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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위장된 탐심
소 주 제: 우상. 누구를 위한 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날자 및 분류: 13.03.17. acts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 행5:1-11
전 하 는 자: 정 헌정 목사 http://cafe.daum.net/changcho
[010-3728-5889 교회 070-8774-5891]
[본문 행5:1-11]행 5:1-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 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헌금 떼어 먹으면 어떻게 되는 가를 위협하려고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1. 신앙은 누구의 눈에 드느냐의 싸움이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수 하는 일이 있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경우도 있고 어리고 연약한 부분이 있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방향과 목적이 비틀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게 손을 되십니다, 그건 안 됩니다, 주를 믿어야 할 사람이 딴 데 가있다 그건 안 됩니다, 그것은 용서하거나 봐 줄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에서 중간시험을 봤는데 뒤에서 10등 안에 든다. 이런 것은 조금 꾸중 들으면 됩니다, 그러나 학교 갈 시간에 디스텍에 갔다 이건 심각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사도행전에 등장한 것도 그와 같이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내제 되어져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이렇게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그 소유를 팔아서 헌금하기로 결심을 했고 얼마는 감추고 얼마는 헌금은 한 것이 그렇게 죽을 일이라고 그 자리에서 부부가 죽어나가는 일이 생겼는가?
앞에 4장32절부터 보시면 당시에 이러한 분위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행 4:32-3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렇게 해 놓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아 돈을 가지고 오는 일이 생깁니다,
당시에 성령감림이후에 유무상통하는 일과 물욕이 없어진 그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소유를 내 놓고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벗어난 아름다운 모습은 신령한 신자들의 모임에서는 늘 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 난 요셉이라는 사람.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그리고 사도바울과 함께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주인공이 되는 이 사람은 상당히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소유인 밭을 팔아서 헌금을 한 것이 굉장히 요긴하게 쓰여 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도 씀씀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사도들은 생업을 위해서 시간을 낼 틈이 없었습니다.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과 뛰어다니는 일과 병 고치는 일 이런 일로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먹고 자고 여행하고 하는 경비가 따로 넉넉하게 조달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이 그 돈을 가지고 왔을 때 그것이 굉장히 요긴하게 쓰여 졌던 것같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변명이 바나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번역하면 권위자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권은 여기서 권할 권자입니다, 위는 위로할 위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갖다 낸 헌금으로 인하여 초대교회의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고 필요한 모든 곳에 넉넉하게 충당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권위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칭송 그 영광 받는 것이 탐이 났습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중요한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헌금을 떼어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처음부터 저들의 신앙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출발시켰느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들어가야 됩니다,
바나바라는 요셉이 얻은 영광과 칭송을 얻고 싶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을 갖다 내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바나바의 헌금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문제만은 교회에서 늘 조심해라 이겁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터지자 행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교회 안에 이 문제만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신자들이 이 시험에 걸리고 교회 전체 분위기 이리 가지는 마라.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이렇게 크게 언급하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기독교 역사상 늘 있어왔던 큰 범죄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이 문제를 꾸짖을 때도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였느냐 라고 그럽니다,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느냐. 이렇게 꾸짖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얻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이 아니고 사람 앞에서 칭찬입니다, 그가 사람을 속이고 사람 앞에 받는 박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돈을 동원합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성실이 살고 부지런히 살고 윤택하게 사는 것을 남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 목적으로 삼는 자세를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인정을 받는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비유하시기를 두 사람 즉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저를 저 세리와 갖게 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분명히 그 세리보다 더 뛰어나고 놀랍고 더 정성스러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세리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아버지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라 바로 그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헌금이란 액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결국 누구를 사랑하면 누구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누구의 눈에 들기로 하느냐에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기로 하는 싸움이냐 사람의 눈에 들기로 하는 싸움이냐가 지금 돈 문제로 분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가면 이런 이유 때문에 친히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눅 12:13-21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재물을 쌓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그 삶의 근거이고 힘이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그래서 재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2. 탐심은 우상숭배
하나님이 그 힘의 근거가 되고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면 재물은 그렇게 썩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설교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런 시험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다르다고 단언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탐심을 재미있게도 엡5장에 가시면 신자들에게 권면하는 장면 있습니다, 엡 5:3 -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그럽니다, 탐심이 왜 우상숭배냐. 여기에 오늘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핵심 되는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고대 사회의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 민족들에 대해서 우상은 처음에는 자연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었습니다, 무지로 말미암는 미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자 미신을 추방한 것뿐만 아니라 사람 마음에서 종교를 전부 뽑아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에게 있어서 우상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두려움. 무지로 인한 미신이 아니고 조금 다른 성격을 띱니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우상은 단순한 자기네들 욕심을 채워주는 자로 우상을 섬깁니다, 애굽을 떠나와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바알신이 가장 많이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등장하는 이유가 생산의 신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상숭배를 성경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필요한 것을 내가 결정하여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요구하는 대상 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권세. 세상에서의 쾌락. 세상에서의 입신양명 등은 모두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은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직접체험하거나 겪게 함으로서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신령하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지금의 환란이나 고통이 저들을 거룩하게 만들고 신령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너는 지금 아픈 것이 낫고 괴로운 것이 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를 보면 늘 사로잡혀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들을 내어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은 당장 고통스럽고 지금은 당장 피눈물 쏟는 일이지만 그것이 이스라엘백성에게 복입니다.
사도바울 주님 앞에 이렇게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내 몸에서 이 사단의 가시를 빼주십시오. 왜냐하면 열심히 주를 위해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가 짐작하기로는 그것이 간질병이 아니었는가. 생각을 합니다, 가득이나 말재주도 없고 외모도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꺼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나오다가 간질이 발작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무슨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이건만은 빼 주십시오. 주의 복음과 영광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도 온전하여짐이라.
주께서 그런 방법을 쓰신다면 그러면 우리들은 기쁜 마음으로 항복해야 됩니다, 그가 그 뒤를 이어서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라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고린도후서 11장 끝 부분에 보면 그의 자랑이 이겁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겁니다, 내가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라고 자랑합니다,
3. 나를 위장하는 탐심
오늘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형태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생활로 각자에게 그런 과정을 걷게 하시고 그런 처지가 되게 하신 것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최선의 길이고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정금같이 만드는 작업이라는 걸 서로 인정하는 마음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같이 외식과 가증한 것이 드러나는 곳도 없습니다, 신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말을 하면 곧 이런 판단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교회 와서 입을 다물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야! 나는 예수 잘 믿었더니 형통하기만 하더라. 너 어려움일 당하는 것 보니까 너 남 모르는 죄가 있지 너! 요사이 기도하지 않지. 라고 째려보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실상으로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 있으매도 불구하고 늘 형통한 것같이 하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이건 안 된다 말입니다, 성령을 속이지 말라 했습니다, 그렇게 그럴 듯한 얼굴하고 나온다면 우리 모두가 아나니아고 삽비라입니다, 이것만은 교회에서 쫓아내라 이겁니다, 사도행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민수기 11장에 가시면 출애굽사건에서도 민 11:4-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출애굽사건에서 이스라엘백성이 가장 웃기는 것은 하나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감사하지 않고 계속 불평만 늘어 논다는 사실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고 웃기고 유대인들은 사람같이도 보이지 않다가 열 번 이상 읽으면 그것이 자기모습인지 알고 까무러치는 내용들입니다, 잘 보시면 어떤 경우에 이런 불편이 나오느냐하면 민11장4절 이하를 보면 탐욕을 품어서 그렇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 땅에서 노예고 처절한 노역에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사 그들이 짓지 않은 집 그들이 경작하지 않은 땅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의 열매를 먹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가는 그 광야 길은 낮 온도는 50도 가까이 오르고 밤 온도는 0도 가까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햇빛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히터를 틀어주시면서 인도해 가십니다, 이 광야 40년 동안 걸었지만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반석에 나오는 물을 마시고 아침에는 만나가 내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떨어져 고기를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이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탐심 때문이고 탐심이 우상숭배고 우상숭배가 신앙과 같은 자리에 있을 수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인 것을 안다면 광야생활은 이것보다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유를 얻은 정도만이 아니라 약속된 땅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길이 더 험하고 더 괴로워도 그것은 행복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탐욕만 품으면 모든 것이 눈에서 가려지는 겁니다, 탐욕을 품으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영혼을 보는 시선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아먹을 준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애기입니다, 사람에게 박수를 받기 위해서라면 주를 속이는 것까지도 불사하는 자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팔아먹는 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 그 시험을 받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여러분 생애를 지금 돌이켜 봐 주십시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처하게 한 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점검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잘난 것과 못난 것이 똑 같은 가치를 가집니다, 남에게 괄시를 받고 고통 속에 있어도 그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지 않은 위협성은 늘 있습니다,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내 손 안에 갖는 순간 영원을 준비한다는 자신을 잊게 되고 지금이라는 순간이 영원을 보답하는 하나의 디딤돌이나 훈련과정인 것을 놓치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만이 나오고 지금 나를 증명하고 행복을 갖다 줄 것이라고 믿는 돈과 세상에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현대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십시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속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고 기다리는 동안에 말씀으로 여러분을 깨우치시는 동안에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에 영광을 준비하십시오. 빼앗기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