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胡 十 六 國 時 代
西秦(서진)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의 한 부류인 乞伏部(걸복부)의 부족장 걸복국인이 세운 나라이다.
본래 국호는 그냥 진이고, 높여 부르면 대진이었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왕조가 많아 구
분을 위해 서진, 혹은 걸복진, 북진, 호진이라고 부른다. 다만 진이란 국호는 2번째 군주
인 걸복건귀 때부터 실제로 썼다.
西 秦 王 朝 世 家
西秦(서진 AD. 385∽431 鮮卑族(선비족) 위치 간쑤(감숙) 성: 乞伏(걸복)
|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 제1대 | AD. 385∽AD. 388 | 宣烈王(선열왕) | 乞伏國仁(걸복국인) |
| 勇士城 | 甘肅省 |
| 제2대 | AD. 388∽AD. 412 | 武元王(무원왕) | 乞伏乾歸(걸복건귀) | 걸복국인의 동생 | 용사성 | 楡中顯 |
| 제3대 | AD. 412∽AD. 428 | 文昭王(문소왕) | 乞伏熾반(걸복치반) | 걸복건귀의 아들 |
| 감숙성 |
| 제4대 | AD. 428∽AD. 431 | 厲武王(여무왕) | 乞伏暮末(걸복모말 | 걸복치반의 둘째 |
| 유중현 |
걸복국인은 선비족의 수령이었던 乞伏司繁(걸복사번)의 아들로 태어났다. 걸복사번은 37
1년에 전진의 왕통과 전투를 벌려 걸복부의 근거지였던 度堅山(도견산 甘肅省 靖遠縣
감숙성 정원현)이 왕통의 기습을 당해 부락이 전부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걸복사번은 결
국 전진에게 굴복하였고 남선우로 임명되어 장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선비의 勃寒(발한)
이 농우를 침범하자 부견은 걸복사번을 사지절, 도독토서호제군사, 진서장군으로 삼아 발
한을 토벌하도록 하였고, 걸복사한은 발한 토벌에 공적을 세운 뒤 376년에 사망하였다.
제1대 선열왕(AD. ?∽AD. 388) 걸복부의 수령이었던 걸복사번의 아들
걸복국인은 걸복사번 사후 걸복부의 수령이 되어 아버지 남선우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전진의 황제였던 부견이 화복을 통일하여 화북 최강의 세력으로 거듭났고 강남의 동
진을 토벌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는 상황이었다. 383년, 부견은 동진 정벌을 앞두고 걸
복국인을 동진 정벌의 선봉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진 정벌을 위해 출정하려는 찰나, 걸복
국인의 숙부인 걸복보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부견은 걸복국인을 걸복보퇴
의 반란 진압에 파견한다. 이때 걸복국인의 반란에 보낸 것이 결과적으로 걸복국인에게
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걸복보퇴는 걸복국인이 온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조카를 후
하게 대우하였다. 이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동진에게 패배하자, 걸복국인은 농서에서 반
란을 일으켰다. 385년 부견이 姚萇(요장)에게 살해되자, 걸복국인은 대도독, 대장군, 대선
우를 칭하고 건의 연호를 선포하며 서진을 건국한다. 걸복국인은 서진을 건국한 이후 흉
노, 강족과 대립하여 세력을 확대하였고, 부등의 세력하에서 원천왕이 되었다. 걸복국인
은 388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에 즉위한 걸복국인의 아우인 걸복건귀에 의해 열조 선열
왕으로 추존되었다.
제2대 무원왕(AD. ?∽AD. 412) 걸복건귀는 선비족 걸복부 출신으로 걸복국인의 동생이다.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하자 걸복건귀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388년에 걸복국인이 죽자
그 아들 걸복공부가 어렸기 때문에 걸복건귀가 대를 이었다. 걸복건귀는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하남왕을 자칭하고 金城(금성 甘肅省 蘭州市 감숙성 난주시)로 수도를 옮겼다.
389년에는 전진의 부등에 의해 금성왕에 책봉되었다. 농서에서 할거하던 걸복건귀는 39
4년에 부등이 지원군을 청하면서 梁王(양왕)에 책봉되자 1만의 기병을 원군으로 파견하
였다. 그러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전사하였고 걸복건귀는 회군하였다. 곧이
어 湟中(황중)에서 부숭이 황제에 즉위하자 걸복건귀는 부승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황중
을 점거하였다. 이에 부승은 구지의 양정에게 망명하여 공동으로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걸복건귀는 이를 격파하여 전진을 멸망시켰으며 농서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걸
복건귀는 진왕을 자칭하였다. 걸복건귀는 395년 苑川 西城(원천 서성 甘肅省 蘭州市)으
로 천도하고 세력 확대를 꾀하여 토욕혼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후량의 공격을 받아 39
7년에 금성을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400년에는 또다시 동방의 苑川(원천)으
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후진이 서진을 공격하여 걸복건귀는 대패하여 서진은 멸망하였
다. 걸복건귀는 남량으로 망명하였으나 재기를 노리다가 실패하여 다시 후진으로 망명하
였다. 후진의 요흥은 걸복건귀를 귀의후에 책봉하였으며, 401년에는 옛 본거지였던 원천
에 진수하여 구 서진의 세력을 이끌었다. 후진의 장군으로 걸복건귀는 후량 공략, 토혼
욕 공략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걸복건귀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한 요흥은 걸복건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주객상서로 삼았다. 걸복부는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이 대신 통솔하였다. 409년에 걸복건귀는 요흥의 진중에서 탈출하여 걸복부로
귀환하였으며 본거지를 원천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견산에 근거를 두고 진왕에
즉위하여 서진을 다시 부활시켰다. 41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원천으로 옮겼으며 농서 일
대를 장악해 나갔다. 일시적으로 후진에 복속하기도 하였으나 남량, 후진 등을 지속적으
로 공격하였다. 412년, 세자 걸복치반이 남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사이 걸복공부에
게 살해되었다.
제3대 문소왕(AD. ?∽428) 걸복건귀의 장남
400년 서진이 일시적으로 멸망할 당시 남량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402년 남량에서 빠져
나와 후진에 있던 걸복건귀와 합류하여 그곳에 있는 동안 세력을 규합하였고 409년 서
진의 옛 땅으로 귀환, 황조를 재건한 공으로 진왕을 자칭함과 동시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412년 걸복공부가 일족을 죽이고 찬탈을 시도하자 그를 사형시킨 후 즉위하여 하남왕으
로 자칭 및 영강으로 개원하였다. 414년에는 남량을 멸망시킨 후 진왕을 복칭하였다.
이후 남는 재위동안 북량과 싸웠으며 428년 병사했다. 아들인 걸복모말이 뒤를 이었으며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문소왕, 능호는 무평릉이다.
제4대 여무왕(AD. ?∽431) 걸복치반의 둘째 아들
428년에 부왕인 걸복치반이 세상을 떠난 뒤에 즉위했으며, 연호를 영흥으로 하였다. 걸
복모말은 재위 기간 동안 제멋대로 형벌을 남발하여 민심이 이반하였다. 위서에 의하면
멸문시킨 인물만 27명으로 나온다. 걸복모말은 재위 기간 동안 북하의 혁련정에게 핍박
을 받아, 북위의 태무제에게 귀순하려고 하였으나, 혁련정에게 저지당했다. 431년, 혁련
정이 서진의 수도인 남안을 공격하였다. 이때 남안성에는 큰 기근이 들어 서진의 군대는
점차 싸울 의욕을 잃어갔다. 결국 걸복모말은 혁련정에게 항복하여, 서진은 멸망한다.
걸복모말은 상규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혁련정에게 살해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
을 멸망시킨 북하 또한 북위에 의해 멸망하였다.
수도 천도
宣烈王(선열왕) 乞伏國仁(걸복국인) 勇士城(용사성) 甘肅省 楡中(유중)
武元王(무원왕) 乞伏乾歸(걸복건귀) 金城(금성) 甘肅省 蘭州(감숙성 난주)
西城(서성) 甘肅省 靜遠(감숙성 정원)
苑川(원천) 甘肅省 楡中(감숙성 유중)
度堅山(도견산) 甘肅省 靜遠(감숙성 정원)
苑川(원천) 甘肅省 楡中(감숙성 유중)
譚郊(담교) 甘肅省 臨夏(감숙성 임하)
厲武王(여무왕) 乞伏暮末(걸복모말) 定連(정연) 甘肅省 臨夏(감숙성 임하)
南安(남안) 甘肅省 隴西(감숙성 농서)
사료 출처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三崎良章(삼기양장)의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 그
리고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