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삼례신금교회.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남전도회 자료실 스크랩 ★제1장 호남 최초의 교회 설립과 선교 (1893~1903)/제1~3절
Chon-yoon 추천 0 조회 21 11.09.20 11: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장 요약]호남 최초의 교회를 세우다

   16∼18 세기 당시 조선 사회는 공리(空理)·공론(空論)의 성리학으로 인해 사변철학적(思辨哲學的)이고 형식을 중요시하며 당쟁이 그치지 않았었다. 그 때 서학(西學)과 함께 전래된 천주교 교리는 젊은 학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문 추구의 지적(知的) 호기심에서 시작된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신앙적인 면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천주교의 신앙 운동은 그 발전 과정에서 조상 제사라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 숭배라 하여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당시 조선 사회의 사상과 생활 및 정치적 분위기는 천주교를‘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교(邪敎)’로 인식하였고, 그 결과 1791년의 신해교난(辛亥敎難), 1801년의 신유(辛酉)교난, 1839년의 기해(己亥)교난과 1866년의 병인(丙寅)교난 등의 사옥(邪獄)이라는 명분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자행되었다.

 

  1875년 9월에 일어난 일본 군함 운양호(雲揚號)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이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丙子修好條約)를 맺게 됨으로써 조선은 개항(開港)하게 되었다. 개항 조약 체결 이후 천주교에 대한 경계가 다소 누그러져 많은 신부들이 입국하였으며, 전북에는 1876년 블랑(Blance, 백 신부), 조스(Josse, 요안 신부), 로베르(Robert, 김 신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 라프르카드(Lafaurcade, 羅 신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 베르모렐(Vermoorel, 張若瑟 신부),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 죠조(Jozeau Moyse, 趙得夏 신부) 등이 들어와 활동을 했다. 그리고 1886년에 체결된 한불(韓佛) 수호 조약 이후 천주교 신부들은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 결과, 전주를 중심으로 해 전라도 가톨릭 선교의 중심 인물이 된 보두네(Baudounet 한국 이름 윤사물(尹沙勿)) 신부의 노력으로 1908년에 전주 성당 착공해 7년만인 1914년에 완공했다.

 

  한국에 기독교 개신교가 전파된 것은 천주교보다 100년 정도 그 시기가 늦다. 우리 나라에 개신교 교인이 처음으로 내한하게 된 것은 1627년 일본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동료인 게이스베르츠(Direk Geisbertz)와 피터(Jean Pieterz) 등과 함께 체포된 네덜란드인 벨트브레(Jan Janes Weltvree, 朴淵, 朴燕)였다. 26년 후인 1653년 8월 15일에는 네덜란드 상선 선원인 하멜(Hendriek Hamel, 哈梅兒,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의 서기) 일행이 제주도 남쪽 화순포(和順浦) 앞바다에 표류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816년에는 영국 정부의 명으로 조선 서해안 일대를 측량한다는 명목 하에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과 홀(Basil Hall) 대령이 중국을 거쳐서 조선 근해로 들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으며, 단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내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개신교도인 귀츨라프 선교사는 상거래 탐색을 하려는 외국 상선에 탑승해 우리 나라에 온 후, 가는 곳마다 성경을 직접 전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등 직접적인 선교를 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865년과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 나라에 찾아 온 영국의 토머스 목사, 윌리엄슨(Williamson)의 간접 선교,로스(Ross)와 매킨타이어(MacIntyre)의 우리말 성경 번역,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성경 번역과 전도 등 우리 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해외에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1882년에 이 한글 성경을 간행해 동만주나 서간도 등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 국내에까지도 은밀히 보급하며 복음 전파를 시도하였다. 특히 로스 목사의 성경 번역 사업에 참여했던 서상륜은 동생 경조와 함께 의주에서 활동하다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大救面) 송천동(松川洞)인 소래로 옮겨 전도한 결과 1885년 경에는 10여 명의 신자를 얻고 마침내 한국인에 의해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로스 목사를 주축으로 한 성경 번역 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887년에 신약 전서인 『예수셩교젼셔(일명 로스성경, Ross Version)』이 간행되었다.

 

  1884년 9월 22일에 알렌 선교사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라는 의사의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 왔으며, 그는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입국해 상주하게 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1885년 2월에 알렌은 병원 설립 허락을 받아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 뒷날 濟衆院으로 개칭)을 설립했는 데,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 사업은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켰으며 복음 선교 사역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나 알렌은 직접 선교 사역에 종사하지는 않았고, 고종의 막중한 신임을 받은 알렌은 선교 행위를 극히 신중하게 했으며, 직접 선교하는 것을 삼갔다.

 

 의료 선교사 알렌의 뒤를 이어 한국에 들어 온 미국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은 부활 주일에 도착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와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였다. 이 날은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정식 선교사로서 들어온 날이며, 직접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그 후 미국 북장로교는 의사 헤론(John W. Heron, 惠論)·앨러스(Annie J.Ellers)·하이든(Mary E. Hayden)·도티(S. A. Doty)·기퍼드(D.L.Gifford, 奇包)·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등의 선교사를 속속 파송했다.

 

 북감리회에서도 스크랜턴 일가(Mary & W. B. Scranton)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해 들어왔다.

 

 뒤이어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데이비스 남매(J. Henry Davis & Miss M. T. Davis)가 1889년 10월에 내한하였다.

 

 

 

                           미 남장로회의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

 

 

  미 남장로회에서는 1892년에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 3명의 남 선교사와, 이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 선교사 등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일컫는 7명의 선교사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으며, 이들 개척 선교사들을 통해 호남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네비우스 선교사의 선교 방법을 도입해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였고, 1892년 가을에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내한하자 연합하여 선교사 공의회(宣敎師公議會)를 조직하였다. 네비우스는 선교의 주 대상을 가톨릭과는 달리, 상류층보다는 노동자나 서민계층 및 부녀자층으로 잡았고, 의료와 교육을 효과적인 선교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교역자 양성을 위해 지방마다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기독교 교육의 효과를 중시했다. 또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을 건축하며 그 경제적 부담이나 운영 등을 도맡아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감당하게 하였는 데. 이런 자립 선교의 기치를 든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 한국 교회의 급성장과 선교의 성공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외국 선교회로부터 한 푼의 보조도 받지 않고 교회 운영 및 전도와 학교 운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선교사들 중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1892년 말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1893년 장로회 미션 공의회에서는 예양 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 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되었다.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는데, 선교사들은 이러한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선교사들이 나서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래서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선정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 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자기의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1897년에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문답한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문답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 17일 주일에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 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시골에서 멀리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는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여했다. 그 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을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으므로, 그 아이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되었다.

 

  이 무렵(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 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 할 것을 작정했으므로,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이 살고 있으며 예배 처소로 겸하고 있는 집을 앞으로는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했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교인들이 힘써 연보하여 충당하였다.

 

 수리를 마친 9월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 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 가량이 출석했다.

 

  1897년에는 선교사들의 사택과 선교부 복합 건물이 들어설 기지를 은송리 옆 완산(完山) 지맥(支脈)자락의 언덕에 있었는 데, 완산이 전주의 주산(主山)일 뿐 아니라 이씨 왕조(李王家) 전주 이씨의 시조 신라 사공(新羅 司空) 한(翰)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라는 이유로 건축이 금지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선교부 기지의 위치를 완산에서 서북편인 화산(華山)으로 옮겨,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임의 사용하도록 하고 완산에 건축했던 건물 대신 세 채를 이전해 지을 수 있는 보상금을 조선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완산에 자리잡으려고 하던 선교부는 현재 엠마오 사랑 병원이 있는 곳(구, 예수 병원 자리)의 등성이에서부터 서북편 일대로 뻗은 야산을 지나, 현재 신흥 학교와 기전 학교 등이 있는 곳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교부가 자리를 옮김에 따라 전주의 초기 교회 자리도 은송리의 선교부에서 바로 보이는 전주성 서문 옆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주 서문 예배당 터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0년대 초반부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적 형편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로 인하여 역사상 가장 파란이 거세고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며, 온 국민이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잃게 되는 민족적 비운을 맛보며 통분했던 기간이었다. 이 때, 설상가상으로 동학도의 주도로 농민 전쟁이 일어나 민심은 흉흉하였고 따라서 국민의 상류층과 하류층의 알력이 더욱 심각해졌다.

 

 선교사들은 전운이 휩싸여 있는 정세의 추이를 지켜보는 중, 당초 동학 혁명의 진원지가 되는 전라도 각 지방의 치안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워, 휴전이 된 후에도 상당 기간을 두고 실정을 살피고 있었다. 신흥 종교인 동학은 지방 농민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기간에 북한 지역을 비롯하여 호남 지역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 역시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 당시 한국의 서남부 지방인 호남 지역에서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기독교 선교를 시작해서 막 뿌리를 내리려는 때였는 데, 동학의 주도로 농민 전쟁이 일어나 기독교의 새싹을 여지없이 잘라 버렸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는 약 1년 남짓 뒤로 밀리고 동학의 전란이 평정되고도 다시 시작하기에는 매우 민심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태였다.

 

 그동안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으로 동요되었던 민심은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었으나, 때로는 남은 동학군들이 복음 전도를 방해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민의 자각정신 고취와 기독교 복음 선교를 위해 좋은 여건을 형성해 준 셈이었다. 또한 민중에게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새삼 깨닫고, 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테이트 목사 남매 선교사의 전주 전도시작

 

  전주 선교부는 1894년 1월 테이트 목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가 서울에서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와 전주 은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학 혁명으로 인해 서울로 일시 철수했다.

 

 1895년 3월 레이널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육로로 다시 전주에 와서 상당기간(3∼5월)을 체류하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주택을 건축하며 선교 활동 재개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초기 세례 받기를 원했던 신자들과 교회를 찾아오던 초신자들은 거의 다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어졌고, 선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이 되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테이트 목사의 집 사랑방에서 다시금 집회를 시작했다.

 

 5월에 레이널즈는 테이트와 3월에 함께 왔던 일행을 전주에서 계속 일하도록 남겨 두고 자기는 육로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전주에서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던 테이트도 서울에 올라가 6월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다.

 

 1895년 10월 서울에서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간계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지방에 있던 선교사들 중에는 시국에 불안을 느끼고 서둘러서 모여들기도 했다. 전킨과 드루도 선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정국이 수습되는 것을 보고 11월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할 주택과 선교 기지를 물색하며 본격적인 군산 선교를 진행했다.

 

 전주에서 꿋꿋하게 일하던 테이트는 12월 일단 서울에 올라가 일 주간 준비를 한 후, 앞으로 누이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에서 장기간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서 군산에 거쳐 1896년 1월초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래서 1월 5일 주일에는 전주 은송리 처소에서 감격적인 새해 첫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는 집회 때마다 성경 강설과 교육을 담당했다. 집회 때는 많은 질문자들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살이에 어떠한 이득과 정치적인 안전 보장의 기대나 경제상의 도움 등을 바라고 있었다.

 

 매티는 모여드는 여자들을 위해 복음의 기본 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한편,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과 위생에 관한 기초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테이트의 사랑방에서 모이고, 여자들은 매티의 방에서 각각 따로 모였다. 뒤를 이어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도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전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 지역 선교부들은 병원 설립? 의료 선교 사업 전개 및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에 힘을 쏟아 군산 구암 병원, 전주 병원, 목포 병원, 광주 병원, 순천 병원, 광주 나병원 등을 설립하고, 신흥 학교, 기전 여학교, 정명(貞明) 여학교, 영흥(永興) 학교, 숭일(崇一) 학교,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영명(永明) 학교, 메리 볼딘 여학교 등의 학교 설립을 통하여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 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초기 장로 교회의 각파(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자, 이들은 장로회의 공통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파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치리권 행사가 별로 없었고 토의와 권고와 보고·친목 등을 다루었으며, 앞으로 정식으로 조직될 치리회의 예비적 공회일 뿐이었다.

 

  이렇게 호남 지방의 선교 활동은 여러 가지 역경을 딛고 재개되었고, 호남 지방 선교는 이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투철한 사명감이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제1장 호남 최초의 교회를 세우다[1893~1903년]

 
 
 

 

                    제1절 한국과 기독교의 접촉

            ④ 개화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 사업(1893~1903)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그 동안 쇄국정책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기 시작해 같은 해 6월 6일에는 한영(韓英)수호통상조약이, 6월 30일에는 한독(韓獨)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야기되고 난 후, 비록 일본의 침투와 압력 때문이었으나 1884년 6월 26일에는 한이(韓伊)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1886년 6월 4일에는 한불(韓佛)수호조약을 맺게 되는데 특히 이 조약문 속에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프랑스 정부측에서는 천주교 박해 당시에 프랑스 신부의 순교가 있었음을 의식하고 조약문 안에 ‘교회(敎誨)’라는 문구를 의도적으로 삽입해 신앙의 자유를 도모했다는 것인 데 외교에 생소한 조선 관원은 교회(敎誨)라는 문구의 본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조인했던 것 같다. 한국 정부의 본 의도는 그 이후에도 기독교 선교 행위에 대해서는 강경한 억제 의사를 표명한 바가 있었다.

 

  1883년 5월에 미국은 전년에 맺은 수호통상 조약의 비준서를 푸트 (Lueieus H. Foote, 福德) 특사가 가지고 와서 상호 교환하고 미국 공사관을 서울에 설치했다. 초대 주한공사로는 특사로 왔던 푸트가 임명되었다. 한국 정부는 푸트 공사의 외교 관례에 관한 설명과 권유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에 견미사절단 (遣美使節團)을 파견하게 되었는 데, 단장 민영익 (閔泳翊)을 위시해 홍영식 (洪英植)·서광범 (徐光範)·유길준 (兪吉濬) 등 1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들 사절단 일행은 1883년 7월 16일에 제물포(濟物浦, 仁川)를 출항해 1883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륙 횡단 철도편으로 시카고·뉴욕·워싱턴 등지를 순방 여행하는 도중, 하루는 차 안에서 미국 북감리교의 가우처(John E. Goueher)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처음에는 그들을 호기심으로 대했으나, ‘한국의 마게도냐인’ 이라는 이수정의 선교사 초청을 요구한 글을 읽은 바가 있었던지 한국 선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과 교제했고, 후에 뉴욕에 있는 감리교 해외선교본부 (Methodist Mission Bord)에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주장하며 그 당시로는 큰 돈인 2,000달러를 보냈다. 연락을 받은 선교부는 당시 일본에 파송되어 있는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에게 알렸다. 이 지시를 받은 매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8일까지 우리 나라를 방문해 2주간 체류하면서 이미 일본에서부터 알고 있던 개화파 김옥균을 통해서 탄원서를 고종(高宗) 황제에게 품신(稟申)했는데 그 내용은 미국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직접 전도와 선교 사업을 내세우지 않았기에 한국 정부는 이를 허락해 주었다.

 

                          (1) 의사의 신분으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

  미국 북감리교회 가우처 목사가 견미사절단을 만난 후 순발력있게 한국 선교에 관한 일을 시도하였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주재하고 있는 레이드(Gibon Reid)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내와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물색 중이었고 이미 동양에 파송되어 중국 상해에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48)은 친구 핸더슨(Henderson)의 권유로 한국에 갈 것을 지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에서 출생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마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아 1883년 10월 11일에 중국 상해에 와서 임지를 정하려고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1884년 6월 22일 선교부의 한국 파송 허락을 받고 9월 14일 황해를 건너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한 다음, 22일에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입국해 상주하게 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문호를 개방은 했으나 기독교 선교에 대해 아직은 경색(硬塞)되어 있었으므로 입국 신분을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라고 했다. 또한 영국·중국·일본 등 각국 영사관에서 공의 업무를 위촉받아 명실공히 의료 행위를 주무로 하는 의사로서 한국 정부의 묵인 아래 머무르게 되었다.



알렌 의료선교사

  그가 서울에 자리잡은 지 두 달 남짓 되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발해 우정국 피로연에서 개화파의 칼에 찔린 근위대장 민영익(閔泳翊)이 빈사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14명의 한의가 동원되었으나 지혈하지 못하고 있었는 데, 그때 당시 통리아문(統理衙門)의 협판(協辦)인 묄렌도르프(P. G. von M?llendorf, 穆麟德)가 알렌을 주선해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고종 황제와 민비(閔妃)의 총애를 받아 어의(御醫, 侍醫)로 임명받았다. 그후 알렌은 의술로 나라에 크게 이바지했다 해서 정부로부터 세 번이나 훈장을 받았으며, 1885년 7월 19일에는 참판(參判) 벼슬을 받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1885년 2월에 알렌은 병원 설립 허락을 받아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 뒷날 濟衆院으로 개칭)을 설립했는 데,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 사업은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켰으며 복음 선교 사역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나 알렌은 직접 선교 사역에 종사하지는 않았고 또 1887년에는 의료 선교 사역에서도 손을 떼고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직원(서기)으로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의료 선교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1895년 8월에 주한 미국공사관의 정식 직원이 되었고 1897년에는 대리 공사 및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1901년에는 한국 주재 특명 전권대사로까지 승진했다. 정치에 가담한 그는 자연 선교 사역에는 소원(疎遠)해져 동료 선교사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1905년 알렌은 모든 일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났다. 비록 알렌이 처음 입국했을 때 신분을 공사관 공의로 했을지라도 선교사였던 그는 자기 어학 선생 이하영(李夏榮)을 전도했고 자연히 알렌 의사가 선교사란 소문이 나게 되니 고종 황제는 미국 공사 푸트에게 그 여부를 물은 바 알렌은 미국을 위시해 각국 공사관의 공의라고 답변한 바가 있었다.

  이하영의 뒤를 이어 알렌의 어학 선생은 노도사(본명 盧春京)였는 데 그는 알렌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기독교 문답서와 신약 성경 낱권을 발견하여 탐독한 후 알렌과 신앙 문답을 했다. 결국 그는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886년 7월 11일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국내 최초의 기독교 세례 교인이 되었다. 고종의 막중한 신임을 받은 알렌은 한국 정부의 눈총을 의식하고 선교 행위를 극히 신중하게 했으며 직접 선교하는 것을 삼갔다. 그러므로 선교 동역자 간에 오해도 받았다. 1900년 미국인들이 서울에 전차를 부설할 때, 한국인의 재산을 수탈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과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 등이 판단하고 전차 이용을 금지하게 한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일시에 살육하라는 밀령이 내려졌을 때 이 정보를 알게 된 알렌 대리공사는 고종 황제에게 상주해 그들의 목숨을 건지는 귀한 일을 했다. 이렇듯 그는 한국에 들어와서 직접 선교를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한국 선교 초기 선교운동에 큰 뒷받침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


  미국에서는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각성(大覺醒)운동에 의해 해외 선교 열풍이 일어났으며 각 교파에서는 해외 선교부를 두고 선교사 파송에 주력했는 데 이 때 신앙적이고 진취적인 젊은 신학도들 중에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이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또한 1880년에 시작된 전국 신학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은 신학생들의 선교열을 구체적으로 조직화했는데, 언더우드·아펜젤러 및 남장로회에서 파송해 한국 초대 선교사가 된 신학도 등은 전국신학교연맹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1884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의사인 헤론(Heron)과 신학교를 갓 졸업한 언더우드를 선발해서 1884년 7월 28일에 한국에 보낼 선교사로 임명했는 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와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는, 앞서 중국에 파송되었다가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국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알렌의 뒤를 이어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였다.

1885년 4월 5일은 부활 주일이었으며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정식 선교사로서 들어온 날이며, 직접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기선 츠루가마루(敦賀丸)로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이날 제물포(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한국 땅을 밟으면서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사망의 빗장과 무덤의 문을 산산이 깨치신 주여!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 데, 이 말은 아펜젤러가 본국 선교부에 보고한 서신에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정세는 청·일·러·영(淸·日·露·英) 등 열강의 각축이 심해 살벌하고 삼엄한 분위기였으므로 미국공사관에서는 미국 여인이 상륙해 견디어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아펜젤러 부부를 잠정적으로 일본에 되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청·일간의 험한 분위기가 일단 안정되자 그 해 6월 20일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스크랜턴(Mrs. Mary F. Scranton, 施蘭敦의 母親) 여사와 스크랜턴 의사 부인(Mrs. B. Scranton, 施蘭敦)과 더불어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부 총무, 배재 학당의 설립자 및 교장, 연합교회 목사, 성경 번역 위원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02년 6월 12일,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작은 기선으로 항해하던 도중에, 목포 근해에서 선박끼리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선박에 동승한 이화 학당 여학생을 구출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는 “사자처럼 당돌하고 여인처럼 우아하며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열정의 감리교인 아펜젤러는 남을 위해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한편 장로회의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해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881년 뉴욕대학을 마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경영하는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신학교에서 1881∼1884년까지 문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는 신학교 재학 중 인도 선교를 지망했을 뿐만 아니라 의학적인 소양을 쌓기 위해 1년간 병원에서 임상 실습도 했다.

  당시 한국은 1882년 미국 슈펠트(R. W. Schufeldt)52) 제독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한미 통상수호조약이 맺어진 뒤였고 이에 따라 문호가 열리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들로서는 1년 이상이 지나도록 선뜻 한국에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심지어 각 교파 선교 사업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며 어떠한 반응이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언더우드는 인도행을 포기하고 자신이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선교 본부에 청원하였다. 한국 정세에 대한 검토가 끝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드디어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1884년 12월 16일에 한국을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885년 1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기착(寄着)해 같은 해 3월 26일에 일본을 떠날 때까지 동경에서 2개월을 체류하면서, 언더우드는 루미스의 소개로 이수정을 만나 어학 공부를 하고 한국 망명객 중 박영효·김옥균 등과 교제하며 한국 정세를 듣기도 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역시 한국 선교사로 가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합류해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1885년 4월 5일에 세 사람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는 달리 바로 서울에 들어와 알렌이 개설한 광혜원(제중원,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전신)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강의하면서, 알렌 의사의 조수로 일을 도왔다. 또 다음해인 1886년에는 우리말로 직접 전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어학이 숙달되었다. 언더우드는 공식 입국한 장로교회 첫 선교사로서 각 분야에 걸쳐 놀라울 만큼 뚜렷한 업적을 이룩했다. 1886년에 우리 나라 최초로 고아원을 세우고 예수교 학당을 비롯해 연희전문학교 등을 설립했다. 제1차 각 지역 순회 전도를 했고 한편 한국어 문법, 한영자전 등을 저술하며 기독교 문서운동을 위한 예수교성교서회(기독교서회의 전신)를 창설하고 그 기관의 총무 및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하였다. 1889년 3월에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연상의 처녀인 의료선교사 호턴(Lillias Horton)과 결혼한 후 신혼여행 차 제 2차 전도 여행으로 평양·강계·의주와 압록강변에 이르러 그 곳에 사는 33인의 결신자에게 세례를 집례하기도 했다. 1890년에는 부인의 산후 후유증 치료 차 2년 동안 미국에 가 있는 중에도 한국 선교의 시급성을 전하고자 각 지방을 돌며 순회 강연을 했는 데 이것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는 데 촉매 역할이 되었다. 호남 지방에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오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적극적인 수고의 열매였다.

  1892년에 한국에 다시 들어와 전도·교육·문서 운동 등에 온 힘을 기울였고 1897년에는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해서 1901년까지 속간하며 교계에 새로운 지식과 영적 교양을 제공했다. 1900년에는 기독청년회를 조직·협력했고 특히 교육 사업으로 감리교의 에비슨(O. R. Avison)과 연합해 연희학원을 설립했으며,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 이듬해 과로로 몸져눕게 되자 미국으로 치료를 위해 돌아갔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전개한 지 31년째 되는 1918년 10월 12일에 별세했다.

  그는 1887년 9월 새문안 교회를 창립하고 1907년에는 조선 장로교 독노회 창립 멤버로 일했으며,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설에 힘써 다음 해에는 총회장에 피선되어 시무하는 등 실로 기독교의 대내 대외적인 활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신학자로서 위치가 뚜렷했고 저술가로서 『성교 섭리(聖敎攝理)』를 비롯해, 『초기 한국 선교사(初期韓國宣敎史, The Call of Korea)』와 『아시아 종교연구서(The Religion of East Asia)』를 간행했으며, 초대 선교사들이 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상제(上帝)·천주(天主)·신(神)·여호와 등으로 사용하던 것을 최종적으로 합의를 이루어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평양 장로회 신학교와 피어선 성경 학원 등 신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데 협력했으며 성경 번역 사업에도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우리 나라 최초의 찬송가인 『찬양가』 역시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의 한국 기독교 선교 사업에 관한 모든 업적은 후대의 신앙과 장로 교회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by 전주서문교회

 

 

 


 

                       제2절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의 입국과 호남선교

 

                                        ①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의 입국

 

 

  미국 북장로교는 언더우드 이후에 의사 헤론(John W. Heron, 惠論)·앨러스(Annie J.Ellers)·하이든(Mary E. Hayden)·도티(S. A. Doty)·기퍼드(D.L.Gifford, 奇包)·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 등의 선교사를 속속 파송했다.

 

 북감리회에서도 스크랜턴 일가(Mary & W. B. Scranton)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해 들어왔다.

 

 미 북장로회와 미 북감리회에 뒤이어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데이비스 남매(J. Henry Davis & Miss M. T. Davis)가 1889년 10월에 내한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전도 여행 도중 천연두와 급성 폐렴으로 1890년 4월 15일에 부산에서 별세했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한국 선교에 더 한층 관심을 두고 여러 선교사들을 차례로 보내어, 부산과 경남 일대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본국에 들어갔을 때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상황 보고와 강연을 했는 데, 1891년 9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국 선교에 관해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 신학생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가 감동을 받았다. 또 1891년 10월에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개최된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주최의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반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尹致昊)를 강사로 초청해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한국의 현재 정세와 장래에 대해서 문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벅찬 감격으로 강연을 들은 맥코믹 신학교의 테이트와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 존슨(Cameron Johnson)·레이널즈(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全緯廉) 등 네 사람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테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미 남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다른 세 사람도 이어서 지원했다. 그러나 남장로회 외지 선교부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알려진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아직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결속해 한국 선교에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Miss Mattie S. Tate, Miss Linnie Davis. Mrs. Potsy Bolling)과 전킨의 새 신부인 레이번(Mary Leyburn) 등이 동참·가세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선교 본부를 깨우치는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미국 남장로회의 지역인 버지니아 주, 북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 등에 있는 주요 교회들을 순방해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언더우드는 쾌히 승낙하고 각 지역의 교회는 물론 각 신학교, 노회, 교계의 각종 집회 등에 나가서, 한국의 현황을 설명하고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그들의 열성은 더욱 높아져 교회 잡지에도 한국 선교에 관한 논문을 투고하며 1892년 2월에는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실어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인가, 아닌가’의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매일 오후 3시를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기숙사의 방문을 닫고 마음을 같이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들은 2년 안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합심 기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언더우드의 형으로서 사업가이고, 미 북장로회 선교 위원인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장로가 해외 선교 자금이 부족해 고민중인 남장로회 선교부에 3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자신도 5백 달러를 보태어 보냄으로써 남장로회 선교부는 용기를 얻고, 때마침 그리스 선교 방침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 ‘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승낙 전보를 보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형제는 북장로회인이었음에도,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위해 교단을 초월해 자진해서 도왔다. 그래서 초대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를 ‘남장로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 3명의 남선교사와, 이미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을 한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 등, 모두 7명의 선교사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일컫게 되었다.

 

 당초에 한국 선교에 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함께 기도했던 선교 동지인 존슨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국 선교사로 오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7인의 선발대보다 한 달 먼저 개인적으로 서울에 와서 모든 정세를 살피고 귀국한 후, 때때로 동지들의 한국 선교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문서 저술 활동으로 뒷바라지를 했으므로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

  7인의 선발대 중 남자인 테이트·레이널즈·전킨 등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아 선교사로서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1892년 9월 7일 미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에서 주관하는 한국 선교사 파송 예배를 드리고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들의 샌프란시스코 출항은 각자 날짜가 달랐다.

 


  전킨 선교사는 후두염 치료 관계로 덴버에서 약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고, 레이널즈 선교사 부부는 전킨 부부를 기다리다가 뒤늦게 미국을 떠나게 되었다



7인의 선발대

 

 

 데이비스 양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양과 일행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오는데, 마침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이자윤 서기관의 부인인 이씨가 함께 승선해 장기간의 항해를 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두 여인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일본 요코하마에 들른 테이트 남매와는 달리, 데이비스 양과 이씨 부인은 곧바로 한국으로 오게 되어,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러므로 미남장로회 선교사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한 사람은 여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 양이었다.


1885년 당시의 제물포항 모습

  한편 테이트 선교사와 매티 양은 일본에서 레이널즈와 전킨 선교사 부부의 일본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미북장로회 선교사로서 일영사전(日英辭典) 편찬과 성경 번역 사업에 공로가 있는 은퇴 선교사인 헵번(Hepburn)을 만나, 여러가지 지식을 얻고 그에게서 언더우드가 편찬한 한국어 문법책과 영한사전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이들 일행 6인의 선교사들은 같은 해 11월 3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그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는 데, 이미 한국에 와있던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 馬布三悅)·그레이엄 리(Graham Lee, 李吉咸)·빈턴(Dr. Vinton) 등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7인의 선교사 일행은 모두 무사히 새로운 선교지 한국에 도착했고, 또 장차 이들 개척 선교사들을 통해 호남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by:http://www.i-seomoon.or.kr/his_1893_ser/his1-2-1.htm

 

 

 



 

                                   ②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조직과 선교정책 수립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에 한국 최초의 개척 선교사로 입국한 후에 각 교단과 교파의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했다. 미국 북장로회는 헤론(John W. Heron), 엘러즈(Annie Ellers), 하이든(Mary E. Hayden), 도티(S. A. Doty), 기퍼드(D. L. Gifford, 奇普),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베어드(W. M. Baird, 裴偉良), 애덤스(James E. Adams) 등이 들어왔고, 북감리교에서는 스크랜턴 일가(Mary & W. B. Scranton), 하워드(Meta Howard), 셔우드(Rosetta Sherwood), 맥길(W. McGill), 홀(W. J. Hall) 등이 잇따라 입국해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을 중점으로 선교에 착수했다.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 선교사와 그의 누이 데이비스 양(Miss M. T. Davis)이 1889년 10월에 입국했는 데, 그들의 내한 연유는 영국 성공회 중국 주재 선교사인 월프(J. R. Wolf)가 1885년과 1887년의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부산 지방을 방문해 돌아 본 후 오스트레일리아에 한국 선교에 관한 호소의 편지를 보낸 결과, 장로회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위의 데이비스 남매를 파송하게 되었다. 경남 지방 전도 여행 중 데이비스 목사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에 걸려 1890년 4월 15일 애석하게도 부산에서 별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호주 장로회는 한국 선교에 관심이 더욱 높아져서 매케이(J. H. Mackay) 부부, 멘지즈(B. Menzies), 포셋(M. Fawcett), 페리(Jean Perry) 등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들은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890년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코르프(C. John Corfe) 감독이 내한하고 이어서 트롤로프(M. W. Trollope) 신부, 와너(L. O. Warner) 신부, 그리고 와일스(J. Wiles)와 랜디스(E. B. Landies) 두 의사가 입국해 서울과 인천에서 의료 사업과 전도 사업을 개시했다. 1889년에 캐나다 침례교회의 독립 선교사인 펜윅(Maleolm Fenwick)과 Y.M.C.A의 선교사 게일(J. S. Gale)이 들어왔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가 파송한 7인의 개척 선교사 레이널즈·테이트·전킨 등의 일행이 입국했다. 1893년에 캐나다 사람으로서 독립 선교사 자격으로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가 들어왔는 데, 매켄지는 한국 가정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토속적인 선교 사역을 하다가 1895년 5월 일사병으로 신음하고 있다가 정신적 충격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다. 캐나다 장로회에서는 이 소식에 충격을 받고 1898년에 그리어슨 박사 부부(Dr. & Mrs. Robert G.Grierson, 具禮善)와 맥레 목사(D. M. MaeRae, 馬具禮), 푸트 목사 부부(Rev. & Mrs. W. R. Foote, 富斗一) 일행을 한국으로 보냈다.

  1896년에는 미국 남감리회의 레이드(C. E. Reid, 李德) 선교사가, 1907년에는 뒷날 성결교로 맥을 이은 동양 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카우만(C. E. Cowman)과 길보른(E. A. Kilborn, 吉寶崙)이, 1908년에는 영국 구세군의 호가드(Hoggard, 許嘉斗) 정령과 번위크(Bunwick) 부령과 밀턴(Milton) 및 와드(Ward) 엔사인(Ensign-지금은 없어진 구세군의 직위명)이 파견되어 입국했다.

(2)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조직과 선교 정책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입국한 후 앞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얼마동안 그들과 함께 같은 건물 안에서 비좁게 기거하였다. 그러던 중 전에 독일 공사의 저택으로 사용된 서대문 근방에 위치한 한식 기와집 한 채를 1,500달러(당시 3,000원)에 구입해 개조하고 신혼부부인 레이널즈 목사 부부 및 전킨 목사 부부와 독신인 데이비스 양이 거처하였다. 또 그 집 울 안에 집 한 채를 다시 지어서 테이트 남매를 거하게 했다. 그 후로 그 건물은 서울에 있는 남장로회의 선교 센터 구실을 하게 되었다.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중남부 지역 출신으로서 극한 추위가 없는 그곳 기후와는 판이한 서울의 겨울 추위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술한 난방 시설 때문에 화재가 나서 진화하느라 고생하는 등 여러가지 고난을 겪으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먼저 한국에 온 만큼 우선 중국의 네비우스 선교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가졌고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도입해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수립한 바 있었는 데, 1892년 가을에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내한하자 연합하여 선교사 공의회(宣敎師公議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교 기구의 조직에 관해 1928년판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에는 1893년부터 1900년까지를 선교사 공의회 시대로 구분하고 장차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완전하게 성립될 때까지 전권치리(專權治理)를 담당하는 공의회로서 그 이름을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ment)라고 기록했다. 이에 앞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호주 선교부 사이에 미션연합공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미국 남북장로회 선교부 간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었는 데 이에 대해 『조선장로교회사전휘집』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공의회의 설립 목적은 위에 소개한 내용과 같이 한국에서의 개신교(갱정교회, Protestant)의 신경(信經)을 제정하는 일과 교회는 각 선교회가 각기 세우되 연합해 하나의 장로교회(조선예수교장로교회)로 설립하는 일이었다.
  이 공의회는 소속미션회(남, 북 미션회)에 대해 치리권은 없고 권고권만 있으며, 장로회 통상 규칙대로 노회(老會)가 조직될 때까지는 전국 교회에 대해 치리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임을 인정했다. 특히 이 공의회에서는 초대 회장이 된 레이널즈 목사가 제안한 선교지구 분할안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선교하기로 하고 북장로회는 평안도, 황해도, 서울과 경기도와 낙동강 이북의 경상도를 맡고, 호주 장로회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이남의 경상도를 맡고 부산과 그 부근은 이미 선교에 착수한 선교회들의 공동 선교 지역으로 했으며, 기타 지역에서는 그 동안 선교를 담당해 온 그대로 선교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것은 선교 사업의 중복과 지역의 이중 점거 등 불필요한 경쟁을 서로 피하고 능률적인 선교를 실시하기 위해 예양협정(禮讓協定,CommityAgreements)을 이룬 것이다.

한국선교구역분할도,1928년당시

  또한 이 공의회에서는 북장로회 선교회에서 이미 정한 바 있는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더욱 보완해 연합된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로서의 선교 정책을 수립했는 데, 이 정책은 자치(自治, Self-Government),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자립(自立, Self-Support)을 기본 바탕으로 삼았음을 볼 수 있다. 그 열 가지의 선교정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선교의 대상은 상류계층보다는 근로계층을 우선적으로 한다.
  2. 2세 교육은 부인들의 영향이 크므로 부녀전도와 소년들을 교육하는
    데 주력한다.
  3. 군소재지에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교사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4. 장차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이와같은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서 배출되도록 한다.
  5. 사람을 변화시켜 회개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성경 번역이 가장 긴요하다.
  6. 모든 기독교 서적과 출판물은 한글을 전용해야 한다.
  7. 발전적인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이다. 선교사의 도움은 가급적
    줄이고 자립하기 위해 헌금하는 교인이 늘어나도록 한다.
  8. 한국의 대중들은 한국 사람의 전도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대중에게 설교하는 일보다는 한국인
     전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9. 의료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사귀고 친밀할 때 더욱 효과적인
     전도를 할 수 있다. 즉 성경을 가르칠 기회도 얻게 된다.
     의사는 모범이 되어야 하며 환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 의술적인 치료만으로는 전도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
  10. 지방에서 입원해 장기간 치료받고 퇴원해 귀가한 환자들에게
     그 주소지로 심방해 퇴원 후의 상황을 돌보며 병원에서 베푼 온정을
    계속함으로써 전도의 아름다운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상의 선교 정책에서는 선교의 주 대상을 가톨릭 초기와는 달리 상류층보다는 노동자나 서민계층 및 부녀자층으로 했고, 효과적인 선교 방법으로는 의료와 교육을 들었다. 기독교 교육의 효과를 중시하고 미래 교역자 양성을 위해 지방 군마다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했다. 레이널즈 선교사의 ‘현지 교역자 양성책(The native ministry)’이란 글에서도 한국 교역자의 지적 수준을 일반 평신도보다 높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초대의 교역자들은 자신의 지식 수준도 높여야 하지만 교회 안에 초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또 이 선교 정책에서 강조된 것은 성경의 정확한 우리말 번역과 문서 전도사업에서 한글 전용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결과를 낳게 했다. 이 두 정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한글로써 민족 문화의 문자화 정립에 뚜렷한 공헌을 하였으며, 한글 전용 주장은 우리 사상 표현을 정착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선교사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 한국인 평신도들의 성경의 바른 번역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초기 성경(로스 번역 성경)에 쓰인 용어는 평안도 사투리 발음이 너무도 강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상의 열 가지 정책을 입안해 실천한 장로교에서는 그 효과가 놀랍게 나타났다. 이로써 초기 한국 선교는 물론, 후기 교회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민중 저변에 그 사상이 침투되어 성경 말씀에 입각해 자주적 토착 교회를 지향하였음을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3) 한국에서의 네비우스 선교 방법 적용

    초창기 한국 선교에 뛰어든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20대의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젊은 나이로 아직 선교의 경험이 없었고 목회 연륜도 부족했고 언어가 미숙해 의사소통이 어려웠으며 한국 실정에 어두워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많은 곤란을 당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이 미국 북장로회에서 중국으로 파송되어 산동성 치프에 본거지를 두고 30년 이상을 선교에 종사해 『선교교회의 설립과 발전(The Plann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을 저술했으며, 동양 선교에 노련했던 네비우스(John L. Nevius) 선교사 부부를 한국에 와 있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1890년 6월에 서울로 초청해 2주 동안 체류하게 하며 수차례 신중하고 경건한 모임을 가진 후 선교에 관해 연구와 토의를 거쳐 일련의 선교 정책을 채택했다. 이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론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 지침이 되었다. 그 내용은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郭安連) 목사의 저서 『한국 교회와 네비우스 방법(The Korean Church and Nevius Methods)』에서 밝히고 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를 요약해 다음과 같이 4개 조항으로 정리했다.

  1. 그리스도인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손으로 생계를 꾸려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말씀을 통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2. 교회의 조직이나 교회적인 방법은 한국인 교회가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발전되어야 한다.
  3. 교회가 전담 교역자를 택할 때는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해야 하고
    교회는 그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4. 교회 건물(예배당)은 한국 전통적 양식을 따라 짓되 한국인들이
    재정을 담당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하게 한다.

  이것은 자립, 자치, 자전의 선교 방법으로 자립(自立)은 한국인 스스로가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것이고, 자치(自治)는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관리한다는 것이며, 자전(自傳)은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선교 정책은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을 건축하며 그 경제적 부담이나 운영 등을 도맡아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감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사실 중국보다는 한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사 중 곽안련(C. A. Clark)과 배위량(W. M. Baird)은 한국 교회의 급성장과 선교의 성공은 바로 네비우스 선교 방법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자립 선교의 기치를 든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한국 선교 초기부터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로써 성공한 곳이 선천(宣川)지역 등 여러 곳이 있으며, 외국 선교회로부터 한 푼의 보조도 받지 않고 교회 운영과 전도와 학교 운영을 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80%의 교회가 자립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스코트(W. Scott, 徐高道)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놀라운 교회 성장을 가져왔으나 다음과 같은 부작용도 있었다고 지적했는 데, ‘자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 안에 계급 조직이 생기고, 이 조직의 중진들이 교만한 사고에서 교회를 좌우하게 되었고, 교회 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에 이르게 되었다. 또 자립, 즉 자급운영을 지나치게 강조해 교회 재정은 교회 조직을 운영하는 데 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복지나 구제 등을 위해서는 재정을 거의 쓰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네비우스 방법에서 자극을 받은 선교사들은, 점차 확대되어 가는 선교 활동에서 교단적인 배경이 서로 다른 관계로 선교 지역의 중복으로 인한 교파간의 경쟁 의식을 피하고 경제적인 소모를 막고 효율적인 선교 활동을 도모하기 위해서 선교사 협의 기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와의 사이에 선교사 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North) and Victorian(Australian) Churches]를 조직했다. 그러나 3∼4차의 월례회를 가진 후 서기 역할을 담당한 호주 장로회 선교사 데이비스가 1890년 봄에 갑자기 병으로 별세하자 회의는 중단상태가 되었으며 유야무야 되어 버렸고, 1892년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자 장로회 치리체제(長老會治理體制)를 가지는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ment)가 1893년 1월 28일에 조직되었다.   

 

 

                                        ③ 전주교회의 창립

  한국에 선교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호남 땅을 밟은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에서 파송을 받고 온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1889년 서울에서 선교지인 부산으로 향해 가던 도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경유하였다.

 

 이후 1892년 말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레이널즈와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 마펫이 선교 지역 책정 문제를 앞에 두고 호남의 초입인 충남 공주 지방까지 말을 타고 답사한 일이 있었다.

 

 그후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미션공의회에서는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에 의해 선교지역을 배정했는 데, 호남 지방인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선교 지역으로 지정(指定)했다.

 

 그리하여 남장로회 선교회는 앞으로 자기들이 선교를 할 호남 지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준비 과정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현지 답사와 선교 중심지역 지정 등에 관해 숙의했다.




미호남 최초의 은송리 예배당(현 동완산동)


  그 당시 호남에는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으로 민심이 흉흉했고, 선교사들은 민심의 동향과 지역 사정에 밝지 못했다. 이에 미국 공사관의 만류로, 자기들이 나서기보다는 우선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을 선임해 파송하기로 했다. 그들은 파송 인물 선정이 현지 선교 사업의 개시(開始)인 만큼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남장로회 7인의 선발대는 한국에 도착해 이미 수개월을 지내면서 먼저 조선말 배우기에 열성을 가지는 한편, 복음 전도에도 노력을 기울이면서 많은 한국인과 접촉했다. 그래서 전주에 처음으로 파송하는 인물은 상당한 식견이 있어 의사 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쁨으로 영접한 신앙인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금전을 맡겨도 될 만한 인격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 정해원(鄭海元)을 적임자로 선정

 

 그들은 숙고 끝에 레이널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자신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적임자로 선정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우선 자기의 선교 경비 중에서 정씨에게 전주에 가서 집을 구입할 경비와 여비 등을 마련해 주며, 여행길에 타고 갈 당나귀를 10냥(미화 5달러 상당)에 구입해 주었다.


  정씨는 아마도 1893년 늦은 봄에 5∼6일 걸려서 전주에 도착한 듯하다. 그가 전주에서 처음 유숙한 곳은, 그 해 9월에 두 사람의 선교사(테이트와 전킨)가 전주에 답사차 왔을 때 정해원의 안내로 묵었던 곳으로, 성밖 서문 곁에 있는 주막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는 성 안에 양인(洋人)의 거주를 금하는 때였으므로 몇 날을 전주 주변을 배회하며 전주의 지세도 참작했다. 변두리라 할지라도 성내 중심지와 가까운 곳이며 성벽을 돌아서 서문 밖 지척에 있는 냇물을 건너 변두리 마을인 은송리(隱松里, 지금의 서부 완산동 지역) 뒷편의 언덕과 벼랑은 있으나 꽤 넓은 마당이





은송리지역 지도,1910년경

있고 행랑채가 딸려 있는 초가집 한 채를 52냥(미화 26달러 상당액)을 주고 정해원이 구입했다. 6월에 집마련을 마치고 이 사실을 서울에 보고했다.

 

  정씨는 자기의 거처를 주막에서 은송리로 옮긴 후, 이웃들에게 일일이인사를 다니며 자기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차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시도했다. 주일이 되면 은송리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생활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신임을 받아 서울에서 전주까지 파송을 받은 사람인만큼, 믿음의 열성이 강했던 초대 교회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 해 9월에 정씨는 자기 가족을 전주로 데려와 은송리 집에서 살면서, 선교사가 지급하는 적은 보수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도 전도와 교회 관리에 열성적으로 책임을 다했다. 그의 사역을 돌이켜보면, 초기 전주 교회의 시작 단계에서 그의 노력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혀 일반화되지 못한 암울한 사회에서, 더구나 척외(斥外)사상이 팽배하던 전주 토반(土班)의 의식구조와 배타심이 강렬한 동학교도의 주창이 보편화되어 있는 이 지역 서민층을 상대로, 천주교로 오인받는 기독교 전파의 개시는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또 교리를 풀어 가르치는 일까지 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찾아온 뒤에는 그들의 짧은 우리말 전도에 보충 설명을 하면서 결신자를 얻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그는 조사(助事)라는 명칭을 가진 바 없었으나, 훌륭한 조사(Helper)의 역할을 담당했다. 가족과 더불어 약 1년간의 어려운 생활을 하며 1894년 늦은 봄까지 지탱해 오다가, 부인의 생활고 호소로 정해원은 선교사에게 사임할 것을 제의했다. 선교사(최의덕)는 한 가정의 최소한의 생계 유지책을 세워 주지 못하면서도 그가 떠나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경제 관념이 한국인의 관념과 달랐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보조를 받는 만큼의 부분적 활동을 생각했으나, 정씨는 삶 전체를 바쳐서 일했으므로 다른 방법으로 생계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경제 관념의 차이 때문에, 선교사들과 그를 돕던 조사들 간에는 이런 일들이 그 뒤로도 종종 발생하였다. 정해원 씨는 선교사들이 서울에 주재하고 있을 때에도 이 고장에서 열심으로 개인 전도와 교리 공부를 시켜왔다.

 

 1894년 이른 봄에 레이널즈 선교사 일행이 전주에 들렀을 때, 세례를 받기 원하는 수삼인이 있어 교리에 대해서 문답해 보니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정해원이 아주 잘 가르친 것을 인정한 바가 있었다. 이같이 훌륭하게 훈련된 일꾼이 전주를 떠난 후, 전주 지방 선교는 동학 농민군의 난리가 겹쳐서 신자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 다 흩어지고 1년 이상 공백기를 가졌었다.

 

                                 (2) 전주 교회의 성립과 첫 세례 교인 탄생

  1897년 7월 15일 목요일에 전주 선교 역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 받기를 원하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이 세례 문답을 하려고 교회로 나왔다. 문답 결과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문답에 훌륭하게 합격하였다. 남자 한 사람은 전씨였고, 또 한 사람은 테이트의 사환인 김내윤(金乃允)이었다. 여자는 함성칠 씨의 부인 되는 임씨였고, 또 한 사람은 김제원(金濟元) 씨의 부인인 진주 강씨(김창국의 모친)이며, 또 한 사람은 유성안(柳聖安) 씨의 부인 김씨였다(김씨는 세례를 받은 후 여성에게도 이름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김성희로 불렀다. 그는 남편이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모진 학대와 고문을 가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여걸이었다.).

 

 앞의 다섯 사람이 세례 문답에 합격한 후 그 다음날인 7월 16일 금요일에는 여성 중 합격한 진주 강씨의 열세 살 되는 아들(김덕화, 후에 昶國으로 개명함)이 자기도 세례 문답을 하겠다고 교회에 나와 레이널즈와 다른 선교사들 앞에서 문답을 한 결과 훌륭하게 합격을 했다.

 

 1897년 7월 17일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남자 2명과 여자 3명(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 교회(교회 명칭)’가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전주는 호남 지방의 다른 곳보다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았고 전도를 받은 분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예배를 드렸으나, 세례를 베푸는 일은 군산 지방보다 1년이나 뒤늦게 이루어졌다.

 

 군산에서는 1896년 7월 20일 전킨 목사와 드루 의사가 개척 선교를 할 때, 세례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두 사람(김봉래-金蓬來, 송영도-宋永道)에게 세례 문답을 하고, 전킨 사택에서 전킨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식을 거행했다. 그러므로 호남 지방 최초의 세례 교인은 이 두 사람이다.

 

 이에 앞서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1893년 이후 1895년 이전에 두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일이 있었다.

 

  1897년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 교회에서 처음으로




최초의 세례교인(김성희,김창국)



교우세례문답책 내용. 1910~1950년까지의
세례문답 내용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있고 성찬 예식을 레이널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했다.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성찬 예식직전에 있던 7월 15일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시골에서 멀리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는 명예스런 전주 교회의 처음 수세자 명단에는 빠지게 되었으나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예했다.

 

 또 특기할 일은 그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을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은 일이다. 이로써 그 아이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된 것이다. 그 당시 자기 한 사람만은 주위의 눈총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의지로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으나, 이곳 토반으로 유교 사상에 찌든 남편 유성안(柳聖安)의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반대 가운데서도 자기 아이를 유아 세례를 받게 했다는 것은 김씨(金聖喜)의 열렬한 신앙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확실한 믿음으로 자녀들을 차례로 유아 세례를 받게 했고, 성경 교육을 받게 하려고 기독교 학교인 신흥·기전에 차례로 입학시켰다.

 

                             (3) 전주 예배당의 확장과 터전 이전

  이 무렵(1897년 9월)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전주 선교부는 발전되어 갔다.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널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 할 것을 작정했으므로,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이 살고 있으며 예배 처소로 겸하고 있는 집(1893년 6월 구입했던 은송리의 집)을 앞으로는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했다. 마루는 물론 부엌까지도 교인들이 앉을 수 있는 방으로 넓혔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를 교인들이 힘써 연보하여 충당하였다.

 

 수리를 마친 다음 9월 18일(토요일)에는 예배당 건물의 둘레에 울타리를 쳤고, 다음날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 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 가량이 출석했다.

 

  1897년에는 또 한 가지 선교부 경영상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선교사들의 사택과 선교부 복합 건물이 들어설 기지를 미화 1,500달러에 구입해 은송리 옆 완산(完山) 지맥(支脈)자락의 언덕에 두 채의 건물을 건축하고 있었는 데, 기독교의 전도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입방아로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전주 관아에서는 건축 진행에 트집을 잡았고 전라감사 이완용(李完用)은 건축 금지를 명령하였다.

 

 건축 금지의 이유는 완산이 전주의 주산(主山)일 뿐 아니라 이씨 왕조(李王家) 전주 이씨의 시조 신라 사공(新羅 司空) 한(翰)의 발상지요 중시조 목조 안사(穆祖 安社)의 본향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므로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아무나 이 지역에 임의로 건축할 수도 없고 토지를 매매할 수도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선교부 건설은 벽에 부딪쳤고, 선교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주한 미국 공사관을 통해 조정(정부)과 협의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한 결과, 일단 선교사들이 구입했던 땅은 ‘이왕가 소유’라는 명칭으로 환원하기로 하고, 선교부 기지의 위치를 완산에서 서북편인 화산(華山)으로 옮겨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임의 사용하도록 하며, 완산에 건축했던 건물 대신 세 채를 이전해 지을 수 있는 보상금을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협상을 보았다.

 

 이로써 완산에 자리잡으려고 하던 선교부는 현재 엠마오 사랑 병원이 있는 곳(구, 예수병원 자리)의 등성이에서부터 서북편 일대로 뻗은 야산을 지나 현재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등이 있는 곳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화산(현 중화산동)으로 옮긴 선교사촌


  이는 오늘에 와서 보면 말할 수 없는 전화 위복의 은혜의 섭리였다. 이 넓은 지역 야산의 곳곳에는 한국 사람들이 옛부터 기피하는 시체들을 암매장하는 흉측한 투장들이 산재한 지대이므로 관아의 관리들과 유생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순순히 내어 주었지만, 오늘에 와서 이 지대를 재래 지관의 오행설(五行說)에 의한 것이나 혹은 전주(全州)를 떠나가는 배의 형상(蒼波行舟之形)으로 보는 것 등의 사설은 차치하고, 현대적 안목으로 지형을 관찰해 보아도 전주성 4대문을 비롯해 부중 복판과 주위를 한눈으로 모두 볼 수 있고, 동편 오목대 위에서 기린봉(麒麟峯)을 연결하는 산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전주성 서편의 유연대(油然臺)를 배경으로, 오른편의 다가산과 왼편의 사직단(社稷壇)을 좌우로 거느리고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 사뭇 전주를 포옹하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어, 명당의 지세(地勢)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선교부 자리를 옮김에 따라 ,전주의 초기 교회 자리도 은송리의 선교부에서 바로 보이는 전주성 서문 옆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주 서문 예배당 터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④ 개신교의 호남선교

 


                       (1) 테이트, 전킨 선교사의 전주 방문과 선교 시도

  정해원의 은송리 집 마련에 대한 보고를 받고 미국 선교사로서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핀 후, 1893년 9월 한국에 온 지 약 11개월이 지나서 테이트와 전킨 선교사는 통역할 어학선생과 사환 한 사람을 데리고 전주 지방 답사를 위해 말을 타고 서울에서 전주까지 육로 257km의 장거리 여행길에 올랐다. 첫날 밤부터 유숙하는 여인숙(주막)에서 빈대와 벼룩, 모기 등에게 시달려 밤잠을 설쳤고, 낮에는 9월의 늦장마로 온통 물난리가 나, 냇물이 불어서 사람의 등에 업혀 건너기도 했다. 이때 키가 큰 전킨 선교사는 냇물을 건너다가 실족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가다가, 논에서 일하는 한국인에게 구조를 받기도 했다.

 

             전주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 테이트와 전킨 

 

  일주일을 걸려서 가까스로 전주에 도착해, 선교사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정해원씨를 반갑게 만났다. 은송리에 예비해 두었던 집은 마침 정씨의 부인이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선교사는 부득이 서문 옆에 있는 여인숙에서 유숙해야 했다. 이 두 사람은 전주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였다. 사람들은 큰 무리를 지어 이상하게 생긴 ‘서양사람’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성안과 밖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두 선교사는 이 기회에 책(성경과 기독교서적)을 펼쳐놓고 팔기도 하고 전도도 하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마을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이미 정해원을 통해 은송리에 복음 전파를 위해 집을 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막상 양인(洋人)들이 전주에 오게 되자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떠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마을의 대표 7∼8명이 두 선교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전주에 온 진의를 살피며 평안을 추구하는 뜻을 전달하고 서로의 협조를 바랐다. 또한 그 중 어른 한 사람은 선교사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후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두 선교사는 관아(官衙)에 찾아가서 관찰사를 만나 전주에 온 연유와 여타의 묻는 말에 대해 일일이 해답을 하니 관아에서도 안심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닭 두 마리와 계란 한 꾸러미를 선물로 주었다. 두 선교사는 1891년부터 전주에 와서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를 찾아가 선교에 관해 대화했고 관아와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일에 조언을 받았다.

 

 테이트와 전킨 선교사는 매일 오후에 전주천 냇가에 내려가 정자 등을 구경했는 데, 이 때마다 철모르는 어린이들은 그들에게 야유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꽃 그림이나 전도 카드를 주는 것으로 온화하게 대응하니 아이들은 점차 누그러들어 낯선 외국인과 금세 친해졌다.

 

 이와 같이 전주에서 두 주일을 머문 후에 두 선교사는 서울로 떠났고, 정해원은 그들을 교외까지 멀리 배웅하면서 전주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훌륭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특별 기도를 요청하여 서로 손잡고 기도한 후 작별하였다.

  테이트와 전킨 선교사는 서울에 돌아와서 전주 답사와 선교 여행에 대해 보고하고 앞으로 선교사들이 전주에 정착할 일에 대해 논의했다.

 

 1893년 11월에 테이트 목사는 두 주간의 방문 계획으로 전주에 다시 오게 되었다. 두 번째 여행 때는 산야의 가을 풍경을 감상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전주에 무사히 도착해, 정해원이 살림하고 있는 은송리의 집에 머물렀다. 지난 9월에 처음으로 왔을 때보다는 익숙한 모습으로 장터 전도와 저잣거리 전도를 하였고, 주일에는 유숙하는 처소에 모인 사람들의 예배를 인도했다. 정해원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모든 것이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지난해 9월의 여행이 선교 가능성에 대한 답사 여행이라면, 이번에는 앞으로 선교사들이 내려와서 어떻게 선교하고 정착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여행이었다.




지게로 엽전꾸러미를 운반하는 모습


  이렇게 두 주간의 현지 답사와 전도 활동의 일정을 마치고 테이트 목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그 해(1893년) 12월에 서울에서 모인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제2차 선교 여행을 보고한 후, 전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지나고 1894년 3월 19일(월요일)에 3개월의 여정으로 테이트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매티 테이트(Mattie Tate)가 전주로 향했다. 이때 동행한 이는 테이트의 어학선생, 매티를 도울 전도 부인, 취사와 요리를 담당할 소년, 여섯 명의 가마꾼, 당나귀 세 마리(한 마리에는 짐을 싣고 또 한 마리에는 엽전을 실었다)를 끄는 마부 두 사람 등이다.


  여행 도중 테이트 목사는 당나귀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걷기도 했고 매티 양은 가마를 타고 오게 되었는 데, 그녀는 키가 크고 몸집이 컸기에 좁은 가마 속에 장시간 웅크리고 앉아 오는 일이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사람의 통행이 한적한 곳에서는 가마 밖으로 나와서 걷기도 했으나 몸과 다리가 굳어져서 곤욕을 치렀다.

 

 이 여행은 엿새가 걸렸다. 3월 24일(토요일) 오후 8시, 어둑할 때에야 비로소 전주에 도착해 은송리의 집에 유숙할 수 있었다.

 

 매티 양은 전주에 온 최초의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금발의 파란 눈이었으며 한국 여인에 비해 거대한 발을 가졌고, 희귀한 옷을 입은 모습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와서 구경하였다. 구경꾼들이 집안과 마당, 길에까지 꽉 차서 마침내는 대문을 부수어 버릴 지경이었다. 방 안에도 염치없이 들어오고 문이 닫혔을 때는 문틈이나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기까지 하며 결혼 초야의 신방을 엿보는 것과 같은 진풍경을 자아냈다. 그들은 개인의 사적 생활 존중에 전혀 무관심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의전도여행에 동원된 말, 당나귀,가마,지게



선교사들의 전도여행에 이용된 자동차(1930년대)



드루 선교사


  그 때 함께 데리고 온 전도 부인 여씨는 구경차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소개하고 자기들 일행이 전주에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며 적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였다. 전도 부인 여씨는 당초 예정한 대로 두 주간을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매티 양은 그대로 남아서 예상치 못한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또 매일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수백 명의 구경꾼들에게 시달리면서 계속 복음을 전하고자 애썼다. 이 과정은 그녀가 한국말을 배우고 실습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해원은 테이트 남매가 1894년 3월에 전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복음전도와 성경 교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꾸준히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전도를 받고 믿기로 결심한 네 명의 남자는 테이트 목사가 전주에 도착했을 때 바로 만나러 왔고, 또 다음날인 주일에는 다섯 명 내지 여덟 명이 그곳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 목사가 5월말 경까지 전주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주일이 아닌 주중에도 찾아

와서 ‘예수 교리(The Jesus doctrine)’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배우는 12명의 남자교인이 있었다. 그 중의 여섯 사람이 세례 받기를 청원했는데, 테이트 목사는 세 명 정도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레이널즈 선교사와 내한한 지 얼마 안 된 남장로회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드루(A. Damer Drew, 柳大模) 의사는 호남 지방 답사 여행 도중 3월 31일에서 4월 5일까지 전주에 들러 머물렀다. 그 때에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전주에 집 한 채를 월 열냥(미화 5달러 상당)에 임차하기로 결정했다. 선교사들의 앞으로의 거처를 위한 비용으로 400냥(미화 200달러 상당)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서북편 언덕 너머에 있는 집을 추가로 구입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 새로운 집과 터가 구입될 때까지 테이트 목사 남매는 10냥을 주고 셋집에서 살기로 했다. 몇 주가 걸려서 높은 언덕 기슭과 측면에 있는 건물 두 채를 확보하게 되었다.




1894년 무렵 선교에 이용된 돛단배


               (2) 레이널즈 선교사의 호남 지방 선교 답사

  남장로회 7인의 개척 선발대 가운데 정책가이면서 리더격인 레이널즈는 의사 드루와 함께 어학선생인 서씨와 요리 담당 옥선이를 대동하고 1894년 3월 27일에 서울을 출발해 제물포(濟物浦, 仁川)에서 선편으로 3월 30일 새벽에 군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군산이 제물포와 선편으로 교통할 수 있는 편리한 항구임을 알고, 군산이 앞으로 호남 선교의 유망한 지점이 될 것으로 여겼다. 다시 육로로 임피(臨陂)를 경유해 3월 31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에는 자기들보다 일주일 전에 육로로 도착한 테이트 남매가 미리 와 있어 반갑게 만났다. 우선 은송리 집에 짐을 내리고 둘러보니 전라감영(全羅監營)이 소재한 성 안에서 아주 가까운 곳, 산수가 수려한 곳에 정해원이 자리를 잡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또한 정해원의 인도로 테이트에게 성경 교리를 배우는 남자들이 여러 명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다음날 주일 예배에 여러 사람이 참석한 것을 보고 레이널즈 일행은 마음이 아주 흐뭇했다. 더욱이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 중에서 박씨라는 분은 레이널즈에게 자꾸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해와서 그에게 믿음의 도리에 대해 몇 가지를 질문하니 놀랍게도 복음에 관한 기본 교리를 잘 알고 있었다. 레이널즈는 기뻐하며 이는 필시 정해원이 전주에 와서 사람들을 잘 지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전주의 지리와 모든 정황을 두루 살펴본 후 레이널즈는 그의 일기에 “전주는 선교의 앞날이 매우 유망하다.”라고 기록했다.

 

  선교 기지의 개설에 대한 5일간의 답사를 마친 후 전주를 출발해 김제(金堤)·정읍(井邑)·흥덕(興德)·고창(高敞) 등지를 경유해 16일 밤에는 영광(靈光)에 도착했고, 17일에 함평(咸平)을 거쳐 18일 무안(務安)·목포(木浦)에 도착했다. 목포 선창에서 하역을 하는 많은 미곡 상인들을 만나서 전도를 하던 중 서울에서 언더우드의 복음 전도를 받았다는 청년을 만나기도 했다. 장차 선교 기지의 후보지로서 목포의 상황을 살펴보며 며칠을 지내다가 4월 23일에는 우수영(右水營)을 거쳐서 진도(珍島)에 도착했고, 24일에는 진도에서 선편으로 완도(莞島)와 신지도(薪智島)에, 28일에는 녹동(鹿洞)을 거쳐서 흥양(興陽, 高興)에 도착했다. 30일에는 벌교(伐橋)를 거쳐서 순천(順天)에 도착했다. 5월 1일에는 좌수영(左水營, 麗水)에 도착하고 2일에는 남해(南海)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으로 몇 날을 지체하다가 5일에 다시 출발해 7일에는 부산(釜山)에 도착했다. 출발할 배편이 없었던 관계로 며칠을 부산에서 지체하다가 다음 선편으로 제물포로 가서 12일에서야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번 여행길에서 고창과 영광, 함평 등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만났지만, 흉흉한 민심 가운데서도 레이널즈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의 자립·자치의 방침과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유지하면서 그들과 직접 맞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그때의 호남 답사여행으로 전라도 땅에 남장로회 개척 선발대로서는 처음으로 복음을 여러 지방에 전하게 되는 귀한 역사를 이루었다.

 

  1894년 3월 27일부터 47일 동안 레이널즈 일행은 호남 일대인 전라도 지방의 주요한 곳을 광범위하게 답사하며 시간을 내어 전도했다. 가는 곳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한국 정부가 외세에 밀려 개항은 했으나, 종전의 서교금압(西敎禁押)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복음을 전파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방문 전도는 시도할 수 없었고, 단지 호기심으로 자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이나 숙소에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만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전도 활동을 했다. 김제·정읍·고창 등지를 지나게 된 4월 8일 주일에는 구경꾼조차도 모여들지 않아, 고용한 마부 두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두 선교사 일행은 예배를 드렸다. 구경꾼이 모여들지 않는 까닭을 알아보니, 불과 서너 주일 전에 “천주교를 경계하라”는 내용의 경고 벽보가 이 일대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동학의 척외(斥外)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외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구경꾼과 방문객들이 있었고 두 선교사가 전도하는 일에 대해 관리들이나 양반들의 직접적인 간섭이나 방해는 없었다.

 

  당시 전도 여행에서 레이널즈는 ‘죄와 구원’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자기 영혼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질 것’을 권면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답사 여행은 동학 농민군이 실력 행동을 하기 직전이었으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몇 주간만 늦어졌더라도 외국인 선교사로서는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여행 직후 호남 지방은 동학 농민군의 전란에 휩쓸렸다. 레이널즈와 드루 선교사 일행이 지나간 후 전주에 남아서 선교 사업을 착수했던 테이트 남매 선교사는 약 한 달 남짓만을 전주에 주재할 수 있었다.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부(古阜)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그후 승승장구하며 호남 일대의 각 지방을 점령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양이축출(洋夷逐出, 양놈을 몰아내라)’을 주창했는 데, 이 사상은 민중들에게 신속히 퍼져나갔다. 이에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5월로 접어들자 서울의 미국 공사로부터 “선교사들은 서울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전문이 오고, 또 5월 말을 기해 동학 농민군이 전주를 향해 돌진해 오자 은송리에 자리 잡고 있던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테이트와 매티 두 남매는 당나귀와 가마를 타고 일단 전주를 떠나 군산에 도착해 선편으로 서울로 왔다. 전주는 5월 31일(陰, 甲午, 4月 27日)에 동학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 전란의 상황 중에서도 끝까지 전주에 남아 있으려고 했던 선교사들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담력은 본받을 만한 일이다.

 

 

                                  ⑤ 동학농민전쟁과 기독교

 1890년대 초반부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적 형편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로 인하여 역사상 가장 파란이 거세고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며, 온 국민이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잃게 되는 민족적 비운을 맛보며 통분했던 기간이었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동학도의 주도로 농민 전쟁이 일어나 민심은 흉흉하였고, 따라서 국민의 상류층과 하류층의 알력이 더욱 심각해졌다. 신흥종교인 동학은 지방 농민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기간에 북한 지역을 비롯하여 호남 지역에 새로 들어온 기독교 역시 급속히 전파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좀더 확고하게 국민의 심중에 자리잡혔어야 했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저항은 결과적으로 청국과 일본의 청일전쟁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의 서남부 지방인 호남 지역에서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기독교 선교를 시작해서 막 뿌리를 내리려는 때였는데, 동학의 주도로 농민 전쟁이 일어나 기독교의 새싹을 여지없이 잘라 버렸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는 약 1년 남짓 뒤로 밀리고 동학의 전란이 평정되고도 다시 시작하기에는 매우 민심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기독교 선교에 큰 차질을 준 동학 세력의 영향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1) 기독교에 대한 동학군의 입장

  우리 나라 정부는 개항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깨닫지 못하고 무능과 부패와 타락으로 과도한 재정 지출을 일삼았고 이에 따라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농민의 담세를 가중시켜 징수에 박차를 가했다. 이것은 당시 재래 영농 방식으로 생산량이 답보적이던 농촌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이로써 궁핍과 수탈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불평과 불만이 충천하게 되고 결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더욱이 탐관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학정은 민중들로 하여금 울분을 더하게 했고 백성들은 해결 방안을 찾기에 갈급했던 것이다. 당시는 개신 교회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중 속에 아직 퍼지지 못한 때여서 정신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의 중부와 남부에서 억울한 인민들에게 파고든 사상이 있었는데 이것이 동학(東學)이었다.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경주(慶州) 선비 집안의 사람인 최제우(崔濟愚, 水雲)에 의해 창도된 조선말기의 대표적 신흥종교였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유교의 경전을 통달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세도 정치가 계속되고 정권 다툼으로 인한 알력이 극도에 달하고 있어 양반과 토반호족(土班豪族)들의 횡포가 극심했으므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은 위기에 처해 있고 국민의 정신적 지주(支柱) 역할을 해야 할 유교와 불교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조정은 민중을 이끌어 갈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또한 서학(西學)이라 하여 조정에서 핍박해 오던 천주교가 국민의 마음에 파고들어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재래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천주교는 이질적인 가르침과 행동이기에 그 동안의 전통적인 사고(思考)와는 충돌될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해 새로운 도(道)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입산 수도한 결과 ‘동학(東學)’을 창설하게 되었다.

  동학은 한국 재래의 민간 신앙에 풍수 사상, 유교 윤리, 불교의 각성(覺性), 불성(佛性), 선교의 양기(養氣), 양성(養性) 등이 혼용되어 있고 심지어는 천주교를 반대하면서도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차용하는 등 유·불·선(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이라는 원리를 내세우는 동학은 서학의 대표로 간주되던 기독교 사상과 대립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또 만민 평등의 이상 실현을 주장하면서 능동성이 희박한 유교적 양식을 비판하고 퇴폐한 양반 사회의 질서를 부정하고 봉건적인 것들을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신비적인 부분도 있었다. 13자로 된 ‘본주문(本呪文,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과 8자로 이루어진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 이 주문을 지성으로 외우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 고침을 받으며 영세 무궁한다는 것이다. 양반 및 상민의 계급 차이와 적서(嫡庶)의 신분을 타파한다는 등의 대중적인 주창은 질병이 만연하고 사회적인 불안이 가중되고 있던 당시에 신속하게 받아 들여졌고 전파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경상·전라·충청 등의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조정에서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하며 탄압하기로 하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동학교도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체포·구금하고 이듬해 교주 수운(水雲) 최제우를 사형에 처했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海月)은 태백산·소백산 등지를 전전하며 은밀히 교세를 확장하고 접주(接主) 제도를 확대·개편했다. 각 지방의 접주들이 직임을 분담해 교세를 펴서 1894년에는 동학 농민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동학 창시자 제1대 교주인 최제우가 사형되자 교도들은 교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신원(伸寃)운동을 벌이며 1892년과 1893년에 걸쳐 공주 집회(忠淸, 公州, 1892. 10), 삼례 집회(全羅, 參禮, 1892.11.)를 대대적으로 실시했으며, 1893년 3월에 대궐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訴)를 할 때는 단순한 신원 운동에 그치지 않고 민심에 부응할 수 있는 척왜양(斥倭洋)을 겸해 주장하였다. 그러나 보은 집회(忠淸, 報恩, 1893. 4.)와 금구 집회(全羅, 金溝, 1893. 4.)에서는 대대적으로 척왜양을 앞에 내세웠다. 동학교도들은 일본인과 일본상인들이 침투하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또한 교세의 전파에 대해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반면 서양 종교(천주교와 기독교)가 하등의 구애를 받지 않고 전도를 하고 있음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원래 동학 창시의 내용 중에 ‘교명’을 서학(天主敎, 西學)에 대립해 ‘동학(東學)’이라고 한 바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서학의 범주가 천주교만이 아니라 기독교(개신교)까지도 포함되어, ‘척양(斥洋)’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893년 3월(음력 2월), 복합상소를 하던 때를 전후해 개신교로서는 서울에서 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울의 외국인 학당과 교회 등에 ‘척양(斥洋)’ 내용의 방문(榜文)이 붙었던 사건이다. 1893년 3월 31일(음력 2월 14일) 밤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기퍼드의 학당(학교이름이 언더우드학당 또는 기퍼드학당으로 불렸다)의 문에 “너희는 경천(敬天)이라는 말은 하나 그 실은 패천(悖天)이고 사람을 사랑한다 하나 그것은 미혹하게 하는 도적이라.”는 등의 비방과 민심을 자극하는 ‘예수교배척방문’이 붙어 있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 4월 4일(음력 2월 18일)에는 미국 감리회선교사 존스(G. H. Jones, 趙元時)의 집에 “목사는 퇴거하라.”는 방문(榜文)이 붙여졌다.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등 20여 명이 동학을 봉기하며 작성한
통문으로 주모자를 알 수 없게 둥글게 서명하였다.


   음력 3월 7일(당시 양력 4월 21일)까지 퇴거할 것을 명하는 기한부 퇴거를 명(命)하는 협박문이었다. 이에 당시 미국 변리공사 겸 총영사인 허드(Augustine Heard, 何德)는 한국 조정의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問) 조병직(趙秉稷)을 찾아가 항의했고 조정에서는 외국인 보호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또 4월 6일(음력 2월 20일)에는 프랑스 공관에도 “우리 나라의 국법을 범해 교당을 세우고 포교하는데, 만일 짐을 꾸려서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음)에 우리 당은 당연히 너희 공관에 쳐들어가 초멸하겠다.”라고 하는 방이 붙었고 각국 공관 등에까지 척왜양의 방문이 붙자 일본 변리공사는 불안해서 일본 군함의 증파(增派)를 본국에 상신했고 일본 정부는 4월 14일(음력 2월 28일) 종전에 인천에 정박하고 있는 경비함 외에 일본 군함 1척(八重山丸)을 증파하였다.

  3월 28일(음력 2월 11일) 동학교도들의 복합상소(伏閤上疏)로 인해 서울 인심이 흉흉하게 되자 조선 총리교섭사무로 주재하고 있던 청국의 원세개(袁世凱)는 자기 나라에 군함 파견을 요청해 순양함 ‘내원(來遠)’과 ‘정원(靖遠)’ 2척이 4월 8일(음력 2월 22)에 인천에 입항했다. 한편, 영국 순양함 ‘세븐(Seven)’호가 4월 14일(음력 2월 28일)에 인천에 들어왔다가 영국 총영사 하일러(Water C. Hilier)가 조선의 종주국(宗主國) 행세를 하는 청국의 원세개를 찾아가 조선 재류 영국인들의 신변 안전을 상의했고 곧 원세개의 책임지겠다는 보장 언명을 받고 4월 19일(음력 3월 5일)에 일단 중국으로 이동 출항했다. 미국 역시 경성 주재 미국 공사관의 요청으로 4월 18일(음력 3월 3일)에 군함 1척을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인천으로 입항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4월 17일(음력 3월 2일)에 일본 공사관 건물 벽에 일본인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 방문이 붙었다.

  또 하나 주목할 일은 이 무렵에 호남지방의 동학교도들이 전라감영에 소장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위기 의식과 경계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고 척왜양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전주 근방 삼례에 모인 동학교도 4천여 명은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① 동학에 대한 사도지목(邪道指目)을 시정하고 ② 외국 선교사와 상인을 축출할 것이며 ③ 지방 관아의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등의 3개조를 요구하였다. 이들 문제는 중앙조정에서 처리할 사안(事案)이라는 감사의 답변을 듣게 되었고, 이에 동학 내에서는 교도들 중 20여 명을 총대로 뽑아 3월 31일(음력 2월 14일)에 서울에 올라가 3개조 요구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거동이 불온하다 해서 전원을 포도청에 구금하고 심문하며 죄인으로 다루었다. 특히 기독교가 주목할 일은 위 3개조를 상소하는 내용 중 제2항의 ‘외국선교사의 축출’을 말한 것으로 이는 동학교도가 널리 퍼져 있는 호남 지방에서 앞으로 시작해야 할 개신교 선교 사업은 일반인에게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해 인식시키고 이를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 담대하게 일대일로 접촉해 설득해야 할 것 등에 대한 특별한 각오와 준비가 있어야 했다.

  동학은 그 때의 시대상에 비추어 하나의 신흥 종교로서 교화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들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한 배척 운동과 당시 부패된 정치 행태에 대한 개혁을 주창하는 사상이기도 했다. 여기 서양 배척의 대상에는 서학인 천주교만이 아니라 새로 들어오고 있는 개신교(기독교)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아직 전봉준(全琫準)은 부각되지 않았고 남계천(南啓天)·김낙철(金洛喆)·손화중(孫化仲)·김개남(金開南)·김덕명(金德明) 등이 호남 동학교도의 주축이 되는 지도자였다.

 

                             (2) 동학군의 전주 점령

  1894년(고종 31년)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서 시작된 동학혁명은 한갓 민란(民亂)이라기보다는 정치 개혁을 외치는 농민들이 궐기해 부정과 외세 침투를 규탄하면서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한 것이므로 이를 갑오년(甲午年)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1876년 개항(開港)이래 주로 일본은 경제 침투를 감행해 한국을 시장화하고 쌀을 반출해갔다. 그들이 물가를 자극해 농민들의 생활이 궁색하게 되었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날로 가중되어 농민과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고부(古阜) 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歲米)를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했으며 자기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 건립을 구실삼아 또 1,000여 냥을 농민들에게서 강제로 징수하고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보(萬石洑)를 새로 축조한다며 농민을 강제 동원했고 가을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일삼고 있었다.

  고부 군민은 더 이상 악정을 참을 수 없어 동학의 고부 접주(接主)인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1894년 1월 10일 새벽에 동학교도와 농민들 천여 명이 그간의 악정과 바로잡아야 할 여러가지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 관아에 밀어닥쳤다. 성난 군중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稅穀)을 모두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같은 고부 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전라감사는 군수 조병갑을 파직하고 용안(龍安) 현감 박원조(朴源朝)를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지방 실정을 잘 아는 신임 군수 박원조는 농민의 원성을 바로 듣고 적절하게 조처했고 군중은 일단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해야 할 안핵사(按使) 이용태(李容泰)는 민란의 책임을 일체 동학교도와 농민들에게 전가시키고 민란 선동의 주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피신해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전봉준은 차제(此際)에 관료들의 고질적인 악행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을 결심하고 인근(隣近)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敎祖) 최수운의 신원(伸寃)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니 1894년 3월 하순에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부안 백산(白山)으로 모여 들었는 데 그 수가 일만 명에 이르렀다. 대오를 정비하고 다음과 같은 4대강령(四大綱領)96)으로 거사(擧事)의 대의를 선포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해 제세안민(濟世安民)하게 할 것
  3.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4.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문세도(權門勢道)가를 진멸할 것

  이 소식이 두루 전해지자 탐관들에게 시달리던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고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사기가 충천해진 민중들은 군대를 편성해 태인의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옥문을 부수며 관속들을 응징했다. 한편, 급보를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과 이재섭(李在燮)에게 동학농민군을 섬멸하도록 명하니 이들은 군사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나와서 정읍 황토현(黃土峴)에서 마주쳐 4월 6일에서 7일 새벽까지 싸움이 크게 벌어졌으나 관군은 참패하고 영장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이긴 동학군은 불과 한 달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었다. 연전연승으로 각 지방의 관아를 습격해 옥을 부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으며 원성 있는 토반과 관속에게 딸린 벼슬아치들의 집을 불살랐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全羅兵使)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800의 군사를 파견해 난리를 진압하도록 했다. 동학혁명군은 몰려오는 관군을 장성(長城) 월평리(月坪) 황룡촌(黃龍村)으로 유인해 격전을 벌인 결과 경군(京軍)을 물리쳤다. 전봉준이 이끄는 만여 명의 동학군은 정읍 지방을 거쳐 북상해 전주를 향해가는 중 금구현아(金溝縣衙)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원평(院坪)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꺾어서 모악산(母岳山) 자락의 청도(淸道)를 휘돌아 독배재를 넘어 그대로 진군해 세내(三川)에 도달했다. 그날 밤(4월 26일)을 지내고 다음날 27일(양력 5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전주성 공략을 위해 동학군의 일부를 장꾼으로 위장시켜 전주로 미리 투입시켜 염탐하게 했다. 전라감영(全羅監營)의 관군은 용머리재와 완산에 대치하면서 지원군인 경군만 믿고 자체 경비를 허술히 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이러한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부수고 노도와 같이 입성해 성을 삽시간에 함락시켰다. 전봉준은 대장으로서 유유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전주성 가운데 위치한 선화당(宣化堂)에 위용을 갖추고 자리했다. 동학군은 너무나도 손쉽게 경군이 도망한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성 안에 들이닥친 동학군은 승리에 도취해 거침없이 분탕질하였다. 약탈과 방화와 그동안 받은 억압에 대한 보복이 벌어졌다. 전라감사 김문현과 중영장(中營將) 임태두(林泰斗)와 판관(判官) 민영승(閔永昇) 등은 체통도 잊은 채 자신들 목숨을 구하는 데 급급해 전주성 동문으로 빠져나가 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전봉준의 계략에 말려 500리를 뒤만 쫓고 다닌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은 전주성이 점령당한 4월 27일(양력 5월 31일)에서야 금구에 도착해 전주 감영 함락의 이유를 ‘감영 내의 관속배 중 내응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구차한 변명 보고를 띄웠다. 전라도의 심장부이며 호남 일대의 으뜸가는 도성인 전주성의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전기간을 통한 전투에서 최대의 승리였으며 최후의 승리였다.

  동학농민군의 전주 함락을 전후해 전투 기간 중 천주교에 대해서는 서학(西學)을 뿌리째 뽑겠다고 외쳤으며 이에 전주 지방을 중심으로 이미 상당수 분포되어 있던 천주교 신도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과 위기감에 싸여 있었다. 그 당시 전주 지방 신부들과 서울 주교관 사이에 전보 연락이 잦았는 데 그 내용은 “신도들이 절박한 위험에 처해있음” “신도들이 약탈과 구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음” “신도와 선교사들이 모두 죽음에 직면하고 있음” 등이었다. 또 전주성 탈환을 위해 청나라 원군이 전주에 입성하고 동학교도들이 도주하자 사람들 사이에는 동학교도들이 서양인을 완전히 추방하고 천주교인을 살해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렇게 동학교도와 천주교도는 심각하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군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천주교도의 재물이 약탈당하고, 또 신자가 붙잡히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한 예로 고산(高山)의 죠조(Jozeau Moyse, 趙時夏, 趙得夏) 신부는 전주 지방의 천주교인 구원을 청원코자 서울로 가는 도중 공주(公州) 산 속에서 동학군의 패잔병에게 추격당하였고, 대치하고 있던 청국 군대에 체포되어 억울하게도 동학농민군의 선동을 받은 청국 군인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동학교도는 척양 사상에 상당히 고취되어 있었으므로 ‘천주교도는 서양 침입자의 앞잡이이고 당연히 탄압받아 마땅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선교 초창기 이 지방에서는 천주교나 야소교(耶魚禾敎, 예수교, 개신교)는 한통속으로 구별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유생(儒生)들까지도 같은 의식으로 배척했던 것이다. 그 당시 동학농민군 가운데는 무뢰한들까지 섞여서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피해를 받은 많은 백성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관군을 지원하지도 않은 채 그저 난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그래서 시일이 지나자 여론도 변화되었고 서울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조정과 일반 시민들은 예수교가 천주교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894년 7월에 동학의 재기포(再起包)가 있었을 때 천주교에 대한 경우와는 달리 동학군이 예수교를 직접 공격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분별없이 날뛰는 동학군을 피해 각지에서 선교사들은 서울로 급히 도피했고 교인들도 당황해 산골짜기로 피신하니 예배당은 여지없이 훼파당해 그 모습은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민심의 변화를 깨달은 동학군도 투쟁목표에서 척양의 조항을 빼고 그 동안 주장했던 왜놈과 서양놈은 일반이라는 왜양일체(倭洋一體)에서 일본과 서양은 다르다는 왜양이체(倭洋異體)로 변화되어 동학의 투쟁 목표가 진멸왜이(盡滅倭夷, 왜놈 오랑캐를 진멸하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봉준이 스스로 다짐해 밝혔던 것이다. 1894년 12월 8일, 그가 자기 군영에 내린 교시 내용을 살펴보면, “도는 서로 다르나 척왜, 곧 항일 저항을 위해서는 신교(信敎)가 비록 다를지라도 우리는 합심해 성업(聖業)에 전진할지라.”라고 하여 예수교의 척왜성(斥倭性)이 현저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은 동학난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은 다음에 개신교가 뒤늦게 찾게 된 값진 발전의 기회였다.



순창에서 체포된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는 장면
1894.12.28

  미국 장로회 해외 선교부 총무인 스피어(R.E. Speer)는 말하기를 “동학도들은 기독교를 박멸하거나 서양 선교사들을 추방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교에 강력한 자극을 주고 복음 전파의 새 길을 열어 준 셈이다. 우선, 동학이 봉기했던 바로 그 불만과 불안의 상황이 기독교 메시지 전파에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으며, 동학 봉기가 실패했을 때 그것은 수 많은 민중들로 하여금 더 절실하게 기독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라고 했다. 박해와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발전할 틈을 찾아 확장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우신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와 동학이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데는 공감대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신앙의 뿌리와 믿음의 도리, 열매 맺음의 목표가 확연히 달라 신학적인 혼동을 가져올 수는 없다.

 

                       (3) 전란 이후의 복음 전파

  그동안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으로 동요되었던 민심은 차츰 안정을 되찾고 있었으나 때로는 남은 동학군들이 복음 전도를 방해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동학군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잔당을 체포하는 수사망이 압축되자 궁지에 몰린 동학군들은 ‘야소교인(耶魚禾敎人, 예수교인)’이라고 사칭해 모면을 꾀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아예 마음을 돌이키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길을 찾기도 하는 자들이 있었다.

  당시 군산의 선교사 전킨이 송고(送稿)한 것으로 1896년 9월 24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동학과 비도(匪徒)에게 들어갔다가 살기 위해 도망한 자들이 거짓으로 예수교인이라고 말하며 전주·옥구·임피·함열·만경 등지로 다니며 서양 선교사의 심부름이라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며 토색하는 일이 무수하다. 원래 예수교 사람이야 이런 일은 도무지 없는지라 관찰사와 관원들은 이런 자들을 잡아서 엄히 다스려 달라고 했더라.”라고 했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의 ‘시대의 편의(時代의 便宜)’항에서도 그 당시의 정황과 해석을 살펴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학 농민 전쟁과 청일 전쟁의 막대한 피해가 한편으로는 국민의 자각정신 고취와 기독교 복음 선교를 위해 좋은 여건을 형성해 준 셈이었다. 또한 민중에게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새삼 깨닫고 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3절 역경후에 재개된 호남선교

 

              ① 선교사들의 전주정착과 본격적인 복음전파


                           (1) 선교사들의 전주를 향한 행보

  1894년 갑오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대장 전봉준은 전라도 각 지방 53군현에 집강소(執綱所)라는 일종의 민정 기관을 설치하고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직접 총지휘를 했다. 농민 혁명군이 전주를 점령할 즈음 정부는 이를 진압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원병 3,000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고 전란지로 오게 되었다. 뒤이어 일본군도 자기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동해 인천항으로 7,0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켜 밀어닥쳤다. 양국은 한국에서 자국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야욕으로 이전부터 미묘한 알력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태로 일촉즉발의 험악한 정세를 이루었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농민 혁명군을 하루 속히 해산시켜 화근을 면해보고자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농민군과 휴전 교섭을 제의하도록 했다. 수차 서면으로 문답이 오고간 후 결국은 농민혁명군이 주창한 폐정개혁(弊政改革)의 조건을 수락하고 드디어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농민군은 해산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주가 점령될 무렵인 5월 30일, 극히 불안한 상태에서 전주를 급히 떠나 서울로 가서 난리를 피하고 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전세의 변동을 지켜보며 호남 지방의 선교 재개를 도모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의 전주 점령 기간은 불과 10일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전지역에서는 계속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관아는 제 기능을 찾지 못하고 있어 치안은 매우 혼란했다. 1894년 7월에 드디어 청국과 일본이 충돌한 청일전쟁은 우리 강토에서 시작되었다. 그 해 8월에 일본이 청국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9월에는 청국군이 대거 주둔하고 있던 평양성을 일본군이 점령했고 그 기세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10월에는 중국 본토 대련(大連)이 함락되자 청국은 일본과 화의를 제기하고 1895년 4월 17일에 청일강화조약(淸日講和條約)을 맺었다. 이로써 일단 우리 강토 내에서의 큰 전란은 피하게 되었지만 지방 곳곳에서 의병들의 항거 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전운이 휩싸여 있는 정세의 추이를 지켜보는 중 당초 동학 혁명의 진원지가 되는 전라도 각 지방의 치안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워 휴전이 된 후에도 상당 기간을 두고 실정을 살피고 있었다. 1894년 가을에서야 테이트 선교사는 마부와 함께 처음 답사했던 그 길로 조심스럽게 전주로 향했고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의 선교의 열정에 의한 모험심과 담대함은 참으로 가상한 것이었다. 전주에 와서 수 주간을 머물면서 전란으로 인한 도성의 상처를 두루 살폈다. 도성 안팎의 마을들은 관군과 농민군의 탈환과 쟁탈전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폐허를 방불케 했다. 이같은 참담한 정경을 시찰한 후 테이트 선교사는 다시 서울로 가서 선교사들 모임에서 상황을 보고하고 선교 재개의 계획을 면밀하게 수립하였으며 호남의 치안 상태의 안정을 약 5개월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개척 선발대는 1892년 미국을 떠나올 때 한국 선교를 위해 드렸던 간절한 기도 운동을 다시 시작했고, 그 해 겨울을 지나서 1895년 이른 봄에 그들은 선교지인 전주로 다시 오게 되었다.

 

  1895년 3월 18일에 레이널즈와 테이트 선교사는 세 마리의 말과 조씨·강씨 두 사람의 도울 사람과 소년 요리사 칠성이, 테이트의 어학 선생 이씨 등을 동반하고 육로로 다시 전주에 와서 상당기간(3∼5월)을 체류하면서 민심을 파악하고 주택을 건축하며 선교 활동 재개를 준비하였다. 두 선교사는 전주를 두루 살핀 결과 도성의 1/4∼1/3이 파괴되고 불탄 것을 목격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전란으로 잡힌 사람들의 공개적인 처형이 장날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기 세례 받기를 원했던 신자들과 교회를 찾아오던 초신자들은 거의 다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었다. 선교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이 되어야 했다. 두 선교사는 테이트 목사의 집 사랑방에서 다시금 집회를 시작했다. 이번 방문 기간에는 선교부가 전에 구입하기로 했던 집 두 채의 값을 완전히 치르고 테이트 목사는 다시 다섯 채의 작은 집들을 앞으로 전주에 올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준비했다. 레이널즈는 집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소나무 숲을 매입하고 건축 재목으로 쓸 큰 소나무들을 벌목해서 그 목재를 집 지을 곳으로 운반했다. 완산 지맥 중 한 편 등성이에 터를 닦고 두 채의 집을 지었다.

 

  한편, 서울 선교 본부에 있던 전킨과 드루는 그간 서울과 전주 간의 육로 여행에서 많은 불편을 느꼈기에 인천에서 군산으로 선편 여행을 하기로 하고 1895년 3월에 인천에서 범선으로 출발했는 데, 항해 도중 모진 비바람과 짙은 안개와 싸워가며 열하루만에야 금강 하류의 군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산의 모든 상황을 두루 살폈다. 1895년 4월에는 장차 전남 선교의 개척자가 될 배유지(Eugene Bell, 裴裕址) 선교사가 도착했다. 5월 6일에 레이널즈는 테이트와 3월에 함께 왔던 일행을 전주에서 계속 일하도록 남겨두고 자기는 육로로 다시 서울에 올라갔다. 전주에서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던 테이트도 5월 31일에는 서울에 올라가 6월 10일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벨을 목포 선교의 개척 선교사로 결정했다. 이때 한국 조정에서는 청국과 일본이 전쟁을 그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 강토 내에서 상호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궁중에서 평화 조인에 따른 축하연을 열었는데 선교사들도 초청되어 참석하였다. 이미 1894년 개국(開國) 500주년 기념식에도 외국 선교사를 초청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조선 정부는 궁중의 외교 행사에 개신교 선교사들을 초청할 정도로 인식이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서울에서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간계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지방에 있던 선교사들 중에는 시국에 불안을 느끼고 서둘러서 모여들기도 했다. 전킨과 드루도 선편으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정국이 수습되는 것을 보고 11월에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서 거주할 주택과 선교 기지를 물색하며 본격적인 군산 선교를 진행했다. 전주에서 꿋꿋하게 일하던 테이트는 12월 23일 일단 서울에 올라가 일주간 준비를 한 후 앞으로 누이동생 매티와 함께 전주에서 장기간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12월 30일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서 군산에 도착한 후 말이나 가마를 타고 1896년 1월초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래서 1월 5일 주일에는 전주 은송리 처소에서 감격적인 새해 첫 예배를 드렸다.

 

  테이트는 집회 때마다 성경 강설과 교육을 담당했다. 집회 때는 많은 질문자들도 있었지만, 모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살이에 어떠한 이득과 정치적인 안전 보장의 기대나 경제상의 도움 등을 바라고 있었다. 진지하게 구원의 도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자 테이트는 몹시 실망해 식욕까지도 상실했다. 매티는 모여드는 여자들을 위해 복음의 기본 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한편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 간단한 의료 시술과 위생에 관한 기초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자들은 테이트의 사랑방에서 모이고 여자들은 매티의 방에서 각각 따로 모였다.

 

  2월 11일에 레이널즈와 벨은 목포가 개항된다는 소식을 듣고 선편으로 서울에서 목포로 항해하는 중 서해 바다에서 풍랑과 안개를 만나 많은 고생을 하고 가까스로 목포에 도착했다. 그 무렵 우리 정부 안에는 친일(親日)·친미(親美)·친러(親露)파 세력들이 대립·견제하였고 결국 친러파에 의해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감행되었다. 따라서 국정이 매우 흔들렸고 선교 운동도 주춤했다. 그런 중에 레이널즈와 벨은 6월 4일 목포에 와서 외곽 지대에 선교 기지를 삼을 셈으로 2,500평의 땅을 미화 51달러로 마련했다. 그러나 이 토지는 목포가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되기 전에 구입했기 때문에 개항 후에는 별로 사용 가치가 없는 땅이 되었다. 목포는 당초에 1896년 4월에 개항하려고 했으나 정국의 불안정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1897년 10월에야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했다. 1896년 2월 24일 전킨과 드루는 다시 군산으로 돌아와서 선교 사업을 진행하고 해리슨은 군산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1896년 7, 8월 중에 선교사 여름휴가가 있었다. 레이널즈 부부와 벨 부부는 관악산 어느 산사에서 지내고 테이트 남매는 일본으로 가서 휴가를 보냈다. 1896년의 여름 휴가를 마치고 9월 19일과 20일에는 선교사 연례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선교사들이 전주·군산·충청도·전라남도 등의 지역을 분담해 선교 여행을 하기로 하였고 이때 전킨 내외와 드루 내외는 군산 선교 담당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전킨, 드루, 테이트, 해리슨 등의 선교사들이 제물포(인천)에서 선편으로 군산에 일단 도착해 전킨과 드루는 군산 지방에서 의료와 복음선교를 펼쳤다. 테이트는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에 도착해서 10월 1일∼12월 23일까지 석 달 동안 전주에 선교부를 건설하는 일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계속했다. 한편 목포 선교를 맡은 벨 선교사는 충청도 강경을 답사한 후 목포로 향했으나 당시는 목포가 아직 개항되지 않았으므로 해리슨과 함께 좌수영 지방을 한 달 넘게 순방하며 전도 여행을 했다.

 

                        (2) 선교사 공의회 시대의 준비 과정

  초기 장로 교회의 각파(미국 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자 이들은 장로회의 공통된 방식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각파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년)를 이루었는데 회장은 아래와 같다.

[표 1] 선교사 공의회시대의 회장 역임자

연 도
회 기
회 장
비 고
1893
1
이눌서(李訥瑞, Reynolds)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1894
2
배위량(Braid)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1895
3
전위렴(全緯廉, Junkin)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1896
4
이길함(李吉咸, Lee)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1897
5
최의덕(崔義德, Tate)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1898
6
부두일(富斗一,Foote)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
1899
7
원두우(元杜尤,Underwood)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1900
8
오기원(吳基元,Owen)
미국남장료교회 선교사

  이 공의회는 치리권 행사가 별로 없었고 토의와 권고와 보고·친목 등을 다루었으며 앞으로 정식으로 조직될 치리회의 예비적 공회일 뿐이었다. 공의회 진행 중 괄목(括目)할 만한 점은 1893년 회의 때 참석한 회원 명단 중 남장로회 선교사들 이름 다음에 張씨란 이름이 있다는 점이다. 장씨는 서울에서 남장로회 선교사의 어학선생 내지 통역을 하던 張仁澤으로, 군산에 와서 선교사들과 더불어 전도인으로 사역한 조선인으로 공의회에 참석한 것이다. 선교사 공의회 8회를 하는 중 제6회와 제8회는 전적으로 영어로만 회의를 진행한 듯하고 그 밖의 여섯 번의 회의에는 한국인들이 각 지방에서 장로와 조사 중에서 총대를 선출·파송해 동회의에 참석하게 했지만 극히 소수였던 것이다. 1901년부터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들이 동등한 회원 자격으로 협력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를 조직하고 제반 안건을 의결 처리했다. 이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서는 ‘합동 공의회시대’(1901∼1906년)라고 부르고 있다.




장인택 조사와 7인의 개척 선교사


  당시의 상황과 운영을 살펴 보면, 1. 위의 총대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여 제반 문제를 토의하면서 민주적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쌓아 목사와 장로가 되어 교회 개척·설립에 공헌하였다 2. 1901년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결의한 바가 있다. 당시 일부 애국적 기독교 청년들 가운데서는 “지금 우리 나라에 필요한 것은 진실한 기독자 몇 사람이다. 우리는 이들 밖에 기댈 곳이 없다. 이제는 성경을 닫아 두고 검을 뽑을 때라고 생각한다.”라는 격렬한 외침으로 교회를 선동하였다. 이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족자주성에 대한 고통을 억제하면서까지 심사숙고하여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다. 1901년 조직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에서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 원칙’을 채택했고 국가 권력에 대해 교정(敎政)의 근간(根幹) 방침을 세웠다. 그때 지방 각 교회에 전달한 목회 서신의 성격을 지닌 결의문의 내용은

                     [표 2] 대한 예수교장로회 공의회 일람(1901~1906)

연 도
회기와 장소
회 장
비 고
1901
제1회 9월20일
서울새문안예배당
소안론(蘇安論,Swallen)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회의참석-한국인장로3,
조사6,외국인선교사25
주요안건-1895년에 서울/평양대리위원부 수립에 따라 전라/경상 두 대리위원부가 추가 설립됨.
1.자유장로회설립방침
  의정위원
2.장로회헌법번역위원
3.공의회규칙제정위원을    가각 선출함
기독신문을 공의회 발행물로 함
53교회 설립보고

1902
제2회
이눌서(李訥瑞, Reynolds)
전라대리위원부 총대
최중진(태인 매계)
최흥서(임피 만자산)
김윤수(목포)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34교회 설립보고
1903
제3회
구례선(具禮善,Grierson)
전라대리위원부 총대
김필수(전주)
양응칠(군산 궁말)
김윤수(목포)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43교회 설립보고
1904
제4회
왕길지(王吉志,Engel)
전라대리위원부 총대
김필수(전주),윤식명
최중진(태인 매계)
김창국(금산)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사

62교회 설립보고
1905
제5회
마포삼열(馬布三悅,Moffett)
전라대리위원부 총대
최대진,김치만,김윤수
임성옥,윤내춘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117교회 설립보고
1906
제6회

배유지(裵裕祉,Bell)
전라대리위원부 총대
최중진(장로, 정읍 매계)
최흥서(임피 만자산)
병창연(장서),박화승
김필수(전주)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133교회 설립보고

① 우리 목사들은 대한의 나라 일과 정부와 관원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이오.
②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일이 아니니 서로 간섭하지 말도록
   교우들에게 가르칠 것이오.
③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에게 복종하며 나라 법을 준수할 것이오.
④ 교회의 교인들이 자유로이 정당에 참여하는 일은 금하지 말 것이오.
⑤ 예배당이나 회당, 사랑이나 교회의 학당 등 교회에 속한 건물에서는
   정치 문제를 위해 모일 것이 아니오 등이다.

 

                ② 전주선교부의 출범과 호남 지역의 다른 선교부


                                   (1) 전주 선교부의 정식출범

  전주 선교부는 1894년 1월 테이트 목사와 그 누이동생 매티 선교사가 서울에서 전주에 정착할 생각으로 내려와 전주 은송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동학 혁명으로 인해 서울로 일시 철수했다가 다시 1896년 11월 19일 레이널즈, 테이트 남매, 해리슨, 데이비스 일행이 제물포에서 선편으로 출항해 그 다음날 정오경에 군산에 상륙해서 전킨과 드루가 주장하는 선교부 설치가 적합한지 여부를 정하기 위해 현지를 답사하고 선교사 연례 회의를 개최했다. 그때 테이트와 매티 테이트는 전주로 다시 오게 되고 해리슨은 전주 선교부에서 사역하기로 결정되었다.

 

  연례회의를 마친 후 벨과 전킨은 4 주간의 일정으로 나주 중심의 선교부 예정지를 시찰·여행하였다. 그러나 나주는 전주보다 더욱 완고하고 배타적이어서 관아에서도 외국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실정이었다. 나주 주민들은 벨 선교사에게 폭력으로 다스릴 듯이 엄포를 하며 나주에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극력 반대했으므로 결국은 나주 선교부 설치는 부득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나주 지역의 개발은 미뤄지게 되었다. 한편 레이널즈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서울과 전주를 주파했는 데 편도에 이틀 걸렸다. 해리슨은 원래 의술을 수학한 사람이므로 환자를 치료해 주며 전도하였다. 레이널즈는 선교사 사택을 짓는 일을 돕기 위해 1897년 2월 전주에 와서 직접 공사장에서 일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순수한 한옥이 아니고 한·양 절충식으로 이루어졌다.

 

  1897년 3월 6일, 토요일에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 예배를 드렸다. 해리슨은 군산에서 말을 타고 전주로 완전히 이사 오게 되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하자 맨 처음 구입했던 은송리 집에 거처를 정하고 약방을 차려 환자들을 위한 간단한 의료시술을 하면서 의료 선교의 길을 터놓았다. 다음날(3월 7일 주일)에는 전도를 받은 사람 중 8명이 예배에 참여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선교사들은 먼저 인도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장터 전도를 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3월 14일) 교회 예배에는 10명이 참석했다. 전주 선교는 매우 소망스러웠다. 한편, 해리슨 선교사는 선교의 방편으로 소년 교육에 관심을 두고 3월 28일 주일부터는 사내아이 네 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도했다. 그 아이들에게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 me)”이라는 찬송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4월이 되면서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에 의해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이에 은송리 예배 장소는 비좁게 되었다. 이미 여자들은 다른 방에서 모이고 있었으므로 이 때부터 예배 때에는 인접한 각 방들의 문을 열어놓고 합동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또한 4월 4일 주일에도 해리슨은 네 명의 사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쳤다. 그런데 전도에 대한 음성적인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반대자들은 아이들이 양인의 유혹에 빠지게 되니 예배당에 나가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라고 부모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4월 11일 주일에는 한 아이도 오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 전도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이 유교적 사상에 편집되고 토속적인 미신에 찌들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백안시하며 공공연하게 비난을 퍼붓고 저주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모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와 화평한 모습으로 장터 전도와 거리·축호 전도를 계속했다. 때마침 레이널즈 내외와 그의 큰아들 볼링 등이 전주로 이사와 선교사들의 선교 운동에 가세했다. 레이널즈는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하며 장터와 거리 전도에 힘썼다. 그 결과 6월 20일 주일에는 생각 밖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다. 물론 레이널즈가 설교를 담당했다. 7월 4일 주일에는 아홉 사람이 참석했으며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여럿 되었다. 그리고 주일이 아닌 날에도 나와서 믿음의 도리를 열심히 배웠다.

 

                                            (2)군산선교부의 설립

  최초로 군산에 온 선교사는 레이널즈 선교사와 의사 드루 일행이었다. 이들은 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전라도 각지를 순행 답사하고자 선편으로 제물포를 출발하여 3월 30일 군산에 상륙해 그곳 참사에게 전도하고 하룻밤을 지낸 후 전주로 왔다. 그 다음 방문은 1895년 3월에 레이널즈와 테이트 일행이 서울에서 육로로 전주로 왔고 또 그 무렵 전킨과 드루는 따로 제물포에서 범선을 타고 서해 연안을 항해하는 데, 때 마침 모진 비바람과 짙은 안개로 고생 끝에 11일 만에 금강 하구에 닿아 군산에 겨우 도착했었다. 그때 접촉한 사람들 중 군산의 김봉래(金蓬來)와 송영도(宋永道) 등이 믿기로 작정하고 선교사들이 다시 군산에 올 때는 원입 교인으로 문답해 줄 것을 청원했다.





  
선교 초기 군산의 모습


  두 선교사는 군산에서 임시로 거처할 집을 구입했으나 동학농민혁명의 후유증이 있었으므로 1895년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일단 서울로 올라갔다. 1896년 2월경에 전킨 목사의 가족이 모두 이사오고, 또 두 달이 지난 후 드루 의사의 가족이 이사와서 자기의 집 사랑에 진료소를 열고 환자들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전킨은 진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주일에는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봉래·송영도·차일선 세 사람이 1896년 4월 6일(월요일)에 원입 문답을 했고, 4 개월쯤 경과해서 위의 세 명 중 김봉래와 송영도는 세례 문답을 마치고 1896년 7월 20일(월요일)에 전킨 목사의 집 사랑에서 전킨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이 전라도 지방에서는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유아 세례는 1896년 10월 4일(주일) 예배 때 송영도의 어린 딸이 받은 것이 전라도 최초의 유아 세례였다. 이는 전주에서 실시된 처음 세례식보다 일 년 앞선 것으로, 이는 열성적인 부흥사 기질의 전킨 목사의 목회 방식과 전주의 레이널즈와 테이트 목사의 조심스럽고 규칙을 갖춘 신중한 목회 방식의 차이가 아닌가 추측되어진다.

 

  1896년 11월에는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한국에 와서 그 동안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래니 데이비스 여선교사가 군산으로 파송되어 왔다. 마침 그때 레이널즈·전킨·테이트·드루, 그리고 전년 초에 한국에 들어와 전라남도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던 벨 등 5인이 3주간 예정하고 전라남도 각지를 답사했다.

 

 이들은 군산보다 선교 기지로서 효율적인 곳을 물색하던 중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인 나주(羅州)를 유망한 곳으로 지목하고 군산 선교 사역을 나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드루가 서울과 군산 간의 교통의 편리성과 전도선(傳道船)으로 서해 연안을 선교할 수 있다고 유리한 점을 주장하며 군산 선교부 이동을 극력 반대하므로, 군산 선교부를 존속시키기로 했다.

 

 군산 선교 기지의 중심터를 정하는 것을 전킨과 드루에게 맡기니, 우선 임시로 자리한 군산 정거장이 있는 앞산보다는 전도선이 정박하기에 적합한 궁말(구암리) 산 밑의 터가 좋다는 드루의 주장에 따라, 군산 선교부 기지를 궁말로 결정했다.

 

  전킨과 드루는 궁말에 기지 정하는 일만이 아니라, 인근 지방을 다니며 순회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1897년에는 김제군 송지동(松枝洞)까지 왕래하며 송지동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군산 구암리 교회 설립

 

  1899년이 되면서부터 전킨은 새로운 기지로 자리잡은 궁말(구암리)의 산등성이와 기슭에 선교 센터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군산 숙소와 10리 가량 떨어진 궁말을 왕복하며 건축 공사 간역(看役)에 수고했다. 늦가을이 지나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12월 4일 주일 예배를 시작하니 이것이 구암리 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구암리교회 설립에 참여한 전도인 장인택(張仁澤)은 1893년 1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사 공의회가 서울에서 조직될 때, 남장로회 측 위원 레이널즈·전킨·테이트와 함께 조선 사람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바 있는데 그는 남장로회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며 전도인 역을 담당한 사람으로 당초 역관(譯官)인 듯하고 서울에서 일찍 신자가 되어 전킨의 군산 지방 선교에 직접 가담해 군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많은 전도 사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사람들이 군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두루 퍼지니, 인근 각지에서 남녀노소가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그때 전킨·드루·장인택 등은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니 여러 사람이 믿기로 하고 어떤 이들은 먼 거리에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에 와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튿날 월요일에 돌아가기도 했다.

 

  1899년 5월 1일에 군산항이 개항되었다. 본래 있던 선창과 거리를 새롭게 정비하기 위해 오래된 집들을 철거하면서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군산 예배 처소 역시 썰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인근 사람들은 구암 예배당을 찾게 되고 군산 예배 처소는 자연 문을 닫게 되었다. 그후 수년이 경과한 후 군산의 시가지가 정리되고 구암리와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군산에 사는 교인들이 1906년에 따로 군산에 예배 처소를 세우게 되었다.

 

  구암 교회는 날이 갈수록 신자의 수효가 더해 수 백 명에 이르렀고 전킨은 지경, 만자산, 남차문, 김제 송지동, 성말에까지 가서 순회 전도하며 기도 처소를 세웠고 인원이 많아지면 교회를 설립했다.

 

 드루 의사는 자원 전도인들을 인솔하고 전도선으로 서해 고군산 섬들과 오식도와 연안의 곳곳을 들르며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에 관한 책자와 전도지를 수천 명에게 나누어 주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

 

 1899년에는 군산 선교의 다음 주도자가 될 불(William F. Bull 夫緯廉)이 군산에 오고 1900년 봄에는 그의 부인이 될 앨비(Miss Libby Alby Elizabeth, 夫以利舍伯) 양이 내한해 합세했다. 군산에 파송되어 온 선교사들은 군산, 옥구 지방은 물론 금강 건너 충청도 서남부 일대의 부여·서천·한산·보령·남포 등 일대와 전라도 금만경 평야 지대를 전도 사업지로 정하고 선교 사업을 전개했다.

                                             (3) 목포 선교부의 설립


  전주에 선교부(Mission Station)를 세우고 난 다음 전라도의 북부 지역 한 쪽으로만 선교사업이 치우치는 감이 있어, 군산 지방 선교부 설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남부 지역에 선교 후보지를 개척하려고 했다.

 

 1895년 6월 선교사 회의에서 벨(Bell, 裵裕址) 목사를 전라도 남부 지방의 개척 책임자로 정한 후, 전주에 있는 해리슨(Harrison, 河緯廉)과 함께 한 달 남짓 동안 남부 지방 좌수영 등을 방문한 바 있으나, 교통이 불편해 차라리 남부의 내륙지방이며 행정의 중심지인 나주(羅州)를 선교 후보지로 지목했다.




선교초기의 목포의 모습


  벨은 전킨과 함께 1896년 11월에서 12월 사이 4주간의 일정으로 나주 지방을 방문·답사하고 선교 기지로 정할 셈으로 초가 한 채를 구입해 거처로 삼고 어학 선생 변창연(邊昌淵)과 더불어 거리 전도를 시도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나주 관아의 관리들은 강한 쇄국사상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외국인의 성내 거주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며 은근히 전도 활동을 방해했다. 그래도 선교사 일행이 나주 선교를 계속하려 하니 나주의 양반 유지들이 일어나 양인들은 나주에서 떠날 것을 강요할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작당해 생명의 위협을 주는 공갈까지 해오자 선교사 일행은 할 수 없이 나주 선교부 설치를 포기하고, 일단 변창연을 남겨 두고 떠나야만 했다. 때 마침 목포가 1896년 초에 개항된다는 소식을 듣고 벨은 서울을 출발해 목포에 도착했다.

 

  이때 조선 정부 안에서는 친일·친청·친러파의 세력들이 심각하게 각축을 벌이며 서로 견제하였고, 궁중에서 민비가 시해되는 참변이 일어나고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거소를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해지고 국정이 매우 흔들리고 있는 때라 목포 개항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에 선교 활동이 일시 주춤했지만 위의 두 선교사는 6월 4일에 목포에 도착해서 외곽 지대에 약 2,500평의 땅을 51달러에 미리 마련했다. 그러나 이 토지는 목포가 자유 무역항으로 개항되기 이전에 구입했기 때문에 1897년 10월 1일 개항이 되고 난 후에는 선교 기지로는 별로 사용가치가 없는 곳이 되었다.

 

  그 해 10월 미국 선교 본부 실행위원회 총무로서 한국에 온 체스터(Dr. S.H. Chester) 박사는 벨 선교사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목포 지방을 둘러보고 난 후 그의 주재 아래 열린 선교사 연례 회의에서 관아와 주민들의 반대가 강한 나주를 포기하고 목포를 전라남도의 선교 거점으로 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벨 선교사에게 1,500달러를 주면서 목포에서 새로운 토지를 구입하도록 했다.

 

  1897년 11월 27일에 목포에 다시 도착한 벨 선교사는 함께 온 한국인 조력자와 함께 방 한 칸을 빌어 같이 숙식하면서 새로운 기지 마련에 힘썼다. 그리하여 12월 하순에 아주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게 되었고 가격까지도 흥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후 서울에 보고차 다녀온 벨은 1898년 3월 2일 새로운 선교 지부 기지 구입이 완결되자 무척 기뻐하였다. 그는 새로 구입한 토지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를 매입해 임시 사택 겸 예배 처소로 사용하면서 본 건축공사에 착수했다. 한편 새로 구입한 집 앞길을 향해 천막을 치고 미국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오는 사람들을 수용하며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도하니 믿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했다.

 

 1898년 5월 15일, 새로 터를 마련해 전도 운동을 벌인 지 2달 남짓 되었는 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자 벨은 큰 용기를 얻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의료 선교사인 오웬(Dr. Clement Carrington Owen, 吳基元) 의사가 목포에 도착해 진료소를 설립하고 열심으로 의료 선교를 하였고 나중에는 일반 선교 업무에 전념했다.

 

 오웬은 1900년에는 북장로회 여선교사 화이팅(Georgiana Whiting)과 결혼해 네 자매를 두었으며 지방 순회 전도에 열중하다가 폐렴이 도져 1909년 4월 3일 애석하게도 별세했다.

 

 1899년 초에는 스트레퍼(Miss. F. Riea Straeffer) 양이 목포에 와서 선교 사업 전개에 가세함으로 목포의 선교가 더욱 활발해졌다. 더욱이 매서인(賣書人) 변창연(邊昌淵)이 나주에서 목포로 옮겨와 적극 협력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천막 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이 목포 교회의 시작이었다.

 

  목포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가던 중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벨 선교사의 부인(Mrs. Lottie Witherspoon Bell)이 심장 발작으로 1901년 4월 12일 갑작스럽게 별세한 일이다. 남편 벨은 전주 선교부 관할 지방 선교 여행 중이었으므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아들 헨리(Henry)와 딸 샤롯(Charlotte)을 부둥켜 안고 숨을 거두었다. 장례를 마치고 벨은 두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에 한국으로 다시 와서 1904년 광주로 이사하기까지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4) 광주 선교부의 설립

  광주에 선교 지부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전라도 서남단에 위치한 목포 선교지부에서 전남의 동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데는 먼 여정이었으므로 그곳의 몇 교회를 돌아보는 몇 주간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전남 지방의 중앙 지점이 되는 광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므로 목포에 사는 벨과 오웬 선교사 두 가정을 광주로 이사하게 하기로 하고, 광주에 기지를 구입하고 두 채의 집을 지었다. 벨과 오웬 선교사 두 가정은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떠났다.




선교초기의 광주의 모습


  자동차나 기차의 교통수단이 없었던 때이므로 작은 배로 두 집 식구와 이삿짐을 싣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가족들이 심한 배멀미로 고생하였다. 영산포 근방까지 가서 상륙한 다음 가마를 이용해 육로로 미리 마련한 광주 집에 이틀 만에 도착했다. 그 당시는 광주에 믿는 교인 가정이 한 집이 있었는 데, 목포에서 이미 믿고 먼저 광주로 이사온 김윤수 가정이었다. 광주의 주민들은 미국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연일 찾아와서 구경하고 말씀도 들었다. 이렇게 벨 선교사 주택의 사랑에서 집회를 시작한 지 몇 주일이 못되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북문 안에 기지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이 집도 비좁아 예배당을 배로 늘리고 후에 다시 늘려 매 주일에 4∼5백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한 나주와는 판이한 것으로 전남의 선교 확장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심을 믿게 되었다.

 

 

                                                     (5) 순천 선교부의 설립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94년 호남 일대를 순회한 레이널즈 목사 일행이다. 그후 1897년에 테이트 선교사가 그 지방에 선교 여행차 들러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장터 전도를 했는데, 그로 부터 20년이 지나 어느 주막집에 그 때 돌렸던 전도지가 벽에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다.

 

  광주의 오웬 목사는 순천까지 내왕하며 열심히 전도해 몇 교회를 설립했다.

 

  1909년에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 목사와 벨 목사가 이곳에 와서 약 50명이 예배드리는 현장을 보고 감격해 신앙 문답을 실시하고 원입 교인을 세운 일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 프레스턴(변요한) 목사가 다시 순천을 찾아가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며 전도를 실시했다.

 

 1910년부터는 일 년에 봄, 가을로 두 차례씩 문답을 실시하고 니스벳(Nisbet, 유서백) 목사가 그곳에 가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911년 순천에 선교기지를 구입해 순천 선교부를 설치하고자 하였고, 그 다음해인 1912년에는 광주에 있는 코잇트(Robert Thornwell Coit, 高羅福) 목사와 스윈하트(Martin Luther Swinehart, 徐路得) 장로가 순천을 내왕하며 집터를 닦고 주택을 건축했다.




선교초기의 순천의 모습


  1913년 4월에 드디어 코잇트(고라복) 목사 가족과 프레스턴(변요한) 목사 가족이 순천으로 이사했고, 여선교사 비거(Meta Louise Biggar, 백미다) 양과 두피(Lavalette Dupuy, 두애란) 여선교사가 도착했다. 전주에서 어학 공부를 하던 티몬스(Henry Loyala Timmons, 김로라) 의사가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하였다.

 

 갑자기 여러 선교사가 오게 되니 주택 건물이 미완성되어 코잇트 목사 가족이 아래층에서 비좁게 생활을 하던 중, 두 아이들이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슬픈 일도 생겼다. 순천 선교의 리더격인 크레인(John Curtis Crane, 구례인) 목사의 여러 가족이 같은 해 가을이 지나 순천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 여러 선교사들은 순천의 일반·농촌 선교와 함께 매산학교 설립 등의 학원 선교, 알렉산더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를 서로 분담해 선교 사업을 전개했다.

 

 

              ③ 전주선교부를 중심으로한 전라지방의 선교의 발전
                   (1) 병원 설립과 의료 선교 사업 전개

                           1) 군산 구암 병원

  선교사가 전라도로 오기 전 서울 남대문 밖 약현(藥峴)의 전킨 목사의 선교사 공관에 함께 있던 드루 의사는 1894년∼1895년경 그 사랑(舍廊)에 약방(藥房)을 열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1895년에 그는 서울 등지에 괴질(콜레라)이 무섭게 번질 때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살려낸 일이 있었다.

 

 드루는 1896년 전킨 목사와 더불어 군산으로 와서 초가집에 살면서 방 한 켠에 약방을 꾸미고 3년 동안 환자를 치료했고, 또 전도선을 타고 군산 연안 각지와 각 도서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 전도에 진력했다. 그러던 중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폐병에 걸려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다. 그후 다시 나오지 못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의료 선교를 펼쳤다.

 

  그가 군산 궁말에서 시작했던 진료소는 그후 병원으로 발전되었고, 1899년에 알렉산더 의사가 왔으나 두 달이 못 되어 본국의 부친 별세 소식을 받고 급히 귀국할 때 청년학도 오긍선(吳兢善)을 데리고 들어가서 학비 등 일체를 담당해 주며 의학 공부를 하게 했다.

 

 오긍선은 의사가 되어 귀국해 목포 병원을 위시해 구암 병원에서도 일했고 미션 기관의 병원에서 봉사하였으며, 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의 교수로 봉직해 마침내 교장이 되어 훌륭한 의학도를 양성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904년에는 다니엘(Thomas Henry Daniel, 丹義烈) 의사가 구암 병원에 와서 병원을 건축하고 시설을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의료 사업을 전개하다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겼고, 그 후임으로 패터슨(Jacob Bruce Patterson, 孫培焞) 의사가 부임해 7년 동안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 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다음 1924년에는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富蘭道) 의사가 내한해 구암 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복음 전파에 진력하다가 1930년에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겼다.

 

                            2) 전주 병원(현 예수병원)

  1897년 해리슨 목사는 미국에서 의료 기술을 수련하고 내한했기에, 전주 서문밖 은송리 초가집에 약방을 차리고 중하지 않은 일반 환자를 진찰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인심을 얻어 전도를 효과적으로 도왔다.

 

 같은 해 11월에 잉골드(Mattie Barbara Ingold) 여의사가 전주로 파송되어 전주 은송리 작은 초가집에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다. 그녀가 오자 해리슨 목사는 환자 진료를 점차로 잉골드 의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일반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한편 잉골드는 처음에는 여성 환자 만을 진료했는데, 여자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기피하던 남자들이 자기 아내의 치료를 위해 왔다가 자기 병도 진찰받기를 청원하므로 그들을 똑같이 진료하였다. 차츰 다른 남자들도 찾아와서 치료를 받았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또 병이 나은 사람들 중에 여럿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중 ‘백만’이라는 사람의 할머니는 점치는 복술인으로서 잉골드에게 병 고침을 받고 난 이후로 예수를 믿어 나중에는 전도 부인이 되기도 했다. 또 유경선 부인이 발목에 독종이 나서 위태로웠는데, 남편에게 업혀 와서 한 달 이상 치료하는 중 한글을 배우며 예수 믿고 온 집안 식구를 교회로 인도하는 등 선교에 큰 성과를 가져왔다.




잉골드 선교사가 초기 전주병원(현 예수병원)
에서 진료하는 모습


  잉골드 의사가 일하던 진료소는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의 전주 예수 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전주 선교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테이트 선교사와 8년의 열애 끝에 1905년 9월에 결혼하고, 남편과 더불어 농촌 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부녀자 성경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전주 병원은 1904년부터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保衛廉) 의사가 와서 열성적으로 전도와 치료에 전념했다.

 

 1905년 3월 어느날, 포사이드는 전주에서 군산 방면으로 60리 떨어진 완주군 봉동읍 만동(蔓洞)에 사는 부자 전주 이씨가 밤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말을 타고 달려가서 응급 치료를 하고 밤이 되어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 밤에 어제의 강도가 다시 습격했고, 양복을 입은 포사이드 의사를 순검(경찰)으로 오인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어 격투하던 중 의사의 한 쪽 귀가 잘리고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날이 밝자 이 소식이 선교사들에게 알려졌다. 전주의 해리슨과 군산의 다니엘 의사가 달려와서 군산 구암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 조치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감동을 받은 전주 이씨는 전주 서문밖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또한 그간 장터 선교 때문에 서민이 중심을 이루었던 교회에 상류층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교회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로써 양반 계급에 대한 선교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포사이드는 상처가 잘 낫지 않으므로, 190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은 후 1907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목포 병원에 파송되어 의료와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1907년부터는 독일인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전주 병원에 와서 1909년까지 진료를 담당하다가 함경도에 있는 미국인 광산 부속병원으로 떠나자, 군산에 있던 다니엘 의사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겨와 병원과 진찰소를 벽돌집으로 확장 건축하고 밀려오는 환자를 수천 명 치료했다. 다니엘 의사는 1916년 3월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로 옮겨 교수로 일하다가 1년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5년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슨(Moor Owen Robertson, 羅培孫, 羅彬孫) 의사가 1916년에 전주에 와서 1922년까지 병원 진료와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3) 목포 병원

  1896년 오웬은 한국에 올 때 의사로 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목사로 전환했다. 그는 벨 목사와 함께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고 진료소를 설립해 환자를 진찰하면서 전도에 열중하던 중 1900년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화이팅(Georgiana Whiting) 여의사와 결혼해 농촌 의료 선교를 열심히 하다가, 1904년 12월에 벨 목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설립을 위해 목포를 떠났다. 그는 개인 전도는 물론 많은 교회 개척에 진력하던 중, 결국 과로에 폐렴이 겹쳐 고생하다가 1909년 4월 3일에 별세했다. 그의 부인은 그대로 한국에 1923년까지 머물며 이 고장 의료 선교를 담당했다.

 

  오웬 선교사가 광주로 옮겨간 후 목포 병원에는 놀란(Johseph Wynne Nolan) 의사가 와서 진료를 담당하다가 1904년 광주 선교부로 옮겼고 거기에서 1년 6개월 근무한 후 평안도 운산에 있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그후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1년 동안 진료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치료 차 전주 병원에 갔다가 귀국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하딩(Harding, Maynard C. 하진) 의사가 왔으나 1년을 근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 치료 차 귀국했던 포사이드 의사가 건강을 회복해 190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 병원의 진료를 담당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받던 그는 1905년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1912년에는 아주 귀국해 1918년에 별세했다.

 

  1912년 리딩햄(Roy Samuel Leadingham, 韓三悅) 의사가 오게 되자, 그 때까지 목포 병원을 맡고 있던 오긍선은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다.

 

 1914년 목포 병원은 병원 조수의 실수로 알코올 통에 불이 붙어 화재로 병원이 전소되었다.

 

 리딩햄(한삼열) 의사의 활약으로 미국의 프렌치와 성요셉교회 교인들이 의연금(1만원)을 보내와 2층 석조 건물로 다시 훌륭하게 신축하였고, 매일 찾아오는 많은 환자로 병원은 활발하게 운영되었으며, 목포 지방의 의료 선교 사업은 날로 발전되어 갔다.

 

                                 4) 광주 병원

  1904년 선교사 벨 목사와 오웬 의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와 광주 선교부를 맡게 되었고 목포에 있던 스트레퍼 여선교사도 광주로 옮겨왔다. 목포 병원에서 일하던 놀란 의사는 광주로 와서 1905년 11월 20일부터 벨 선교사의 집에서 진찰소를 열고 진료를 시작하면서 진료소 건축을 하며 1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평안도의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1908년부터는 윌슨(Robert Manton Wilson, 禹一善, 禹越遜) 의사가 와서 광주 병원을 운영하던 중 1911년에 미국에 있는 그레이엄(Graham) 장로가 자기의 죽은 딸을 기념하며 일만 원을 기부하므로, 그녀의 이름을 붙여 ‘엘렌 레빈 그레이엄(Elen Ravine Graham) 기념병원’을 크게 건축하였다.

 

 장기간 성심으로 병원을 경영하던 중 1912년에는 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를 치료했고, 또 치과를 개설하고 폐결핵 환자 요양소도 설치해 결핵 예방에도 공헌하였다. 순천 지방에까지 순회 진료를 하며 전도 사업을 하다가, 여천군 율촌에 애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5) 순천 병원

  1912년에 전주 병원에서 근무하며 우리말 공부를 하고 있던 티몬스(Henry Loyola Timmons, 金로라) 의사는 1913년에 순천 진료소를 열고 환자를 진찰했으나, 환자가 많아지므로 1915년에 현대식 건물로 병원을 건축했다. 티몬스 원장이 건강 관계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는 광주병원의 윌슨 원장이 겸무를 하며 의료 선교 사업에 지장이 없게 운영하였다. 티몬스는 1922년에 한국에 다시 와서 전주 예수 병원장으로 수고하다가 1926년에 아주 귀국했다.

 

  순천 병원에는 1917년부터 로저스(James McLean Rogers, 魯宰世, 노재수) 의사가 부임해 간호실, 전염병실 및 기타 설비를 확충하고 건물도 4층으로 증축했다. 특히 극빈 환자들의 치료에 심혈을 기울여 그의 별명을 ‘노제세(魯濟世)’라고 불러 불신인들에게도 칭송을 들었다. 일제 말기 강제 출국 때까지 순천에서 의료 선교 사역과 전도 사업을 계속했다.

 

                               6) 나병원

  1909년 광주의 오웬 선교사가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포사이드(보위렴) 의사가 그를 진찰하기 위해 목포에서 말을 타고 광주로 오는 도중, 길에 누워 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기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왔다. 그러나 수용할 곳이 없으므로, 벽돌 굽는 가마에 그녀를 두고 정성껏 돌보며 치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선교사들이 특별 모금을 해 우선 세 칸 집을 짓고 그녀를 수용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나환자들이 모여 들었고, 이에 선교사들은 45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나환자 병동을 건축했다. 광주 기독 병원장 윌슨 박사가 이 병원장까지 겸했고, 병원을 더 크게 건축해 모여드는 나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한편 1921년 광주 병원을 거쳐 1927년에 순천 병원으로 옮긴 엉거(James Kelly Unger, 元佳理) 의사가 순천 지방에도 나병원을 설치해 줄 것을 선교부에 청원한 것이 허락되어, 1928년 광주 나병원과 합병해 순천 지방 한 곳에 큰 나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엉거(원가리) 의사와 광주의 윌슨(우일선) 원장의 민첩한 활동과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나환자 천국이라 불리는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요양원이 이루어졌다.

 

 

 

                     (2)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

  한국의 개신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던 선교 초기에, 의식 있는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을 세우면서 대개 교육 기관도 함께 세웠다. 당시 신문화에 대한 선각자였던 교회 유지들의 교육 목적을 살펴보면

 첫째, 한국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자주 국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고,

 둘째, 한국인이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 긍지를 가지도록 하며 이를 지킬 때, 외부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지 않고 자주적 정신과 자율 행동으로 각각 연보하기를 힘쓰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라도 나가서 참여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유인을 양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그 당시 각 선교사회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하며 직·간접으로 학교를 세우는 일과 경영하는 일에 참여했다. 각 지방 교회에서도 교육 시설을 세우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위와 같은 교육 목표 덕분에 이후 일제 침략하에서 기독교 학교는 민족 정신을 보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기독교회 역사상 1886년(미국 개신교회의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배재(培材)학당,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여선교사의 이화(梨花)학당 설립을 위시해, 1887년에 서울 새문안의 선교부에서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설립하고 송순명(宋淳明)·안창석(安昌錫)·김유순(金裕淳) 등 몇 사람의 학도를 모집해 윤치경(尹致景)·목원홍(睦源弘)이 교수한 것이 한국 교회 교육의 창시였다.

 

 또 1887년에 북장로회 선교사회에서 서울 연지동에 여자 교육 기관을 창설해 연동(蓮洞)여학교를 시작했고, 다음해 새문안 교회에는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설립하여 경영했으며, 같은 해 평북 용천군(龍川郡) 신창(新倉) 교회와 정주읍(定州邑) 교회와 박천군(博川郡) 남호(南湖) 교회에서는 사숙(私塾)을 일으켜 교회 교육을 시작한 것이 점차 확장되어 학교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들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경향 각처에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1898년에는 평양 부중 교회와 평북 의주군 남산 교회에서도 학교를 세웠고, 1900년에 평북 의주읍 교회·선천읍 교회·박천읍 교회·황해도 황주군 용연 교회에서도 사숙을 시작하여 교회 교육을 발전시켰다.

 

  이상의 모든 학교는 각 지방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담당했는데, 선교부의 주도로 재정과 교사를 갖추어 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게 된 학교 중 전라노회 산하의 유수한 학교의 설립 내력을 살펴보자.

 

                            [표 3] 초기(1885~1909)선교사들의 학원 건립 상황

연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연 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1885
廣 惠 院 장로교·감리교 서울 1902 永興學校 장로교 목포
1885
培材學堂 감리교 1902 永明學校 군산
1886 梨花學堂 1902 메리볼딘
女學校
1886 儆信學校 장로교 1903 崇義女學校 평양
1887 貞信女學校 1903 樓氏女學校 감리교 원산
1894 光成學校 감리교 평양 1904 德明學校
1894 正義女學校 1904 好壽敦女學校 개성
1894 崇德學校 1904 眞誠女學校 장로교 원산
1895 日新女學校 장로교 동래 1904 懿昌學校 감리교 해주
1895 正進學校 감리교 평양 1905 永明學校 공주
1896 攻玉學校 서울 1905 信聖學校 장로교 선천
1897 崇實學校 장로교 평양 1906 啓聖學校 대구
1897 信軍學校 감리교 서울 1906 保聖女學校 선천
1897 永化女學校 인천 1906 韓英書院 감리교 개성
1898 培花女學校 서울 1906 美理欽學校
1898 盲啞學校 평양 1907 信明女學校 장로교 대구
1898 明信學校 장로교 재령 1907 崇一學校 광주
1900 新興學校 전주 1907 須彼亞女學校
1901 平壤神學校 평양 1908 昌信學校 마산
1902 紀全女學校   전주 1909 懿貞學校 감리교 해주
1902 貞明女學校 목포        





초기의 신흥학교 학생들의 수업모습

 

           1) 신흥 학교

  1899년 해리슨 선교사가 전주 선교 초기 주일에 소년 몇 명을 따로 모아 교회 교육을 시켰고, 주중에도 그의 어학 선생과 더불어 8명의 소년을 교육하였다.

 

 1900년부터는 레이널즈 선교사를 설립자로 하여 그 사택에서 그 부인(Patsy Bolling)과 함께 교과 과정을 정해 가르쳐왔다.

 

 1907년 3월에는 교육을 담당할 선교사로 니스벳(John Samuel Nisbet, 柳瑞伯) 부부가 전주로 파송되어 와서 정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교사로는 해리슨 부인과 최중진(崔重珍)·김명식(金明植)·김필수(金弼秀) 등이 수고했고, 1908년에 교명을 신흥학교로 명명했다.

 1909년에 한국 선교 후원자인 그레이엄(C. E. Graham)의 기부금으로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했으며, 역대 교장으로 니스벳· 레이널즈·해리슨·에베솔·린턴이 시무했다.

 

 

                               2) 기전 여학교

  1902년부터 매티 테이트는 12명의 소녀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주간(週間)에 두 번씩 교회 교육과 일반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4년 전킨 선교사의 전주 부임 이후, 그 부인(Mary Leyburn)이 교육을 담당하였고, 다시 1907년 2월에는 교육 전문가인 랭킨(Nellie Beekwith Rankin, 엄언라) 여선교사가 파송되어 와서 본격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그녀는 학교를 교육의 본궤도에 올려놓기도 했거니와, 서문밖 교회에서 소아회(小兒會)라는 명칭으로 소년·소녀 주일학교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중 불행하게 병에 걸려 1911년 8월 13일 이 고장에서 별세했다.

 

 학교의 이름을 기전(紀全)으로 한 것은 학교 설립 초기 힘써 일하던 전킨 선교사가 이곳에서 1908년 1월에 병으로 별세하였으므로, 이를 기리어 ‘전킨을 기념한다(紀全)’는 뜻으 정한 것이다.

 

 랭킨 다음으로 바크랜드(S.M.Bakland, 朴世理)와 콜턴(Colton Susanne Avery, 孔貞純) 여사가 역대 교장으로 시무했다.




초기의 기전학교 학생들과 선교사


 

                              3) 정명(貞明) 여학교

  목포 선교가 시작될 때 1899년에 내한한 스트레퍼(Fredriea Elizabeth Straeffer, 徐女史) 여선교사가 1902년 5월 10일부터 소녀들을 모아서 윤리적인 기초 훈련과 일반 초등학문 과정을 교육시켰던 것이 정명여학교의 출발이었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목포 지방 여성 교육에 헌신적이었고 목포를 중심으로 무안·함평 등지까지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다가 한때는 혼자 목포에 남게 되기도 했느데 1908년에 귀국하였다.

 

 

                               4) 영흥(永興) 학교

  목포에서 여성 교육이 시작되자 1902년 9월 1일 양동 교회 이남규는 남학교를 설립하였다. 1903년에 내한해 목포 지방으로 파송되어 온 프레스턴 선교사가 1905년부터 교장으로 취임하고, 1908년에는 그의 활동으로 학교 교사(校舍)를 근대적 석조 건물로 신축하고 기구를 확충했다. 한편 프레스턴 선교사는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강진 지방에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후 광주로 이전해 숭일학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선교에 진력했다.

 

 

                                5) 숭일(崇一) 학교

  광주 선교와 더불어 1907년 벨 선교사는 처음에는 광주 선교부 직원의 자녀와 교인 자녀들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목포에서 학교 교육과 일반 선교를 담당하던 프레스턴 선교사를 광주로 불러와 학생 교육을 담당하게 하며 오웬 선교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일을 맡게 하였다. 그간 배유지 선교사가 임시 교장으로 있던 남학교를 1908년 2월에 학교 이름을 숭일(崇一, ‘하나님 한 분만 섬긴다’는 뜻)로 하고 프레스턴 선교사가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의 활약으로 1909년에 교사 건물을 기공해 4층 건물을 준공하고 점차 발전했다.

 

 

                               6)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광주에 옮겨 온 벨 선교사는 교육 선교 사업에 착수해 남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한편 자기 집 사랑채에서는 자기 부인(Magaret Bell W.)이 소녀들을 따로 불러모아 교육을 개시하였다. 1907년에 목포에서 옮겨와 광주 선교에 합류한 프레스턴 선교사의 부인(Annie Preston S.)이 또 이를 도왔다. 1908년 봄에는 여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09년에는 교육 전문 선교사인 그레이엄(엄엘라) 여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에 그녀의 활동으로 미국 스턴니 스피어(Sternsnee Speer) 여사의 기부금으로 3층의 교사를 짓고, 교명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Girls School)로 이름하였다.

 

 

                               7) 영명(永明) 학교

  군산에서는 1900년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전킨 선교사의 부인이 주일학교 교육의 연장으로 집에서 아이들 3∼4명에게 성경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일반 기초 교육도 실시했는데 바로 이것이 학교의 시작이라 하겠다.

 

 학생이 증가되자 1902년에는 전킨 선교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해 군산 궁말(구암동) 선교 기지에 5∼6칸의 집을 세우고 소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교사로는 전킨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들, 장인택 조사, 양종국, 그리고 때 마침 공주에서 이사 온 교인 오인묵 등이었다. 전킨 선교사가 전주로 옮겨 간 이후는 불·해리슨 선교사에 이어 이얼(Alexander Miller Earle, 어아력, 魚목사) 선교사가 학교책임자가 되어 미국 교회의 보조를 받아 학교 건물을 3층으로 신축했다. 지방에서 오는 학생을 위해 기숙사를 건축해 운영하니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이 학교는 군산과 충청남도 일대에서 건실한 교사들이 청소년을 가르쳤던 곳으로, 기독교와 민족 의식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8) 메리 볼딘 여학교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를 전개하면서 먼저 영명학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부인(Leyburn Junkin Mary)은 인근 동리 가가호호를 심방해 소녀들을 오게 하여 자기 집에서 따로 가르쳤다. 이것이 여학교의 시작이었다.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건강 관계로 전주로 가게 되자 1900년에 군산에 와서 불 선교사의 부인이 된 앨비(Libbie Elizabeth Alby) 여선교사가 여학교를 맡아 운영하는 중, 자기 모교회(버지니아 렉싱턴 장로교회)와 미국의 메리 볼딘(Mary Baldwin) 대학에 학교의 건축 보조를 호소하자, 교회와 그 대학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모금 운동을 펴서 건축 기금을 보내왔다. 이로써 구암동 선교기지 내에 3층 벽돌 건물로 교사를 신축할 수 있었다.

 

 그 때 교사 건축을 위해 미국의 학생들이 끼니를 걸러가며 성심으로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매월 학교 운영비로 1,000달러씩 보내주는 것을 기념해 학교의 이름을 메리 볼딘 여학교라고 하였다. 교사들은 옆에 있는 영명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이외에도 1904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청년 학원(新民會-安昌浩가 주도한 구국 운동 체의 훈련 기관), 도산 안창호의 대성 학교(大成學校, 평양), 이승훈(李昇薰)의 정주 오산 학교(五山學校)를 비롯, 황해도 안악, 평안도 선천, 충청도 한산에 김인전(金仁全)이 설립한 한영 학교(韓英學校) 등 민족을 깨우치는 사학(私學)교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본도 시인하고 있었듯이, 기독교야말로 ‘是實로 今日의 新敎育制度의 淵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사학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과 민족 의식을 배양하여 한국 교회의 외부에 펼치려는 목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호남 지방에서도 1903년에 익산군 고내리(益山郡 高內里) 교회에서 학당을 설립하고 교인 자제를 교육했고, 뒷날 학부(學部)의 인가를 받아 정식 학교로 설립해 많은 젊은이들을 양성하였다.

 

 

  1905년에는 충남 서천군 구동(九洞) 교회와 부안군 대수리(大水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고, 김제군 월성리(月成里) 교회에서는 남학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는 김제군 두정리(豆亭里) 교회에서 용광(鏞光)학교를 설립해 청소년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1월,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기억될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불붙기 시작해 교세가 요원(遼原)의 불길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해 9월 17일에는 역시 같은 예배당에서 전국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여 미국 남·북장로회와 캐나다 및 호주 장로회 등 네 교파의 선교사들이 합력해 단일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를 비로소 조직하게 되었다.

 

  초창기 독노회 안에 전국 각 지역을 나누어 7개 대리회(平北·平南·咸鏡·黃海·京忠·慶尙·全羅)를 조직하니,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전라 대리회 지방 안에서는 각처에 교회와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광양군(光陽郡) 신황리(新黃里) 교회와 장성군(長城郡) 영신(永信) 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보성군(寶城郡) 이만리(貳萬里) 교회에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순천 경내의 교육 사업 전개에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1909년 전주군 삼례 교회에서 영흥(永興)학교를 세웠고, 익산군 동련(東蓮) 교회에서는 계동(啓東)소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나주군 방산리(芳山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다. 서문밖 교회에서는 서문 안에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경영이 확실한 기전여학교에 인계했다.

 

 1910년 전주군 제내리(堤內里) 교회는 함녕(咸寧)소학교를 세웠고, 옥구군 구암리(九岩里) 교회와 군산 개복동 교회가 연합해 안락(安樂) 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구암 영명(永明)학교에 인계했다. 같은 해에 화순 대포리(大浦里) 교회에서는 영창(永昌)학교를 세웠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조약에 조인함으로 민족적 비운을 겪게 되는데, 기독 교회에서는 전국적으로 100만명 구령운동을 전개하여 각 교회들이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펼쳤다. 이 기간에도 교회는 민족이 배우고 깨어야 산다고 계도하며 각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계속했다.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지방 대리회에 불과했던 교회 조직이 7개 노회(평북·평남·함경·황해·경충·경상·전라)로 확장 개편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전인 1911년 10월 11일에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전라 노회가 창립되었다(노회장 마로덕, 서기 이승두, 회원 목사 13명, 장로 19명).

 

 이와 같이 교회 조직이 확장되자 각 지교회들은 전도와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전국 각처에서 남녀 학교를 계속 설립하며 인재 양육을 도모했는데 전라 노회 산하 교회에서도 자발적으로 협력하였다.

 

  1913년 광주군 송정리(松汀里) 교회에서 남선의숙(南鮮義塾)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고 1915년 전주군 삼례(參禮)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永興)학교는 증축 후 교명을 영신(永新)학교로 변경해 일백 명의 학생을 교육했다.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교회에서는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50여 명을 교육했고 대붕리(大鵬里) 교회는 부용(芙蓉) 학교를 설립해 많은 학도들을 교육했다.

 

 1916년 광주군 봉선리(鳳仙里) 교회와 장성군 소룡리(小龍里) 교회에서 각기 소학교를 세우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7년 나주군 삼도리(三道里) 교회에서는 기독교 광명의숙(光明義塾)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2일, 총회 개최지인 경성 승동 예배당에서 임시 전라 노회를 열고 그 동안 전라도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노회 분립안을 논의한 후 분립 청원을 하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전라 노회를 전북 노회와 전남 노회로 양분할 것을 결정해, 1917년 9월 20일에는 전남노회가 목포 양동 예배당에서 창립되었다(회장 유서백, 서기 김영국, 회원 목사 10명, 장로 13명).

 

 역시 같은 해 10월 10일 전주 서문밖 예배당에서 전북 노회가 창립되었다(회장 이원필, 서기 홍종필, 회원 목사 15명, 장로 20명).

 

 1918년 임실군 옥정리(玉井里) 교회에서는 남·여 소학교를 세워서 가르쳤고, 1919년 전주군 고산읍 교회와 김제군 난산(卵山) 교회는 각기 남녀 소학교를 설립해 신자의 자녀 교육을 맡았다.

 

 1920년 정읍군 천원 교회에서는 은성(恩成)소학교를, 임실군 삼길(三吉) 교회에서는 양춘(陽春)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경제난으로 한때 문을 닫았으나 이후 유지들의 찬조로 다시 운영할 수 있었다.

 

 1921년 익산군 남전리(南田里) 교회에서는 신성(信成)소학교를 설립해 70여 명의 어린이를 가르쳤고, 1922년 익산군 장등(長登) 교회와 전주군 밀파리(密波里) 교회와 남원군 신풍리(新豊里) 교회도 각기 소학교를 세워서 많은 어린이들을 교육했다.

 

 1923년 전주군 남문밖(南門外)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해 남학생들을 가르쳤고, 군산 개복동 교회에서도 영신학원(永信學院)을 세우고 보통과 생도 1·2학년 70여 명을 모아 가르쳤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1910년 한일 합방 당시 그 동안 정부 인가의 사립학교 총수는 2,250여 개교였는데 장로회 계통이 501개교, 감리교 계통이 158개교, 가톨릭 계통이 137개교, 기독교 계통이 796개교였다. 이때 교회가 사회 교육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여 투자에 힘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15년에 조선 총독부가 사립학교 규칙을 제정·발표하고 기독교 교육을 억제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하자, 정식으로 인가받은 학교의 설립이 주춤해졌다.

 


 

                                                                by 서문교회(http://www.i-seomoon.or.kr/his_1893_ser/his1-2-5.htm)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