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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원리주의
[출처: KHALIL]
Ⅰ. 들어가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공기 테러나 무차별 인명 살상도 마다 않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문명세계의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분쟁과 테러가 있는 곳에는 예외없이 무슬림이 있다.” 우리가 ‘이슬람’하면 떠 오르는 생각은 대충 이런 식이다. 뉴욕의 무역센터 폭파사건, 알제리의 프랑스 항공기 납치 폭파사건 등 최근의 거의 모든 테러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서방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 이후 언론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와 학계에서도 이슬람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에서 사담 후세인이 웃기는 악역으로 등장한 것이나, 새뮤얼 헌팅턴이 에서 서구세계의 새로운 적으로 이슬람 세계를 지목한 것이나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해 이 글에서는 어떤 한쪽의 편협한 시각이 아닌 객관적 관점으로 살펴보겠다.
Ⅱ. 이슬람 원리주의
1. 명칭의 유래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 가운데 과격한 일파를 지칭한데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들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미국의 신교파의 일파로서 성경의 창조설을 확신하고 진화설을 전적으로 배격하였는데, 성경을 복음이자 유일한 권위서로 믿고 신앙생활에 몰두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전통적인데다 과격한 회교도를 이슬람 원리주의자(Islamic Funda- mentalist)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 이름 붙인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非이슬람세계, 특히 영어권에서 이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이외에도 이슬람 급진주의자(Islamic Radicalists), 이슬람 개혁주의자(Islamic Reformist)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는 정작 무슬림세계서에서는 아랍어로 우술리야(usuliyyah)라는 한 단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요즈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이슬람 부흥운동(nahdah; 부흥,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더 선호하고 있다.
2. 기원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전통적 이슬람이 부패무능하여 무슬림 사회가 쇠퇴・몰락하자, 이를 재생, 부흥해야 하겠다는 개혁차원에서 18세기 중엽에 무슬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곧 구미열강의 중근동 진출 이후 외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슬림 국가 대부분이 구미열강의 식민지, 반식민지 또는 그 영향권에 들어가 사회적 파탄을 가져오게 되자 이 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그 구호는 ‘본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이다. 즉 이슬람의 원점인 코란에서 해결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코란에 입각하여 해석상 하자가 없으면 이슬람적이어서 수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는 역시 이슬람 역사상 유사한 운동과 마찬가지로 ‘본래로 돌아가는 것’과 ‘시대적 상황의 요청’을 조화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또한 그 현상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흥주의, 개혁주의 및 급진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시대적으로는 18세기 이후에 등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동하고 있다.
3. 등장배경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이슬람교가 탄생한 이래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해온 것은 전통적 이슬람(Traditional Islam)이며, 이는 역사나 정치에 있어서 이슬람의 주된 흐름이었다. 종교적인 신앙을 초월해서 ‘전통적 이슬람’은 사회질서이며 인생철학이고, 경제원리체계인 동시에 또 통치방법인 것이다. 이슬람은 개인을 위한 종교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이슬람을 공동문화유산으로 생각하는 아랍인들은 지난날의 위대한 이슬람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이슬람 세계는 구조적 성격을 띤 위기를 맞는다. 새로 혁신된 서구의 과학, 기술, 사상제도와 맞부딪힌 이슬람 세계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패배를 맛보게 된 것이다. 과학・기술적인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무슬림들은 이슬람 문화가 기독교나 유럽문화보다 본질적으로 우수하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이슬람 세계의 참상을 확인하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초기의 순수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랍사회는 안팎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이슬람의 후진성은 서구사회와 비교해볼 때 두드러진 것이며, 서구열강과 내부갈등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 아랍인들이 꿈꾸는 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는 실현되지 못한채 외부의 문화가 아랍사회의 이슬람 문화보다 우세한 것을 보면서, 아랍인들의 감정은 민감해졌다. 이 민감성이 아랍 민족주의로 변신하고, 이어서 강력한 아랍 민족주의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변신한 것이다. 사실 1960년대만 해도 국제무대에서 이슬람의 영향은 미미했으며, 이슬람은 외면당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할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복고주의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그후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화되면서 리비아와 파키스탄에서 이슬람법이 강화 적용되고, 이집트와 터키에서 과격단체들이 출현하며,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가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키는 등 이슬람 원리주의 활동은 세력을 확장하고 활동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아랍민족에게 반서구적・반제국주의적 사상을 싹트게 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세력확장을 야기한 상세한 동기와 배경은 다음과 같다.
① 아랍국가들의 경제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 서구화로 인한 개발계획들은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공업화는 농업을 부진하게 만들어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하여 도시의 거대한 하류계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슬람속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사회적인 결속을 모색하게 되었다.
② 고유문화의 황폐화 때문이다. →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의 물질문화와 세속문화가 아랍 고유의 문화를 황폐화시켰고, 결국 천년 이상 내려온 무슬림들의 주체성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③ 이슬람 원리주의의 득세는 교육적인 요인 때문이다. → 서구의 식민지 교육은 이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였으나, 독립 이후 무슬림의 교육에 있어 종교는 다시 주요 부분이 되었다.
④ 이슬람 원리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대안으로 등장했기 떄문이다. → 예를 들어 이집트의 경우, 1960년대 나세르의 사회주의 노선과 1970년대 사다트의 서구화 정책이 이집트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수의 아랍인들은 이슬람만이 가장 자연스러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인한 반이스라엘・반서구 감정 때문이다. →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는 서방의 농간으로 완성된 작품으로 생각한다. 또한 팔레스타인 문제도 서방에 의해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로 아랍세계에 내재하게 되었다고 여긴다.
⑥ 서구식 경제・정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서구식 경제방식은 가난을 가져왔으며, 서구식 정치제도는 독재를 가져왔고, 심지어 서구식 전쟁은 패배를 가져왔다고 믿으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방식을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무슬림은 그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길은 알라가 국민에게 제시한 ‘진리의 길’이라고 믿는다.
⑦ 근대사에서 당한 쓰라린 식민통치경험 때문이다. → 아랍민족의 근대정치사는 피식민지 정치사의 쓰라린 경험이다. 그들은 오늘날 이슬람세계를 분열시키고 타락시킨 장본인은 서구의 제국주의이며,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바로 이슬람의 수호라고 믿고 있다. 이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더욱 접근하는 것으로서 서구지역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을 ‘알라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국은 대적, 악마의 화신이며, 모든 선의 표상인 이슬람의 극악무도한 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4. 이슬람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의 정의 (by ZHANG XIAODONG)
첫째, 이슬람 원리주의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단체나 조직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네 명의 정통 칼리프들의 시대를 회고하며, 이슬람 사회의 재건을 꿈꾼다.
둘째, 이들 단체나 조직의 목적은 현재의 정치, 사회적인 시스템을 정당하거나 혹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 폐지하거나, 바꾸거나, 전복시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목적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셋째, 이슬람 원리주의는 민중에 의한 이슬람 운동이며, 정부에 의해 제창되고 촉진되는 ‘Islamilization Movement’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란이나 수단과 같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Popular Islam’이 옛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넷째, 이들은 아주 강력하게 외래문물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 특히 서구의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그들의 주된 적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서구의 침략과 장기간의 식민지화, 그리고 서구화가 이슬람 사회의 쇠퇴와 정치적인 붕괴의 원인이다.
5. 역사적 전개
초기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예는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일어난 ‘와하비 운동’과 리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사누시 운동’이다. 현 세대의 이슬람 원리주의의 역사는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이의 출현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확장과 이슬람 사회의 몰락과 식민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원리주의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문제는 어떻게 무너져가는 이슬람 사회와 국가, 종교와 문화를 구제하고 개혁하는가 였다. 1928년에 Hasan al-Banna가 이집트에서 이슬람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1941년에 Mawlana Abl Ala Mawdudi가 인도에서 Islamic Society를 설립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이슬람 원리주의는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정인 성격을 띠지만, 1960년대 이후 그 성격이 크게 변했다. 온건주의를 버리고 투쟁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의 Sayyid Qutb는 투쟁적이고 급진적인 이슬람 운동의 창시자였다. 그는 그 당시의 이슬람 사회는 이슬람의 이상과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야만의 시대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들은 선봉부대를 조직하고 성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부터 Qutb는 기존 사회제도에 대항하는 이슬람 운동을 펼쳤다. 원리주의자들은 기존의 이슬람의 통치자는 서구나 동구 이해관계의 대리인이고 마찰의 희생자라고 생각했기에,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슬람 국가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도 없었고 무슬림의 이해를 보호해 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원리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를 뒤엎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슬람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슬람 원리주의의 출현은 이슬람 사회의 외적인 압력과 내적인 위기에 의한 직접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의 변화는 그 압력과 위기가 이전보다 더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자기성찰과 자기구제의 운동이었다. 다른 문명에서의 개선 노력과 비교해 불 때 그것의 유일한 차이점은 신앙과 급진적인 방법을 통한 호소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원리주의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첫째,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과격 이슬람 원리주의자, 단체, 조직들은 납치, 암살, 폭파 등을 동원한 맹렬한 전쟁을 기존 권위(정부)에 대항해 펼치고 있다. 둘째, 온건한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이들은 기존의 정부에 대한 참을성은 잃었지만,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들은 자선단체 등을 만들어 빈민층을 돕고, mosque(이슬람 사원)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기에,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어마어마한 기부를 받는 종교집단이었기에, 이 결과 정부의 기능은 약해졌고, 온건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셋째, 합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지역적인 행정이나 의회에 참여하길 원하며, 기존의 체제 아래서 그들의 이슬람 이상을 실현하기를 바란다.
중동 국가들에 있어 최대의 위협은 온건한, 또는 합법적인 이슬람 조직이다. 그들은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이슬람 교도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기 떄문이다. 온건파나 합법적인 조직의 발전을 저지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만약 이슬람 국가들이 정치 정당이나 선거의 참여를 더욱 확대한다면 승자는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6. 국가의 개념
이슬람 원리주의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이슬람 국가의 개념을 잘 정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울라나 마우두디였다. 이슬람 정치체제에 대한 서구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우두디는 아주 명확하게 이슬람 국가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 형태는 이슬람 성법에 기초한 완전한 신정주의 국가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과 개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슬람 정치이론의 기본 원칙은 일원적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고,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민은 신의 종복에 불과하고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세속적인 서구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조는 주권재민에 있다. 이슬람 국가체제는 대중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 않고 신의 주권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 통치하는 자는 칼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정할 수도, 함부로 법을 폐기할 수도 없다.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합의에 의존한다. 이런 면에서 마우두디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 체제에 ‘신정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셋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은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선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데 있다. 넷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 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둔다. 이슬람 국가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 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아니한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체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Ⅲ.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현재적 상황
1979년 중동의 가장 서구화 된 석유부국 이란에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이슬람 혁명이 성 공했을 때, 서구는 경악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을 껴안은 아래로부터의 이슬람 혁명은 50년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빼앗긴 대중의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주었다. 그들은 조금 덜 가졌지만, 전보다 더 행복해 했다. 주인의식과 이슬람의 도덕성이 살아 숨쉬는 사회, 자신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바탕 위에 꽃피는 첨단과학의 낙원을 그들은 꿈꾸었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지난 18년간 서구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무역제재에도 그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빠른 템포의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사회를 선호하는 이러한 민중의 뜻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권의 많은 문제점과 경제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쿠데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만약 그런 사태로 발전하더라도 친서방적인 정권의 출현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는 중동전문가들의 지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알제리는 독립 후에는 30년 가까이 군부에 의한 일당독재에 시달렸다. 자신들의 전통과 고유한 이슬람 문화는 말살되고, 프랑스어를 쓰는 프랑스인화 되었다.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시위는 급기야 1988년 시민폭동으로 연결되었고, 군부는 다당제의 도입과 자유로운 총선을 약속하였다. 이슬람의 회복을 갈구하는 대중들은 1991년 12월에 실시된 1차 자유총선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신생 '이슬람구국전선(FIS)'에 표를 몰아 주었다. 이리하여 이슬람 세력은 430석중 188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슬람 세력의 집권을 앞둔 시점에서 군부는 돌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선결과의 무효를 선언했다. 더구나 FIS는 불법정당으로 해산되었다. 이슬람식 정치를 표방하는 FIS의 집권은 서방과 알제리 군부의 이익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와 인권을 그처럼 강조하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도 독재군부를 두둔하면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민주적 결과를 외면하였다. FIS와 그 추종자들은 분노하였고, 그 중 급진적인 세력은 '이슬람 무장단체(GIA)'를 결성해 반독재, 반서구 무력투쟁에 나서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을 중심으로하는 급진성향의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약진은 아랍국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1978-1982년에 걸쳐 '무슬림 형제단'의 반정 투쟁이 극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아사드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소탕당하였다. 1981년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도 '형제단'의 행위로 알려져 있다. 요르단에서도 1989년 4월의 총선에서 원리주의 세력이 의회 의석의 45%를 차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더욱이 수단에서는 1989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국민이슬람전선'이 집권함으로써 이란에 이어 두번째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등장하였다. 이 외 튀니지에서도 1983년 식량폭동 이후 대량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한 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나흐다'를 지지하여 기세가 등등했으나, 군부의 소탕으로 현재는 지하로 잠적해 있다. 원리주의 성향의 이슬람부흥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90년대였다. 동유럽과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의 중동각국에 대한 침탈이 더욱 가속화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무너진 사회주의의 축을 이슬람이 대신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노골화된 서구의 침략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졌기 때문이다.
Ⅳ. 나오며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양차 대전중 이슬람 세계의 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 태동된 근대적인 현상이며, 2차 대전후 더욱 중요성을 띠며 발전해 왔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완전한 삶의 방식으로서 만연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종교적인 이념에 대해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 개혁 운동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 정치-이념적인 그리고 문화-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우선 정치-이념적인 면에서는 외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 나아가 서구의 자유주의와 구소련의 맑시즘의 문화적 영향과 이념적 간섭에 대항하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독특한 이슬람 문화의 동질성 주장과 본래적인 이슬람의 믿음, 규범, 의례에 기초한 신앙심 회복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50년동안 이슬람 헌법의 제정과 샤리아의 실시, 민주주의와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중대한 정치쟁점이 있을 때마다 이슬람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정책적인 수정과 반대집단과의 정치적 제휴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개혁론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슬람 국가의 수립에 매진해 왔다. 동시에 대중을 선도하고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 교육의 이슬람적 개혁, 성적으로 천박하고 외설적인 공공매체의 정화, 무신론적인 이념서적의 금지, 남녀공학 교육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개혁적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정치-경제적 이념의 근본은 시민사회와 국가간에 협력적이고 상호 균형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생산자는 그가 생산한 물품에 대해 적정한 가격 이상을 부과하지 않으며, 노동자는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과 좋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기업가와 임금 노동자, 지주와 소작농은 갈등과 대결관계가 아닌 협력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속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합의틀 속에서 공동번영을 누려야한다. 즉, 그들의 이념에 따르면 상호관계는 계급투쟁을 통한 반전이 아니라 이슬람의 도덕적 가르침과 코란의 원칙에 따라 해결점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이슬람 세력들이 급진주의적 양상을 띄면서 서구가 빚어낸 배신과 약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렬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의 발호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서구와 결탁하여 지배층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부패한 세속정권과 복리민복이라는 기본적인 경제정책의 실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슬람 가치관의 타락에 대한 반발이고, 힘으로 지배하는 서구강국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의식 강한 무슬림들의 응어리의 표출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들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풍토와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슬람 세계는 이미 12억의 인구를 가진 어마어마한 문화덩어리이고, 이슬람 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5개국에 달한다. 세계화라는 절대절명의 명제를 강조하면서 언제까지 서구 언론이 자기들 구미에 맞게 양념된 정보만을 취하면서 우리 바깥의 문제들과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문제까지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수용하고 있는 무지와 위험상태를 계속할 것인가? 이슬람은 위험하고,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처럼 호전적인 사람들이란 이미지조작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적 본질에 접근하는 자세가 아니다.
결국 이슬람 부흥운동은 자신의 종교적 전통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귀속을 바탕으로 템포 느린 현대화를 지향하겠다는 바람직한 국민의식 운동이며, 가장 뚜렷한 자신의 개성을 가진 채 세계를 호흡하겠다는 21세기 ‘전통과 현대’의 이상적인 조화와 17억 무슬림들의 이상으로 살아날 것이다.
XIAODONG ZHANG, RE-UNDERSTANDING: ISLAMIC FUNDAMENTALISM, INSTITUTE OF WEST ASIAN AND AFRICAN STUDIES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1995 장병옥,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과 비아랍무슬림 국가의 사회운동, 한국중동학회,1993 금상문외, 이슬람세계의 정치와 국제관계, 서울:오름, 1999 장병옥외, 국제 정치와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서울:민맥,1994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님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