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보시를 질적으로 나누면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주상보시는 문자 그대로 상에 머무는 보시입니다. 상(相)은 ‘나다’하는 것입니다. 상을 낸다는 것은 자기를 과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유주상보시는 ‘나다’하는 생각이 있는 채로 하는 보시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왔다고 하는 상이 남아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갚기를 바라게 되고, 혹은 머리 속에 기억해 놓고 상대방이 갚지 않는다든지 서운하게 하면 ‘네가 그럴 수가 있나?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을 가지고 하는 보시는 완성인 바라밀 행이 아닙니다. 그런 보시가 얼마간은 그런대로 통할 수 있는 선행일는지 몰라도 열반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장엄하는 실천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보살도의 실천에 의한 보시는 상에 머무는 보시가 아니라 무주상보시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나눔이니 마치 저 허공을 날으는 새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주상보시입니다.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靜)이라고 하는데, 즉 보시하는 사람(施者)과 보시하는 물건(施物)과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 이 셋이 모두 깨끗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에게 얼마를 베푼다는 생각마저 텅 비워버린 보시를 말합니다.
우리 중생은 ‘나다’하는 것이 끼어들어 있어서 조그만 것을 돕고 베풀고도 상을 남겨 놓습니다. 아주 가까운 부자관계뿐만 아니라 부부, 친구간에도 그렇습니다.
당연히 내가 할 일로 알고 했으면 될텐데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물을 대할 때 서운한 감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감정이 상을 앞세우면 고생입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가지고 있으면 시어머니 고생이 있고, 며느리의 상이 있으면 며느리 고생이 있습니다. 내가 박사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틀림없이 박사의 괴로움이 따릅니다. 반대로 그런 상을 내려 놓으면 평화롭고 평안합니다. 불교는 어쩌면 그 고질적인 상병을 고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시는 아상(我相)의 뿌리를 치유하는 실천이기 때문에 무주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무주상보시야말로 열반의 땅, 피안의 세계로 가는 보시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상없는 보시는 영원한 공덕입니다. 즉 무루복(無漏福)을 짓는다고 해서 새어나가지 않는 영원한 복입니다.
반대로 상으로 하는 보시는 유루복(有漏福)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베푼 것이므로 공덕을 짓긴 짓는데 새어나가는 공덕이니 영원치 않고 새어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왕이면 새지 않는 복을 지어야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에 등 하나를 켜면서도 온갖 상을 다 낼 수도 있고, 청정한 등공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등이 크니, 작으니, 또는 법당의 정면 한가운데 걸렸으면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면 등을 밝힌 공덕이 다 새어나가고 맙니다. 등이 구석에 켜졌다고 부처님께서 못 보시겠습니까?
저 빈녀(貧女)의 일등(一燈)은 오직 “성불하여지이다”하는 간절한 원이 있을 뿐, 상이 없는 깨끗한 등공양을 올렸으므로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영원한 마음의 등, 진리의 등불임을 뜻합니다. 마음의 등불, 진리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무주상의 보시로만 가능합니다.
보시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나중에 한꺼번에 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는데, 보시는 그렇게 해서는 언제까지나 할 수 없으며,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대로 해야 합니다.
<백유경>에 보면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날을 받아 잔치를 하게 되어 젖소에서 우유를 짜서 미리 준비해 둬야 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짜면 번거롭고 저장할 곳도 마땅치 않으니, 그냥 소 뱃속에 놓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짜자는 생각으로 송아지도 떼어놓고 한 달쯤 지냈습니다. 그리하여 잔칫날 소를 끌고 와 우유를 짜려 하는데 다 말라버려 우유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재산이 많이 모이면 하자.’는 생각을 가지지만 재산이 모이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또 모인다 해도 실제로 보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시는 어던 형태로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그때그때 실천되어야 할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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