, 정영현 어린이. 태권도학원을 빼곤 이렇다 할 학원에 다녀본 적
없는 두 친구는 우물 옆 징검돌에서 달리기 내기를 하며 해맑게 논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이들에겐 세상 모든 곳이 '놀이터'다.
이튿날 아침,
통영항을 끼고 있는 서호시장으로 간다.
소설 속에 '새터 아침장'으로 묘사된 바로 그곳이다.
'새터'에서 '서호'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새벽의 활기는 소설 그대로다.
왁자지껄, 시끌벅적, 꿈틀꿈틀, 펄떡펄떡. 평소 쓰지 않던 의태어들이 이곳에선 마구 튀어나온다.
김복금 할머니는 낮엔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새벽엔 서호시장에서 캔 바지락을 판다.
잠 잘 시간은 있느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그저 웃기만 한다.
바지런하지 않으면 통영 여자가 아니다.
서호시장에서 30년 넘게 해산물을 팔아온 김신자 할머니는 옆자리에서 함께 장사를 해온
'친구'가 요 며칠 아파서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며 쓸쓸해 한다.
'경쟁자'가 줄었는데도 할머니는 친구가 얼른 다시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의리'가 없으면 역시나 통영 여자가 아니다.
해가 뜬 통영항에선 돌아오는 배와 떠나가는 배가 분주히 오고 간다.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이나 아픔도 머물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문득 힘이 된다.
통영이 아름다운 또 한 가지 이유는 수많은 예술가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것은 물론,
창작의 밑천을 두둑하게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그만큼 통영은 예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예향의 도시'이자 많은 예술가가 오매불 망 사랑하고
그리워한 고향이었다.
.
2008년 5월 5일 소설가 박경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문단과 독자들은 마음속 기둥하나가 불쑥 뽑히는 허탈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특히 그녀의 고향이자 작품 속 무대였던 통영의 슬픔은 더욱 컸다.
1926년 10월 28일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불합리했다"고 거침없이
털어놓을 만큼 마뜩잖은 유년을 보냈다.
유랑 생활을 즐겼던 아버지는 이곳저곳에 가정을 꾸렸고 홀어머니와 박경리는 궁핍과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 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는 그녀의 회고처럼 통영은
애(愛)와 증(憎)을 함께 키워준 고향이었다.
특히 살아 생전 박경리에게 통영은 증오가 더 큰 땅이었다.
27세쯤 고향을 떠 난 후 2004년이 되어서야 통영 땅을 다시 찾았지만, 자신의 생가가 있는
뚝지 먼당에는 끝내 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는 증오는 없는 듯하다.
2007년 12월 세 번째로 통영을 찾은 박경리는 눈앞에 펼쳐진 수려한 풍경 앞 에서
"왜 이제사 여기에 왔을까"라며 고향과 화해를 나누었다.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박경리는 한 문예지에 유언 같은 종시(終詩)를 남겼다.
.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그리고 그의 육신은 비로소 통영의 양지바른 묘역으로 돌아와 긴 휴식에 들어갔다.
고국의 위상을 드높였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끝내 살 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1967년 동 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같은 역작을 탄생시켰던 사람.
통영 도천동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자유는 빼앗겨도 예술혼은 빼앗기 지 않았던, 유목민으로 떠돌면서도 고향만은 잊지 않았던 그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자신은 다만 우주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옮기는 존 재일 뿐'이라는 거장의 겸허가 깊은
울림을 준다.
허무와 애수의 시인이지만 감상적인 관념 안에서 허우적대지 않았다.
통영에는 유치환 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두군데 있다.
하나는 청마문학관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동우체국이다. 전자가 청마 유치환의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곳이라면 후자 는 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곳.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시인 이영 도와 사랑에 빠졌던 그는 중앙동우체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편지를 그녀에게 부쳤다.
청마거리는 중앙동우체국부터 충무교회까지 200m 남짓을 일컫는다.
오래된 골목길을 느릿느릿 걷노라면 사랑하는 이에게 손으로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던
'설렘'의 시간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때 '꽃'은 의미를 피워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꽃을 '연애'의 심상으로 받아들인다.
아무려나 대중의 사랑을 그처럼 끈질기게,
그토록 집요하게 받아온 시인도 드물 것이다.
통영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김춘수유품전시관에선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 들을 만날 수 있고 남망산
조각공원 입구에 있는 김춘수 생가에선 어린 시절 그가 바라봤을 하늘빛을 느낄 수 있다.
항남동 버스정류장 앞,
자그마한 자투리땅에 서 있는
김춘수시비는 통영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자신이 오가는 길목으로 시인을 불러들인 통영시민이야 말로 또 하나의 예술가다.
학연이나 지연 따위에 연연하지도 않고 일시적인 미술
흐름에 타협 하지도 않으면서,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꿋꿋이 지켜냈다.
통영 미륵산 자락에 위치한 전혁림미술관은 화백이 1975년부터 30년 가까이 생활하던 집을 헐고 2003년 5월에 문을 연 '통영의 명소'로 작품 80점과 관련자료 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전 화백의 작품 다섯 점과 아들 영근 씨의 작품 다섯 점을 세라믹타일로 제작한 미술관 외벽에 통영의 아름다움과 화백의 예술적 이미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윤이상, 유치환, 김춘수와는 1945년 통영문화협회를 함께 창립한 예술적 동지이자 친구
사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챙겨 나서야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거리에 있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든 매력이 그곳에 있다.
때문에
다녀온 사람에게도,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통영은 '로망 여행지'다.새해에는 게으름과 잔걱정일랑 떨쳐내고 지도 한 장 손에 쥐고 로망을 이루러 나서보자.
2008년 개장 이후 관광 명소로 급부상하 면서 갖가지 기록도 써내려가고 있다.
케이블 길이 총 1975m로 국내 최장 기 록 보유, 4년 만에 탑승객 500만 명 돌파에 이어 '한국 관광 기네스'에 이름 을 올렸다.
경치와 의미 둘 다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맑고 잔잔한 바다,
병풍처럼 둘러싼 수려한 산등성이, 머물고 떠나는 선박들, 아련한 외딴 등대까지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다.
곱고도 화사한 통영항의 야경 역시 꼭 봐야 할 풍경으로 사진촬영 명소이자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맑고 잔잔한 바다,
병풍처럼 둘러싼 수려한 산등성이,
머물고 떠나는 선박들,
아련한 외딴 등대까지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다.
곱고도 화사한 통영항의 야경 역시 꼭 봐야 할 풍경으로 사진촬영 명소이자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공원 길을 따라 올라가면 관해정(觀海亭) 에 닿는데 이곳에서는 수려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들어오며,
특히 일몰이 장관이다.
아울러 달아공원 주변 산양일주도로는 동백나무길과
다도해 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다.
완만한 아치형 모형을 이루고 있으며 140m 중앙부에 196개 초록빛 투광등을 달아 밤마다 멋들어진 야경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조명이 수면 을 비추면 데칼코마니를 찍어낸 듯 럭비공 모양의 무 수산이 만들어져 장관을 이룬다.
때문에 통영8경에도 당당히 뽑혔다.
유일한 통로였던 통영해저터널은 1932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동양 최초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규모다.
통영대교가 세워진 후 통로의 소임은 다했지만 대신 독특한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터널 내부에는 건립 당시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 도 비치해두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챙겨 나서야 할 만큼 만만치 않은 거리에 있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든 매력이 그곳에 있다.
때문에 다녀온 사람에게도,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통영은 '로 망 여행지'다.
새해에는 게으름과 잔걱정일랑 떨쳐내고 지도 한 장 손에 쥐고 로망을 이루러 나서보자.
통영 바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다양한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을 한상 가득 차려낸다.
양·질·신선도까지 한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다.
대추나무(055-641-3877) 벅수실비(055-641-4684)
별난 이름, 볼품 없는 모양 과 달리 달짝지근한 맛과 풍부한 영양이 일품이다.
할매우짜(055-644-9867) 통영빼떼기죽(055-646-3443)
봄 도다리쑥국, 여름 하모회, 가 을 전어회, 그리고 겨울 물메기탕이 그것이다.
특히 통영 사람들의 물메기탕 사랑은 각별한데 겨울이면 통과의례처럼 챙겨 먹는다.
부드러우면 서도 시원한 물메기탕은 속을 편안하게 해줘 해장국으로도 좋다.
송학횟집(055-644-2460) 분소식당(055-644-0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