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4.火. 비
오늘의 이름은 05월22일 日요일.
남자南子들만 골라 보기요.
말해서 일요법회 도반님들 중 서울 팀이라면 나와 선심행보살님과 백화보살님에다가 강동구에 사신다는 강동거사님이 계시는데 사실 말해서 강동거사님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저 이름하고 나이 정도 아, 일요일에도 일과 관련된 전화가 수시로 걸려 와서 전화통화를 자주 하고는 한다는 정도 밖에 모르고 있으니 도반님이라기보다는 신도님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절이 바쁠 때면 왠지 거사님 일도 바빠져서 상황에 따라 절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 불교의 초심자인데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천장암의 분위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약간 의외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건 그렇고 엊그제 일요일 점심공양 후 차담시간에 정덕거사님 군대이야기가 나온 끝에 내가 잠깐 물어보았다. 남자南子들이란 여자荔子 분들이 남자들의 다소 과장된 군대이야기를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군대이야기만 나오면 신바람이 나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정덕거사님도 논산 군번이시군요. 군번이 어떻게 되지요?”
“네, 12** **** 이지요.”
“아, 그러시군요. 나는 1263 5***이랍니다.”
정덕거사님과 나이 차는 나와 세 살 간격인데 군번 차는 별로 나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정덕거사님께서 군 입대는 한두 해 가량 늦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강동거사님께서 대화에 참여를 했다.
“나도 논산 군번인데요.”
“그래요? 그러면 군번이 어떻게 되지요?”
“네, 1263 4***이지요.”
“어, 나보다 조금 빠르군요. 내가 논산 23연대 출신인데 그럼 몇 연대를 나오셨지요?”
“어어, 30연대요.”
“30연대요. 고생 좀 하셨겠네요. 30연대라면 숙소는 구막사에다 밥 먹으나 마나라고 유명했던 연대인데 황토교장까지 거리가 멀어서 각개군장 갖추고 황토교장까지 가다보면 배가 다 꺼져버린다고 해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우리는 2층 슬라브 건물에다 군법당도 바로 옆에 짓고 있었고, 훈련소 정문 가까이에 위치해있어서 사제私製 바람도 잘 들어 다니던 신막사 연대였거든요.”
“그랬지요. 그런데 저와 나이가 같으신데 입대날짜는 언제지요? 나는 76년도 2월26일이거든요.”
“그러세요? 나는 2월25일 입대를 했는데 군번은 늦지만 입대날짜는 내가 하루 빠르네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강동거사님과 나는 하루 차이를 두고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훈련을 받았던 논산 군번 훈련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입대날짜가 하루가 빠른데 왜 군번은 늦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 제대는 군번 순이 아니라 입대날짜로 따져서 차례대로 제대특명을 받게 된다. 남자南子들에게 군번이란 평생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는 자존심인데 괜히 손해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의심을 하고 골똘히 그 이유를 따져볼 때 나는 살아있다는 실감實感이 나는 종류의 사람인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다. 원래 나는 매사에 의문疑問과 의심疑心투성이이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확인하고 스스로 따져가며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 이외에는 잘 믿지 않는 경향이 농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아하, 하고는 무릎을 탁! 쳤다. 징병소집이 되던 날이면 대체로 학교운동장에 모여서 근처에 있는 기차역으로 이동을 한 뒤 입영기차에 타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기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장정壯丁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군인대접을 받아가면서 얻어터지기 시작을 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한 뒤에야 훈련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다음 날 새벽 논산에 도착을 해서 들어간 곳은 논산훈련소가 아니라 보충대라고 부르는, 신체검사도 다시 받고 공수부대나 해병대원 차출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귀가歸家 조치도 하는 일종의 대기소였다.
이곳에서는 훈련도 없고 배정된 시간에 신체검사를 받기만 하면 되는 곳이라 소속된 부대의 규율도 그리 엄정 하지가 않아서 그저 식사시간에만 우르르 모여들었다가 식사를 마치고나면 눈치껏 땡땡이를 치면서 신체검사 순서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 시간들은 작업에 불려나가 온갖 일을 해야 했었다. 보통은 보름정도 빠르면 일주일, 그러나 늦으면 한 달 이상을 보충대에서 뒹굴며 보내고 있는 장정壯丁들을 많이 보았는데 나는 보름가량 보충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서 논산훈련소로 입소하기 전 날 각자 자신의 물건과 옷을 집으로 부치는데, 보름동안 입고, 작업하고, 뒹굴었던 옷을 본가本家로 보내면 대개 어머니들이 아들이 부친 짐 속에 들어있는 옷가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것은 옷이라기보다는 거의 넝마에 가까웠으니까. 그렇구나! 아마 강동거사님은 보충대에서 일주일가량 있다가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군번은 입대날짜가 아니라 논산훈련소 입소 순서대로 지급을 받는 것이니까. 내 군번인 1263 59**보다 1번 빠른, 그러니까 보충대에서 보름동안 한 내무반에서 뒹굴었던 장정의 수염 많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본인의 말로는 서울 법대 대학원에 다니던 중에 군 입대를 했다는 나이가 든 장정이었는데, 우리들보다 너덧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보충대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그 형이야말로 서울법대 출신이고 대학원 재학 중에 군 입대를 했는데, 이런 말을 내게 슬쩍 해주었다. “너하고 자주 붙어 다니는 그 친구 말이야, 자신이 서울법대 대학원 재학 중이라고 하던데 어쩌다 이야기를 좀 해보았더니 다른 대학원에 다녔는지는 몰라도 서울법대 대학원은 아닌 것 같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일단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야.” 보충대에서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하던 날에는 일단 논산훈련소 병영에 들어서면 오伍와 열列을 뒤섞어버려 같은 부대 한 내무반의 짝이 되고 싶어 하는 훈련병들을 서로 간 멀찌감치 떼어놓는 일부터 시작을 했다. 그리고 배정된 부대의 내무반에 들어가면 관물이 지급되고 더하여 수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 수저는 앞으로 6주 훈련기간 동안 밤이나 낮이나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밥을 먹을 때마다 사용을 해야 했다. 그런데 훈련 중 구르다가 수저를 잊어먹으면 글쎄,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집어먹든 옆 내무반 훈련병의 수저를 훔쳐오던 스스로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했다.
우리 바로 앞 기수까지만 해도 관물로 지급되는 살충제 백색결정분말인 DDT(디클로로 디페닐 트리클로로에탄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가 들어있는 이약 주머니를 의무적으로 가랑이 사이에 차고 다녀야 했다는데 우리들부터는 하얀 DDT가루를 몸에 한 번씩 뿌려주고는 그걸로 이에 대한 두려움의 마무리를 했다. 23연대 8중대 3소대 소대장은 이관호 중위였고, 우리 3소대 기간병 중에는 이름이 이순신이라는 상병이 있었다.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 우연히 알고 보니 이순신 상병은 백양사 출신의 스님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본인이 스님이었음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훈련을 받던 중 배식당번이 되어 밥을 타러가거나 수돗가에서 식판을 닦다가 저의 비슷한 시기에 군 입대를 했던 고등학교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두어 번 장교로 입대를 했던 고등학교 친구를 곤란한 상황에서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 애 이름이 김영식이다. 그 애가 “야! 거기에 있는 훈련병 이리 와봐!” 이 한 마디가 화가 날대로 난 기간병이 철모로 내리치는 충격을 하마터면 내 머리통으로 받아낼 뻔한 순간을 가볍게 넘겨주었으니까. 그런 은혜들이 그때는 친구의 도움인 줄로만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부처님의 가호였다는 걸 느끼고는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어 보인다. 진실眞實이나 사실事實이라고 해서 다 눈에 보이고 다 손에 잡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만한 나이가 이제는 되었으니까.
(- 남자南子들만 골라 보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