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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왜성과 임란북천전적지를 답사<☞ http://cafe.daum.net/phanmaum/FXy6/452>하고 노악산(露岳山) 산행에 나선다.
노악산은 상주 삼악(三岳)의 하나인 노음산(露陰)이다.
상주 삼악(三岳)은 서쪽의 노악(露岳 노음산)과 남쪽의 연악(淵岳 갑장산) 그리고 북쪽의 석악(石岳 천봉산)을 일컫는다.
대동여지도와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모두 노음산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천년고찰 남장사의 일주문엔 노악산남장사(露岳山南長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노악산남장사(露岳山南長寺)'라 적힌 편액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에게 서법을 가르친 해강 김규진(1868~1933)의 솜씨다.
그의 글은 해인사와 개심사에도 남아 있다.
남장사를 끼고 있는 계곡일대는 '경북 8경'으로 울창한 수림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철마다 풍광을 달리하며 절경을 이루고,
깊은 계곡을 흐르는 석간수(石澗水)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한다.
날머리에서 만나는
남장사(南長寺)와 관음선원(觀音禪院)엔 목각탱 등 몇 점의 문화재가 더 있어 살펴볼 만하다.
남장사로 진입하다 남장지 조금 못미쳐 좌측으로 안내판과 돌장승이 보인다. 그곳이 본격 들머리이다.
노음산 등산 안내판과...
개념도가 그려져 있다.
시도지정문하재 '남장리 석장ㅇ(南長寺 石長ㅇ)' 공식 명칭은 남장사 석장승이다.
안내판.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3호> 남장사 석장승(南長寺 石長丞)
이 장승은 남장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장승(石長丞 )이다.
장승은 마을 수호신, 이정표의 기능을 가진 민속신앙 문화재이며 사찰입구에 세워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찰 성역내의 금지된 규제와 풍수비보를 지켜주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상이라 한다.
그 복부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하였고 임진구월립(壬辰九月立)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임진은 극락보전의 현판기록과 대조하여 1832년(순조 32)
혹은 1892년(고종 29) 중의 하나라 추측된다.
처음부터 큰 바위를 다듬어 장승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형태의 바위를 골라 소박하게 손으로 다듬었다.
다른 석장승과는 달리 균형도 잘 맞지 않고 구체화된 표현도 없으나 원초적인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높이는 1.86m로 민간신앙과 불교가 어우러진 신앙예술품이다.
보통은 왕방울 같은 눈망울은 둥글게 하는 것이나 이 장승은 위로 치켜뜬 모양이며 콧날도 없이 펑퍼짐한 주먹코는 매우 크게 되어 있다.
입은 야무지게 다물고 있지만 형식적인 표현이라도 송곳니의 표시가 있고 수염은 마치 옷주름을 다듬은 듯하게 형태만 표현하였다.
머리는 상투라고는 보기 어려운 마치 불상의 육계와도 흡사하게 되어 있으며 귀는 표현하기는 했지만 모양만 나타나 잘 알아보기 힘들다.
얼굴전체는 바위 생긴대로 다듬어서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다.
안부에 올라섰다.
흩뿌리는 이슬비와 뿌연 운무가 잠긴 산길을 오르노라니 장맛날에 이만한 날씨도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정표 1
이정표 2
사위는 온통 먹통이다. 그저 상상만으로도 분에 넘친다.
바위 아래엔 운무의 바다다. 뛰어내리면 그저 아무탈없이 사뿐이 내려 앉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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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계단으로 안전을 확보해 두고 있다.
아쉬움이야 더 말해 무삼하리요.
돌아 본 모습.
노악산의 하이라이트는 기차바위를 밟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하고...
산행을 이어간다.
정상에 섰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의 정상석은 상주시에서 공을 들였다.
정상석
2충 팔각정자를 지나고...
중궁암 갈림길이다.
직진은 중궁암 100미터(3분)...
하산로에서 만난 꺾인 소나무.
이렇게 직각으로 꺾였으니 장애인가? (전봇대는 중궁암으로 향하는 시설인 듯...)
중궁암 푯말이 붙은 숲속엔 촉촉히 이슬(露)을 머금은 초목이 싱그럽다. 이슬 로(露)를 쓰는 노악산(露岳山)이 아니랄까봐.^^
관음서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곳의 이정표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다...
안내판을 일별하고...
세로로 관음선원(觀音禪院)이라 새겨진 해탈문을 들어선다.
문화재인 목각탱이 보존된...
관음전(觀音殿)은 문이 살포시 열려있다. <合掌>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923호>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觀音禪院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이 목각탱은 관음전의 주존불인 관세음보살상 좌상 뒷편에 있는 후불탱이다.
다섯장의 목판을 잇고 위아래로 다시 한 장씩 이어 붙였으며 전면에 금박을 하여 찬란하고 장엄하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네보살이, 그 주위로 2대 제자인 아난.가섭과 사천왕(四天王)을 새겼다.
그 위로는 과거3불(過去三佛)을 배치하였다.
목각탱 하단의 대좌는 연지(蓮枝) 형태로 굵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각 줄기 끝에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조각되었는데 이 연꽃이 연화대좌를 이루고 있다.
연잎, 연봉, 줄기 등이 강한 릴리프로 조각되어 있고 중심부의 본존은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사적기(寺蹟記)를 비롯한 관련 기록을 통해 1694년(숙종 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배후 촛불을 꺼 주세요. '촬영금지'라는 경고 글귀에 화들짝...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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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 앞으로 내려서서 남장사 가는 길은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길이다.
남장사 후문으로 들어간다. 후문 처마밑에 방란금(榜亂禁)이라 적혀있다. 조용히 하란 이야기인 듯...
남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32년(흥덕왕 7)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여 장백사(長柏寺)라 하였으며, 1186년(명종 16)각원(覺圓)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다.
그 뒤 1203년(신종 6) 금당(金堂: 법당)을 신축하였고, 1473년(성종 4)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35년(인조 13)정수(正修)가 금당 등을 중창하였다.
1978년 7월 영산전의 후불탱화에서 주불(主佛)과 16나한상을 조성할 때,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들을 봉안했다는 기록과 함께 사리 4과 및
칠보류가 발견되었다.
중고암(中高庵)이 있다.
이밖에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된 석장승이 있다.
다포식 건물의 보광전 좌측으론 교남강당(嶠南講堂)이 있다. 교남(嶠南)은 영남을 일컫는다.
지팡이와 모자를 계단아래에 벗어두고 보광전으로 올라섰다.
문이 굳게 닫힌 보광전 앞에 서면 늘 신도 벗지 않고 선 채로 합장하는 게 전부인 나의 기도방법으로 인해 부처님께 송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닫힌 문을 살며시 잡아당기니 법당 안에는 여신도 한분이 열심히 참배하고 계신다. - 合掌-
목각탱을 배경으로 중앙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990호인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尙州 南長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碑銘)>에 의하면, 한국에 불교 범패를 최초로 전파한 고승인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830년, 大和四年)하여,
“처음 석장을 상주 노악산(露嶽山) 장백사(長栢寺)에 놓았는데, 의원에 환자가 모이듯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보면 남장사의 전신은 장백사이며, 830년 이전부터 있었던 고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장사 보광전은 가장 먼저 건립된 불당으로 주존불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었는데 철로 불상을 조성하였으나 개금하여 전신이 금색으로 찬연하다.
철불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되었으며, 본 철불상은 조선 초기의 불상으로 조선 철불상 연구에 귀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철불 좌상의 좌고는 133㎝, 머리높이 20㎝, 무릎 폭 102㎝이다.
『상산지』사찰조에 의하면, ‘천년이나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는 스스로 땀을 흘리는 영험함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불자들에게는 이 비로자나불 숭배가 어떠했던가를 추측할 만하다 하겠다.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922호> '남장사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普光殿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이 목각탱은 보광전 주존본인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鐵造毘盧자那佛坐像) 뒷편에 있는 후불탱(後佛幀)이다.
길죽한 판목 일곱 장으로 연결하고 위에는 길게 1판석을 놓아 모두 여덟장으로 구성하였으며, 사방 가장자리는 액(額)으로 고정 시켰다.
중앙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두고 좌우로는 관음(觀音)과 대세지를 비롯하여 4구씩 3열로 비천(飛天), 권속(眷屬)을 조각하고 있다.
중앙의 좌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아미타불인데, 수인(手印)은 설법인(設法印)이고 광배는 거신화염광(擧身火焰光)이다.
관음과 대세지보살은 연화좌 위에 앉았고 다른 상들은 입상이거나 무릎을 꿇은 형태이다.
각 조각물 사이에는 보상화(寶相華)와 연화문, 연봉(蓮峰)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윗 부분에는 중앙 본존의 두광에서 솟은 서운이 피어오르면서 두 줄기로 갈라져 천상계(天上界)를 구획하고 비천이 배치되어 있다.
보광전 개금불사 인연록(普光殿 改金佛事 因緣錄)에 보면 1928년 개금한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전반적인 수법이나 양식경향이 대승사(大乘寺)의 목각탱과 유사하기 때문에 조선후기(19세기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고문.
문화재 스테인리스 안내판은 칠이 벗겨져 잘 보이지 않는다. <목각탱>
<철불좌상>
1977년 영산전 불화에서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당시 남장사 주지 수봉스님과 신도들의 원력으로 1979년 사리를 모신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석탑은 이층 기단의 튼실한 밑자리에 준수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석탑형식을 따른 듯...
<자료>
아래로 내려서면 극락보전(極樂寶殿)을 만나고 앞에는 두개의 석등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극락보전 앞마당 중앙의 삼층석탑.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635호로 남장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尙州 南長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에 따르면 순치 2년(조선 인조 23, 1645)에 수많은 사부 대중이 참여하고, 지희(智熙) 스님의 증명 아래 청허(淸虛), 영색(英),
현욱(玄旭), 천휘(天輝), 나흠(懶欽), 법찬(法燦) 등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상 제작의 수조각승 청허는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인 청헌(淸憲)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즉 양감이 강조된 방형의 큼직한 얼굴, 당당한 어깨, 넓고 안정된 무릎,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선묘를 추구하여 건장하면서도 평담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어 청헌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한편 이러한 형태미는 임진왜란 이후 자존심을 회복한 불교 재건사업과 맞물려 새롭게 대두된 양식적 경향으로 이해된다. <자료>
범종루(梵鐘樓)를 걸어나와...
돌아선 모습.
범종루 앞의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오랜 연륜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잡석(雜石)으로 낮게 쌓은 축대위에 자연석 주초(柱礎)를 양 쪽에 놓고 세웠다.
건물의 특색은 양쪽 기둥 앞뒤로 모난 기둥을 붙여 세우고 다시 또 하나씩의 활주(活柱)를 고여서 중압을 받쳐 주고 있는데 그 주두(柱頭)가 용(龍)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단히 사실적이다.
정면 추녀 밑에는 '광서8년(光緖八年)'(1882)에 '노악산남장사(露嶽山南長寺)'란 편액이 해강(海岡) 김규진의 글씨로 쓰여져있다.
(그의 글은 해인사와 개심사에도 남아 있다.)
이 건물의 양식은 ㅡ자형에 정면 1칸(4m), 측면 1칸(2.6m)형태의 3평으로서 전체적으로 건축 외형에서 균형감과 볼륨감이 있으며 특히 구조적인 면을 고려한 까치발의 조각수법이 특이하다.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고색창연한 기둥이 천년된 칡뿌리라고도 하고 싸리나무라고도 하는데 명확하지 않다.
중간 활주를 까치다리형으로, 상단을 용머리로 조각한 솜씨는 여느 절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주문 안내판.
비가 그친 사찰진입로 한켠에 감사님과 분순씨가 무언가를 열심히 관찰하고 계신다.
가까이 가보았더니 제법 큼지막한 달팽이다. 일단 카메리에 담아갖곤 산행기를 올리면서 자연관찰을 탐색해 본다.
참달팽이였다.
참달팽이는 한국고유종으로 멸종위기 동물인 동시에 현재 우리나라에 몇 종 남지 않아서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이다.
보통 껍데기 높이 18mm, 지름 27mm로 북한산달팽이와 매우 유사하다.
나층은 5층이며 차체층 이후 각정 부위까지의 높이가 북한산달팽이보다 낮고 제공은 좁고 깊다.
성패의 각구 끝은 두꺼워지고 약간 퍼지며 활층의 흔적이 있다. 색대를 갖는 0200형과 색대가 없는 0000형의 2가지 형태가 있다고 한다.
주차장으로 내려서서 계곡으로 빨려 들어간다.
일행들은 첨벙하며 온몸으로 석간수를 맞았지만 컨디션 별로 좋지않은 나는 등목만으로 산행흔적을 지운다.
주차장의 이정표
이슬비와 뿌연 안개의 회색천국을 뒤로하고 남으로 내리닿는 길.
오래간만에 마신 몇 잔의 술기운에 눈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바위 벼랑과 물먹은 나무섶이 아슴하게 살아난다.
산을 내려가면 산에서 얻은 에너지를 '곶감 빼먹듯'야금야금 빼 먹을 것이고,그 에너지가 고갈될 때쯤이면 다시 또 산을 찾으리라..
산을 오르며 <정 호 승>
내려가자 이제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끝까지 오르지 말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춘란도 피고 나면 지고 두견도 낙엽이 지면 그뿐
삭발할 필요는 없다 산은 내려가기 위해서 있다
내려가자 다시는 발자국을 남기지 말자
내려가는 것이 진정 다시 올라오는 일일지라도
내려가자 눈물로 올라온 발자국을 지우자
눈도 내렸다가 그치고 강물도 얼었다가 풀리면 그뿐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올라왔다
내려가자 사람은 산을 내려갈 때가 가장 아름답다
산을 내려갈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강요당하지 말고
해방되기 위하여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가자 북한산에도 사람들은 다 내려갔다
첫댓글 산마루님, 구포왜성, 북천전적지, 노음산까지 잘 정리하신 좋은 글을 즐겨 보고 갑니다.
이제사 한덤님의 댓글을 보았습니다.잘 보셨다니 고맙고요,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데...^^
@산마루 또 뵐 수 있기 바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