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저녁에 20170423 오후 한나선교회 헌신예배
요한복음 20:19-31
▪ 기도의 사람 ‘한나’
‘한나’는 사무엘의 어머니로, 불임여성이었으나 하나님께 간절하게 서원기도를 드림으로 사무엘을 얻었으며,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을 때 강력한 영적 지도자가 됩니다. 한 여인의 기도가 자신의 삶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역사까지도 바꾼 것입니다.
한나는 시련과 아픔을 당할 때 기도로 역경을 이겨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1:6-2:21). 흔히 사람들은 고통을 당할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나 상황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외면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한나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기도의 생활로 그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한나선교회원 여러분과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이 ‘기도로 역경을 이겨내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우아함’이란 뜻의 히브리어 ‘חנה’에서 왔습니다.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한 이름은 독일어로는 ‘안나’ 러시아어로는 ‘아냐’ 영어로는 ‘앤’ 등 친숙한 이름입니다. 우리 한남교회 어린이 중에도 지난 성탄절에 유아세례를 받은 ‘한나’가 있습니다. 제 신학교 동기 중에는 ‘드보라’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목사 사모로 얌전하시지만, 학교 다닐 적에는 여자 사사 드보라처럼 정말 씩씩한 친구였습니다. ‘한나선교회’는 한남교회에서 가장 어르신들이고 한남교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켜오신 산 증인들이십니다. 한나처럼 기도로 한남교회를 이끌어 주시고, 이름처럼 우아한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닫힌 문 사이로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은 함께 모여 있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홀연히 그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끝까지 의심하는 제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였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무서워서 도망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그만 동료와도 멀어지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그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려고 못 박혔던 손과 발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제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눅 24:39).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만 대표적으로 확인시켜 주시고 있습니다(요 20:24-27).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도마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자기의 상처를 만져보고 확인하게 하신 일은 모든 제자, 모든 사람을 향해 증거를 보이시는 것과 똑같습니다(막 16:11-14). 이렇듯 예수님은 의심과 불신앙과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오시어 부활의 증거를 확인시켜 주시며, 평강과 기쁨과 성령을 주시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입니다.
▪ 도마에 관한 이해
도마는 그저 ‘의심 많은 제자’로만 규정할 수 없습니다. 도마는 사실 영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제자 중 하나였고, 예수님의 복음을 가장 잘 이해한 제자였습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야)에서 <도마복음>이 52개의 영지주의 문서들과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 27권을 처음으로 정한 인물인데, 그는 367년에 ‘27권의 책만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후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가 아타나시우스가 선별한 27권만 신양경전으로 채택하고, 나머지는 이단문헌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때, 영지주의 문헌들은 분서갱유를 피해 이집트의 광활한 사막에 묻혔습니다. 그때 <도마복음>도 함께 묻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의심’이 죄일까요? 그리스도교가 하지 말았어야 할 것 중의 하나를 했는데, 그것은 ‘의심’을 ‘죄’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맹목적인 신앙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이성의 도움 없이 기적으로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이상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도마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암시하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고 하실 때에, 이 질문의 핵심을 간파한 유일한 제자는 도마였습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합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 오직 도마만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누가복음 24장 39절의 말씀을 소개했는데, 예수님이 자신이 정말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먹고 손과 발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마는 사실 의심많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심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제자였던 것입니다. 7일 후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는 도마도 그 자라에 함께 있었습니다. 도마를 만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서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정말로 도마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예수의 손을 만져보고,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한 제자는 도마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현대사회에 살아남으려면 ‘의심’ 혹은 ‘회의’라는 도마의 신앙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 예수님이 주신 선물 – 평강과 기쁨과 성령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은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평강과 기쁨과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거듭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환청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주신 말씀이기에 진실로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직접 손과 옆구리에 남아있는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시고 확인시키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이제 주님은 그들을 도와줄 동반자, 곧 보혜사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지도하고 함께하심으로 도와주는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주심으로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늘 제자들이 주님을 곁에 모시듯이 살고 일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 – 선교, 사죄, 믿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세 가지입니다.
선교와 사죄와 믿음이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제자들은 사도로서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같이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온 땅에 나아가 주 예수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증거자가 되어야합니다. ‘한나선교회’ 여러분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선교’하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다. 외국여행과 선교를 구분하지도 못하고, 무례한 배타적 선교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 한나선교회 여러분에게 선교는 무엇일까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기도의 어머니가 되고, 교회를 잘 살펴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물질과 재능을 통해 돕는 것입니다. 이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한나에게 복을 주셨던 것처럼 복을 주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사도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죄의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회개를 선포할 때, 그 선포를 듣고 죄를 돌이키는 사람에게 사도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도 사도의 사명입니다. 저는 56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딱히 원수 짓고 살아가는 경우는 없습니다만, 솔직하게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용서한 게 아니고 잊고 사는 것이 맞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결코 호의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지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기기 마련이고, 주관이 뚜렷해지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면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이라는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타인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려면, 자신을 용서하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뜻밖에 타인은 잘 용서하면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물론, 자신의 죄에 민감해야 하지만, 죄의식에 빠져서 살아가면 안 됩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마침내 의심 많은 사람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동고동락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 기꺼이 몸을 바쳐 주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부활의 증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