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은 월천 조목이 1539(중종 34)에 세워서 학생을 지도하고 공부하던 서당이다.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이 썼다.
강가의 마을 뒤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흙담을 집에 가깝게 두른, ‘일(一)’자형 목조단층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있다. 신위를 봉안하게된 것이다. 가난한 선비가 가묘를 모시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법도이다.
월천은 이황의 제자이며 원래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왕명이 내려졌으나 대부분은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 동생과 두 아들들과 더불어 곽재우와 합세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이황의 제자 가운데 1615년(광해군 7) 유일하게 도산서원 상덕사에 함께 모셔졌다.
主享者
- 조목(趙穆, 1524~1606)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 대춘(大椿) 대에 예안에 정착하였다. 그는 예안현의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별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이곳이 퇴계의 향리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목은 자연히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결국 퇴계의 수제자로 도산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종향되었다.
연보(年譜)에 의하면 조목은 5세부터 책을 읽어 12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읽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15세에 퇴계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학업을 청하였다. 이 때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으며 퇴계의 학문적 성취에 따라 월천 또한 성장함으로써 퇴계의 많은 문인들 가운데 그 의발을 전해 받은 으뜸가는 제자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9세 되던 해(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즈음에도 그는 퇴계를 찾아뵙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해 질의하고 공부하였다. 32세 때에 두 번째로 상경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는 학문과 과거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조목은 과거 시험을 그만두고 부용산 아래에서 은거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도학에 대한 월천의 연구가 본격화한 것은 아마도 퇴계와 고봉 기대승 사이에 1560년(명종 15)부터 비롯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39세 때인 1562년(명종 17) 심경(心經)에 관한 질의가 처음 나온 이래 4~5년간 퇴계와의 사이에 심경부주(心經附註),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정민정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등 심학 관련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때 단순히 퇴계에게 질문을 아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조목은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굳히고 이후 독실한 수행으로 덕성을 쌓았다.
과거를 거치지 않은 월천에게 처음으로 벼슬이 내린 것은 그의 나이 43세 때인 1566년(명종 21)이었다. 그 즈음 사림의 진출이 두드러지며 사림의 영수로서 신망이 두터웠던 퇴계에게 연이어 소명이 내렸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퇴계 문인에 대한 등용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월천에게는 처음으로 이조의 천거로 공릉참봉이 제수되었고, 뒤이어 선조 원년 성균관의 천거로 집경전참봉이 되었으나 사은 후 곧 물러났다.
조목의 존재가 중앙 정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73년(선조 6) 삼공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李之함),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부터 였다. 그는 다섯 인물 가운데 첫 번째로 꼽혔으며 단번에 참상의 벼슬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 종2품인 가선대부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를 한 것은 53세 때인 1576년(선조 9) 봉화현감으로 2년 남짓 재직한 것과, 65세 때인 1588년(선조 21) 2년간 합천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지방관 시절에는 향교를 중수하고 유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반 행정과 정치적 능력은 크게 평가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합세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의 향화를 받들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강학 활동을 벌려 퇴계의 학풍을 계승, 확대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조목은 『퇴계문집』의 간행을 통하여 기라성 같은 퇴계의 문인들 가운데 단연 퇴계의 의발을 받은 적통 제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80세 이후 강학을 할 수 없는 형편에서도 도산서원에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묘당을 배알하였다. 퇴계의 가르침으로 출발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퇴계를 숭모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행장에 의하면 월천은 저술하기를 즐기지 않아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서야 겨우 간행을 보게 된 문집마저도 서애와의 갈등 관계를 담은 내용 때문에 문인 김택용이 지은 「월천언행록」 등의 기록을 제외시켜버려서 조목 학문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성격은 퇴계 이상으로 주자설을 받들어 주자설에 대한 비판이나 다른 학설을 이단을 물리치는 차원에서 극력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조목 성리학의 핵심은 심경과 그 부주의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심학도의 비판과 인심도심도의 비판적 고찰에 집중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圖)를 그려 그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의 학문은 심경을 발판으로 한 주자학적 심학이었다. 심학에 매진하는 목적은 올바른 행위를 위한 ‘바른 심성 수양’을 하려는 데에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과 행위를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조목의 남달리 뛰어난 마음가짐과 성실한 실천 행위는 치밀하고 명철하게 정확한 태도로 탐구한 그의 심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목의 이러한 정통 주자학적 자세는 그의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는 관직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또 벼슬다운 벼슬을 하지 않아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584년(선조 17) 영덕현령의 자리를 사양하면서 올린 갑신사직소(甲申辭職疏)와 강화에 반대하여 올린 갑오진정소(甲午陣情疏) 등을 보면 그는 향촌사회에 대한 중앙이나 지방관의 통제를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향촌활동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당시 향촌 사림의 여론을 대변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며 성리학적 정치론의 근본 입장과도 맥을 같이한다.
스승을 기리는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던 그는 마침내 1613년(광해군 5)에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묘소는 서당 뒤편 부용산 남쪽 언덕에 있으며, 서당과 50여 보 거리에 있다.
이것은 토계동 향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던 상소 초안이다. 국가의 가장 급한 의무는 나라의 선현 중에 대현(大賢)을 가려 숭상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퇴계의 도학을 이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을 도산서원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는 상소이다.
명 칭
:
월천서당(月川書堂)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539
건축
:
조목(趙穆, 1524~1606)
시기
:
1539년(중종 34)
소유자
:
조동주(관리자 : 조동주)
문화재
:
경상북도 기념물 제41호, 1982년 12월 1일 지정, 374㎡
건축 배경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학문을 배우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건축 특징
서당의 전면은 낭떠러지 끝에 있어 문을 낼 수 없을 정도여서 일각문이 서편에 설비되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 단층 와가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이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랭이가 되었다. 어칸 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하반에 널판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있다. 신위를 봉안하게 된 것이다. 가난한 선비가 가묘를 일으키는 법도로 허용되었던 방법이다.
전면과 측면에 쪽마루가 설치되었는데, 그 반대편 측면과 배면에는 쪽마루가 없다. 대청 뒷벽에 머름을 들이고 바라지창을 달았다. 방의 뒷편에는 개구부가 없다. 질박한 구성법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가 깔렸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귀틀의 설치가 보통은 병행되는 법인데, 이 건물의 귀틀은 병렬과 교차가 혼재하였다. 안통의 동귀틀이 도리에 병행되었는데 앞쪽에서는 동귀틀에 의지하고 다시 작은 귀틀을 만들어, 보와 평행되게 하였다. 원형이 아닌 듯이 보인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