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Music 의 殿堂 Arthill
☆ Mary Queen of Scots ☆
( 8. 같은 하늘 아래)
The Execution of Mary, Queen of Scots"
by Robert Herdman (1867)
제 8 장 같은 하늘 아래 (Chapter VIII. Under the Heaven)
1568년 5월 16일 저녁시간, 아직 어두움이 깔리기 전, 잉글랜드 Cumberland의
Workington항에 조그마한 배가 정박하려 들어오고 있었고, 약 400여명의
잉글랜드군사들은 예상치 아니한 방문객인하여 긴장을 하며 이들을 맏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Mary여왕은 조그마한 어선에 몇 명의 수행원과 함께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엘리자베쓰의 보호아래로 들어갑니다.
Mary는 Carlisle Castle에 거처가 마련이 되는데, 숙소는 일반 귀족부인들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고, 잉글랜드 왕궁으로부터 보내주는 물품들은
지극히 제한적이였습니다.
모레이경은 여왕의 옷장을 보내주었다는데 쓸모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엘리자베쓰여왕에게 옷을 빌려달라하지만 몇벌 보내온 것이라곤 모두가 낡고 헤어진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받아든 여왕의 수행원들은 이러한 것들은 여왕의 종들에게나
보내는것이였다고 그 상태를 말합니다
Carlisle Castle
한편 스코틀란드에서는 섭정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Moray경은 계속
William Cecil이라는 잉글랜드의 인물과 내통하며 메어리여왕이
계속 잉글랜드에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에게 여왕이 스코틀란드에 없는 것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의미했지요.
Sir William Cecil, 1st Baron Burghley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엘리자베쓰여왕과 메어리여왕과의 상봉에 대하여 논합니다.
이들에게 서로 만난다는 것은 여러모로 엘리자베쓰와 메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수 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두여왕은 한번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만난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메어리에게 보내온 통보문은 어이없게도 단리의 살인이 깨끗이 해결되지 않는한
엘리자베쓰 잉글랜드여왕은 메어리를 만날수 없다는 것이였어요.
실제로 엘리자베쓰는 조카인 Mary Queen of Scots를 만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Mary여왕은 ‘욕심많은 스코틀란드의 마녀’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Mary during her captivity, by Nicholas Hilliard, inscribed with the date 1578
당시 잉글랜드의 위상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대국이였던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항상 눌려지내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쓰여왕시대를 맏이하여 일대 변화를 일으킵니다.
먼저 종교적으로는 헨리8세떄부터 교황의 세속적 권세에서 스스로 탈피하여
정치적 독립과 나라의 돈이 로마로 빠져 나가는 것을 줄여 나라경제가 조금씩
알차게 틀을 잡고 있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성공회로의 독립은 종교를 국가의
권력 밑으로 세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고, 이는 헨리8세의 딸
메리여왕(즉 Mary Tudor; 블러드 메리)때 강한 성공회의 탄압으로 수많은
자들을 피를 흘리게 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하기도 하였지만, 엘리자베쓰1세때는
카톨릭과 성공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모두를 인정하는 정책 (일명 온건정책으로
middle-way; 이는 오늘날의 영국전체의 분위기까지 이어집니다) 으로 종교적
평화를 꾀하였습니다.
Elizabeth I: The Armada Portrait
경제적으로는 먼저 나라의 부강함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1588년)으로 유럽의 해상권을 잉글랜드가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히 최고의
강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대륙발견이후 해외 식민지의 건설로 부를 쥐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에 점차 자리를 내주어야했고, 잉글랜드는 식민지에
동인도회사의 설립 등 무역으로 인한 국부의 축척은 세익스피어의 문학만개 등으로
그야말로 명실 상부한 일등국으로 가고 있었지요.
Embarkation of Columbus from Spain,
Viking ship on its voyage of discovery
Pilgrims landing at Plymouth Rock
이렇게 모아진 나라의 부는 잉글랜드 국내의 재정에 대한 권한을(예산안) 가지고 있던
의회 (헨리3세때인 1215년 마그나카르타 기초로 의회 성립)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왕이 정치를 당당히 하게 됨으로 엘리자베쓰여왕은 왕권확립을 다지게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국으로 변모하고 있더라도 잉글랜드는 아직 국제적 사법역활을
수행하지는 못하였어요. 이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메리여왕의 처리를 놓고
그 적법성이 논란이 됩니다.
즉 잉글랜드는 잉글랜드에 피신해 와 있는 메리여왕의 대한 탄압정책의 하나로 그를 단리의
죽음의혹에 관한 재판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놓고 잉글랜드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일입니다. 실제로 잉글랜드는 다른나라의 주권자의 행동에 대한 사법권이 없기에
메리여왕에 대한 재판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효라고 봐도 될것입니다.
하지만 변칙은 어디에서든 통하듯이 그들은 재판이 아닌 재판과 유사한 심문의 형태로
메리여왕을 잉글랜드의 사법권이래 놓았습니다.
York에서 있었던 심문에서(The Conference of York) 스코틀란드에서 모레이경도
소환되고, 물론 그는 메리여왕의 반대편에 서있었고, 전혀 근거도 알지도 못하는 증거물을
들이대며 메리여왕에게 유죄여부를 추궁합니다. 반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정도의 심문이
계속되었으며, 엘리자베쓰여왕은 ‘침묵은 죄의 인정을 뜻한다’ 라며 결코 메리여왕에게
동정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판결은 미결로 남고 모레이는 스코틀란드로 돌아가고
메리여왕은 죄수의 신분으로 잉글랜드에 남아 이곳 저곳 감옥으로 떠돌게 됩니다.
Mary, queen of Scots, c1575, by an unknown artist
여기서 잉글랜드에서 비참한 메리여왕의 이야기를 얼마나 더 이야기해야하는지 저도
고민입니다. 기간적으로 본다면 메리가 스코틀란드의 여왕으로 재위한 것은 프랑스로부터
귀환시인 1561년 8월부터 잉글랜드로 피신한 1568년 5월까지 약 7년간이지만
이에 비하여 잉글랜드에서 감금상태로 있었던 기간은 약19년으로, 훨씬 더 많은
Mary의 생애가 그 비참함 속에 있었습니다.
이 많은 세월을 메리는 무슨 생각과 무슨 일로 보냈을까요! 아마도 지난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새기기 보다는 어더ㅎ게든 스코틀란드로 돌아가는 일들과 아들에 대한 생각
들로 항시 눈은 저너머 북쪽을 향하고 있었을 겄입니다.
한편으로 메리는 수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귀족이상 신분인 여자들의 공통적인
취미 이기도 하였습니다.
메리의 수; 뛰어난 솜씨의 메리의 유품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이제 메리여왕의 처분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집니다.
너무 오랬동안 감금상태로 두자니 명분이 마땅치 않으며, 다른 나라의 이목 또한 좋지 않고,
그렇다고 스코틀란드로 돌려보낼수는 없는 일이었으며, 프랑스로는 보낸다면 향후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절대로 선택의 대상이 아니였지요.
엘리자베쓰여왕도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중 하나가 바로 메리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는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어, 나라를
일등국으로 일으킨 자신 이였지만 찹잡한 심정은 메리여왕 이상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리여왕 처리에관한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는데 이는 바로 바빙톤의
서류사건입니다. Babington은 카톨릭 열심당원으로 메리여왕구출에 관한 모종의 음모에
관련이 되는데 메리여왕의 싸인이 들어간 이 서류가 엘리자베쓰여왕의 서기인
Walsingham의 손에 들어갑니다. 이 서류에는 희미하지만 그 의미로는 엘리자베쓰여왕의
제거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서류사건으로 메리는 최후를 맞이 합니다.

Walsingham 과 당시 서류 Code Book
1586년 10월 14일 메리는 다시 잉글랜드법정에 변호인도 없이 서게 되고
이떄 Babington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이미 처형된 상황이였습니다.
메리여왕은 답변하기를 탈출을 생각하기는 하였어도 엘리자베쓰여왕을 해칠 의도는
없었다고 하지만(‘I have not procured or encouraged any hurt against Her Majesty,
Queen Elizabeth.’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지요
바빙톤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의문점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한 것이였기에 다시 음미하기에 마음이 아프고, 잉글랜드에서 죄수아닌 죄수의 신분으로
이성 저성을 떠돌고, 결코 적법치 않은 재판을 받는 등 이미 잉글랜드에서 메리에 대한
처우는 그 자체가, 아무리 16세기라 하더라도, 일반상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 떄문에
이러한 서류사건이 발생하는것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간 당시 잉글랜드의 귀족층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Mary Stuart에게 적용된 죄는 반역죄였습니다. 엘리자베쓰여왕은 준비된 판결문에
싸인하기전 망설였다합니다. 그리고는 ‘이 불행한 사건’은 자신의 어느 가족의 죽음보다도 더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발언일까요? 아니면 친족의 죽음에 관한
잠시의 진실된 순간이였을까요?
하여튼 1587년 2월 1일 엘리자베쓰여왕은 메리의 사형언도문에 싸인을 합니다.
스코틀란드가 평화가 오면 메리여왕이 잉글랜드의 보좌를 넘볼까봐 직간접적으로 계속하여
메리여왕 재임시 스코틀란드내의 내분을 지원하였던 잉글랜드의 5촌혈족인 엘리자베쓰.
이제 그 결말이 오는 순간이였습니다.
엘리자베쓰여왕은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란드의 제임스6세에게 이에 관한 편지를 썼습니다.
대고모로써 조카를 위로하는 문체였지만, 이를 받아서 읽고 있는 제임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요? 후에 제임스는 비록 잉글랜드의 왕관까지 쓰지만,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질책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인간적 번뇌는 평생 그를 휘잡았습니다.
이 세기적 판결이 발표되자 스코틀란드는 항의하였습니다-하지만 약한 항의였고 – 프랑스의
반응은 거셋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나중에 이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잉글랜드를 침략하기도 합니다
이 판결문이 메리자신과 측근시녀들에게 통보된 것은 사형집행 겨우 하루전이였습니다.
시녀들은 눈물에 휩싸였지만 Mary Stuart 자신은 이 소식에 매우 침착하고 냉정한
반응이였어요. 메리는 마지막 성례를 자신의 종교에 따라 프로테스탄트식 목사에 의한
예식을 거부하고 카톨릭식으로 하길 원하였씁니다. 결국 이것조차 거절을 당하지요.
전날밤 메리는 자신의 소지품등을 정리하고 물품을 친족들과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측근 시녀들에게는 용기를 잃지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1587년 2월 8일 아침해는 몰인정하게 메리의 머리위로 떠올랐고 날씨는 봄과 같이
화창하였습니다. 6시경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실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형집행은 8시에 하기로 예정되었지만 9시가 다되서야 그녀를 부르는 녹크가 방안 전체를
울렸습니다. 혼자가기로 되어 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시녀들의 울부짖음으로 방안은
잠시 시간이 정체된듯하였습니다. 시녀들의 눈물겨운 간청끝에 6명이 동행하기로
허락받고는 Fotheringhay Castle의 사형집행장으로 발길을 옮기였습니다.
Mary Queen of Scots Being Led to Execution
그녀는 시녀인 Melville에게 말하기를 스코틀란드로 돌아가 자신의 아들인 제임스에게
어머니는 스코틀란드왕국을 불모로 아무런 타협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달라 하였습니다.
검은색 옷에 흰색베일, 자줏빛 슬리브 그린색의 가터 그리고 진홍색의 벨벳 페티콧을 입고
집행장에 들어가자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아한 걸음으로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 나무형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위엄을 잃지 않고 서있었고,
프로테스탄트목사는 그앞에 무릎을 꿇고는 기도를 시작하자 Mary Stuart는 몸을 돌려
카톨릭의 라틴기도문을 외우고는 영어로 기도하기를 엘리자베쓰여왕과 제임스, 그리고
잉글랜드를 용서해달라고 외쳤습니다.
집행인에 대한 용서의식이 있었고, 잠시후 그녀는 검은 윗옷을 벗고 진홍색옷만 입은체
집행대에 무릎을 꿇고 목을 누그러 트렸으며, 이윽고 세번의 날카로운 도끼날에 의해 그녀의
목은 몸에서 분리 되였습니다. 집행인은 God save the Queen!을 외치며 목을 집어 들었고,
곳 Fortheringhay의 바닥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메리의 시녀들은 울부짖었고, 메리스튜어트의 애완견인 스카이테리어는 주위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여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Mary's execution at Fotheringhay Castle, 8 February 1587
‘나의 종말은 곳 나의 시작이다.’ 라는 자신의 말대로 그녀의 죽음은 바로 전설의 시작이
되였어요.
주위에서 단리의 죽음과 보쓰웰과의 결혼시 메리를 비평하던 카톨릭국가들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카톨릭적 순교로 경의를 표하였고, 프랑스의 시동생인 헨리3세는 바로
메리가 자신의 형과 결혼하였던 노트르담성당에서 Mass를 드렸습니다.
1580년 메리가 감금되었던 당시 그녀가 썼던 Essay on Adversity 에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듯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진리를 찾기에 필요한 혹독한 시련이다-이는 스스로의 가치를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Tribulation has been to them as a furnace to find gold – a means of
proving their virtue)
God save the Queen!
SI QUIS DILIGIT ME
in
Sacred Music for Mary Queen of Scots
Valse-Lov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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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같은 하늘 아래... 제목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비가 오는 밤에 읽기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네요. 허망한 인생이여~~! 진리를 얻기위한 고난.... 파란만장한 메리의 일생이 막을 내렸군요. 에필로그 가 기다려 지구요. 읽으며 계속 한숨이....love님 너무 감사합니다. 왠지 서글퍼지는 비오는 밤,유월의 첫날밤 입니다.
이곳에도 계속 비가 오고 있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라고요, 에필로그 방금 올렸습니다. 그동안 모든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마지막을 읽어 봅니다....너무나 비참한 한 여왕의 생애가 마치..나의 현실인듯느껴지고..어지러운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보여주는듯..!아.......... 깊은 한숨을 토해내어 봅니다...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늘 행복하십시오~~~!한국에 언제 나오시나요? 꼭 뵙고 싶은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항상 존님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한국에 잘하면 올 여름 갈수도 있을것 같지만 아직 미지수입니다. 간다면 제일 먼저 연락드릴꼐용.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꾸준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좋은날 되세요...
정말 이런 소중한 자료 감사하게 잘읽었습니다. 뒷이야기도 궁금하네여. 건강하세여
결국 힘의 논리군요. 안됐지만 메리 여왕은 왕의 자리가 버거운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지는 왕은 반대 급부로 포기하고 살아야할 것들도 많으니까요. 왕은 사랑도 마음껏 할 수 없는 자리....그러나 저는 마음껏사랑하고 또한 사람의 정을 기대할 수 있는 평민이길 택하렵니다.
'고난은 스스로의 가치를 드러내는 길'.......명백한 진리라고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경우에 그 진리가 이루어져 왔으니까요. 좋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집중이 필요한 자료들인데..... 정말 감사해요.
마릴라님의 말씀이 맡는듯합니다. 여왕의 자리가 버거운 여인인 메리...사랑과 공적신분 사이의 갈등이군요.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두근두근,,,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날까요? 음악또한 제 마음을 흔들어 놓네요...모두모두 행복하세요
음악을 선택한다는 것이 주인공의 Mass음악중 하나인데 조금 그런 느낌이죠? 너무 슬픈이야기입니다. 소중한 하루 되시기를...
음악과 함께 정말 귀한 글들 잘 읽었습니다. 죽음앞에서도 의연한 여왕의 기품을 떠올리며.. 평민이던지 왕족이던지 '고난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는 진리의 사람들에게.. 영혼의 강건함을 빌면서~~~
cherry님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분 같네요. 우리는 진리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지요. 인생자체가 자신의 가치관과 주위환경과의 다툼이라면 그러한 것들을 잘 조화롭게 하는자가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Mary Queen of Scots의 이야기는 그녀 메리여왕의 역사로만 그치는게 아닌듯 싶습니다. 이 이야기 엮으실동안 사랑님의 현재의 삶도 반추해볼 수 있었을거고, 이 글을 읽는 저도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엮어볼까 하고 생각해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간의 이야기의 결정체라 그러나요? 가슴이 답답하여지네요....
초록이님! 그간 격려 너무 고맙구요...음악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존님이 올려주신것중에 있는것 같은데 제가 나중에 사용하려 눈도장을 찍어 놓았으나 님이 먼저 사용하셨네요^^ 필링이 같아 좋습니다.
아트힐은 음악방이어 음악으로만 만나는 님들가운데, 유독 멀리서 학문 탐구에 여념이 없을 사랑님의 애정어린 기록에 저도 집중하면서 읽어내려갔습니다. 새로운 과제 하나 받은 기분이네요~ 뜨거워진 가슴 추스리다 갑니다.
오랜만에 아트힐에 돌아와 님의 자료를 먼저 봅니다 ~~ 그동안 진도가 많이 나가서 이제 너무 슬픈 결말에 도달했군요 마지막 가야하는 메리 여왕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까 ~~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 감사합니다
네 너무 슬픈 결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이기에 사실로 받아들여야할수 밖에는...좋은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