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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일-능력은 없어도 선의는 있어야. 등 )
*** 마지막 부분 평화방송 미사, 신부님 강론. 나병환자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고 헤아리면서 “오늘은 제가 나병환자입니다”라는 글 들어 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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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6주일-능력은 없어도 선의는 있어야
오늘 민수기를 읽으면서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이런 생각이 들고,
더 나아가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입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오늘 민수기는 나병 환자는 피부에 병이 든 사람인데 머리에 병이 든
사람으로 간주하고 사제에 의해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이 되어야 하며,
부정한 사람이기에 진영 밖에 쫓겨나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지금 코로나 시국에 우리도 거리 두기를 하니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만한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민수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며 콧수염을 가리는 겉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이
나병 환자임을 다 알아보게 하여 밖을 나다닐 수 없게 하니 그것만도
비참한데 자기 입으로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다니게 하니 이것은
한 인간을, 비참함을 넘어 처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여기서 '한 인간'이라고 하였는데,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실은
인간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실로 지금 코로나를 앓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병을 앓은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의 고통이 더 크다고 하지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로 보거나 기피 인물로 보는 것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사람 서리에서 밀려나는 거라고 표현해왔습니다.
'서리'란 순우리말로서 '무엇이 많이 모인 무더기의 가운데'란 뜻이 있지요.
그러니까 사람 서리에서 밀려났다는 것은 그저 물리적으로 사람 가운데서
떨어져 같이 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문제는 다른 사람의 취급보다
자기가 자기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자기 존엄성의 상실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나병 환자는 이렇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만약 사람들이 있는데도 예수님께 다가왔다면 나병 환자는 그런 용기를 낸
대단한 사람이고 주님은 그런 용기를 내게 하신 더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용기를 내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주님의 능력일 겁니다.
주님의 초대에 용기를 내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사도처럼
오늘 나병 환자도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달리 나병 환자로 하여금 용기를 더 내게 한 것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보다 주님의 선의 곧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 앞에 "하고자 하시면"을 덧붙이고
주님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다가가고자 한다면 나병 환자처럼
주님의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누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려면 주님처럼
'저 사람이라면 나를 받아줄 거야!'라고 하는
우리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그로 하여금 가질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만큼 능력은 없어도 선의와 사랑은 조금이라도 주님을
닮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을 많이 반성케 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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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공동체와 함께 어울려서 지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레위 13장 참조). 그런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만나시는 대상이 주로 병자와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의 규정처럼 나병 환자는 격리되어야 하고,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누구도 그와 접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응은 어떠하였나요?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가 다가오는 상황을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보고, 피하거나 멀리하거나 못 본 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여워하십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면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러한 감동은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절정에 다다릅니다.
나병 환자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을 건넸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응답하십니다. 나병 환자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오늘 독서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를 두 번 외쳐야 합니다.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이 엄격하게 구별되는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사람을 존중하시고, 부정한 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따뜻함이 우리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 만남 설명서’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부정한 사람이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건네는 모든 말을 절대 놓치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희망을 품어 봅시다! 우리의 좋은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품어 주시는 그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 박형순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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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연중 6 주일)
오늘은 연중 6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알려줍니다(레위 13,1-2,44-46).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으며,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교회에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 10,31-32)라고 권고하면서 ‘자신은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는다.’(1코린 10,3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 와서 치유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장면’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에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이 처럼, ‘복음’은 규정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이는 그가 예수님의 권능, 곧 치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말해 주며, 동시에 그 능력의 행사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도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를 말해줍니다.
바로 이처럼, 나병환자도 예수님께 그렇게 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바람에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 13,45-46),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거룩함이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불결함에 닿아도 불결해지지 않는 오직 ‘거룩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치유는 마치 불꽃 속에서도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시고(탈출 3,2),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시 듯, 불결한 이를 만져도 불결해지지 않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신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곧 당신이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그 거룩하신 분,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문드러지고 부스럼투성이인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굳세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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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이 치유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레위 13,45-46). 즉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복음: 마르 1,40-45: 그는 나병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41절) 라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하는 고통의 의미이다. 또한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에 ‘대시며’(41절)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43-44절).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또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손을 갖다 대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의 다른 행위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 기적이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으려면, 인간 사이의 혹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경계가 모두 극복되어 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마르코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습을 없애려 하는지를 묻고 있다.
또 예수께 그 기적 후에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몰려가지만, 그분은 백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지금의 모든 가르침은 오로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서 충만하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다. 즉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선교 사명이 자칫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칫 현세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나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래서 우리의 자제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10,31-11,1).
이것을 나병환자의 치유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평범한 생활 테두리를 넘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길 때에도 기꺼이 수락하면서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펴나가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도움을 간절히 청했던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치유해 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초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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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6주일.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
어디로부터
정화는
기인하는가?
삶은 곧
정화의
여정이다.
마음의 정화가
간절한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을
치유하여
주신다.
정화는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는
치유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다.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로의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사랑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이다.
정화는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함이다.
투명할수록
빛나는
사랑의
관계이다.
투명한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주신다.
다시
되살리기 위한
사랑이다.
내자신이
먼저 깨끗이
되어야 세상도
깨끗하여
질 수 있다.
사람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인
정화와 치유를
우리에게
주신다.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게
하신다.
하느님
사랑으로
치유되는
은총의
주일이다.
하느님께
치유의
해답이 있음을
믿고 하느님을
향한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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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4.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6주일
제1독서(레위 13,1-2.44-46)는 무서운 전염병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말합니다.
요즘처럼 무서운 전염병이 엄습했을 때, 이스라엘이 작은 부족국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예방법을 말해줍니다. 원인도 몰랐고, 치료약도 없던 이 시기에 열악한 환경에서 직접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나병에 걸린다면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무서웠습니다. 환자들을 마을 밖에 격리시키는 것 밖에는 아무런 치료법이 없었기에(민수 5,3) 이들에 대한 경계심도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찢어진 옷을 걸치게 했으며, 도시 가운데를 지나가거나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게 될 경우에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율법을 어긴 것이므로 돌로 맞아 죽게 됩니다. 당시에는 사제들이 중요한 전염병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통행을 허락하거나 치유되었음을 확인하려면 사제에게 가서 보여야만 했습니다(레위 13,47-59).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나병의 성서적 의미는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민수 12,12) 여겨졌고, 하느님의 백성을 못살게 한 것에 대한 징벌이며(2열왕 5,1),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독한 결과입니다(2열왕 15,5).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저주받은 부정한 이들이 받은 일종의 형벌로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공동체를 파괴시킬 것이므로 격리시켜야만 했습니다.
복음(마르 1,40-45)도 나병에서 치유된 이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갈릴래아에서 나병환자가 치유의 가능성에 대해 굳건한 믿음으로(“하고자 하시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죽음으로 향하는(욥기 18,13)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타나거나 마음대로 길거리를 다닐 수 없었고,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하는데, 아무런 표시도 없이 예수님께 다가왔다고 합니다.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같은 유다인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대담하게 율법을 거스르면서 예수님께 다가온 것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결단을 고백하는(무릎을 꿇음)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신 나머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었습니다. 율법(격리)을 어긴 이에게 퍼붓는 분노가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선 이에게 자비와 치유의 힘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는 것이며, 가장 나쁜 악행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느님과 공동체로 돌아왔음을 뜻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에 의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대시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행동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 돌아서는 당신 백성을 구하러 오신 착한 목자이며, 깨끗하게 해주시는 구세주이시고, 정결함을 확인해주시는 사제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완전하게 요약합니다. 칠 일 동안의 격리(미르얌: 민수 12,14)와 일곱 번의 씻음(나아만: 2열왕 5,8-14)으로 나병이 치유된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다가온 이를 즉시 치유해주셨는데, 복음은 환자를 중심으로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치유는 전적으로 구세주의 선물이지만, 반드시 믿음을 지닌 인간의 간청(돌아섬)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이에게 율법대로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레위 13,49), 모세가 명령한 제물을 바치라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이제껏 하느님을 모독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준엄한 질책입니다. 또한 악조건 속에서도 단호하게 예수님께 다가온 믿음과 용기에 대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신원을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당신의 행적에 대해 침묵을 지키라고(메시아의 비밀) 명령하십니다. 사제에게 보이러 갔을지라도 누가 치유해주었는지 모르게 하고, 치유된 이는 유다인들 공동체로 돌아가서 살아야 하니 율법(사제에게 보이고, 예물을 바쳐라)만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더 훈련시키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직 예수님의 신분(메시아)이 공적으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며, 율법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도 없고, 단순하게 기적을 베푸는 자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침묵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치유된 이가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모세의 규정대로 예물을 바쳤는지 확인해주지 않고, 다만 “그는 떠나가서 자신이 치유된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치유된 사람(예수님께로 돌아선 유다인)은 이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를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치유해주신 분(빛)을 세상에 외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둔다는 것(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 마르 4,21)은 또 다시 격리되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회개와 치유에 대한 기쁨에서,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고마움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치유된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명성은 널리 퍼지고, 아직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서 머물러야만 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처럼 함부로 동네를 돌아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1코린 19,31-11,1)는 이웃에게 훼방을 놓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교도의 제사에 바쳐진 제물을 공동체가 모이는 곳에 가져와서 먹어도 되는지(우상숭배) 묻는 말에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1코린 10,23)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코린토 공동체의 아픔은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불륜(1코린 10,7-8)의 유혹에 아무런 생각 없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쉽게 넘어가는 이들(영지주의자들)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런 악습이야말로 불치병과 같은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에 따라 무슨 일이든지 할 수는 있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려면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남에게 걸림돌(스캔들)이 되거나 훼방을 놓지 말아야 하고,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의 영적 성숙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1코린 10,24-30). 그래서 바오로는 자기가 모범을 보여준 것(1코린 9장)처럼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기 유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행동하라고 합니다.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는 상호비방은 물론 우상숭배와 불륜을 떨쳐버리고 모든 일에서 양심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교회 공동체에 아픔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로 깨끗하게 된 나병환자는 공동체의 걸림돌이었기에 격리되었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은 “불경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만 했었습니다. 불행했던 이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를 받은 뒤에는 행복한 마음으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환자)의 믿음이 만나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낳았습니다. 그가 치유의 기쁨을 발산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유된 이는 율법은 물론 침묵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명령도 무시한 채 사방에 예수님의 행적을 선포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이의 구원에 유익한 것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안에서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영광만을 찾으려 한다면 나병 못지않은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깊이 성찰하지 않거나 하느님께로 돌아서려는 단호함이 없다면 쉽게 치유되지 않겠지만, 이런 중병에 걸렸다면, 공동체에서 소외될 것은 물론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질 것입니다. 구원과 치유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헐뜯고 비방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구원에 유익한 것을 찾으면서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이런 불치병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허물을 깊이 성찰한 뒤 감추지 말고 하느님께 고백하라(시편 32,1-2.5.11)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깨끗하게 용서해주실 것은 물론 공동체도 그를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에 의해 잘못이 덮여진 사람,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거짓이 없어서 더 이상 주님께서 그의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이 만난다면 새로운 삶의 희망이 솟구칠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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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의 분야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때로 그것은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선진국은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왜?’라는 질문에 대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진국은 선진국이 내린 정의를 모방하고, 따라간다고 합니다. 당연히 ‘왜?’라는 질문이 없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외우라고 합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중진국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고, 왜라고 질문하는 대신 외국의 모델을 모망하거나, 따라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한국이 잘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쩌다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연아 선수, 손흥민 선수, 박세리 선수, BTS, 봉준호 감독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랐을 때도 대한민국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방역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왜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코로나19의 검사를 받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의료진이 검사소 안에 들어가고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검사를 받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일명 ‘Drive through와 Walking through'입니다. 검사받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소독하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경험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하였고, 다양한 대처방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진단키트를 긴급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고, 대한민국의 진단키트는 전 세계 코로나19검사의 7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으로 3T(Trace, Test, Treatment)를 적용하였습니다. 확진자를 효과적으로 찾아낼 수 있었고, 감염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고,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대한민국의 방역사례를 따라하려고 하였고, 대한민국은 대처방안을 번역하여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2020년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000년 전인 구약의 시대에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역의 차원에서 격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같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함께 있으면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이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면 ‘따돌림’으로 드러납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민족차별’로 드러납니다. 노예제도, 식민지 건설,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는 뿌리 깊은 흑인의 차별에서 발생했습니다. 두려움은 낯선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월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부정한 사람을 두려워해서 멀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도 치유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월감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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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6주일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 입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은 이겨내는 힘입니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끓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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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키엣대주교님. 감사와 새로운 다짐(연중 제6주일)
새해가 되었습니다. 지난 한해를 붙잡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안한 한해였습니다. 코로나라는 전례없는 전염병은 전 세계 곳곳에 흔적을 남겼으며 우리의 삶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교회의 미사와 많은 활동을 변화시켰습니다. 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지만 그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맞이하는 설이기에 더욱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감사
설에는 감사와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도움을 준 사람 뿐 아니라 잊고 지냈던 사람들도 다시 떠올리며 인사를 건네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감사는 정이 넘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힘입니다. 감사는 복음의 가치를 드높이는 믿음의 가치입니다. 가장 먼저 소중한 생명과 삶을 주신 우리의 조상이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너무 힘들고 나의 크고 작은 죄와 나약함으로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알지만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말처럼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용서를 구하고 주님께 의탁하는 한해가 될 것을 기도드립니다.
새로운 다짐
설날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지난해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지나간 나쁜 일을 잊고 새로운 날을 소망합니다.
‘새로운 삶’은 바로 주님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진정한 자유의 길을 걸어 성스러운 당신의 자녀로 거듭 날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교리인 술을 담을 수 있는 소중한 그릇이 되어야합니다. 설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를 바꿀 것을 다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처럼 민속 명절인 설의 의미는 복음의 정신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나의 가족과 이웃에 베풀어준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다가오는 소외된 사람들과 나병 환자를 따뜻하게 맞이하신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인연들을 진심으로 맞이하고 존중해 준다면 어제보다 따뜻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시간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역사의 완성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며 인류의 구원이고 희망이신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감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올 한해를 살아간다면 설의 의미는 더욱 더 풍성해져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하늘나라로 이어져 영원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오늘 다짐한 새로운 마음을 올 한해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간직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이번 설에는 어떤 소망, 어떤 결심을 하였습니까?
2. 그 소망과 결심은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까?
3. 설을 맞이하여 우리의 조상이신 주님에 대해 묵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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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새벽을 열며. 연중 제6주일. 빠다킹 신부님.
초등학생 때의 제 모습은 자신감 없는 소극적인 모습이 많았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도 못 했고, 특히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이번에 구연동화 대회가 있으니까 우리 반 대표로 명연이가 나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얼굴부터 빨개지는 제가 또 말재주도 전혀 없는 제가 사람들 앞에서 동화를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괜찮아. 너는 잘 할 수 있어. 선생님은 너를 믿는다.”라면서 무조건 나가라는 것입니다.
결과를 말한다면, 대회에 참석했고 저는 2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참가한 사람들이 잘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좋은 성적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대회를 통해서 저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때의 구연동화 대회에 참석한 것이 지금 이렇게 말로 먹고사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가오는 모든 기회는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실패 역시 또 하나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편이 되어서 늘 좋은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따라서 내게 다가오는 모든 기회를 두려워하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 도움이란 무엇일까요? 나병이라는 병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호칭이 단순히 ‘스승님’입니다.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히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용한 의사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늘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해답을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의 고통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율법에 금지되어있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행동인 나병 환자를 직접 만지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께 충실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어떤 순간에서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어려움과 힘듦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좋은 쪽으로 성장하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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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가장 강한 모습으로 나선다(폴 매카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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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한계는 없습니다.
나무나 처마 아래 등지에 벌집을 짓고 사는 일반 벌과는 다르게, 땅속에 집을 짓고 사는 벌이 있습니다. 바로 ‘땅벌’입니다. 유명한 노래 제목인 ‘땡벌’은 강원도에서 부르는 ‘땅벌’을 말합니다.
이 땅벌은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벌은 큰 덩치에 비해 너무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역학적으로 도저히 날 수 없는 구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벌은 날지 못할까요?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잘 날아다닙니다.
날지 못할 구조이지만, 잘 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땅벌을 보면서 한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면서 할 수 없는 이유의 숫자를 늘립니다. 그러나 세상에 정해진 한계는 없습니다. 그 한계를 만들어가지 않을 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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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믿음>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권능’에 대한 믿음과 그 ‘자비’에 대한 믿음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권능은 가지고 계시지만 자비가 없으신 분이라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또 만일에,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권능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하느님과 함께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어서
우리의 모든 사정에 관심을 쏟고 계시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분”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곧 하느님의 능력이고,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다.”
라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저는 예수님께서 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고쳐 주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말은,
그가 ‘병고’를 겪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기셨다는 뜻인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의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가엾게 여기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도 ‘가엾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그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의 병이 나병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동작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또는 없애려는) 노력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세상에 오신 일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일은 모두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일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그 순종도 당신이 원해서 하신 일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를 고쳐 주는 일도,
그가 청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의술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만으로 병을 고치시는 분입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3)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자비는 믿었지만, 권능에 대한 믿음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마르 9,22-23)”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의 뜻은,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했던 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이기 때문에(요한 10,30),
하느님처럼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4)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가 동시에 드러난 일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요한 5,13),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 쪽에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병을 고쳐 주신 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안 하셨고,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5,14).
‘믿음’은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받은 은총을 자기 것으로 잘 간직하고,
그 은총 속에서 잘 살아가는 조건입니다.>
5)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을 때가 많고,
그럴 때에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응답을 얻는 경우도 많지만,
아무 응답도 얻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의, 또는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입니다.
신앙인 자신이 “주님께서 나의 일에 무관심하신가?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가?” 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그 일이 해결되겠는가?” 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의심도, 비아냥거리는 말도 모두 사탄의 유혹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나의 일에 항상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고, 내가 바라는 그것을 주시지 않더라도,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나에게 주시는 분이고,
언제나 항상 나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다.” 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기어이 얻어내려고 주님께 떼쓰는 일도 아니고,
그것을 안 주시려고 하는 주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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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고도미니코 신부님. 연중 6주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깨끗함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만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되는 부정이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유 되어 정화 예식을 거치기까지는 공동체와의 상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내리치시는 최고의 재앙이라고 여겨져졌습니다. 원칙적으로 보아 나병은 죄의 표시였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나병환자의 간절함의 동시적인 만남은 죄의 해방과 치유의 은총을 낳게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날 때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啐(줄)이라고 하고, 어미새가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끼는 안에서 죽어버리기에 줄과 탁의 동시적인 행위로 인해 껍질이 깨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자비와 깨끗해지고자 하는 나병환자의 간절한 바람도 이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치유의 기적과 깨끗해짐을 위해 자신의 노력만을 믿어서도 않되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않될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나병에 걸린 것보다 더 큰 것은 정신적 나병이었습니다. 치유받고자 하는 희망과 아무런 노력 없이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에 대해 죄의식에 빠져 부모나 조상을 원망하며 고통과 비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나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도 정신적 나병을 지닐 수도 있었습니다. 팔삭둥이었던 그는 놀림도 받고 자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유대교에서 개종했기에 변절자라는 수모를 받았을 것이고 교회를 박해했기에 더욱 그럴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진퇴양난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환란과 시련을 극복하자고 하는 강한 바람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께 영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디딤돌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며 그 영광속에 감추어진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정신적 나병의 상황이 닥쳐올 때 사도바오로가 어떻게 했는지를 상기하여 위기를 기회로, 걸림돌을 디딤돌로, 비관을 낙관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삼도록 합시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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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6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법을 보여 주십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6)
지금은 한센병이라 불리는 나병은, 구약 시대에는 접촉하면 전염되어 부정하게 되는 악성 피부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병에 걸린 이들은 공동체에서 내쳐져 소외되고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병으로 무너지는 몸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오늘 복음에서는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치유를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무리지어 따라다니는 랍비에게 먼저 다가오다니, 병자로서는 어마어마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자칫 내쫓기는 수모와 함께 두 배 세 배의 상처를 입을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금기를 깨시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십니다. 이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지요. 그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쳐 주실 수 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이 따뜻한 위로의 손길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터치나 악수, 다독여 주는 접촉은 같은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대접을 받는다는 자존감을 되살려 주지요.
예수님은 낫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곧 당신의 바람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아프고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하나 하나에게 가지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부정함과 불결함을 벗고 깨끗하게 된 이는 몸과 마음이 함께 치유되었을 겁니다.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그런데 이 감동스런 치유 기적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 옵니다. 치유된 이가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당부를 간과하고 사제뿐만 아니라 만나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고 퍼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드러나게 다니시지 못하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시게 된 겁니다.
"바깥 외딴곳"
이는 예수님 구원사업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피하는 환자의 병뿐만 아니라 인류가 앓고 있는 모든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짊어진 분이시고, 그분의 치유 방법, 사랑 방법은 고통에 허우적대는 이가 지닌 모든 아픔을 당신이 대신 다 가져가는 방식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가 증언하고 있지요.
구원자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모든 죄악과 고통을 지고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최후를 맞이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된 자리가 바로 여기인 셈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5)
그분의 가르침과, 소외된 이를 대하시는 그분의 격의 없는 친밀함, 그리고 치유 기적 이야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나섭니다. 사람 대접과 존중이 그리운 이들이 대다수였을 것 같습니다. 율법의 금기를 넘어 사람을 따뜻이 어루만져 주시는 분에게서 군중은 기존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파격적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1코린 10,33)
철저히 스승 예수를 닮으려 했던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행하신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 대상은 어둠과 그늘 속에서 좌절하고 신음하는 가련한 백성들이었지요. 그분의 중심에는 당신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백성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정치와 종교의 권력이 짱짱하게 행사되는 현란한 도성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깥 외딴곳에서 비천하고 부정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 위에서 차갑게 숨을 거두신 예수님 곁에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은 세상이 강함과 부유함, 우월함을 자랑하며 손짓할 때 가장 무력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는 분이십니다. 이런 그분의 사랑법이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해 주지요.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도 되어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그리스도인은 차별과 갑질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런 예수님을 닮으라고 불리운 이들이지요. 아울러 우리 저마다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며 깨끗하게 해주고자 하시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 손길의 수혜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살피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 치유받아 깨끗해진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새로 시작되는 올 한 해, 예수님의 사랑법을 배우고 나누는 복된 한 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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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6주일>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하면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은 전적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레위기의 말씀인 오늘 독서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은 사람들을 갈라놓았습니다. 부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놓아, 부정한 사람들을 구원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유다인에게도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10,31-32)
사도 바오로의 이 권고는 당시 분열되어 있었던 코린토 교회를 향한 권고이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를 향한 권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죄인과 의인이 갈라져 있지 않는, 부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라져 있지 않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를 갈라놓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죄인들과 부정한 사람들에게 다가 가셨고, 의인이 되고자 깨끗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닮게 하시려고, 때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하십니다.
율법이 아닌 율법의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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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 만남, 치유, 선포 -
오늘 나병환자에 관한 말씀을 대하면서 떠오른 말마디가 외로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의 다음 나병환자의 처지를 생각해 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혼자 격리되어 사람들에게 멸시와 차별, 혐오중에 살아가는 나병 환자들에게 신체의 병이나 아픔보다는 마음의 외로움이, 아픔이 치명적일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이 상징하는 바 갖가지 사유로 고립단절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분명 외로워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널리 회자되고 있는 정호승 프란치스코 시인의 시도 생각납니다. 주님이 없는 외로움은 병이자 아픔일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 겪는 외로움을 축복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외로움은 주님을 찾으라는 주님의 간곡한 초대의 표지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외로움도 견뎌낼 수 있으며, 더 고마운 것은 외로움은 주님을 그리는 그리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외로움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 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 내듯
땅이 꽃들 피어 내듯.”-2001,8.17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참 고마운 것은 주님 안에서 외로움은 곧 주님 향한 그리움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의 눈빛이 어둡고 무겁다면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움의 눈빛은 별처럼 영롱하게 빛납니다. 제 집무실 책상 위 도예가 조카가 선물한 도자기의 핀란드 흰 올빼미 눈이 바로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눈빛처럼, 그리움의 눈빛처럼 늘 영롱하게 빛납니다.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모두 정답고 깊은 순 우리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찾았던 나병환자의 눈빛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참 귀한 진리를 배웁니다.
첫째, 갈망과 찾음입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하느님 심어 주신 당신 향한 갈망과 열정, 그리움입니다. 바로 외로움은 이런 주님 향한 갈망과 열정, 그리움에로의 초대입니다. 바로 이런 갈망의 그리움으로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찾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정한 성소의 표지는 이런 주님 향한 샘솟는 그리움, 갈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이런 갈망과 찾음의 모범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좌절이나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는 갈망으로 주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그리움의 열정만은 식어선 안됩니다. 갈망의 열정이 있어야 깨어 기도하게 되고 마음의 순수입니다. 참으로 그리움의 갈망이, 열정이 있을 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향한 목마름이요 배고픔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합니다. 하여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고 배고픔을 채우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우리들입니다.
둘째, 만남과 치유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저절로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주님과의 소통의 사랑이, 개방이 기도입니다. 주님을 찾을 때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절대 만나지 못합니다. 갈망으로 찾을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지만 찾지 못해 영혼이 눈멀어 있으면 주님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병환자의 마음은 갈망으로 주님 향해 활짝 열려 있었고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쏜살같이 예수님께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분명 나병환자는 이 사람 하나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나병환자들은 체념과 절망의 자포자기로 무너져 내려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만은 주님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찾고 기다렸던 듯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소원을 고백합니다. 참으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의 고백에 주님은 감동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께서 사제를 통해 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런 나병환자와 같은 절실한 심정으로 심신의 병과 아픔을 치유해 주십사 기도할 때 심신의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치유의 구원선언입니다. 사실 심신의 치유와 건강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치유제도 예방제도 없습니다. 모두가 거리를 두고 멀리했지만 주님만은 나병환자와의 일치를 통해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1.가엾이 여기는 마음, 2.따뜻한 스킨쉽, 3.권위있는 말씀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원리를 배웁니다.
어찌 나병 육신의 치유뿐이겠습니까? 외로움과 그리움, 차별, 무시, 혐오로 인한 온갖 마음의 온갖 병과 아픔도 치유되니 말 그대로 온전한 전인적 치유입니다. 정말 무서운 병은 무지와 허무, 무의미, 절망, 좌절, 우울증 같은 영혼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생활고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생존의 위기로 심신의 병과 아픔을 겪고 있는지요! 외로움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말마디들은 이런 분들에게는 사치스런 감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날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 합니다. 어제 몇분의 형제들의 의견에도 공감했습니다. 나라만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IMF 때 금모으기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이익공유제란 말도 나왔듯이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어 가진 것을 나누는 거국적 사랑의 운동으로 자영업자들, 소상공인들도 함께 살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견들이었습니다.
셋째, 파견과 선포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로 끝이 아닙니다. 곧장 파견과 선포로 이어져야 비로소 치유와 구원의 완성입니다. 복음 후반부가 치유받은 나병환자의 파견과 더불어 복음 선포의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치유의 구원을 받은 나병환자가 제 본연의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니 그를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믿는 이들 모두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이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처방의 삶도 없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해 바오로 사도를 통해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바오로 사도 자신을 본받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에 근거한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규칙57,9) 이란 분도규칙의 말씀이 수도원 입구 정문 바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미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도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바로 군중들의 과열된 열광의 분위기를 피하여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친교를 통해 새롭게 자신을 충전시키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분별의 지혜를 배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하니 새삼 예수님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하느님 영광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 구원의 빛이자 향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연중 제6주일, 사순시기를 앞두고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롤모델이 됩니다. 그러니 이를 위해,
1.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과 열정을 지니십시오.
2.주님을 만나 치유받으십시오.
3.제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의 영육의 병과 아픔을 말끔히 치유해 주시어 당신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각자 제 삶의 자리로 파견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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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그리스도를 본받음
- 성사 윤리 ⓻ : 고해,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화해하기
⒈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0,31.33;11,1).
연중 제6주일인 오늘 미사의 제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전서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을 닮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⒉ 마르코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에게 몰려든 군중 가운데에는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이 많았고
그분 혼자서 이들을 다 돕기에는 힘이 부쳤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에서 미처 오지 못한 이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병든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어서 파견하셨습니다(마르 7-13).
같은 복음을 루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권한은 가난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이들을 해방시키는 의무이기도 했습니다(루카 4,18-19).
병들면 가난해지고 마귀에 들리면 자유를 상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시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이들이 아니라 이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2,17).
⒊ 사도가 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강림하신 성령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병든 이들을 돕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성사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기본적으로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사람들을 돕고 마귀 즉 악령에 대항할 영적 무기를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행위가 바로 악령에 대항하는
영적인 싸움인 것이고, 이 영적 싸움에서 필요한 방패가 믿을 교리라면 사회 교리와 영성 교리 등
지킬 교리는 칼이고 성사 교리는 창으로서 모두가 이 영적 싸움에서 필요한 영적인 무기인 것입니다.
⒋ 마귀의 무기는 쾌락과 이익이라는 미끼로 위장한 악입니다.
창세기는 선과 악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이라면서 유혹했습니다.
악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죄가 저질러집니다.
쾌락은 생존의 욕망에서 비롯되고 이익은 생활의 필요에서 생겨납니다.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필요를 가로막을 때 죄가 됩니다.
고대로부터 교부들도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했고 논쟁도 일어났습니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죄는 필연적으로 자유와 연관되어 있고 인간이 이 자유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악이나 선으로 기울어집니다. 인간의 자유를 선으로 이끄는 영적인 힘이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느끼는 힘이 양심을 구성하는 영적 감각입니다.
⒌ 4세기에 이 문제를 두고 뺄라지오와 아우구스티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영국 출신의 수도자였던 뺄라지오는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며 은총은 다만 좀더 쉽게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가 악으로 기울지 말고 선에로 쓰여져야 함을 강조한 것인데,
로마 시대에 사악한 박해에 굴복했던 배교자들을 염두에 두고
악에 굴복하지 않고 선을 지향할 수 있는 강한 자유를 주장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자신도 입교하기 전에 마니교 이단에 빠져서 죄의 체험을 진하게 했던 터라서,
이에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원죄에 물들어 있으며
그래서 무상으로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 은총의 실체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수난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야 자유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고,
이 자유를 선용함으로써 공로도 쌓을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은총에 이끌리는 자유만이 선을 행할 수 있고 그래야 공로도 쌓을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적 논증이 받아들여져서 뺄라지오는 단죄되었습니다.
⒍ 근대에 들어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사색한 인물은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과 에리히 프롬입니다.
밀은 왕정시대에 권력자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권력으로 억압을 가할 때 어떻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자유를 주장할 수 있고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근대 국가들의 헌법에
기본권과 자유에 대한 보장을 주장했다면, 프롬은 나치즘 치하에서 중산층 시민들이 자유를 억압당할 때
저항하거나 유다인의 무죄한 희생에 반대하기를 포기하고 도피함으로써 사회악이 더욱 커졌다고
분석했고 따라서 자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인간에 대해 비판하고 적극적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⒎ 그러나 밀이나 프롬에 비해 더욱 깊이 있게 영적인 차원에서 자유에 대해 논한 인물은 요한 23세였습니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으로서,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하여, 모든 자유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존중할 때라야 그 균형이 잡힐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책임을 소홀히 하는 행위는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고 이 남용행위에서 죄가 저질러진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뺄라지오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의 노선을 따라서 자유를 논하되,
밀이나 프롬 같은 사회사상가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의
더 깊은 영적 근원에 대해 가르쳤다고 할 수 있겠고,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자유만 앞세우는 현대인들의 그릇된 자유주의 풍조에 경종을 울린 셈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자유는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책임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며,
책임을 소홀히 하는 데에서 죄가 비롯되기 때문에, 하느님과 떼어놓고서는 그 어떠한 자유도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죄의 문제를 피한 채로 자유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⒏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의 토의를 거쳐 편찬된
교리서에서는 요한 23세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죄는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가톨릭교회교리서, 1849항)입니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죄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는 것이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것으로 돌리게 합니다.
최초의 죄와 마찬가지로 죄는 선과 악을 알고 규정하는 하느님처럼 되겠다는
헛된 의지로 하느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1850항).
⒐ 하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은총은 사람이 지은 죄를 씻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에로 이끌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록 도와줍니다(1987항).
은총에 따라서, 죄를 지은 사람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도와주며,
선을 행하도록 회개시키는 것을 의화(義化)라고 합니다(1990항).
이 의화는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의 죄까지 대속(代贖)하려는
성화(聖化)에로 나아갑니다. 고해성사에서 주어지는 보속은 이 의화와 성화의 공로를 겨냥한 것입니다.
⒑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의화와 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신자들을 위해서 교회는 고해성사를 거행합니다.
전통적으로 그 순서는 성찰과 반성, 결심과 고백, 보속의 실천 등 다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찰(省察)의 단계는 일상생활에서 침묵 중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가 행사한 자유가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는 데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스스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반성의 단계는 성찰의 결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되거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느껴지면 뉘우치는 것입니다.
흔히 저녁기도 중 반성의 기도에 해당됩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결심의 단계는 반성의 단계에서 이어지는 통회의 기도로 나타나는데,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전 단계입니다.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악을 저지르고 선을 멀리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리고 나서 고해소로 가서 고해 사제 앞에서 고백(告白)을 하게 됩니다.
이 단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인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 입으로 자기자신의 죄를 고발함으로써 죄로 상처입은 영혼이 치유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는 사죄경을 통해서 죄를 고백한 신자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사죄경의 내용 역시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죄인을 용서하심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와 성령의 이끄심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이 교우에게 몸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마지막 보속(補贖)의 단계는 고해사제로부터 받는 훈계와 함께 주어집니다.
통상 지었다고 고백된 죄의 무게보다 가볍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보속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자발적으로 선행을 더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의화와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계기로서 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 나병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피부가 오그라들어서 끔찍한 흉터가 생기는 나병처럼,
무릇 모든 죄는 우리 영혼에 나병에 못지않은 흉터를 남깁니다.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고해성사의 은총을 가까이 하여
예수님을 본받는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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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 6주일. 울릉도 도동성당. 안드레아 신부님.
나병 환자의 모범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설 명절은 잘 지내셨나요?
설 연휴가 길긴 했지만 5명이상 모이질 못하니까 가족들과의 만남도 여의치 않은 명절이었죠? 월요일부터 조금 완화가 되긴 하지만 5인 이상 집합금지는 여전히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미사는 좌석정원의 30%까지 허용되니까 조금은 나아질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나병환자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사제가 나병환자라고 선언하면 그 사람은 가족과 함께 살 수가 없고 진영 밖으로 쫓겨납니다. 그 순간부터 나병환자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보호해줄 사람도 없는 완전한 외톨이가 됩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길을 가면서도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라고 외치면서 다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고 나병환자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사람이 되면 하느님 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나병환자는 늘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 예배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그렇게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서 병균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동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느님과 자신의 영혼을 저주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나병에서 치유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비들은 나병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겼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 나병환자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미친 사람도 고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은 예수님보다 먼저 그 고장에 당도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나병환자는 “그런 분이라면 내 병도 고쳐주실 수 있을 거야!”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을로 오셨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나병환자는 용기를 내어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있었기에 그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병환자가 가까이 오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만큼 환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컸습니다. 그러자 바로 나병이 나았고 환자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특히 당신의 능력을 믿고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도 생활하면서 많은 경우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잘 들어주시던가요? 만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를 통해서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기도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을로 들어간 나병환자와 같은 참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런 장애물들을 다 극복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왔으면 예수님께 나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새삼스럽게 내 내면을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도 나의 치부를 감추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처지와 속사정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두려움도 극복해야 합니다. 내가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때 예수님께서 나에 대해서도 측은한 마음을 지니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드려야 합니다. 나병환자는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면서도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맡겨드렸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드린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게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베르나노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다 주님의 은총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서 나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면서 내 영혼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길 기도드려야겠습니다. 내 영혼이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더럽혀져 있으면 내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깨끗해지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깨끗해졌을 때는 바오로 사도의 당부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 때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 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사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갖고 예수님께 나아가고 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리면서 내가 청하는 것들을 당신의 뜻 안에서 이루어 주시길 기도드립시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 될 것입니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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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일]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 환자의 지난 인생은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지옥같은 나날이었습니다.
비참한 하루를 끝내고 차디찬 동굴 안에 몸을 눕히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그러나 길고 슬픈 밤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르고, 강물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더 심각해졌고...
죽음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던 나병 환자가 은혜롭게도 죽음 직전에 구원자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번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간절히 외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코 복음 1장 40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병환자의 외침은 이 세상에 가장 간절하고 열렬한 청원 기도입니다.
이토록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이토록 겸손하고 힘있는 나병 환자의 기도를 어찌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한번 잘 살아보자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보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그저 다람쥐 챗바퀴 도는듯한 지루한 일상이 끝도 없이 반복됩니다.
지금은 ‘난다긴다’ 하지만, 지금은 떵떵거리며 살지만, 세월은 어느새 쏜살같이 흐르고 순식간에 죽음의 병고 앞에 서게 됩니다.
보십시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유한합니다.
인간만사의 끝은 결국 허무입니다. 인간의 끝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들이 모두 떠나간 후 하느님은 다가오십니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한결같은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교차로에서 건강하고 순결한 예수님과 병들고 불결한 인간이 만났습니다.
고상하고 맑은 정신의 예수님과 좌절과 원망뿐인 한 인간이 만났습니다.
위엄으로 가득 찬 영광의 예수님과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한 사람이 만났습니다.
빛과 어둠이 만났습니다. 생명과 죽음이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비참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참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존재의 만남입니다.
그 결과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피부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과 대면할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순간은 참으로 축복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지은 모든 죄와 허물, 어둠과 상처는 하느님 자비의 얼굴과 마주치는 순간, 활활 타오르는 화로 위에 던져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인간의 비참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한 가지 노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터치(touch)를 가져오는 간절함이요 절박함입니다.
겸손함과 강렬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혹독하고 비참하다 할지라도, 때로 더 이상 나아갈 의미를 못 찾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단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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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6주일]
예수님도 체제에 불순종한 적이 없으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고자 해서 다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고자 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하시며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라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치유 받은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종교나 정체 체계에 순종해야 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보다 훨씬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치유해 주셨으면 그만이지 모세가 명령한 것에 순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도 어기고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셔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도 결국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분의 복음전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은총을 아무리 받았다고 해도 마지막 때에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게 됩니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미국에서 10대 후반의 나이로 수표 위조 사기범으로 활동했던 현재는 한 기업의 보안 컨설턴트가 된 ‘프랭크 윌리엄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회고록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영화 속 프랭크 아버지는 사업가로 프랑스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프랭크를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업 중 탈세 혐의로 국세청에 고소를 당해 사업이 망하게 되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간 프랭크는 학교 학생의 텃세에 눌리게 됩니다.
프랭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기꾼의 기지를 발휘하여 프랑스어 선생 행세하며 며칠 동안 아이들에게 숙제도 내주고 텃세를 부린 학생에게 면박을 주고 또한 학교 친구의 조퇴요청서 위조를
도와주며 사기꾼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이 싫었던 프랭크는 부친이 생일 선물로 준 25달러가 든 계좌와 수표책을 들고 집을 나오게 됩니다.
프랭크는 밖에서 버티기 위해 수표를 위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은행에서 수표를 받아주지 않자 당시 항공사 팬암의 기장이 모든 사람의 관심과 혜택을 받는 것을 보고는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팬암 기장의 옷을 입고 팬암 위조 수표를 만들어 돈으로 바꿉니다.
팬암 위조 수표를 계속 만들며 돈을 쓰던 프랭크는 결국 FBI 위조 수사 전문가 칼 헨래티에게 덜미를 잡히고 뒤를 쫓기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기꾼 기술에 FBI도 농락당합니다.
프랭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똑똑한 머리로 외과 전문의 사칭으로 병원에 취직 간호사 브란다를 만나
약혼을 하고 조용히 새로운 삶을 살 결심합니다.
진심으로 2주 동안 공부하여 변호사 시험에 합격도 합니다.
그러나 FBI의 추격으로 이 결혼은 성사될 수 없었고 프랭크는 프랑스로 탈출합니다.
미국 탈출 후 프랭크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인쇄소를 차려 수표 위조하며 돈을 쓰다 결국에 체포됩니다.
프랑스에서 옥살이하던 중 칼의 노력으로 미국으로 이송됩니다.
이후 칼은 4년 동안 갱생의 시간으로 프랭키에게 그동안 쌓아 올린 위조 기술로 수표 감별사 보안 컨설턴트로 활동하게 해 줍니다.
이후 프랭크는 한 번 더 팬암 기장의 옷을 입고 도망치려고 계획합니다.
하지만 칼의 설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업무에 복귀해 현재 기업에서 연간 수백만 달러의 기술료를 받고 자신을 체포한 칼과도 친구로 지내며 산다고 합니다.
[출처: ‘캐치미 이프 유 캔’, 네이버 블로그, ‘누사에서의 욜로’]
프랭크가 수표를 위조하여 받아낸 돈은 지금 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해당합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랭크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면서 부유하게 삽니다.
하지만 법 밖에서는 어디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칼이 순순히 놓아줄 때 그는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의 능력이 나라의 법체계를 앞선다고 생각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겸손해진 것입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야만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이 많아지다 보면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처럼 능력이 공동체의 법을 초월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은총을 받은 것보다 은총을 받은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교만해지면 은총을 받지 않으니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겸손하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은총을 받았을 때조차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받은 은총으로 교회의 체계를 넘어섰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분이셨지만 구약의 체계를 존중하셨습니다.
종교나 정치의 결정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이시면서도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특별히 마르코 복음에서의 겸손은 공동체를 곧 하느님의 권위로 보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다고 이 세상의 공동체를 무시해도 된다고 믿는다는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시며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로마에도 순종하셨습니다.
이는 일본의 속국이었을 때 우리나라의 존경받는 사람이 일본에게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로 치면 매국노로 찍혀야 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노예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고 노예는 주인에게 충실해지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을 때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눈이 생긴 것에서 공동체 안에 그것을 세우신 분의 권위가 들어있음을 볼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주님께 은총을 청하기도 해야겠지만 그 은총을 받았을 때를 대비하여 항상 더 겸손한 삶을 살 연습을 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유재석 씨는 유명해지기 전부터 자신이 유명해지면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겠다고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주 율리아의 경우는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면 교회의 권위도 넘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가 주님의 허락으로 세워진 것이고 그래서 그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그 공동체의 규칙을 넘어서려는 마음은 갖지 않으려고 평소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오히려 주님께 손해를 끼치는 원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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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연중 제6주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주일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즘은 치유약이 나와 환자가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감소한 추세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겪는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사회와 고립되고 단절되는 그 아픔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근세에서는 약간 덜하지만 예수님 당시만 해도 거의 천형에 가까운 형벌로 생각을 했고 철저히 인권이 유린되는 그런 암울한 시대에 이들이 살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병했음에도 죄의 결과로 생긴 것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나병환자가 단순히 나병만이 아니라 일반 피부병 환자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저히 사회와 격리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나오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혼자 살아야 한다고 레위기 규정에 나옵니다. 병에 걸린 것만 해도 서러울 텐데 게다가 혼자서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고충은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원망과 한탄으로 한 세상을 보내야 하는 그런 처지였을 겁니다. 이런 와중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을 들었는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규정에 보면 사실 격리된 곳에서 일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나올 수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경고를 하고 그 경고에 응하지 않으면 죽였던 시절이라고 합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오늘 복음을 들여다봐야 좀 더 사실적으로 이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사실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죽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기적적으로 치유하셨으니 자신의 병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강한 확신이 찼을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도 불사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비천한 모습을 솔직히 드러낸 것 같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육신의 병이 문드러졌지만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이 병든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는 한없는 겸손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병보다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병환자는 아니지만 실제 넓은 의미에서는 나병환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가 영혼에 약간씩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존재이고 또 나약한 인간으로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그런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병환자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병자가 예수님께 하는 말을 좀 더 주목을 한다면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거의 천형과도 같은 형벌이라고 하는 병인데 그런 병도 예수님이시라면 얼마든지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고백을 할 정도라면 그 병자의 마음이 얼마나 자신의 병을 낫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지 예수님께서도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리시다보니 측은한 마음이 드실 겁니다.
복음에서는 가엾은 마음이라고 표현했지만 원래 이 단어의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애간장이 녹아 내리는 그런 마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시니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원래 자비라는 한자말 속에 이런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찢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셨을 겁니다. 그런 측은지심이 있었기에 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것입니다.
사실 그런 환자에게 손을 대신다는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도와 관습도 관습이지만 우선 자신이 그런 병에 전염이 될까 봐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병환자는 기적적으로 자신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을 한번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환자가 말을 한 것을 그대로 다시 거듭 되풀이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를 한번 묵상해봅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듯이 그냥 얼마든지 가령 “깨끗이 나아져라!”하고 명령함으로써도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저는 이런 상상을 통해 묵상하고 싶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런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요? 병자에게도 해당되지만 여기서 뭔가 시사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믿음의 재확인입니다. 이건 복음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병자의 그 믿음 그대로 믿음으로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려고 하는 숨은 의도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묵상해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오늘 복음에 나병환자가 치유될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이지만 이런 기적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게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우리에게도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그걸 더 원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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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4일 주일 연중 제6주일 매일미사
_이도행 토마스 신부 집전
https://youtu.be/MiYaEETNjMc (45:40)
•202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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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행 토마스 신부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보도운영주간) 집전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 신부님 강론 16분 10초부터 20분 35초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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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일 제1독서(레위 13,1~2.44~4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1~2)
레위기 11장 1절에 이어서 두번째로 하느님께서는 모세만이 아니라 아론도 함께 부르신다(레위14,33 ; 15,1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함께 부르실 때 다루는 주제는 특히 사제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정함에 대한 분별이었다.
즉 이것은 레위기 10장 10절에 나타난 사제의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는 임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스럼이 생겨'에서 '부스럼'에 해당하는 '세에트'(seeth)는 '들어 올리다'란 뜻을 지닌 동사 '나사'(nas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는 피부 위에 '부풀어오른 것'을 뜻하며, 사마귀(mole), 종기(boil), 부스럼, 염증(inflammation)등을 포함한다.
'습진이 생겨'에서 '습진'에 해당하는 '사파하트'(saphahath)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발진(eruption) 혹은 '딱지'(scab)가 앉은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다.
'얼룩이 생겨'에서 '얼룩'에 해당하는 '바헤레트'(bahereth)의 어원은 '빛나다'란 의미를 지닌 '바하르'(bahar)이다.
이것은 '피부에 생긴 희고 맨질맨질한 얼룩 부위'(white patch of skin)를 가리키는 말로서 영역본은 '밝은 반점'(bright spot)으로 번역되어 있다.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에서 '병이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하야~레네가' (haya~lenega)는 '병같이 되다'가 아니라 '병이 되다'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네가'(nega)는 '만지다'(15,23), '치다'(욥1,11)란 뜻을 지닌 '나가' (nag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역병'(a plague),'상처' 혹은 '닿으면 아픈 곳'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악성 피부병'에 해당하는 '차라아트'(tsaraath)는 옛날에는 '문둥병'(나병)이라 변역했으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레위기 13~14장에서 '차라아트'(tsaraath)는 사람과(13,2~46; 14,1~32) 옷과(13,47~58), 집의(14,33~53) 경우로 나뉘어 소개된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사람에게만 생길 수 있는 병의 일종인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우기 레위기가 말하는 '차라아트'(tsaraath)의 증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둥병(나병)의 증상과 다르므로, 어떤 의사도 레위기의 증상을 보고 문둥병(Hansen's disease)라고 결론을 내릴 사람이 없다.
또한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Septuaginta; LXX)은 '차라아트'(tsaraath)를 '레프라'(lepra)로 번역했으며, 그 영향을 받아 영역본들은 '문둥병'(나병)을 뜻하는 단어인'leprosy'로 번역했다.
그러나 정작 문둥병(나병)의 증상을 가리키는 희랍어는 '레프라'(lepra)가 아니라 '엘레판티아시스'(elefantiasis)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그 의미에 있어서도 희랍어 '레프라'(lepra)는 '비늘이 떨어지는 상태' (scaliness)를 뜻하며, '차라아트'(tsaraath)의 어원도 '~을 아래로 던지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차라아트'(tsaraath)는 '피부가 떨어지는 종류의 피부병'을 일컫는 용어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곳은 '차라아트'(tsaraath)를 사람에 대해선 '감염성 피부병' (an infectious skin disease)으로, 옷이나 벽에 대해선 곰팡이 (mildew)로 번역했다.
물론 정확하게 '차라아트'(tsaraath)가 어떤 병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둥병(나병)보다는 문둥병(나병)을 포함한 '감염성을 지닌 악성 피부병'으로 여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본문의 '네가 차라아트'(nega tsaraath)는 '감염성을 지닌 악성 피부병의 상처'로 번역할 수 있다.
한편, '차라아트'(tsaraath)의 증상을 보면,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물건의 일부분이 영향을 받아서(13,9~13; 14,37.42.55) 표면의 색깔이 변하고(13,3.49; 14.37), 표면 뿐 아니라 안까지 파고 들어가며(13,3; 14,37), 전염성을 갖고 있다(13,7.51; 14,44)
이런 증상은 거룩함의 특성인 온전함(레위10,10)을 파괴하고, 현상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선포된 것이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2)
'데려가야 한다'로 번역된 '후바'(huba)는 '들어오다(가다)'란 뜻을 지닌 '보'(bo)의 수동 사역형으로 '그가 데려와질 것이다'(he shall be brought)란 뜻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신의 수치나 아픈 곳을 될 수 있는 한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결과 자칫하면,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이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운명을 맞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나 친척등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데려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가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사제에게 데려와지는 것이다.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13,44~46)
다른 부위에 발병한 피부병의 경우는, 2주간에 걸친 유예 기간과 거듭되는 관찰이 요구되었던 반면에, 머리에 발병한 피부병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진단과 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머리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지배하는 몸의 최고 기관으로서 부정함이 노출 되어서는 안된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라는 본문이 환자의 부정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것처럼 전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사제가 '그의 상처가 그의 머리에 있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옷을 찢어 입고'에 해당하는 성경 원문은 찢겨진 옷들을 계속해서 입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옷을 찢는 한 번의 행위는 극도의 슬픔을 단숨에 표현하는 것이지만 (창세37,34; 2사무1,11), 찢어진 옷들을 계속해서 입고 다니는 것은 죽음의 기운이 자기 위에 있음과 자기 애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감염성 피부병으로 인해 온 몸에 찢어진 옷을 걸쳐야 하는 것은 아무리 조그마한 상처라도 그것은 결국 온몸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아무리 미약한 부정함이라도 온 인격체에게서 거룩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짓는 죄악이 아무리 미약해 보여도 그것이 부정한 죄라면, 온 인격체가 그 고통을 다 뒤집어써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
'머리를 푼다'에서 '머리를'에 해당하는 '로쇼'(rosho)는 '머리'를 뜻하는 '로쉬'(roshi)에 대명사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그의 머리'란 뜻이다.
그리고 '푼다'에 해당하는 '파루아'(pharua)는 '(머리를)풀다'란 뜻을 지닌 '파라'(phara)의 단순형 수동태 분사로서 '풀어져 있는'이란 뜻이며, '하야'(haya)동사의 미완료형인 '이흐예'(yhye)와 함께 쓰여져 계속적인 상황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머리는 풀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이다.
앞 부분의 옷을 찢는 것처럼, 이 경우에도 머리를 한 순간 풀어 헤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머리를 풀고 있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처럼 부정은 인간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외모를 꾸미고 다듬는다고해서 나아질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드려야 했던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45)
'콧수염'으로 번역된 '사팜'(sapham)은 '코밑 수염'을 뜻하며, '가리고'에 해당하는'야테'(yate)의 원형 '아타'(ata)는 '덮다'(시편71,13), '입다' (1사무28,14)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덮어 가리우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입술을 가리우는 행동은 에제키엘 24장 17절, 22절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태도를 상징하며, 미카서 3장 7절에서는 수치당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입술을 덮어 가리운다'의 표현은 죽은 상태와도 같은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애도이며, 또한 수치를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회에서 혼자 고립되는 것은 죽은 상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는 결국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총체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콧수염으로 입술을 가리고 그가 해야 했던 일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행동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타인에게, 부정함이 옮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부정이 발산되는 것을 막는 상징적인 행위인 동시에, 위생적으로 감염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46)
본문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외롭게 홀로 거할 것은 물론, 그의 삶의 본거지가 공동체와는 격리된 진영 밖이 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며, 영적 죽음의 상태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의 사람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계약(언약)의 축복으로부터 단절이며, 하느님의 거룩함을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사건을 보면, 죄에 대한 심판으로 질병이 발생되었던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민수12,8~10; '미리암의 문둥병').
또한 감염성 피부병에 대한 치료책이 주어지지 않았음으로, 그 병에 걸린 자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질병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새 계약 공동체에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병환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고쳐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마태8,2~4; 11,5; 마르14,3).
이것은 더 이상 질병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정한 자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없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옛 계약의 시대가 끝나고 새 계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새 계약의 공동체는 정결과 부정의 기준이 더 이상 외형적인 질병이 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으며, 오히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내적인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마르7,20~23).
연중 제6주일 복음(마르1,40~45)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1~42)
'나병환자'로 번역된 '레프로스'(lepros; a leper)는 오늘날의 한센씨병 (Hansen's disease), 즉 나병이 아닌 일종의 피부병으로 여겨진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정상인들과 함께 살 수가 없었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 취급받아 종교적으로도 배척을 받았다(레위13,45.46).
따라서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일은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어, 회당의 한 구석에 칸막이 너머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본문은 환자가 먼저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최초의 기록이다.
그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으로서 먼저 정상인에게 다가가서는 안된다는 율법 조항을 어기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으로부터 치유를 받기 원하는 그에게는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없었기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과감하게 예수님에게로 나아갔던 것이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고'에 해당하는 '고뉘페톤' (gonypeton; kneeling down)은 극도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40절 후반부에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고자 하다'(원하다)에 해당하는 '텔레스'(theles; you will; you wish)나 '하실 수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뒤나사이'(dynasai; you can make)는 모두 현재형이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병 고치는 능력이 있으며, 일반 의원과는 달리 지금 당장 낫게하는 신적 능력을 가진 메시야로 믿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여기서 '깨끗하게'에 해당하는 '카타리사이'(katharisai; clean)의 기본형인 '카타리조'(katharizo)는 육체의 불결함이 깨끗해질 때도 사용되며 (마태23,25.26), 도덕적, 종교적 정결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사도15,9; 2코린7,1).
나병환자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병이 주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취급받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음을 암시한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 나아온 이 나병환자는 종교적으로 매우 갈급한 심정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지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에 해당하는 '스플랑크니스테이스'(splangchnistheis; Jesus moved with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는 원래 인간의 '내장'을 가리켰으나, 점차 '사랑'이나 '애타는 마음'이라는 뜻을 갖게 된 '스플랑크논'(splangchnon)에서 유래하여 찢어질 듯한 마음을 뜻한다.
어떤 사본에서는 이 단어 대신에 '노하셔서'에 해당하는 '오르기스테이스'(orgistheis)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나병환자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신명6,5)과 이웃 사랑(레위19,18)의 계명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격리시키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당시 사회와 종교를 향한 의노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병환자를 향한 주님의 행위는 그들의 잘못된 해석과 관행을 뛰어넘는 참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치유였다.
마르코 복음 1장 42절에서 '나병이 가시고'의 '가시고'에 해당하는 '아펠텐'(apelthen; departed; left)의 원형 '아페르코마이'(aperchomai)는 인격적 분리보다는 장소적 이동에 비중이 있는 단어이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께 나아온 나병환자의 병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해 즉각적으로 떠나갔음을 보여준다.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나병환자를 단죄하고 그를 격리하는 일밖에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의 병을 고치셨다.
이것을 통해 진정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할 자는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요 목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히브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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