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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온천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온천-김길수
<단편소설>
여보, 고향 갑시다!
김 길 수
띠리리링~ 띠리리링~
핸드폰의 알람이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를 깨듯 요란하게 울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시 눈을 붙이던 박 여사는 후다닥 일어나며 핸드폰의 알람을 끈다.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두시 삼십분이다.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긴 하품을 내뱉으며 안방 문으로 다가간다.
“아니? 우리 예쁜이가 그새 잠을 깨 혼자 놀고 있네. 선영아 잘 잤어? 벌써 언니 마중 갈 시간이다.”
박 여사는 익숙한 동작으로 손녀를 안아 포대기로 들쳐 업는다. 현관문을 나서며 우산까지 챙긴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지라 잠시라도 아이들께 비를 맞혀서는 안 될 일이니까.
아파트 단지 안 유치원차량 정류소! 노란색 샛별유치원 통학버스가 들어와 서고, 인솔교사가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다시피 부축해 내려서는 마중 나온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넘겨준다.
“은주 할머니, 안녕하세요? 은주 오늘도 잘 놀았어요.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마지막으로 인솔교사가 박 여사께 인사를 건네며 은주의 손목을 쥐어주자, 은주가 와락 할머니께 안긴다.
“할머니…!”
“아이쿠 내 새끼! 재미있었어?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요.”
박 여사는 인솔교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은주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한 손을 잡힌 은주는 걸으면서도 깨금발을 뛴다.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기다란 머리가 덩달아 우쭐거린다.
“자 은주야, 먼저 세수부터 좀 하고…, 시간 맞춰 또 피아노 공부하러 가야지?”
“…또 가야 돼? 난 선영이하고 놀고 싶은데…!” 은주가 선영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하는 말이다.
“피아노 공부하고 와서 저녁에 선영이랑 놀면 되지. 피아노 공부 재미있다면서?”
박 여사가 선영이를 요람에 태우고는 은주에게 세수를 시킨다. 머리를 다시 묶어주고, 가방을 열어 피아노학원 교재며 준비물들을 챙겨본다.
“우리 이뿐이 우유 먹어야지?” 은주를 학원에 보낸 박 여사는 곧장 주방에서 선영이의 이유식을 챙겨 나와 갓 첫돌 지난 선영이의 입에다 갖다 물린다.
‘이제 저녁준비 할 시간이네….’ 선영이를 지켜보며 혼잣말을 하는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엄마…!” 직장에 가 있는 딸이다. 박 여사는 자주 있는 일인 듯 무덤덤하게 전화를 받는다.
“이 시간에…, 또 무슨 일로?”
“엄마, 미안한데…. 오늘 우리 회사에서 회식이 있거든. 그래서 좀 늦을 것 같애. 아이들 좀 챙겨주라고!”
“뭘 챙겨…? 아이들이야…, 저들 알아서 학원에 가고 오잖아?”
“그래. 매일 하는 대로야. 영진이는 학교마치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갈 거고…, 혹시 철민이 녀석 시간 맞춰 학원에 안 갈까 봐…?” 박 여사는 약간 짜증스럽다. 하지만 내색은 않은 채, 혼잣말 하듯 대답한다.
“그래 알았다. 그 놈의 학원 참! 그리고 무슨 놈의 회식은 또 그리 많노?”
박 여사는 전화기를 소파위로 툭 던지며 넋두리하듯 중얼거린다.
‘망할 것들! 저희들은 하고 싶은 일들 다 하면서…!“
선영이를 업은 박 여사가 현관문을 나서 승강기를 타고는 17층에 위치한 딸네 집 현관으로 들어선다. 거실이며 주방을 둘러보던 박 여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찬다.
“또 이래 놓고 출근을 했나?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조금만 일찍 일어나면 될 일을…?”
투덜거리며 둘러보다가 거실소파에다 선영이를 내려놓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리를 시작한다. 흩어져있는 아이들 옷가지며 책들을 대충 제자리에 정돈하고, 개수대에 담겨있는 그릇까지 씻어 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둘러엎는다.
‘이런 일까지 해야 하다니…? 젊은 것들은 하나같이 게을러터져 가지고…!’ 그러면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거실바닥까지 대충 훔친다. 베란다에 널린 빨랫감까지 걷어와 각을 세우듯 반듯반듯하게 개킨다.
“어! 할머니 오셨네. 할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영진이가 현관문으로 들어서며 밝게 인사를 한다.
“그래. 학교 공부 잘 했니? 배고프지? 손 씻고 식사 좀 해야지?”
“밥은 먹었어요. 할머니!”
“오늘 학교공부는 재미있었니?”
“네. 할머니! 오늘 작문시간에 선생님이 칭찬해주셨다.”
“그래. 우리 영진이가 글짓기도 잘 하나봐!” 박 여사가 영진이에게 참외를 깎아준다.
“영진아, 또 학원에 가야지? 가방 잘 챙겨놨나? 오늘은 무슨 학원이더라?”
“오늘? 피아노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한자…!” 영진이가 학원가방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 여사는 잠시 옷을 갈아입힐까? 하다가 오늘은 그냥 보내기로 한다.
경수씨는 귀갓길에 복지관 옆 대형 마트에 들렀다. 아침에 아내가 주문한 세제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다. 이곳이 동네 슈퍼보다는 아무래도 값도 싸고 질도 좋다며, 틈이 잘 안 나는 아내가 종종 심부름을 시킨다. 그래서 오늘도 아내가 메모해준 대로 꼼꼼히 챙긴다. 자칫 잘못하면 주문한 제품과 다르다며, 심부름 잘 해다 주고도 핀잔을 듣곤 하는지라, 메모할 때 미리 제품명은 물론, 크기나 용량, 심지어 포장지 색깔까지 꼼꼼하게 챙겨나가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래놓고…? 또, 위층에 갔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뭐고? 무슨 수를 써야지. 이거 원!”
거실에 들어선 경수씨가 아무렇게나 널려져있는 은주의 학교책가방이며 장난감, 그리고 첫돌박이의 요람까지 제자리에 갖다놓으며 혼자해보는 말이다.
“또 위층에 갔다 오는가? 대낮인데…, 무슨 일로?” 경수씨가 딸네 집에 갔다가 선영이를 업은 채 현관문을 들어서는 박 여사에게 하나마나한 이야긴 줄 알면서도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무슨 일은? 영진이 학원가는 거 좀 챙겨봐야지!”
“영진이 걔는 3학년인데, 스스로 알아서 가면 안 되는가?”
“왜 안 돼. 안되긴. 그래도 챙겨봐야지. 제 엄마도 자꾸 전화를 해대고?”
“전화는 왜 자꾸? 사람 성가시게?”
“그러게 말이요. 저희들은 맨날 회식이다 뭐다하면서…!”
“……! 그건 또 무슨 얘기지?”
“아이고! 몰라! 오늘도 사무실에서 무슨 회식을 한다나? 시간 맞춰 은주 마중이나 좀 가소. 학원이 바로 코앞이라도 확실히 챙겨야지…. 하도 무서운 세상이니까. 철민이 녀석 학원 안 갈까봐 지애미가 전화까지 해대는데 또 올라가 봐야지.” 박 여사의 얼굴에 귀찮고 피곤한 표정이 역력하다. 경수씨는 아내의 표정을 보며 이렇게까지 될 줄 미리 예상치 못한 자신의 짧았던 생각에 다시금 후회가 일었다.
딸은 철민이 학원가는 거나 좀 챙겨주라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막상 집에 들어와 보면 이것저것 손 갈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두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러자니 또 어딘가 꺼림칙하여 결국 이리저리 치우고 닦아내려 팔을 걷어 부친다.
“할머니 학원 다녀오겠습니다.”
오후 늦게야 학교에서 돌아왔던 철민이가 저녁식사를 하고는 다시 집을 나선다. 학원시간에 늦을라? 걱정하는 외할머니의 독촉에 철민이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그래. 공부 잘하고 와! 엄마는 오늘 좀 늦게 온대, 이런 때일수록 더 잘해야지”
“엄마는 왜 또 늦는데요?”
“회사에서 모임이 있다는 구나. 그러니 넌 학원공부 잘 하고 와!”
“…알았어요. 할머니”
“이제야 오늘 일이 모두 끝났나 보네!”
저녁 설거지를 마친 며느리가 손주들을 데리고 저희들 방으로 들어가자, 박 여사가 거실 소파에 걸터앉으며 하는 말이다.
“오늘도 수고가 많았네.” 끝나가는 저녁 아홉시 TV뉴스를 지켜보던 경수가 한마디 했다.
“이제 선영이 업고 다니기도 힘이 드네. 여기 어깨나 좀 두드려줘요” 박 여사가 경수씨 앞으로 어깨를 들이민다. 경수씨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아내의 어깨부위를 이리저리 두드리기 시작한다. 요즘에 와서 가끔 이런 요청을 해오는 아내가 새삼 안쓰럽다.
“여보, 내일은 복지관에 가시지 말고, 내 일 좀 도와줘요”
“무슨 일인데…!”
“내일은 선영이 정기 접종일이라네요. 혼자 가기 힘들 것 같으니 오전에 좀 도와주시라고.”
“그런 일은, 걔 엄마가 직접 데리고 가야 할 일 아닌가?”
“며느리는 내일 사무실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을 낼 수가 없다 네요.”
“허! 그것 참!” 경수씨의 대답이 뚱하다. 내일 시간 내기가 힘든 게 아니라, 아이들의 요구사항에 은근히 심사가 뒤틀려서다. 딸이나 며느리는 하나같이, 아이들 일을 아내에게 떠맡겨버리려는 것 같아서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만 해도 얼마나 자질구레하며 힘이 드는데…, 이제는 바깥일까지!
사실, 경수씨도 이만한 일에 심사가 뒤틀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줄 충분히 안다. 그럼에도 ‘아이들도 이젠 제 어미 고충을 알만한 나이가 아닌가?’ 싶고, 거기다가 최근에야 깨달은 일이지만, 아이 보는 일이 남 보긴 쉬워도 당사자는 엄청 힘들다는 사실이다. 원래 잘해야 본전이고, 잘못하면 왕창 바가지 쓰는 일이다. 저희들이 놀다 작은 생채기가 나거나 사소한 고뿔이 들기라도 하면, 으레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주의 탓이 아닌가? 하는 분위기로 바뀐다는 사실이, 여간 신경 쓰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임자, 아무래도 우리 괜히 이사 왔나보다.” 경수씨가 TV뉴스를 지켜보며 불쑥 던졌다.
“왜요?” 박 여사는 경수씨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면서도 되묻고는, 다시 스스로 답을 했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 하면 뭘 하누?”
“그야 당신 몸 상태가 자꾸 안 좋아지는 것 같아 하는 말이지….”
“농사짓기도 힘들고, 그냥 놀기도 힘 든다며 아이들한테 가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처음부터 내가 그랬나 뭐. 아이들이 원했고, 또 노후에는 그게 제일 좋을 줄 알았지.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잖아?”
“그거야…, 아이들이 맞벌이하니까 그렇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데 우두커니 놀면 뭐 하나? 도와줘야지?”
“그 말이야 맞지. 하지만 그 맞벌이? 그거 꼭 해야 되는가??”
“아이들 학원비가 얼만데…?”
“학원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며? 이건 교육이 아니라, 숫제 아이들을 잡는 거야.”
경수씨는 갑갑한지 냉장고에서 냉수 한 컵을 꺼내 마시고는 거실을 이리 저리 서성인다. 박 여사도 덩달아 기분이 착잡해진다. 박 여사가 혼자 푸념하듯 이야기한다.
“1~2년이면 되겠지 했는데…, 벌써 3년째야. 앞으로도 얼마나 더 가야할지 끝이 안보이네…?”
“맞아. 어찌된 게 아이들이 커갈수록 돌봐야 할 일이 더 많아지네. 끝이 안 보인다는 게 맞아. 그나저나 인숙이는 곁으로 이사 못 오게 할 걸 그랬어. 처음엔 저희들도 외롭겠다 싶어 곁으로 오는 걸 좋아라했더니만. 이젠 우리가 완전히 잡혀버린 꼴이야. 같은 지붕아래 살면서 안 챙겨볼 수도 없고….”
“그거야 멀리 살면서…, 오라 가라 하는 것보다야 가까이 있는 게 오히려 편하지.”
“인숙이는 아이들 학원 좀 줄이면 안 되는가? 그러면 굳이 맞벌이 안 해도 될 것 같은 데…?”
“아이고. 또 모르는 소리. 젊은 것들 학원 줄이라면 버럭 한다니까.”
“……? 왜?”
“아무리 힘이 들어도 학원에는 보내야 된대.”
“그 놈의 학원, 참! 그리고 조기교육! 그거? 효과가 있기나 할까?”
“젊은 엄마들이 얼마나 극성들인데…? 학원도 일류 이류 삼류가 있는데. 철민이, 영진이 가는 데는 중간치도 못된다며 불만인데, 뭐라 하요?”
“아직 중학생도 아닌 놈을? 돈도 모자라 허덕이면서…!”
“어른들만 지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지라오. 철민이 녀석은 가끔 빼먹기도 하는가봐. 학원을 네 군데나 간다니까, 제 녀석도 지치고…, 가기 싫겠지?”
“그놈의 학원이 뭔지? 학교 공부만 했어도 다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쯔쯔…!”
경수씨는 혼자 중얼거리며 갑갑한지 TV채널을 돌린다. 마침 육아문제에 대한 패널들의 토론프로가 전개되고 있었다. 육아가 어려우니까 나라에서 일정부분 책임져야 하며, 그래야 결혼기피현상이나 저 출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빤한 이야기들이다.
경수씨 내외가 아들네 집으로 합가한지도 벌써 3년째다. 고향에서 교직을 정년퇴임 하고나니, 맘은 편했지만 무료했다. 특히 경수씨는 매일 출근할 일도 없는데다 농사일도 서툴렀다. 때마침 아들 내외는 부모를 모시겠다며 자기들 집으로 합가를 요청했다. 손주들 육아문제 때문이었다. 부담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맡아야 할 자신들의 일로 받아들였다. 솔직히 아들 내외가 은근히 고맙기까지 했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돌볼 손주도 은주뿐이었다. 매일매일 은주의 재롱에 파묻혀 즐겁고 행복한 생활이었다. 외 손주들은 같은 시내이긴 해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자주 만날 틈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2년 사이에 둘째 선영이가 태어나고, 또 작년 겨울 딸네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자 상황은 예상 못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딸네는 이사 올 계획이 없었지만, 사돈 마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시자 당장 아이들 육아문제에 부닥쳤다.
육아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이 이미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이다. 일일이 돌보기보다는, 부득이한 경우, 지켜봐주기만 하면 좋겠다는 게 딸과 사위의 생각이었다. 맞벌이하는 입장인지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거나 꼭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딸네의 이런 사정을 듣자, 처음에는 박 여사도 경수씨도 그거 참 괜찮은 아이디어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다 자랐으니 특별히 돌 볼 일도 없겠고, 대신 외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오누이가 이웃에 살게 되면 우애도 더 깊어지겠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엄마, 오늘 이사 갈 곳 정했어.” 어느 날 딸은 흥분된 음성으로 박 여사에게 전화를 해왔다.
“그래? 어디로?” 박 여사도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엄마. 놀라지 마. 엄마가 사는 그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했어요.”
“거, 무슨 말이고?”
“엄마, 엄마 옆으로 이사 가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마침 엄마가 사는 그 아파트가 나왔지 않겠어? 그래서 오늘 계약을 했다니까.”
박 여사도 다행이다 싶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같이 살게 되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인숙이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오기로 했대요.”
저녁 때 귀가한 경수씨에게 박 여사가 이야기를 전하자, 경수씨도 파안대소했다.
“거 참 잘 됐네. 한 번씩 가보려고 해도 너무 멀다 싶었는데…. 잘 됐다! 아이들도 자주 볼 수 있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딸네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 17층으로 이사를 왔다. 아들네 아파트가 5층이니까 위 아래층에서 살게 된 것이다.
딸네의 이사와 동시에 아이들도 개학에 맞춰 모두 전학을 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씩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학교나 유치원을 마치고는 모두 학원엘 가는 게 문제였다. 아이마다 학원시간도 다르고, 과목도 달랐다. 자연히 누군가가 챙겨주어야 할 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씩이나 되는지라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었는데…! 곁에서 챙겨주는 것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치원생인 은주야 당연하지만, 초등학생인 외 손주들에게도 간혹 간식도 챙겨먹여야지, 때로는 옷도 갈아입혀야 할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시간 맞춰 학원에 가도록 챙겨주는 일이었다. 자칫 놀기에 몰두하다 학원을 빼먹거나 지각하는 경우도 흔했다. 딸도 겉으로야 엄마께 미안해하면서도, 내심으론 얼마나 마음 든든하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에 박 여사로서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둘 스스로 챙겼다.
그런 과정에서 무엇보다 경수씨가 놀란 것은 아직 초등학생인 외 손주들이 무슨 학원을 그렇게 많이 가는가? 하는 점이었다. 하기야 유치원생인 은주도 피아노학원에 보내는 세상이니, 초등학생이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란 점 까지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한 두 과목도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려 4~5개 과목의 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년에 중학에 갈 철민이도 학교수업 외에 학원을 무려 네 곳이나 다닌다고 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들은 경수씨는 무슨 엉터리 같은 짓을 하고 있느냐? 며 딸을 나무랐다가 오히려 딸한테 핀잔만 들었다. 요즘 학원 그렇게 보내지 않는 집이 어디 있느냐? 고, 당장 내년에 중학에 갈 것인데 처음부터 뒤처지게 해서야 되겠느냐? 고. 그리고 요즘이 어디 아버지세대가 살아온 세상과 같으냐? 고.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촌 영감 대하듯 조목조목 따지는 바람에, 꿀 먹은 벙어리 격이 되어버렸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더욱이 3학년짜리 영진이도 네 군데의 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불끈 화까지 치솟았지만, 결국은 저희들이 알아서 교육시키겠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싶어 억지로 참아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아이들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기로 작심을 하다시피 한 경수씨다.
평생을 아이들 교육에 바쳐온 경수씨가 아닌가! 비록 시골에서, 그것도 평교사로 정년퇴직을 했지만 사명감하나로 묵묵히 교직의 길을 걸어온 자신의 생각이 도무지 발붙일 데가 없다는 데 허탈감이 들었다.
현 실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요즘 아이들을 기르는 젊은 부모들의 극성스럽다 싶을 만치의 교육열도 잘 알고 있다. 한 집에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기르는지라 자기자식교육에다 모든 걸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상풍조를 몰라서도 아니다.
평소 조기교육이란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적성과 소질이 어디에 있는가? 를 일찍 발견하고 이 부분을 계발하고, 심화시켜나가는 데 의미와 효용이 있다는 교육관을 갖고 있는 경수씨로서는 학교교육의 재탕이나 다름없는 묻지 마! 식 학원교육에는 결코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경수씨의 눈에는 학원교육이라는 것이 영락없는 학교교육의 재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학교교육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학원에 가서 또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니, 학교교육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너도나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니 학교교실의 붕괴라느니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경수씨는 될수록 17층 딸네 집에는 가지 않았다. 학교에다 학원에까지 얽매여 있는 아이들이 대견해보이기는커녕 불쌍해 보이기까지 해서다. 그런데도 딸은 자신의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경수씨는 딸의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무척 당혹스럽다. 도대체 그 어린 아이들에게 왜 그리도 조기교육을 집착할까? 하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교 졸업 후 한때 학원 강사를 했던 딸이었다. 그때 딸은 매월 초 학원들이 학원생 유치를 위해 들이는 수고가 너무나 장삿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 같은 학원 강사로서의 부끄러움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리고 학원에는 보낼 필요가 없다며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지론에 찬성을 했던 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신이 학부모가 되고부터는 완전히 180도 달라져버렸다. 종래의 학원 무용(無用)론 자가 아닌 적극적인 학원 옹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나 학원가 엄마들의 모임에 가보면 학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며 과거생각이 잘못 되었다며 오히려 당당했다.
딸의 이런 변화에 경수는 정말 어이가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복지관에 가서도 가끔 이런 문제를 거론해보면 대부분의 동년배들도 비슷한 경우를 겪고 있다며 아예 간섭을 포기해버렸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딸의 말처럼 엄청난 세대차이라는 점만 재확인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 아침 출근시간도 분주하게 지나갔다. 아들과 며느리가 바쁜 출근을 핑계로 대충 거실이며 주방을 정리하고는 달리듯 후다닥 현관을 나가버리자, 비로소 정적이 찾아왔다. 박 여사는 마치 체증 같은 게 쑥 내려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제 다음 박 여사의 일은 아직 자고 있는 은주를 시간 맞춰 유치원 통학차에 태워 보내는 일이다. 그리고는 은주가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선영이 예방접종을 해 와야 할 테니까 서두르기 시작했다. 경수는 아내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오늘 병원에서 아내 건강검진을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선영이 접종시키고, 당신 진찰도 한 번 받아봅시다.”
“왜요? 검진 받은 지 1년도 채 안됐는데…!”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인다. 피곤해서 그런가?”
“피곤하기야 하지. 하지만 어쩌겠어요? 무슨 큰 병이 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진찰이라도 받아보잔 말이요.”
아이 녀석들은 매일 제 어머니의 얼굴표정을 쳐다보면서도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 전혀 못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설사 그런 생각이 있다 치더라도 챙겨볼 시간도 없다는 것이 경수씨를 서운하고 허탈하게 만드는 것 같다.
비교적 이른 시각, 아들과 며느리가 동시에 현관문을 들어선다. 박 여사는 평소에 비해 이른 아들 내외의 퇴근을 의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그것도 둘이 같은 시간에…?”
“예? 오늘 일찍 오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요?”
“누가? 네 아버지가? 잠깐 외출하신 것 같은데…?”
“아버님께서 직접 전화까지 주셨던데요?”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은주를 안으며 며느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무슨 일이지? 오후 내내 아무 얘기도 안하시던데…?” 박 여사는 무슨 일인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지라 의아한 생각마저 든다. 그 순간, 다시 현관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사위와 딸이 함께 들어왔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인가? 아빠는 요?”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너희들은 또 왜?” 박 여사는 더욱 놀란 눈으로 딸과 사위를 쳐다본다.
“아빠가 이 시간까지 집에 오라고 전화했던데?” 딸이 말하자, 사위도 덩달아 이야기한다.
“예. 장인어른께서 반드시 시간 지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녁시간. 온가족이 모두 경수씨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나 경수씨는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쭉 둘러본다. 박 여사는 또 별 영양가도 없는 훈계나 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이 사십이 넘어가는 사위를 불러 무슨 얘기를 하겠다고?
“바쁜 아이들 모두 불러놓고 왜 말이 없어요?”
기다리던 박 여사가 재촉하자, 경수씨는 기다렸다는 듯 박 여사를 바라보며 대뜸 한마디 한다.
”여보! 우리 시골로 다시 이사 갑시다.”
그러자 모두들 놀라며 경수씨를 바라본다. 잠간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아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수씨와 박 여사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동생과 올케까지 둘러본다.
“누나는? 참. 그거 몰라서 물어? 아이들 보느라 힘이 드니까 그러시잖아?”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아들이 제 누나에게 이야기하자, 딸은 풀죽은 음성으로 되묻는다.
”…!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이사라니요?”
“너희들은 매일 봐도 잘 모르지? 네 엄마 요즘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다. 오늘 병원에서 링거까지 맞고 뫘다.” 경수씨는 아이들의 행태를 에둘러 꾸짖듯 했다. 그러자 딸은 울컥하며 말을 받는다.
“아빠! 우리도 다 알아요. 조금만 신경 써 주시면 된다싶어…? 그리고 몸이 안 좋으면 더 여기 계셔야죠. 시골로 가면 어떡해요?” 그러자 묵묵히 앉아있던 사위도 한마디 거든다.
“죄송합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다보니 우리생각만 자꾸 한 것 같습니다.”
경수씨는 이때다! 싶어 평소 생각해왔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너희들 생각이야 다 알지…! 그런데 학원이라도 좀 줄이면 안 되겠나? 아이들도 편하고, 그러면 인숙이도 좀 편할 것이고.”
그러자 대뜸 딸의 반론이 튀어나왔다. 마치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 같은 대답이다.
“아빠! 그건 안돼요. 철민이가 곧 중학교에 가는데, 처음부터 뒤처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
경수씨는 뜨악한 표정으로 딸과 사위를 바라보았다.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누나! 아빠 말씀도 맞잖아? 학원 좀 줄이고 누나도 좀 쉬면서…!”
딸은 동생의 말을 지체 없이 자른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희들은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까 잘 못 느끼나본데. 우리 철민이는 아주 적게 가는 수준이야. 올케 안 그래?”
딸은 올케에게 동의까지 구하며 학원 줄이는 문제는 어림도 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그렇긴 해요. 요즘 학원 때문에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어머님이 저렇게 편찮으신데…!”
“올케도 남의 말처럼 하네. 우리는 지금이 딱 고빈 데, 한 1년만 엄마가 옆에서 조금씩만 챙겨주면 된단 말이야.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이라니? 그리고 매일 하는 것도 아니라니…?’ 경수씨는 튀어나오려는 대답을 간신히 참았다. 동시에 딸의 암팡진 대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멍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알았다. 난 또 무슨 큰일이 난 줄 알았네. 너희들 아버지가 괜히 사람 놀라게 만들 구만.”
듣고 있던 박 여사가 마치 결론을 내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경수씨는 진지하게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아니야.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오늘 내가 시골 친구에게 전화까지 해놨어. 거처할 집 한 번 알아보라고. 너희 엄마 성격 너희들도 잘 알잖아? 자기 건강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은 가기 싫어도 가야 돼.”
“아버지!!” 아들과 딸이 거의 동시에 안타까운 음성으로 불렀다.
“시골에 가면 뭐 할 일이라도 있나요?“ 좀 느긋해진 마음으로 박 여사가 경수씨에게 물었다.
“쉬엄쉬엄 농사일도 좀 하고. 그래야 당신도 좀 쉴 것 아냐…!”
“장인어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듣고 있던 사위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듯 말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뒤쪽에 앉아 아무 말도 않고 있던 며느리가 제 남편인 아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철민이와 영진이야 다 컸으니 괜찮지만, 우리 선영이는 어떡해요?”
“지금 그게 문제야. 유아원에라도 보내야지.” 아들은 빤한 일을 두고 왜 그러느냐? 는 식의 반응이다.
“유아원? 유아원은 아직 너무 어려요? 대소변도 못 가리는 데. 비용문제도 그렇지만, 맘 놓고 맡길 수가 없다면서 모두가 꺼리잖아요?”
“……? 그래도 어쩌겠어? 어머니 건강이 저리 안 좋으신데, 아니면 당신이 회사 그만두는 수밖에?”
“그러면 은주 학원비랑 돈 들어가는 것은 또 어떡하고요?”
듣고 있던 경수씨는 다시금 입맛이 쓰다. 저희들 살아갈 궁리에만 집착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영 마뜩찮다. 둘러앉은 가족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신중한 표정으로 재차 말을 꺼냈다
“너희들에게 끝까지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는, 늙었는지 체력도 따라주지를 않는구나.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떻게든 너희들이 알아서들 해라. 아버지 어머니 생각 말고. 그러니 여보! 이제 우리 고향 갑시다.”
“아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딸이 거의 울음 섞인 말투로 얘길 했으나, 아무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모두들 각자의 생각으로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한다.
밤이 깊은 시각. 경수씨는 베란다에서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본다. 무수한 자동차의 행렬이 이어지는 거리저쪽. 학원 건물에는 아직도 불이 훤하다.
“저 놈의 학원들이 사람 골병들게 만든다니까. 학교공부만 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건데…”
“세태가 그런걸 아이들인들 어쩌겠어요? 그리고 당신 시골에 간다고 맘 편하겠어요?”
베란다로 따라 나온 박 여사의 가라앉은 음성이다. 경수 씨는 박 여사와 허공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했다.
“안 편해도 할 수 없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일단 경고라도 해놔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래야 저희들도 현 상황을 제대로 알고 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도 좀 해 보지 않겠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저희들 일은 저희들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기의 인생을 사는 법이니까. 이제 우리도 늦긴 했지만, 우리 인생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무엇보다 이젠 한 번 건강을 잃고 나면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운 나이란 걸 깨달아야지.”
“그야 누가 모르나?”
“아이들 말 하는 걸 보라고. 모두들 저희들 입장만 생각하지 부모생각 염두에나 있어?”
“그야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예로부터 내리사랑만 있지 치사랑은 없다고들 했잖아요.”
부부는 나란히 깊어가는 거리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박 여사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빙그레 웃는다.
“… ? 아니? 웃긴 왜 웃어? 이 판국에?”
“왜는 왜겠어요? 그래도 날 생각해주고, 챙겨주려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구나! 싶어 서지!” 끝.
※ 투고자 인적 사항
성명 : 김 길 수(닉네임, 온천)
주소 : 부산시 동래구 안남로 79번길 101동 203호(안락동, 강변뜨란채 아파트)
연락처 : 010-8520-5920
주요경력
부산문협회원, 연제문학회 이사. 공무원 문예대전 단편소설 최우수(2001), 옥로문학 신인상(2001).
산문집 「가보지 않은 길」
첫댓글 동병상련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