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이북에서 아버지를 따라 혼자 내려온 어머니는 내가 젖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고 할머니는 구박을 해서 집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6.25 난리가 터지자 만 2 살이었던 나는 할머니 등에 업혀서 예산에 있는 이모할머니 댁으로 피난을 갔다. 그 후 아버지는 사업한다고 부산으로 가고 우리 남매는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아버지와 잠깐 동거했던 여인의 집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과부에게 임신만 시켜놓고 부산에 와서 처녀장가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찾아 다시 부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하게 젊은 새엄마를 만난 것도 국제시장의 어느 다방이었다. 철이 있을 리가 없는 새엄마가 우리 남매를 받아들이지 않아 우리 남매는 다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신다고 동분서주 다니셨지만 변변한 사무실도 없어 다방에서 주로 사람들을 만나 일을 보시고 하셨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를 찾아 국제시장 근처의 이 건물 저 건물 다방마다 문을 열고 다니다 운이 좋게 아버지를 만나면 없는 돈에서 얼마를 주면 밥을 사서 먹고 또 이삼 일 견디어 나갔다. 어떤 때는 잘 곳이 없어서 공사 중인 건물 안으로 몰래 들어가 잠을 자던 때도 있었다. 하루는 대팻밥이 수북이 쌓여 있는 데서 새우잠을 자다가 우리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란 야방(야간 경비) 보시는 아저씨가 ‘누구요?’하고 소리를 질러서 황급히 도망을 나온 적도 있었다.
원래 부산은 조선 후기에 부산포였고 정작은 동래가 큰 고을이어서 부사가 재직하던 도성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부산이 항구로 개발되었다. 그러다가 그만 6,25가 터지는 바람에 피난민들이 몰려왔는데 워낙에 평지가 손바닥만 지형적 특성 때문에 피난민이 산기슭에 천막을 치거나 양철조각이나 사과상자로 하꼬(상자)방을 지어서 생겨난 것이 피난민촌이다.
그래서 당시의 부산은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으로 가득해서 판잣집에서 켜놓은 전깃불 때문에 수송선을 타고 밤에 부산항에 도착한 미군들은 부산에 ‘웬 고층건물이 저렇게 많은가?’ 하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동네에서 아이들은 여기 저기 뒹굴러 다니는 헌 철모에다 종이로 계급장을 만들어 부치고 산동네 대항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병정놀이를 했다. 밤에는 흑인 병사들이 맥주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던 것이 무섭게 느껴지던 기억도 난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와서 통칭 성동구 신당동이라고 하는 동네 주변을 뱅뱅 돌며 이사를 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당동은 아래 쪽은 소위 적산가옥이라고 부르는 일본 사람들이 지어 놓은 번듯한 양옥집이 위 쪽으로는 한옥이 산 쪽으로는 해방 후 가난한 사람들이 지은무허가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무허가 집은 아닌 주로 한옥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어떤 때는 형편이 좋아져서 집을 독채로 얻어서 셋집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잘사는 사람들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집에 대한 기억이 많다. 박정희의 군 선배로 천도교 교령을 하다가 박정희와 사이가 나빠져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죽은 최덕신의 학교 운동장만한 정원이 있던 집, 대문이 웬만한 집 만했던 이병철 씨(우리는 돈병철이라고 불렀다) 집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병철 씨 집 대문의 처마 밑에서 놀다가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김종필 씨 집 앞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차를 구경하기도 하고, 한양대학교 이사장 김연준 씨의 집에서 초상이 났을 때는 화환이 온 동네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부자 동네의 변두리에서 이사를 다니다보니,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명사들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낸 적도 있었다. 초대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지낸 장기욱 박사의 손자, 문교부장관이었던 고광만 씨의 손자,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 대장의 아들 등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동네에 그냥 살았다고 해도 그들과 끝까지 친구로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보통 동네 골목에서 논다. 그러다가 크면 동네 골목을 벗어나서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국민학교 6 학년 어느날 갑자기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다.
4.19가 터져서 학교가 문을 닫아 심심하고 할 일이 없을 때 세상이 뒤숭숭해서 호기심으로 동네 아이들을 인솔(?)했는지 형들을 따라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신당동에서 골목골목으로 돌고 돌아 을지로 2가에 있는 내무부(지금 한전자리)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대학생들이 경찰과 대치 중인 광경을 목격했다.
또 하루는 멀리서 연기가 나길래 달려가 보니 약수동에 있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라며 최인규의 집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불 꺼진 다음 창고에 들어 갔더니 노트가 잔뜩 쌓여 있어서 무더기로 약탈(?)해 가지고 와서 홍길동이 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노트에는 고무인으로 '어린이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내무부장관 최인규'라고 찍혀 있었다. 그가 그 다음 총선에서 출마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지역구인 남양주군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렇게 4.19를 체험하면서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고교 졸업 후 40 살이 넘어서 처음으로 만난 한 동창생이 몇 가지 안부를 묻고나서 "야! 우선 너한테궁금했던 것이 있다.", "뭔 데?", "너 중 3 때 도서관에서 사상계를 책상에 쌓아두고 보고 있더라. 그 때 너 그 내용을 알고 본거냐? 아니면 폼으로 그러던거냐?"”라고 물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아마 그랬을 것도 같다. 나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인 1964년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학생회장이 교단 위에 올라오더니 지금 부터 데모를 하러 나간다고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선생들이 기겁을 해서 말리기 시작하자 교장은 나가려면 교실로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해보고 결정을 해서 나가라고 했다.
교실에 들어와서 담임이 한일회담에 대하여 토론을 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는 녀석이 없어서 내가 나가서 평소에 사상계를 보고 갈고 닦은 실력으로 설명을 했다. 당시 김종필이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사람은 15%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고등학생인 우리라도 나가서 시위를 해서 15%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열심히 급우들을 설득한 결과는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라 선동한다는 이유로 담임으로부터 떡실신이 되도록 얻어맞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컸는데 그만 신학교를 잘못 가서 ‘내가 바뀌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다시 제 정신이 들어 ‘세상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목회 현장에 나와서였다. .
예수는 자기가 세상에 온 이유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고 말했다. 이 말은 갈등, 혹은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창조적 존재로 살아 가자면 세상과의 불화를 피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싸움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함께 힘을 모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공동체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다. 함께 모여 더불어 살면 그 보다 더 좋을 수 없지만 함께 살지 못하더라도 공동체적생각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