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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형제가 되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2:10~18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에 히브리서 2장 10절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은 다시 이 구절부터 18절까지에 담긴 주제를 가지고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구절의 주제는 구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는가입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자신을 낮추어 구원받은 대상인 사람과 동일학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두 번째는 그가 죽음과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마귀로부터 사람을 붙들어주려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구원받는 자들을 위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험을 받는 주의 백성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2장 10절로부터 13절까지의 구절들을 통하여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는 자들의 형제로서 자기를 낮추셨다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란 세상 만물의 창조주요 만사의 대주재자가 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존재 이유요 그의 영광이 그 모든 존재의 목적이요 모든 사건과 일들의 원인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굴복하게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굴복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그 오는 세상의 통치자로 부름받은 자들을 두고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이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많은 아들들을 그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시니, 이 영광은 장차 그가 완전케 하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많은 아들들 곧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가는 자를 정하셨으니, 그를 여기서 ‘구원의 창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창시자’라는 말은 ‘아르케고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는 자’로서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나라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이끌고 들어가는 구원의 선구자이십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 12:2에서도 재사용되는데 거기에서도 예수님께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 말씀에 이르기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갖게 만드는 선구자이십니다. 또한 ‘온전하게 한다’는 단어는 ‘텔레이오우’라는 단어로서 ‘완전하게 한다, 충족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께 대한 믿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게 하도록 우리 안에 믿음을 심어놓으신 믿음의 선구자이시자 또한 우리 믿음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자라나도록 하시는 믿음의 완성자이시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자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신 분이요 우리 믿음을 온전히 자라가서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의지적으로 결단하며 믿는 것도 분명한 일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믿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 믿음이 끝까지 보존되며 온전하게 되는 것 역시 주님께서 은혜로 주심으로써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며 끝까지 이 믿음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우리 주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택하신 많은 아들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들이는 일에 있어서 그 구원의 선구자가 되시는 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는 일에 있어서 구원의 창시자는 당연히 온전함이 필요합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당할 존재인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들이며 그 장차 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자리에 있게 앞장서서 이끌어들어가시는 일은 너무나 큰 중책이 아닙니까? 바로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기에는 그는 대단한 존재요 온전한 존재가 아니면 안됩니다. 바로 그렇게 큰 일을 이루기 위한 온전함을 갖춰야 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이 구원의 창시자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의 하반절에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라는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그 구원의 창시자가 출신 성분이 좋아야 완전해지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아들이기에 이보다 더 완전한 조건은 없습니다. 죄가 없는 자라야 한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전혀 없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기에, 이것도 완전하게 조건을 충족하신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완전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구원의 창시자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많은 아들들을 이끌고 영광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선구자가 될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구원받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은 고난을 겪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 후에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신음하며 저주 아래 시달리며 각종 질병과 고통과 죽음과 영벌의 위협 아래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 고난 중에 살다가 고난 중에 죽어가고 영원한 심판의 장소로 떨어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 역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고난에서 면제된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선구자 역시 육체를 입고 이러한 고난을 함께 겪는 자가 되지 않으면 그들을 구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만 없을 뿐 모든 고난을 다 겪으시면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우리와 동일한 형제로서 지내셨던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나시고 말구유에 그 몸을 누이셨고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헤롯 왕의 살해 위협을 받으시고 이방 땅 애굽으로 피난살이를 하시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돌아와서 나사렛 촌 동네에서 살아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목수의 아들로서 일하면서 집안을 섬기며 많은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그는 마귀의 시험을 당하셨으며 곧장 당시 종교적 권력을 쥔 기득권자들의 견제를 받으셨고 미움과 의심과 비방과 살해위협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의 열렬한 요구를 채우고자 그는 밤 늦게까지 자지 못하고 새벽 일찍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기르시며 그 제자들의 몰이해와 미성숙을 견디셨으며 마침내 자기 백성의 악함과 제자들의 배신을 겪으셨으며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라고 그의 고난의 모든 것들을 다 통과하시면서 마침내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온전하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이 마땅히 당할 저주와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으셨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들어갈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선구자로서 그들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다 겪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에 합당한 온전함을 이루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무 죄도 없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의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감당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또한 그 독생자를 그토록 큰 고난으로 밀어넣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이사야 53:10 말씀에서 이 점을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처럼 구원의 창시자가 고난을 당하며 속건 제물로 하나님 앞에 자기 생명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많은 아들들을 살리는 일은 이미 작정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독생자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을 그토록 깊고 두렵고 험한 고난의 자리로 내어모시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들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을 인하여 영원히 찬양을 드립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제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는 자들과 한 형제가 되셨습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구원의 창시자요 구원의 선구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거룩하다’라는 ‘하기아죠’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구별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별되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훌륭하거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아브라함 때에 이미 그의 후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을 것을 작정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해졌습니다. 많은 그릇이 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되도록 구별되어 제작된 그릇은 거룩합니다. 많은 소와 양과 염소 등 가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우리에 있지만 그것들 중에 하나님의 제단에 갖다 제물로 바치려고 구별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자기 백성이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거룩하게 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룩하게 함을 입도록 하신 이 곧 거룩하게 하시는 이가 바로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30, 31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거룩하게 하시는 이 우리 구주 예수님이 없이는 죄인이요 부패하여 세상에서 가장 거짓 된 존재인 우리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구원받은 자가 되었으니 우리는 오직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감사하며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거룩한 삶에 살기를 힘씁시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데, 그를 통하여 거룩하게 함을 덧입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은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고 히브리서 기록자는 11절에서 말씀합니다. ‘한 근원’이란 바로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질적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써 거룩하게 함을 입은 구별된 구원받은 자들은 한 근원에서 났기 때문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지극히 부족하고 어리석고 연약하고 죄 투성이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리를 주님은 자기의 형제라고 주저함 없이 곧장 인정하시고 그렇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첫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한복음 20:17)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버려두고 제 살 길 간다고 도망쳐버린 제자들, 계집 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시치미 뗀 제자를 주님은 내 형제들이라고 그렇게 주저함없이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크고 놀라운 사랑과 그의 지극히 큰 겸손과 자비를 인하여 그를 찬양합시다.
12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형제 됨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록자는 다시금 언급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이 말씀은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시인 시편 22편의 말씀 중 일부입니다. 고난당하신 메시야가 그의 고난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을 자기 형제들이라고 언급하며 함께 교회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에서는 성도들을 자기의 자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여기서 보면 예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녀라고 한다고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향하여 마치 자기의 어린 아이들처럼 부르신 적이 종종 있습니다. 마가복음 10:24,25 말씀에서 이르기를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어려운지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라고 하였으며, 요한복음 21:5 말씀에서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해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없느냐”
라고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구주이신 예수님께는 형제이나 아들 딸이자 아기나 소년 소녀 같은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선구자이신 예수님은 친히 고난당하심으로써 자기의 형제들이자 자기의 자녀들인 구원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에 온전케 되셨고, 그리고 마침내 고난받는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이유가 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난 형제로 우리를 삼고자 함이요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하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함이요 그와 더불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교회의 일원되게 하기 위함이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사 저 영광의 나라에 너끈히 이끌어들이시는 일에 온전하게 되신 우리의 구원의 선구자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어서 구주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겪으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4절로부터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한 부모 밑의 자녀라면 같은 피, 같은 몸을 이어받은 같은 혈육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물의 창조주요 만유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신 분이신데, 그가 지극히 약하고 병들고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인 인간과 동일한 혈과 육을 입으셨으니, 이는 그가 우리 사람과 동일한 형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과 형제로서 동일한 같은 혈과 육을 가진 연약한 인성을 지니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시되 특별히 죽음을 겪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자존자요 영원한 영이시고, 천사도 피조물이지만 육신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혈과 육을 가진 인간만이 죽을 수 있는 연약한 혈육의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권세 아래 무력하고 죽음의 압제 아래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한평생 자기가 죽을지 모르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늘 죽음을 무서워하는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지혜자라도 죽음 앞에는 무력하고 아무리 권력자라도 죽음의 세력 앞에는 꼼짝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부자를 가진 자도 그 많은 재물로도 죽음의 사자를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절세 미인도 아무리 용맹하고 강한 용사도 죽음을 물리칠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은 자라도 안 되고 아무리 힘든 도를 닦은 종교가라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담 이래로 그 어떤 자도 죽음 앞에서는 감히 교만을 부릴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들 위에 왕노릇하는 사망의 권세를 누가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죽음의 권세 아래 무력하고 공포에 질린 인간들을 위하여 구원의 창시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으니 그가 이 무서운 죽음의 권세를 꺾고자 친히 나서신 것입니다. 그가 그 죽음의 권세를 어떻게 꺾고 죽음의 세력을 잡고 늘 인간을 흔들어놓는 악한 영 마귀를 무력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마귀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로서 주어진 사망을 가지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악한 영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은 자들이므로 마귀는 합법적으로 죄 값으로 사망으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시지만 범죄하고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은 결국 마귀의 결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영원한 사망 길로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들이기 위해서 사람의 죄를 피로써 씻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버리고 해방시키고 마귀를 멸하시고 사망의 두려움의 결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사망에 이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를 다 담당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에게서 모든 죽음의 권세가 꺾여버리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무력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 뒤에 다가올 영원한 고통의 장소 유황불의 지옥에 떨어지는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실로 예수 그리스도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 구원의 창시자는 사람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혈과 육을 입으신 것은 그가 혈과 육을 가진 자로서 죽음에 넘겨짐으로써 택한 백성들에게서 사망 권세를 완전히 폐하시고 자유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의 삯과 심판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히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삼킨 바 되고 주의 백성들에게는 그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이 부은 바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아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도 육신의 죽음의 고생은 남아 있지만 그가 호흡을 그치고 심장이 멈추어 그의 육신은 완전히 죽게 될지라도 그 순간 그 몸에 깃든 불멸의 영혼은 그 몸을 떠나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 성에 들어가서 거룩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더불어 천사의 시중을 받으며 주님을 찬양하는 행복한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 잡힌 자들을 해방시키신 일은 결코 천사를 붙들어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혈육을 가진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혈육을 가진 모든 사람을 붙들어주시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16절 후반절에 나온 말씀처럼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가리킴이요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인 육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진심으로 믿는 자들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위대하고 놀라운 축복 곧 사망에서 자유롭고 마귀에게서 놓여나고 죽음 앞에서 당당함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당하는 순간 마귀의 채찍을 받으며 영원한 사망의 고통을 겪는 유황 불의 장소로 끌려 들어가서 영원한 사망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 끝없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17절과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함께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구원의 창시자, 구원의 선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고난 당하심으로써 온전하게 되셨으니 이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으니, 그는 우리의 형제가 되셨으며 우리와 같은 형제로서 혈과 육을 가진 존재가 되어 죽음까지 겪으셨으니, 이로써 우리를 압제하며 공포에 떨게 하던 죽음까지도 정복하셨고, 마귀도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대신 죽음에 삼켜지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서 눌리지 않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장차 들어갈 나라에서는 천사가 통치하지 않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형제로 불러주시고 그들을 위하여 같은 혈과 육을 입으시고 죄 값으로 내몰린 죽음까지도 대신 당해주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장차 올 영광의 나라를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는 그 나라의 영원한 왕중 왕이시요 우리는 그의 피로써 거룩하게 되어 그와 더불어 공동통치자로서 장차 올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택하심을 입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붙들어주신 것이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그가 범사에 그렇게 형제들과 같이 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서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함께 동일하게 혈과 육을 입고 고난을 겪고 죽음까지 함께 겪어야만 그들을 불쌍히 여길 있고 공감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두 친구가 동일하게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고난을 겪고 비참하게 낮아지고 온갖 질병과 수치요 무기력의 처지에 떨어졌을 때에 정말 나를 깊이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며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두 친구 중에서 나와 같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 살고 고생 없이 자란 친구가 해주는 위로의 말이 내게 힘과 용기가 되지 않습니다. 나처럼 동일하게 고난도 당하고 사기도 당하고 깊은 병에서 걸렸다가 낫기도 하고 수치와 모욕을 겪고 배신의 아픔도 겪은 다른 친구가 내게 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 더 깊이 나를 세우고 힘을 주고 위로해주는 말로 마음에 닿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아파봤고 슬퍼해봤고 낙심의 늪에 빠져보기도 했고 마귀의 영적 시험과 친구의 배신과 질병과 죽음의 무시무시한 공포의 동굴도 지나가보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모든 일에 함께 고난을 겪은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긍휼이 풍성하며 충성스럽게 돕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너그럽고 가장 신실한 대제사장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너끈히 속량해주시고 우리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할 때에 시험받는 우리를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여, 우리의 구원자시요 우리의 형제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죽음까지 대신 겪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것을 기억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시험 중에 낙심하지 맙시다. 그가 죽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자길들 버리셨으니, 그 무엇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도, 죽음까지도, 우리를 그의 사랑의 능력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니 그 어떤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감히 삼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범사에 우리와 함께 되신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우리 대제사장이신 주님을 의지하여 모든 시험 중에도 담대하고 평안하고 그를 힘입고 기도로 맡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도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면서 천국 소망을 가지고 더욱 담대하며 즐거워하며 죽음 너머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