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李蘭影(이난영, 1916년 ~ 1965년)
성악가(신민요·유행가·재즈송).
전라남도 목포(木浦) 출생. 본명 이옥례(李玉禮).
오케사·태평사 전속가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5세 때까지 삼촌 집에서 학교를 다녔고,
오빠 이봉룡(李鳳龍)이 운영하던 목포의 악기점에서 노래에 접하면서 노래에 흥미를 가졌다.
노래를 부르고 싶던 그녀는 태양극단(太陽劇團)이 목포에서 공연할 때
어머니와 오빠의 권유로 여배우를 지망하여 이 극단에 입단했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이 극단의 단장인 박승희(朴勝喜)가 붙여준 것이다.
8개월 간 극단을 따라다니는 동안
오사카(大阪) 공연 때 부친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태평레코드사에서
"도라지타령 "을 취입했지만, 결국 부친 사망의 소식을 듣고 막간 무대에서
"집시의 노래"를 부르다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귀국했을 때 태평음반에 녹음한 노래가 있음을 알고 있던 아사히(朝日)상회 주인의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 입사하게 됐다.
그녀의 데뷔곡은 1933년 10월에 선보인 유행소곡 "향수"이며,
이듬해 11월 김능인(金陵人) 작사, 문호월(文湖月) 작곡의 "고적"(孤寂)과 "불사조"(不死鳥)를
출반하였다.
"불사조"의 인기를 얻어 그해 12월 "과거몽"(過去夢)과 "홍등의 탄식"을,
그리고 1934년에는 신민요 "신강남"과 "밤의 언덕을 넘어"를 내었고,
이어 인기곡 "봄맞이"를 녹음하였다.
1934년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국명가수음악대회에
조선인으로서는 홀로 출전해 대갈채를 받았다.
1935년 드디어 가요의 여왕으로 만든 "목포의 눈물"을 녹음하게 되었다.
작사가 강사랑(姜史浪)은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사장에게
무명의 여가수 이난영을 유망주로 소개한 이후,
그녀가 부른 김능인(金陵人) 작사, 문호월(文湖月) 작곡의 "불사조"는 그녀의 데뷔곡이 되었다.
오빠 이봉룡의 목포 친구 문일석(文一石)이 응모해 당선한 "목포의 눈물"을
손목인(孫牧人)이 작곡하고 그녀가 불러 그녀는 더욱 유명해졌다.
당시 오케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로 있던 김해송 (金海松)과 결혼하였다.
1934년 고복수 (高福壽)와 듀엣곡 "젊은 뱃사공"을,
1935년에는 "어촌낙조"(漁村落照)·"봄아가씨"·"유허(遺墟)를 지나며"와
고복수와의 듀엣곡 "사랑의 노래"를,
1936년에는 "아버님은 어디에"·"세월은 간다"와 김해송과의 듀엣곡 "청춘해협"을 각각 출반했다.
1937에 발매한 그녀의 "해조곡"(海鳥曲)은 히트곡이 됐으며,
1938년 김정구 (金貞九)와 "연애 삼색기"(戀愛三色旗) 등을 불렀다.
1939년에는 남인수 (南仁樹)와 듀엣곡 "제3일요일"을 비롯해
"달 없는 항로"·"남행열차"·"연락선 비가"를 출반했으나,
그녀의 "다방의 푸른 꿈"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40년 박고송 작곡의 "사공의 아내"를 내어놓았고,
고향 목포를 노래한 또 하나의 곡 "목포는 항구다"(이봉룡 작곡)를 불러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일제강점기 강남향(姜南香)·고복수·고운봉 (高雲峰) 등과 함께
오케관현악단·오케선양악단·오케재즈오케스트라 반주로 취입한
"감격시대"(感激時代)·"감상의 가을"·"갑판의 소야곡"을 포함한 150여 곡의 유행가는
오케음반에 전하고, 오케음반에 신민요 11곡을 취입했다.
일제강점기 그녀가 취입한 유행가 "시드는 청춘"·"지나간 옛 꿈"은 태평음반에 전한다.
이난영 관련의 기사는 『三千里』(1933) 5권 10호·『別乾坤』(1934) 70호·『中央』(1934) 4호·
『中央』(1934) 8호·『三千里』(1935) 7권 7호·『三千里』(1935) 7권 11호·『朝鮮文壇』(1935) 22호·『新世紀』(1939) 1권 8호 등에 나온다.
1930년대 오케음반에 신민요를 10회 이상 취입했고,
오케음반에 유행가 45곡을, 그리고 태평음반에서 두 곡을 취입하였다.
"목포는 항구다"·"목포의 눈물"·"불사조"(不死鳥) 등을 취입하여
대중가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한 그녀는
6·25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했다.
자식들도 미국에서 김씨스터스·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하였다.
金海松(김해송, 1911년 ~ 1950년)
작곡가(신민요·유행가)·성악가(재즈 송·유행가). 본명은 김송규. 평안남도 개천(開川) 출생.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재학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고,
클래식 기타의 명수로 당시 유행하던 하와이언 기타에 매혹되어
기타 연주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35년 미국의 팝송 "마이 블루 헤븐"(My Blue Heaven)이
이 땅에서 젊은층에게 사랑을 받던 시절
그는 이 곡을 우리말로 직접 취입해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작곡가 김송규라는 이름으로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영화 "노래의 조선"에 출현했다.
이난영(李蘭影)과 듀엣으로 "청춘해협"을,
그리고 이은파(李銀波)와 듀엣으로 "꽃 피는 영산포"를 출반했고,
1937년 장세정 (張世貞)이 부른 "연락선은 떠난다"와
이은파가 노래한 신민요 "요핑계 조핑계"를 본명으로 작곡해
유명해지면서 작곡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8년 콜럼비아에 입사한 이후
유행가(流行歌) 37곡과 신민요(新民謠) 네 곡을 작사했고,
김해송이라는 예명으로
유행가 18곡과 신민요 2곡을 콜럼비아음반에 남겼다.
1930년대 콜럼비아음반 및 오케음반에 취입한 신민요 6곡을 작곡하였다.
1938년 "환희의 대지"를 빅타음반에 취입했고,
김옥진 (金玉眞)과 듀엣으로 부른 신민요 "사랑푸리,"
그리고 김복희(金福姫)와 듀엣으로 "명랑한 양주"와 "흘러간 로맨스"를 녹음하였다.
1938년 오케사에서 이난영(李蘭影)과 함께 듀엣으로 "흘겨본 가정뉴스"를 녹음했고,
1939년에는 "집시의 고향"·"무정사"(無情詞)를 냈다.
이난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는
1939년 11월 아내를 위해 조명암(趙鳴岩) 작사의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해 발매했다.
왕년의 인기 여가수 장세정(張世貞)의 출세작 "연락선은 떠난다"와 "잘 있거라 단발령"은
그가 1935~1936년 사이에 작곡한 히트곡이다.
이 노래들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창되었다.
왕년의 인기 여가수 장세정(張世貞)의 출세작 "연락선은 떠난다"와 "잘 있거라 단발령"은
그가 1935~1936년 사이에 작곡한 히트곡이다.
이 노래들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애창되었다.
1938년 그가 작곡한 "코스모스 탄식"(1938년: 박향림 노래)·"오빠는 풍각장이"(1938)·
"알아 달라우요"(이난영 노래)·"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며는"(1938년: 장세정 노래)·
"선창"(1940년: 고운봉 노래)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939년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사장이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악극단인
조선악극단 (朝鮮樂劇團)의 일본 공연 때 그는 총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39년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사장이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악극단인데
1940년에 들어와 김해송은 조명암·장세정과 콤비로 "잘 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등의 인기곡을 연발했고,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도 그가 작곡한 히트곡의 하나이다.
그가 남일연 박향림 등과 함께 콜럼비아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가미 부부탕"(加味夫婦湯)·"마누라 대문 여러(열어)"·"개고기 주사"(主事)를 포함한
20여 곡의 유행가와 신민요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둥굴둥굴 내 사랑"·"명랑한 양주" 외 30여 곡의 유행가,
그리고 그가 편곡한 곡을 김선영 ,장세정·이난영 등이 노래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오케음반에 유행가 네 곡을 작곡했고,
또한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14곡을, 빅타음반에 네 곡을,
그리고 오케음반에 15곡을 취입하였다.
오케음반에 유행가 네 곡을 작곡했고,
또한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14곡을,
빅타음반에 네 곡을,
그리고 오케음반에 15곡을 취입하였다.
- 한겨레음악인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