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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해남보다 덜 알려졌지만 역사성 깊은 양산·김해의 매화기행
선인들이 '꽃 중의 으뜸 꽃'으로 여겨온 매화. 매화를 들여다보고 향기를 맡다 보면, 추위 속에서 일찌감치 '탐매 행각'을 벌였다는 선인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가장 진한 향기와 화사한 빛깔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꽃이 매화다. 전남 광양·해남 등의 대규모 매실농원들이 유명하지만, 경남 동부지역에도 볼만한 매화 경관들이 있다. 양산·김해시 일대의 매화들을 감상하고 왔다. 세련되고 규모 큰 유명 관광지는 아니어도, 이맘때 화사한 빛깔과 향기를 즐기려는 이들이 꾸준히 찾는 곳들이다.
양산시 원동면 영포마을과 순매원 경남 밀양시 삼랑진역에서 양산시 물금역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철도는 낙동강 푸른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물줄기와 철길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펼쳐 보이는 곳이다. 이맘때 이곳 강변마을 풍경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매화다. 1022번 지방도를 따라 차를 몬다면, 낙동강 물줄기와 화사하게 피어난 매화, 달리는 열차가 어우러진 근사한 풍경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그대로 매화 향기다. 양산시 원동면 원리에서 69번 도로를 따라 좌회전하면, 마을 거의 전체가 매화밭인 '매화마을' 영포리 영포마을에 이른다.
"한 25년 됐나. 쌀농사 치아삐리고 매화나무 심은 기라요."
지난 3월16일, 매향 자욱한 영포마을 산비탈에서 마른 잡풀더미를 치우던 주민 윤석주(60)씨가 말했다. "나락농사 지봐야 묵고살기 애려우이까네." 다랑논도 비탈밭도 죄 매화나무밭인 영포마을은 경남지역에서 가장 규모 큰 '매화마을'(매실마을)이다. 69번 지방도 좌우 산비탈이 온통 부옇게 피어나기 시작한 백매·홍매 꽃밭이다. 80가구 130여명의 주민들이 22만㎡의 밭에서 매화나무를 가꾼다.
2만그루 가까이 된다는 이 마을 매화나무의 수령은 대부분 20년 안팎. 하지만 산자락 일부엔, 본디부터 있던 50년 넘은 나무도 많다. 지난주부터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 영포마을의 매화는 이번 주말쯤 가장 많이 피어날 것으로 보인다. 광양 청매실농원처럼 잘 꾸며진 곳도 아니고, 눈에 확 띄는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칠고 소박한 대로, 산비탈에 만들어진 1㎞가량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진한 매화 향기에 흠뻑 빠질 수 있다. 영포마을 '쌍포다목적매실광장'에선 23~24일 '제7회 원동매화축전'이 열린다. 매화향음악회·매화보물찾기·매화퀴즈잔치 등이 진행된다.
영포마을에서 10여분 거리의 낙동강변엔 매실농원 순매원이 있다. 이곳엔 지난주부터 매화가 피어나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3년 전 귀농한 김용구(63)씨 부부가 조성한 강변 매실농원이다. 철길 옆 1만여㎡의 터에 700여그루가 있다. 일제강점기 경부선 원동역 역무원들의 관사가 있던 자리다. 김씨는 "20여그루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심은 100년 된 매화나무"라며 "24일께까지는 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순매원은 매화 피는 때를 골라 사진작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이 주목하는 풍경은 낙동강 물줄기와 매실농원, 그리고 그 사이를 S자로 굽이치며 달리는 열차 모습이다. 최근엔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진찍기 좋은 곳'으로 선정하면서 전망대도 만들어졌다.
김해 김해건설공고 와룡매 "하이고마, 학생보다 찍사들이 많데이." 맞다. 오고 가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보다 고성능 사진기와 렌즈, 삼각대로 무장한 사진가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지난 15일 경남 김해시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교정. 정문에서 시계탑까지 이어진 280m 길이의 '매화로'엔 양쪽으로 화사한 꽃을 피워올리고 늘어선 매화나무마다 사진가들이 꿀 빠는 벌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한 사진동호회 회원은 "매년 이맘때 매화를 찍으러 오는 코스 중 한곳"이라며 "먼저 통도사 홍매를 찍고, 양산 원동 순매원을 거쳐 여기로 온다"고 말했다.
김해건설공고의 매화가 사진가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두 가지다. 심은 지 80~90년 된 고매(古梅)에 속하는 나무들이 81그루나 도열해 있는데다, 오래된 나무들이 분재처럼 꼬이거나 땅으로 기는 모습으로 자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용이 기어가는 모습'이어서 '와룡매'라고도 불린다.
이 나무들이 정확히 언제 심어졌는지는 학교 쪽에도 기록이 없다. 본디 김해농고가 있던 자리에 40여년 전 농고가 이전하고 건설공고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농고 시절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 와룡매 무리를 관리해온 정아무개(82)씨는 "내 추정으론 90년은 된 나무들"이라며 "특히 주차장·연못(구지호) 주변의 10여그루가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말했다.
김해건설공고 전양훈(50) 행정담당 교사는 "지난해 6월, 90세도 훨씬 넘어 보이는 어르신 한 분이 매화나무를 붙들고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며 "이 나무들을 심은 분으로 재일교포라는 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80여년 전 자신이 심은 나무들을 만난 100살 어르신의 감격은 어떤 것이었을까.
81그루의 나무 중 백매가 63그루, 홍매가 18그루다. 백매 가운데 일부는 꽃받침이 은은한 초록색인 이른바 '청매'다. 백매는 이미 활짝 피었고, 홍매·청매는 이번 주말께까지 꽃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선인들이 사랑한 고매(古梅)들, 통도사 홍매, 금시당 홍매, 표충사 백매 매화는 전통적으로 꽃의 색깔과 형태, 나무 모습 등에 따라 20여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요즘엔 다양한 접목기술 발달로 수백 종류의 개량 매화들이 개발돼 있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 토종매는 꽃잎의 색깔에 따라 백매, 홍매로 나눈다. 꽃잎은 같은 흰색이어도 꽃받침의 색깔에 따라 홍매, 청매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찰이나 고택들엔 수백년씩 묵은 고매들이 전해오는데, 각각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양산·밀양에도 이런 고매들이 몇 곳 전해온다.(* 금시당과 표충사는 밀양에 있어 내가 여행한 바 있습니다. 산청삼매는 남사리 원정매, 단속사지 정당매, 산천재 남명매가 유명함)
양산 통도사엔 이름난 홍매 세 그루가 있다. 고찰 통도사의 봄빛을 압도하는 꽃나무들이다. 극락전 옆에 두 그루(수령 300년 추정)가 있고, 영각 앞에 한 그루(350년 추정)가 자라고 있다. 극락전 옆 두 그루 중 하나는 매우 연한 분홍색(홑겹 담홍매), 하나는 진한 분홍색(여러겹 만첩홍매)이다. 영각 앞의 매화는 둘을 섞은 듯 중간 분홍색을 띤다. 통도사 문화해설사 김용관씨는 "통도사 홍매는 자장율사 창건 때부터 뿌리가 닿아 있다 해서 '자장매'로도 불린다"고 했다. 지난 주말 이미 활짝 핀 상태.
밀양시 용활동의 조선시대 정자와 사당인 금시당·백곡재에도 180년 된 홍매가 한 그루 있다. 금시당 이광진의 14대손 이두성(65)씨가 낙향해 살며 돌보고 있다. 이씨는 "큼직한 매실이 달리는 토종 홍매"라며 "원래 백곡재 앞에 세 그루의 홍매가 있었는데 하나만 남았다"고 했다. 이번 주중에 볼만하게 피어날 전망.
밀양의 고찰 표충사에도 200년 됐다는 백매 한 그루가 있다. 지난 주말엔 봉오리만 맺힌 상태였다. 이번주부터 꽃잎을 열 것으로 보인다.
양산·밀양·김해=글·사진 이병학 기자leebh99@hani.co.kr
travel tip
한옥체험관도 있어요
▣ 가는 길 양산 영포마을은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여주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김천분기점~경부고속도로~동대구분기점~대구부산고속도로~삼랑진나들목~1022번 지방도~물금 쪽~69번 지방도로 좌회전. 김해건설공고 와룡매는 대구부산고속도로~대저분기점~동김해나들목.
▣ 먹을 곳 영포마을(윤순흠 이장 010-3889-5410) 매화축제장 먹거리장터. 순매원(055-383-3644) 국수와 간식류. 김해건설공고 옆 김해국립박물관 주변에 추어탕 전문점 안채(055-327-4406) 등 식당이 많다.
▣ 묵을 곳 양산시 원동면 대리에 에덴밸리리조트(055-379-8000)가 있다. 16평 12만4000원부터. 김해시 봉황동엔 깨끗한 한옥체험관이 있다. 주중 4만4000원(2인실, 주말 6만원)부터. 2~4인용 객실 13개.
▣ 여행문의 양산시 종합관광안내소 (055)382-4112, 김해시 종합관광안내소 (055)338-1330.
▣ 매화·벚꽃 탐방 행사 부산 해운대 파라다이스호텔은 시기별·요일별로 고찰 통도사 홍매화 탐방, 달맞이 문탠로드 벚꽃투어, 감천마을 탐방 등을 진행하는 '불어라 봄바람 숙박패키지'를 내놨다. 야외 오션스파 씨메르와 피크닉 존 무료이용 포함 1박 20만원(세금 별도). (051)749-2111.
산청삼매의 역사속으로
연합뉴스 보도자료|입력2013.03.15 16:15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퇴계선생은 100편에 가까운 매화시를 모아 '매화시첩'으로 묶었고, 세상을 떠나는 날 아침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다.
남명의 수제자였던 수우당 최영경(1529~1590)이 한강 정구(1543~1620)의 백매원을 방문했을 때 마침 매화가 만발하였다. 봄은 중춘이라 복숭아가 만발한 시기였다. 수우당은 노복을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고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명했다.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백설이 가득한 깊은 골짜기에 처하여 절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복숭아꽃과 더불어 봄을 다투니 너의 죄는 참벌하여야 마땅할 것이나 사람들의 만류로 그만두니 너는 이후로 마땅히 경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며 늦게 피어난 매화를 꾸짖은 일화가 있다.
「남사리 元正梅」
<고려말 하집이 심은 元正梅>
집 양지바른 곳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영매詠梅 (원정공매화 시)
남사마을, 매화집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집. 이곳은 진양 하씨가 32대째 살고 있는 집이다. 열두 대문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은 없어졌지만 석파 노인(대원군) 낙관이 뚜렷한 원정구려(元正舊廬) 현판이 이집의 권위를 대변하는 듯 걸려있다.
진양 하씨 대동보에는 "1377년 이후 원정공은 송악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송헌(松軒)이라 호를 지었으며 일찍이 매화 한그루를 심었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원정공의 매화 사랑을 짐작케 한다. 분양고가(汾陽古家)는 동학란 때 소실되고 지금 있는 집은 31대손 하철이 지은 집이다. 집터 담장 옆에는 원정공의 손자 문효공 하연이 심은 감나무가 있다.
이제 원정매는 긴 여정을 내려놓고 밑둥치에서 싹을 틔운 자손에게 대를 잇게 하였다. 진양 하씨는 고려 말 이후 하공진의 시랑공파, 하진의 사직공파, 하성의 단계공파를 막론하고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시랑공파 하륜(1347~1416)은 태종조 영의정으로서 조선의 기틀을 닦았고, 사직공파 하즙(1303~1380)의 증손 하연(1376~1453)은 세종 조에서 영의정을 지냈다. 하즙은 하진의 8세손으로 21세(132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 문하찬성을 거쳐 진양부원군에 이르렀다.
「단속사지 政堂梅」
한 기운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나니
천심을 섣달 전의 매화에서 볼 수 있네
스스로 큰 솥에 국 맛을 조화하는 열매가
부질없이 산중에서 떨어졌다 열렸다 하네
단속사견매斷俗寺見梅 (동문선 권22)
천년고찰이었던 단속사, 폐허된 터에는 삼층석탑 2기를 덩그러니 세우고 수많은 얘기를 풀어낸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은 금당자리였던 뒤쪽에 마른 등걸 의지하여 가지를 키운 정당매다. 정당매는 조선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록으로,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단속사편에서 정당매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라 하였다." 1487년 지리산 유람 길에 나선 추강 남효온(1454~1492)은 단속사 뜰의 매화를 보고 통정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떠 올렸고, 1489년 지리산 등정에 나선 탁영 김일손(1464~1498)도 단속사의 정경을 소상히 기록하면서 정당매를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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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정당매 |
강통정의 증손자 용휴는 정당매 시문을 모은 시첩을 만들어 책의 서문을 김일손에게 부탁하였는데 김일손은「정당매시문후」라는 글을 지었다. 그 글에 따르면, "매화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백년이 넘었고 처음 심은 사람은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 강회백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백여 년을 넘게 살다가 죽고 말았다. 통정의 증손자 강용휴가 1487년에 옮겨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정의 손자 인재 강희안(1417~1465)이 쓴 「양화소록」에는 "승려들이 매년 북을 주고 잘 길러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또한 이끼가 덮여있다. 그 밑에 아직 죽지 않은 한 자 남짓한 낡은 등걸이 있는데 참으로 영남의 귀중한 고물(古物)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강회백이 심은 매화는 이미 죽고 증손자 용휴가 아버지 희맹의 명을 받들어 근처에 매화를 다시 심은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icadong.net%2Fdslr%2Ffiles%2Fdata%2Flandscape_gallery%2F20090310_D3Y_8943.jpg)
진양 강씨 강시(姜蓍)(1339~1400)는 원정공 하즙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처향인 남사마을로 이주하였다. 강시는 부인 진양 하씨 사이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강회백이다. 강회백은 동래정씨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고, 부인이 일찍 죽어 후취부인으로 성주이씨를 맞아들여 2남을 낳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dicadong.net%2Fdslr%2Ffiles%2Fdata2%2Ffree_gallery%2F20090310_D3Y_8932.jpg)
<단속사지 홍매화를 정당매라 한다>
강통정은 당대 명문들과 혼사를 맺었고, 넷째 아들 강석덕은 최고의 세력 가문인 심온의 둘째딸과 혼인하였다. 심온의 첫째 딸이 세종의 비 소현왕후였으니 강석덕은 세종과는 동서지간이다. 강석덕과 청송 심씨 사이에 희안과 희맹이 태어났으니 이들은 문종, 세조와는 이종간이 된다.
「남명 조식의 산천재 南冥梅」
한해 저물어 홀로 서 있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이 내렸구나
선비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설매雪梅 (남명집)
남명조식(1501~1572)선생이 만년의 장수처로 삼았던 산천재 마당에는 세상 사람들이 남명매라 부르는 매화나무가 있다. 1561년 선생이 산천재에 터를 잡을 때 심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매화를 보고 지은 시 두 편이 전한다. 선생은 하늘 한 모퉁이를 떠받치고 어엿이 서있는 천왕봉을 사랑하셨고, 자신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원하셨다.
천왕봉의 눈이 녹고 덕천 강물이 봄소식을 풀어낼 때쯤 남명매는 꽃망울을 연다. 선생은 "우리선조는 창산 사람, 9대동안 평장사가 났다"고 가계를 밝혔다. 증조부 안습은 강성군 삼우당 문익점(1392~1398)의 조카 가용의 딸 남평문씨와 혼인하였다.
조부 영(14287~1511)의 부인은 남평조씨 조잠의 딸이였는데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임천조씨 지족당 조지서의 누이다. 부친 언형은 충순위 이국(1451~1519)의 딸 인천이씨와 혼인하였으니 세종 때 무인으로 좌의정에 오른 정열공 최윤덕(1376~1445)의 손녀다.
산천재에서 바라본 남명매입니다. 앞의 강물은 덕천강이고 진양호로 흘러내려 갑니다.
산청의 삼매는 봄맞이를 나서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매화가 아니다. 한없는 세월동안 시대와 시대, 그 시대속의 인물과, 그들의 삶과 정신을 이어온 매개체다. 옷깃을 여미며 고매(古梅) 와 마주해보자.
한편, 성철스님 생가 앞 마당에도 2013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길 희망하듯 아름답고 화사한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끝)
출처 : 산청군청 보도자료
========이조년의 시조=========
이조년 시조 풀이-
이화(봄)에 월백(月白)하고
은한(은하수)이 삼경(三更)일제
일지춘심을
자귀(소쩍새)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풀이
배꽃이 피어있는 달밤(봄밤의 아름다움)
은하수 흘러가는 삼경에
한줄기 봄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쩍새는 모르겠지만
정이 많아 잠 못 들어 하노라.
초 : 봄밤의 美 이미지(흰색)
중 : 화자<->자규(화자의 정서가 자규와 대비)
객관석 상관물 -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끌어들여진사물
종 : 다정 사랑 > 자연사랑
병 = 천석고항(낮지않는 병)
느낌 -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노래하면서도 슬프고 감상적이다. (애상적 흥취)
======== 이 조 년 ===========
고려 후기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 이속(吏屬)인 장경(長庚)이다. 장인은 정윤의로 경산부에 부임해서 그의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1294년(충렬왕 20)에 향공진사로 급제한 후 안남서기(安南書記)·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협주지주사(陝州知州事) 등을 거쳐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의 이간으로 충렬왕·충선왕 부자간 다툼이 치열했는데 이조년은 진퇴(進退)를 삼가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억울하게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 유배 후 13년간은 고향에서 은거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숙위(宿衛)시 방탕하게 생활하므로 경계의 말을 간곡히 올리자 왕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정당문학예문대제학직을 내리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했다. 충혜왕의 방탕을 보고 충정으로 간했으나 듣지 않자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죽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다.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것으로, 잠못 이루는 밤의 심정을 자연을 통해 표현한 절구(絶句)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