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친서를 가내야마 대사에게 건넸다.
친서에는 포항제철소를 만들고 싶은데 일본 측이 기술 협력을
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는 알리지도 않고 가내야마 대사는 조용히 도쿄로
건너가 사토 총리를 만났다.
▶사토=“(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지원하는) 그 문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또 해달라고 가져왔군.”
▶가내야마=“박 대통령께서 저에게 이 친서에 답이 없으면 한국
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한
관계가 끝장납니다.”
▶사토=“이거 큰일 났네.” 사토 총리는 그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 겸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
(經團連) 회장에게 전화를 돌렸고 그날 밤 세 사람이 만났다.
▶이나야마=“나사도 제대로 못 만드는 한국이 무슨 제철소야.”
▶가내야마=“그런 말씀 마십시오. 1897년 야하다(八幡) 제철소
(신일철 전신)를 만들기 전에는 우리도 나사조차 못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변명보다는 도와줄 방법을 찾아주세요.”
가내야마는 마치 주일 한국 대사로 부임한 사람처럼 집요하게
이나야마 회장을 설득했다.
당시까지‘일본의 재계 총리.로 불리던 이나야마 회장은 결국
마음을 돌렸고 포항제철소 지원의 길이 열렸다.
“광복절 행사에도 참석 못 할 이유 없어”
기억할 만한 일화는 또있다.
대사 부임 이후 처음 맞은 69년 3·1절 기념식에
가내야마는 주한 일본 대사로서 사상 처음 참석했다.
이후 지금까지 어떤 후임 대사도 엄두를 내지 못한 기록이다.
당시 본국의 질책을 받자 가내야마 대사는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 문제가 되나. 8·15 광복절 행사에도 못 갈 이유는 없다”
고 항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내야마 대사가 일관성 있게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자
일부에선 창씨개명한 한국인 김씨의 후예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내야마 대사가 “나는 원래 구보타(久保田) 가문 출신
인데 가내야마 가문의 양자가 됐다”고 해명하자 해프닝으로
끝났다.
대신 그는 김해김씨 명예회원으로 명부에 올랐다.
이처럼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대사까지 지낸 일본인이 사후에 한국 땅에 묻힌 곡절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도쿄에서 태어난
가내야마는 97년 11월 1일 미수(米壽·88세)를 넘겨 타계한다.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5세 때 외교관이 된 이후 38년간
바티칸 주재 참사관, 칠레·폴란드 대사 등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도쿄의 천주교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
생전 그를 아끼던 한·일 양국의 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가나야마의 자녀 12명 중에서 장남은 장례식에 참석하러 한국에서 온
노신사에게 다가가“최서면 원장님이십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장남은“부친께서‘내가 죽으면 유골을 최원장께 맡겨달라'고 유언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친께서 최 원장님께 말씀 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절친 최서면 원장에게 “한국에 묻어달라”
자신의 유골을 부탁할 정도로 최 원장과 돈독하게 된 사연이 있다.
72년 귀국한 가내야마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은 유럽일본관장 자리를
대사급으로 격상해 맡기려 했으나 가내야마 대사는 사양하고 바로 은퇴했다.
그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그해 11월 도쿄에 있던 한국연구원
으로 최 원장을 찾아갔다.
당시의 심정과 각오를 대사는 88년 발표한 ‘최서면과 나’라는 글
에서 토로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사로 있으면서 일·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었고
제2의 인생을 일·한 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했다”고 썼다.
최 원장은“가내야마 대사가 기회 있을때마다‘일본 사람들은 미국
·소련(러시아)중국·영국과 외교를 잘하면 일본 외교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일하면서 보니 이들 4개국과의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한국과의
관계를 잘못 처리하면 일본 외교의 실패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한·일 관계의 중요성에 공감한 두 사람은 이날 만남을 계기로
의기투합했다.
최 원장은 한국연구원에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새로 만들어
가내야마 대사에게 초대 소장을 맡겼다.
같은 천주교 신자인 데다 공교롭게도 영세명(아우구스티노)이
같은 두 사람은 일가(一家)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75년 4월, 가내야마는 최 원장의 모친 3주기를 맞아 방한한다.
지금은 가내야마 대사 자신이 묻힌 파주 천주교 하늘묘원을 찾아 참배했다.
차를 마시면서 가나야마 대사가 대뜸 최원장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가내야마=“나도 죽으면 이 땅에서 묻히고 싶다. 최 원장과
이세상에서 일·한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최서면=“정말인가. 그럼 내가 여기에 묏자리를 만들 테니
나중에 오시겠나.”
최 원장은 자신이 매입한 가족묘지 공간에 가나야마 대사의 가묘
(假墓)를 만들어줬다.
그 후 가내야마 대사는 자신의 가묘를 찾아“영혼의 집이 마련됐다”고
기뻐하면서 자신의 가묘에 성묘까지 했다.
지금은 가내야마 대사의 묘 바로 옆에 최 원장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유해 봉환식 때 일부 반일 단체 술렁
가내야마 대사가 97년 11월 타계한 뒤 그의 유골이 실제로 한국
땅에 묻히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이듬해인 98년 8월 가나야마 대사의 6남 가나야마 세이기치
(金山成吉·전 NHK 기자)가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방한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조촐한 유골 봉안식이 있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날 행사를 주관한 김수한(87) 한일친선협회
중앙회 회장은 당시 경찰로부터 특이동향 소식을 접했다.
주한 대사를 지낸 일본인이 한국 땅에 묻힌다고 하니 일부 반일
단체가 술렁거린다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은 “한·일 관계를 위해 고향도 아닌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가내야마 대사의 정신이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환영해야지
소란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된다”며 사복 경찰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최 원장은 “한국에
유골의 대부분을 묻고 그중 극히 일부를 가나야마 대사의 아들에게 줬다”고 비화를 공개했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이 쓴 가내야마 대사의 비문에는
“나는 죽어서도 일·한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고
다짐
첫댓글 감동적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 국민이 알게 해야 하는데 아쉽네요.
제가 아는 까페에 퍼 날랐읍니다.
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