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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1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수원] 아빠를 바꿀 순 없나요?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사도 9, 1 - 20
† 복음 : 요한 6, 52 - 59
★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사흘 동안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난 사울은 다시 앞을 보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로 바뀐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당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서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기를 촉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뒤에 공익 광고 하나가 나왔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친 할머니, 30년 동안 모아 온 돈을
나라를 위하여 기부한 군인, 줄 것이 없다며 자신의 몸을
기증하기로 한 할머니 등이 등장할 때마다 추기경의 말씀이
나옵니다. “밥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추기경의
육성이 들립니다. “사랑은 내어 주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
“밥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이 짧은 문구는 김 추기경이 1989년
서울 세계 성체 대회 때 밝힌 말씀이라고 합니다. ‘밥’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영양분을 주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주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네 밥이냐?”라는
말처럼, 남에게 눌려 지내거나 이용만 당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에도 ‘밥’이라는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러니 ‘밥이 되고
싶다.’는 것은 자기희생과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김 추기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밥’이 되신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도 역시 성체 곧 ‘밥’이 되어 오십니다. 김
추기경 말고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본받아 ‘밥’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라는 ‘밥’을 먹으며,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밥’이 되고 있는지요?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빠를 바꿀 순 없나요?
2013년 다해 4월18일 2013년 다해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
복음 : 요한 6,52-59
<아빠를 바꿀 순 없나요? >
우연히 아이들 동화책을 하나 집어 읽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 중의 하나인데
‘아빠를 바꿀 순 없나요?’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람이는 오늘 엄마, 아빠와 놀이공원에 가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엄마는 보람이에게 빨간 색 바지를 입으라고 꺼내줍니다. 그러나
보람이는 분홍색 치마를 입겠다고 떼를 씁니다. 놀이공원에 가면
치마가 불편할 것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분홍색 치마를 입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아빠가 흰색 운동화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람이는 빨간색 구두를 신겠다고 또
떼를 씁니다. 많이 걸어야 해서 불편하다고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결국 보람이는 분홍색 치마와 빨간색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아빠의 핸드폰이 울립니다. 아빠의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당장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공원에는 다음에 꼭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보람이는 오늘
안 가면 앞으로도 안 가겠다고 소리 지릅니다. 그래도 아빠는
회사로 가버립니다.
엄마가 보람이를 달래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보람이는
엄마이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아빠 싫어. 아빠 바꿔 주세요.”
엄마는 놀라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를 어떻게 바꾸니?”
아이는 대답합니다.
“왜 안 돼? 옷도 바꿀 수 있고, 신발도 바꿀 수 있는데, 아빠는
왜 못 바꿔?”
왜 아빠는 바꿀 수 없는 걸까요? 혹시 우리는 나의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님이 다른 모습이기를 바랐던 적은 없나요?
비슷한 동화책이 있는데 [엄마 아빠를 바꿔주는 가게]라고
합니다. 잔소리에 지친 아이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은 엄마
아빠를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가게입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엔 잔소리도 안 하고 야단도 안 쳐서 편한 것 같았지만, 왠지
무언가 부족한 걸 느낍니다. 결국 지금의 엄마 아빠가 가장 좋은
분들이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엄마 아빠를 내 맘대로 바꾸어서 더 좋다면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좋아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이가 부모를 바꾸어서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바로 그것은
무엇일까요? 다른 부모가 채워줄 수 없는 바로 그것, 그것은
바로 친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며 서로 싸우기도 하고 결국에는 대부분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말씀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왜 바꿀 수
없는 것일까요? 대치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과 바꿀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본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성체와 성혈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대체될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안타깝게도 그것마저 바꾸어 버렸습니다. 개신교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먹으라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많은 이들이 당신을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도 대체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는데도
개신교에서는 ‘살과 피’를 ‘말씀’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잃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는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 구원의 ‘본질’
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체, 성혈을 왜 인간 구원을 위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삼으셨을까요?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행위 중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행위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당신
자신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만큼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음식은 부모의 생명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해 줄 때 부모는 그 음식을 위해서 조금씩 죽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생명을 먹고 큰 사람들입니다. 생명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만약 성체성사보다 더 크고 완전한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거나, 구원의 원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저는
예수님이 세운 성체성사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성체성사
안에 하나로 모이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뀔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가 바로 구원을 위해 대체될 수 없는 본질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을 위해서 보약을 먹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보약을 먹고는 더욱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몸에 좋다는 보약이라는 말에 그리고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라는 생각을 갖고 꾸준히 보약을
먹었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진찰을
해보니 보약이 체질에 맞지 않아 간이 녹아버렸답니다. 결국
몸을 좋게 할 것이라는 보약을 먹고 오히려 건강이 더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약하기만
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병균
하나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할 수도 있고, 또 아무리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영토를 소유했으며 대단한 지도력을 보였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도 집에 돌아오면 고독과 외로움에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하지요. 하물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철저하게 순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물 중에서 가장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입니다.
이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순명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순명을 위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들은 것을 행동해야 합니다. 듣고
행동하는 것, 이 모습이 하느님 앞에 순명하는 사람의 바른
모습입니다. 만약 듣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떤 우리들을
원하실까요? 당신께 순명하는 사람 아니면 당신의 뜻을 항상
외면하는 사람?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몸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 힘주어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옛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빵만을
소유하고 먹으려 합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에만
집착하다보니 영원히 살 수 있는 주님의 살과 피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우리의 생활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주님의 말씀을 혹시 이쪽
귀로 듣고 저쪽 귀로 흘리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이 세상의 삶 안에서 좌절하지
않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니까요.
우리는 무엇이 안 되는지 경험함으로서 무엇이 되는지
발견한다(사무엘 스마일스).
어젯밤, 교구청 담벼락에 피어있는 개나리에 홀딱 반했지요.
고통을 담는 그릇
제자의 끊임없는 불평에 신물이 난 스승이 제자에게 소금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소금을 갖고 오자, 그는 우울한
얼굴의 제자에게 소금 한 줌을 물에 타서 마시라고 했지요.
“맛이 어떠냐?”
“죽을 맛입니다.”
스승은 낄낄거리면서 제자에게 다시 소금 한 줌을 근처 호수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소금 한 줌을 호수에 휘휘
뿌리자 스승이 말했지요.
“이제 호수의 물을 마셔 보거라.”
제자가 턱 밑으로 물을 뚝뚝 흘리면서 호수 물을 떠 마시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맛이 어떤고?”
“시원합니다.”
“소금 맛은 나느냐?”
“안 납니다.”
스승은 제자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습니다.
“삶의 고통은 순수한 소금과 같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양은 똑같아. 정확히 똑같지.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고통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져.
고통이 느껴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넓은 마음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것뿐이야. 유리잔 말고 호수가 되어야 해.”
우리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요? 유리잔일까요?
호수일까요? 고통에 대한 나의 모습에서 내 마음의 크기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하루를 영원처럼
2013년 다해 4월1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하루를 영원처럼>
어떤 날 하루를 돌아보고 나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날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했습니다. 그보다 더 한
하루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날입니다. 자신을 통제 못해
좌충우돌 이웃들과 부딪치고, 나나 상대방이나 크게 상처 입은
마이너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주로 사랑을 만난 날입니다. 크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날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몸 바친 날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루를 살아도 영양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것, 하루를 1년같이,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
지상에서의 모든 순례여정을 내려놓고 드디어 하느님을 뵙는 결정적
순간의 영원한 삶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내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체 순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합일하는 너무나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 결정적 구원을
미리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머나먼 훗날, 젊음이 지나가고,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후에야 맛보기보다는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순간순간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대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형제 이태석 신부님, 그의 생애가 너무나 짧아
다들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고 있지만 그는 짧은 생애 내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충만하고 치열한 삶을 살다갔습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남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갔습니다. 톤즈 가난한 청소년들의 둘도 없는 친구,
진심으로 제자들에게 다가서는 참스승, 나환우들의 든든한 보루,
음악을 통한 영혼의 치유자...이런 면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았습니다. 그는 하루를 1년처럼,
하루를 영원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잘 보여주고 갔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바라볼때 마다 같은 수도회 수도자이자 동료사제로서
정말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
바빴습니다. 그의 하루는 보통 사람의 한 달, 두 달 이상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그는 톤즈의 가난한 청소년들과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내고 있던 톤즈 주민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늘 고민을 거듭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장례식 참석차 방한했던 살레시오회 동아프리카
관구 소속 수단 지부 지부장 페링톤 신부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는
이태석 신부님께서 얼마나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밀도 깊고 충만한 삶을 살다갔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다섯 명, 열 명이 할 일을
혼자 척척 다 해냈습니다. 그는 톤즈에서 불과 8년 동안만 선교사
생활을 했지만 사실 80년을 봉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 하루,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라고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큰 선물인 이 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 ‘요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뼈대 있는 사람
자식농사가 여러 갈래라 참 어렵고 계획대로 되질 않습니다.
자식을 됨됨이가 잘 된 사람으로 길러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자식 다 기르고 나서 후회와 한탄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교육으로 인간의 중요한 기초를 다져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뼈대 있는 힘찬 사람이 되지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인 성체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한 6,5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성체성사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기도는 두말할 것 없이 미사다. 왜 미사가 그토록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날마다 저질러지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봉헌되는 성체성사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가끔 피정 지도를 할 때 미사 강론으로 이런 질문을 한다. “여러분
중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는 분은 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해하면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물론 성체를 모실 외적인 자격은 세례를 받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하는 질문이다.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이 세상에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어 모시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태도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깨닫는 데 있다.
선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음 두 가지면 된다. 하나는 ‘죄송합니다.
애를 썼지만 또 죄 속에서 당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는 마음과,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저에게 오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다.
물론 기억에 상처나 죄가 남아 있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셔야
한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너무 생각 없이, 너무 뻔뻔하게 성체를 모시는 이가 많다. 떨리는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성체를 모셔야만 한다.
- 김대열 신부(일본 사이타마교구 오따천주교회) -
◈ [기타] 부활 제3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4월19일
직원들이 함께 입을 봄 잠바를 보고 있습니다. 색깔도, 종류도,
가격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 중에서 고르려니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무엇을 고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여자 분들은 백화점에 가면 쇼핑을 즐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중하게 고르는 편입니다. 선택한 옷을 입어보고,
남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이 옷 어때!’ 남자들의 대답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좋은데!’ 저도 어제 직원들의 질문을
듣고서 대답했습니다. ‘아무거나 골라요.’ 결국 회색 잠바로
낙점되었습니다. 수련장에는 많은 건물들과 시설물들이
있습니다. 시설물들의 이름과 명칭을 적은 부착물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디자인도 선택하려니까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했는데, 그 생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생각은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대한 선택은 직원들에게 맡기는
성격이라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금을 도금하고 백합을 색칠하는 것, 제비꽃 위에 향수를
뿌리는 것, 얼음을 매끄럽게 또는 색 하나를 더 무지개 위에
입히는 것, 다만 장식을 위해 빛으로 아름다운 천상의 눈을
쫓는 것은 낭비이며 어리석은 지나침이다.”
공자는 ‘過猶不及’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입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다른 제자인 자하와
자상을 두고 질문을 합니다. 둘 중에 누가 더 어집니까? 그때
공자는 말을 합니다. 자하는 지나치고, 자상은 미치지 못한다.
그러자. 제자들이 또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어질다는
것입니까? 공자는 말합니다. 둘 다 똑같다. 셰익스피어와 공자는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을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이제 회심하여, 교회의 커다란 기둥이 됩니다.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을 복음의 사도로 만드셨는지?’를 묻는 것은
지나친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든 사람에게
나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이 전 존재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예수님께 ‘왜 그렇게 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사람들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다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재능을 기꺼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내맡긴영혼은>간병인에게고(告)합니다!-이해욱신부
간병인에게 고(告)합니다!
병자를 돌보시는 "간병인"께 고합니다.
지금, 님들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아주 "거룩한 일"입니다.
직업으로 하는 일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지금 님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협조자로서 일하고 계시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의 다른 글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병자들은 아주 매우
기운이 쇠합니다. 병자의 병이 깊으면 깊을수록 말입니다.
기운은 글자 그대로 움직이는 기(에너지)이기에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물이 맑은 물이든 흙탕물이든
똥물이든 모든 물은 다 그렇게 흐릅니다.
기도 마찬가지로 좋은 기운이든 나쁜 기운이든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기운이 49%이고 나쁜 기운이 51%라면
좋은 기운보다 나쁜 기운이 1%라도 더 강하기에 그 1%의
틈을 비집고 나쁜 기운 속으로 사탄이 파고들어 49%를 한
번에 다 잡아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병이 깊은 환자에게 있어서는 그 환자 옆에서 간병을 하는
이가 어떤 기운의 소유자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간병인이 좋지 않은 생활과 환경 속에서 살면서 거룩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간병인은 당장 다른 이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정말 거룩히 사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 간병인 문제는 어쩌면 "의술이나 의료진"의 문제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병자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라고 저는
굳게 생각합니다.
모기업의 "생각이 에너지이다"라는 광고 문구는 참으로 훌륭한
문구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생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에너지(기)를 갖고 있기에 병자 옆에서 간호하는 이가
하는 생각에 의해 생겨난 에너지(기)가 기운이 없는 병자에게
고스란히 흘러가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부모나 주인의 믿음에 따라 병자가 완치되는 기적이
그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마태 8,5-13 / 루카 7,11-17)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사도요한이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우리 요한이가 다시 맥박은 살아났으나, 어제부터 계속
자고 있습니다. 아주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병원에 방문했을 때, 요한이 엄마에게 "주님께서 요한이를
데려가신다 하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리세요.
그것이 진짜 요한이를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요한이가 아주 조금씩 좋아지다가 갑자기 안 좋아질 때,
절대로 실망과 걱정을 하지 마세요. 갑자기 안 좋아지는 것을
통해 더 좋게 해주시려는 신호입니다."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을 잊어버리신 모양입니다.
하기야 오랜 세월 동안 사제생활을 해 오시던 어떤 분도 분명히
그렇게 당부의 당부의 당부 말씀을 드렸건만, 간병인과 함께 그
말을 다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이니...
그래서, 끊임없는 내맡김의 화살기도와 성가찬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살기도와 성가찬미는 "생각, 특히 나쁜 생각을 몰아내는 데"
정말 최고의 기도입니다. "아주 안 깨어나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앞서는 그 걱정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때려잡는 데 있어서 아주 "최고의 재래식 무기"입니다.
"아주 안 깨어 날 것 같다."는 그 생각을 타고 마귀가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저를 찾아 오셨던 말기암 환자들에게서 얻은
경험을 통해서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통하여 죽어가는 병자가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을 그 어디에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시기하는 마귀의 두목과 마귀의
모든 군대가 떼거지로 달려들어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잘못된 일은 "맥박은 좋아졌는데..."라는
말입니다. 맥박이 좋아졌다는 것, 정말 이것은 주님의 아주 큰
은총입니다. 맥박이 좋아졌다는 한 가지 사실에 두 손 모아
진정한 감사와 뜨거운 눈물을 하느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 행위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느님께 99%를 내맡긴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사"를 잊어버리면,
곧, 그 사람이 받았던 모든 은혜를 한 순간에 다 거두어 가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은 8 (1+7)마리 "마귀의 신나는 놀이터"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마태 12,43-45)
특히, 부모는 자식의 전신이기에 부모의 자녀에 대한 태도는
정말 절대적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피는 못 속이는 법"
입니다. 핏 속에는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氣血)
부모의 영적 상태가 고스란히 자녀에게 기혈(氣血)을 타고
유전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혈기(血氣)를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아님말구!
"감사할 줄 모르는 부모" 밑에 자라난 자녀가 과연 지 스스로 저절로
감사하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이 엄마는 요한이 때문에 어떨결에 영세를 받아서 잘 몰라서
그랬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이 엄마를 알고 계신 분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요한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뜨거운 불화살 기도"가
요한이에게 쏟아지고 있습니까?
요한이 엄마는 앞으로 "걱정"이라는 것을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 걱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기도가 한 방에 다 날아갑니다.
마귀는 하느님 다음 가는 능력의 소유자이기에 그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요한이 엄마는 앞으로 당장,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거의
멈춰졌던 요한이의 맥박이 다시 뛰게 되었음을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요한이를 데려 가신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렇게나마, 맥박이 뛰는 요한이를 옆에서 지켜 볼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시니 저는 정말 그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요한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마저도 사흘
만에 깊은 잠, 죽음에서 깨어나신 주님의 뜻에 맡겨 드립니다."
라고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정말, 병자 옆에서 간호하는 간병인은 천사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다음에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하덧사 간병인
단체"를 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주님께서 지금 저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주님, 병자들을 간호하는 모든 간병인들의 마음을
당신의 뜨거운 성심의 불꽃으로 태워 주시어 그들 마음이
인간생명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불타오르게 하소서!"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허신부의 강론: 참된 먹거리
제목: 참된 먹거리!
연일 대중매체에서는 먹거리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를 하였다.
그러한 보도를 보고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사회는
발전한 것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먹을 것에 대한 이러한
사기극이 어떻게 이렇게 자주 그리고 넘쳐나도록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영과 육을 위한 참된
먹거리를 주신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몸속에서 아기가 자기 몸의
영양으로 탄생되어 나오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위한 먹거리이다.
부활이후 언급되는 복음의 주제는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이다.
마치 이 주제로 시리즈 연속극을 쓰는 듯 보인다. 우리는
부활을 위한 사순시기에만 열심해서는 안된다. 부활이후에
50일간의 준비를 통해 성령강림을 준비해야 한다. 그 50일간
우리는 성체성사에 대해 묵상하고 공부해야 한다. 부활을
향해 사순을 그렇게 준비한 우리는 다시 50일간의 참되고
거룩한 먹거리에 대해 사순시기를 보낸 더 큰 노력과 시간으로
예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을 묵상해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이의 선물은 준자의 경향과 수순 그리고 방식과
문화를 담고 있다.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허윤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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