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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홀로 테마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돈키호테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최근에 전두환의 인사정책의 장점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도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전두환의 그 정책을 배우겠다는 말을 했다.
전두환은 원래 학창시절 공부, 성적은 좋지 못했다.
(당시 공업고등학교는 지금 공고보다 수준이 높았음.)
대구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200명 뽑는데 2400명이 응시한 곳에 합격한 것을 보면 ??
중학교 시절부터 복싱을 했고, 육사 다닐 때도 공부는 하위권이지만 축구를 좋아했던
전두환... 소위 임관 이후에도 성적은 거의 하위권이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억지로 차지한 뒤에 각 장관들을 전문가(?)로
배치하고 그들이 나라를 운영하게 했다.
윤석열 후보는 그 부분을 이야기 한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문제가 될 이야기도 아닐 수 있겠지만,
전두환 이라는 인물에 대한 국민 전체의 감정이 안 좋다.
대표적인 이유로 그는 자신이 집권을 하기 위하여 부당하게 많은 인명을 살상했으며,
그렇게 정권을 잡은 다음에 (운이 좋게도) 석유가 물보다 저렴한 석유파동을
이용하여 (수출에 의존했던 한국의) 국정운영이 쉬웠으며, 몇 천억을 횡령하고도
아직까지도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국민들 대부분이 비난하고 있다.
난 여기서 <전두환>이 좋다~ 싫다~를 평가할 마음도 없다.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이해관계도 없고, 평가할 정도로 내 지식이 높지 않다.
(민감한 정치문제는 관심없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에 인물들(차지철, 김재규)
그리고 그들의 분쟁(?)으로 인하여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전두환이 정권을
차지하는 과정을 (나름대로 조사한 바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객관적으로 글을 쓰고자 노력했으며, 많은 서적과 검색을 참고해서
본인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구성'했으니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최근에 독일에서 16년을 통치하고 자진해서 물러난 메르켈 총리..
그는 최초의 동독 출신의 대통령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그리고 지금도 독일 전체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차기 총리가 임명되기
전까지는 아직까지도 그는 독일의 총리이다.
언젠가 한국에도 이러한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이 넘는 세월을 통치하고 죽음으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에,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위 사진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보이고, 양쪽으로 차지철과 김재규가 보인다.
박정희 통치 시절에 두드러진 두 사람은 분명 차지철과 김재규이다.
(박정희의 오른팔이 차지철이면, 왼팔이 김재규다.)
박정희를 총으로 죽인 사람이 김재규인데, 둘 사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이다.
왜 죽였는지? 둘 사이의 갈등 구조에 대해서는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둘 사이를 요약해 본다.
공통점으로는
= 둘 다 첫번째 부인을 버리고 재혼했다는 점
(둘 다 이혼이 아니라 버렸다고 표현해야 함)
= 육군사관학교 2기 동기생이며, 둘 다 '군인 체질'이었다는 점.
= 고향이 구미(박), 선산(김) 모두 옆 동네라는 점.
= 둘 다 교편을 들었던 교사 출신이라는 점.
차이점이라면.
= 비록 육사 동기지만 나이는 박정희가 8살 위 였다는 점.
(육사 성적은 박정희가 우등생이라면 김재규는 하위권
하지만 김재규가 육사에 들어가서 군인으로서는 학력은 상위권이었다.)
= 김재규는 일본이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매우 싫어하고 싸운 흔적이 많지만.
박정희는 반대로 일본 내지 공산당과 친한 점이 많다는 점.
= 김재규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중학교 떨어져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박정희는 동학혁명 아버지로 인하여 매우 가난한 집에서 성장함
= 김재규는 학창시절 공부를 못한 편에 속했지만, 박정희는 성적이 좋은 편
= 박정희는 술을 좋아했지만, 김재규는 (간이 안 좋아서) 거의 못 먹었다.
사실상 역사 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박정희가 왜 김재규를 곁에
두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더 많다.
박정희 앞에서 그 누구도 싫은 말을 못 했지만, 김재규는 몇 차례 충언을 했다.
= 박정희 아들 박지만이 육사 4학생 생도때에 여의도 호텔에서 성추문을 일으켜서
크게 문제 되었을 때도 김재규는 지만이를 일반 대학으로 전학보내야 한다고 요청했고,
= 딸 박근혜 역시 당시 최태민 과의 관계를 알고, 둘 사이를 떼어 놓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만약에 김재규의 말을 듣고 최태민을 멀리 보냈다면 오늘날 최순실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의 충고를 들으면서 박정희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것을 받아 들이지는 못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박정희는 김재규를 늘 곁에 불러서 왼팔 자리를 허락했다.
군인의 길을 가겠다는 김재규를 강제로 안기부, 국회의원, 건설교통부 장관 등의
자리를 줬고, 싫지만 김재규는 상명하복의 정신으로 복종했다.
박정희가 김재규를 끝까지 곁에 둔 이유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부하기 바쁜데 누군가는 정직하게
자신의 단점을 말해 주는 사람이 한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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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길었다.
오늘 주인공은 박정희, 김재규가 아니라 전두환과 차지철이다.
'전두환'을 설명하는데에 나머지 3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간단하게 터치했다.
김재규가 1979.10.26에 궁정동 안가에서 총으로 박정희, 차지철을 저격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용의주도함과 거리가 먼 그의 행동...
하여간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반대로 생각해 보면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전두환'이 대통령 되는 것도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김재규를 이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없는 죄까지 만들어서 몰아 세웠다.
정권 안정을 위하여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을 한 사람은 김재규인데 그만 죽이지 않고 그 부하들 6명까지 모두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항쟁을 진압하면서 민심이 혼란한 틈에 처형시킨다.
김재규는 몇가지 유언.. 아니 부탁을 했다.
1. 재산 몰수형을 받아서 전 재산을 빼았기는데, 유일한 딸에게 선물한 피아노 하나만은
제발 딸이 갖도록 해 달라.
2. 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사람으로 '무사'로 죽기를 원하니 내가 죽으면 장군 옷을
입혀서 묻고, 비석에는 '장군'으로 새겨 달라.
3. 내가 했고, 내 부하들은 지시에 따른 죄밖에 없으니, 제발 부하들은 죽이지 말아달라.
4. 내 부하들이 죽으면 내 옆에 묻어 달라.
5. 자신을 처형하면 민심이 동요되고 데모가 일어날 수 있으니,
나를 그냥 풀어주면 나 스스로 자결하겠다.
전두환은 이중에 단 한가지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
김재규의 가장 큰 실수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과소평가 했다는 점이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성공할 때에..
김재규는 육사 교장(별 1개) 였으며,
차지철은 '대위'로서 공수 특전단의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전두환은 '대위'로서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이었다.
김재규는 1926년 출생했고, 차지철은 1934년 출생했으니,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8살 어리다.
전두환은 1931년 출생으로 차지철보다는 3살이 많고,
김재규보다 5살 어리다.
김재규가 별 1개 달았을 때, 대위였던 차지철, 전두환은 나이 차이가 5살,
8살을 떠나서 한참 후배 내지 손자뻘로 취급했을 수도 있다.
김재규는 별3개(중장)으로 예편했지만, 차지철은 끽~ 해야 중령으로 예편했다.
김재규, 전두환은 정상적인 육군사관학교 장교 출신이지만, 차지철은 육사에
떨어져서 육군 갑종장교 포병 간부후보생 출신..
그러니까 싸이드로 들어온 장교다.
그나마 차지철은 태권도 5단, 검도 4단.. 그리고 육영수 여사가 교회를 다니다보니
서울 명동 영락교회에 성도했던 차지철을 (박정희에게) 잘 봐 달라고 해서
발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김재규 입장에서는 상대자로서 너무 질이 떨어지는 차지철을 자신보다 더 우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질투를 많이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 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권력이 높은 사람은 '차지철'이었다.
김재규 눈에는 차지철만 보였으며, '전두환'에 대해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보다 5살 어린 후배고, 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하는 양아들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보다는 '군대'에 충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전두환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몰랐고, 박정희가
차지철, 김재규 외에 차지철과 김재규를 견제할 수준의 인물로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김재규는 몰랐다.
김재규는 시대를 볼 줄 몰랐고,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판단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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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전두환'에 대해서....이야기 해 보자.
전두환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1.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다닐 때에.. 육사에 참모장 이규동 대령 집을 수시로
들락날락 하면서 그의 딸 이순자와 결혼하게 된다.
이 자체가 일반 군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뿐 아니라 1959년 결혼후 중령 진급까지 무려 8년간이나 처가살이를 하면서
장인어른 사이를 오가며 군대 및 정치인들 사이에 동태를 파악하고,
주요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일단 장인어른 뒷배경이 전두환에게 큰 장점으로 차지했다.
2. '전두환'이 가장 크게 부각된 사건은 1961.05.18 군사 쿠데타가 있은 후에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에게 쿠데타 반대 시위에 맞서서 '찬성 시위'를 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교장은 생도들 중에 찬성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뉘고 있는데
그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하겠다고 거절을 한다.
그러자 '전두환'은 (교장을 구속으로 몰고 갔으며) 자신이 직접 육사 생도 800명과
졸업생, 군인들 200명을 인솔해서 광화문, 시청, 남대문 등을 돌면서 찬성 시위를 했다.
이것이 더 크게 신문에 났으며 세계적으로도 긍정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이것을 본 박정희는 전두환에 대한 총애가 무거웠으며 (육사 성적과는 무관하게)
11기 동기들 중에서 승진이 가장 빨랐다.(노태우와 함께...)
3. 1970년 11월.. 베트남 참전을 해서 전두환은 병사중에 영문학과 출신을 옆에 두고
영어를 배웠다. 한국 대통령 중에서 영어를 잘 했던 대통령은 전두환, 김대중 등이다.
4.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성공하고 차지철과 전두환을 불러서 정치를 하라고 했다.
차지철은 군복을 벗고 정치인(국회의원)으로 나갔지만, 전두환은 몇번이나 거절을 한다.
"군대에도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절 이유였다.
결국 그래서 박정희는 전두환을 더욱 더 믿고 총애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다.
5. 1976년.. '차지철'의 권력이 정점에 올라 있을 때이다.
청와대 '경호실장'을 '장관'으로 승격시킨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
경호실 바로 밑에 중장(별3개)과 준장(별1개)은 물론 헬기, 장갑차, 사단에 준하는
병사까지 준비해 나간다.
박정희의 총애가 컸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내가 전두환이 대단하다고 말 하는 이유는 이 당시 전두환이 자신보다 3살이 어리고,
정식 육사 출신도 아닌 차지철이 경호실장에 있을 때에 그 밑에서 '차장보'를
했다는 것이다.
행진을 하고 태극기를 올리고 내릴 때... 전두환은 "경호실장에 대하여 밧들어 총"
구호를 외치고 그를 상관 대우를 해 줬다.
차지철 기분은 마치 '용'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두환 기분이야 매우 안 좋았겠지만 그는 차지철과 불쾌감을 감추면서 인내했다.
여러가지로 볼 때에.. '전두환'은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늘 한 발자국 뒤에 선 사람이다.
전두환이 고속 승진을 하고 나면 바로 뒤에 노태우가 있었고,
전두환이가 거쳐간 자리에는 반드시 '노태우'를 앉혔다.
민정당 총재 자리도 1대가 전두환, 2대가 노태우.
그리고 대통령 자리까지 전두환 다음에 노태우가 차지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덤으로) 가는 것에는 순서가 따로 없다.
얼마전 10.26일에 노태우가 먼저 갔으니 말이다.
참고 삼아.. 차지철과 전두환을 비교해 보았다.
전두환 때나 노태우 때나 최류탄 개스가 익숙한 시대였다.
노태우 정권 시절.. 1991년 8.16.. 경희대에서 '범민족 대회'를 개최하는데,
누나 집이 경희대 정문 앞에 있다보니, 밥 한끼 얻어 먹으려고 가던 중에
전경에게 잡혀서 동대문 경찰서에서 2박3일간 새까만 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잡아서 집으로 연락조차 못하게 했던 그 시절..
집에서는 갑자기 막내가 실종되서 난리가 났는데, 그런 일이 하도 많다보니
실종 신고도 안 해 놓았던 그 시절..
잘 나가나 못 나가나 결국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인데,
수천억을 챙겨서 자식들에게 물려 주고, 수많은 목숨까지 빼앗는 그런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지금쯤 연로한 '전두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한번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나를 만나주지는 않을 것 같고~~!)
차지철이 죽었을 때 종교적으로 그는 영락교회 '집사'였다.
전두환은 국립묘지에 안장하려고 했으나 국민들의 저항이 있자.
영락교회 공동묘지(남양주)에 묻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