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40)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6장 진소양왕의 무력 정책 (4)
민지회담을 하기 위해 인상여(藺相如)는 한단성을 떠나기에 앞서 정병 5천 명을 뽑아 지령을 내렸다.
- 배를 타고 황하를 따라 내려가 민지(澠池) 땅 30리 밖에 매복해 있으라.
조혜문왕(趙惠文王)은 인상여를 대동하고 민지를 향해 출발했다.
대장군 염파(廉頗)가 전송할 겸 대군을 이끌고 국경까지 호위했다.
진(秦)나라 경계에 이르렀을 때 염파(廉頗)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께서는 지금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신이 민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건대, 회합을 마치고 돌아오시기까지는 30일 이상 소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30일이 지나도 왕께서 돌아오시지 않으면 신은 세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진(秦)나라의 야망을 끊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날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초회왕과의 친선 회담을 제의해놓고 그를 납치하여 함양성에 가둔 적이 있다.
초회왕(楚懷王)을 인질로 삼아 초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작정이었으나, 초나라 대신들은 거기에 말려들지 않고 세자를 왕위에 올렸다.
이로 인해 초회왕만 처량한 신세가 되어 끝내 함양에서 죽었다.
이를테면 속임수는 진소양왕의 주특기였다.
이것을 어찌 조혜문왕(趙惠文王)이나 염파(廉頗)가 알지 못하겠는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이 민지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고,
염파가 굳이 전송하는 자리에서 세자 운운한 것도 초회왕(楚懷王)의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처량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오.“
이윽고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배에 올라 황하를 건넜다.
회견날이 되었다.
조혜문왕과 진소양왕은 예(禮)를 마친 후 술잔을 나누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문득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조혜문왕에게 권했다.
"소문에 듣자니 조왕(趙王)께선 음악을 퍽 좋아하신다고 하더이다. 바라건대 거문고를 한 곡조 들려주시오."
술에 취한 조혜문왕(趙惠文王)은 진소양왕의 말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줄 모르고 대뜸 승낙하고 거문고를 가져오게 하였다.
한 곡을 연주하고 나자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한바탕 크게 웃은 후 옆에 시립해 있는 어사(御史)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과인은 오늘 좋은 음악을 감상했도다. 오늘의 일을 역사에 기록해놓도록 하라."
어사가 재빨리 붓을 들어 죽간(竹簡)에 글자를 써넣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秦王)은 조왕(趙王)을 만나 술을 마시며 조왕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였다.
그랬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조혜문왕이 자신에게 칭신(稱臣)한 것처럼 꾸며 그를 모욕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은 조혜문왕(趙惠文王)은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분노와 부끄러움에 얼굴이 뻘개져 어쩔 줄 모르는데, 옆에 있던 인상여(藺相如)가 진소양왕 앞으로 나섰다.
"우리 왕께서도 진왕(秦王)께서 음악에 능통하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제 신이 진왕께 분부(盆瓿)를 올릴 터이니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연주해 주십시오."
분부(盆瓿)란 진흙으로 구워만든 고대 중국의 그릇으로, 주로 술이나 장을 담는다.
때로는 두드려서 노래 장단을 맞추는 악기로도 사용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인상여의 의도를 눈치채고 얼굴에 노여운 빛을 띠었다.
"...........................“
그래도 인상여(藺相如)는 굽히지 않고 서너 걸음 더 다가가며 분부(盆瓿)를 내밀었다.
"즐거운 자리입니다. 한곡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인상여를 향해 꾸짖었다.
"무엄하구나!“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겁고 낮은 음성으로 외쳤다.
"대왕과 신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만일 왕께서 끝까지 분부(盆瓿)를 두드리시지 않겠다면 신의 품속에 있는 칼이 대왕의 전신을 피로 물들일 것입니다.“
인상여(藺相如)는 연주를 부탁하는 척하면서 은연중 진소양왕 가까이 접근했던 것이다.
놀란 것은 진(秦)나라 신하들이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저 무례한 자를 당장 잡아라!“
진나라 무사들이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인상여(藺相如)가 눈을 부릅뜨고 천둥보다 더 큰 소리로 호령했다.
"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이때의 인상여의 얼굴은 악귀보다 더 험악하고 무서웠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빳빳하게 곤두섰고, 눈에서는 퍼런 인광이 뿜어져 나왔다.
무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며 서너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이르자 난감한 것은 진소양왕(秦昭襄王)이었다.
그는 정말로 인상여가 자신을 향해 돌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인상여가 내준 분부(盆瓿)를 한 번 두드렸다.
팅!
둔탁한 소리가 울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제야 험악한 표정을 풀고 조나라 어사(御史)를 향해 지시했다.
"그대는 오늘 일을 역사에 기록하오.“
조나라 어사가 나와 죽간(竹簡)에 써 내려갔다.
모년 모월 모일, 진왕(秦王)이 조나라 왕을 위해 분부(盆瓿)를 두드렸다.
조(趙)나라를 모욕주려다 오히려 모욕과 망신을 당하게 되자 진(秦)나라 신하들은 분을 이기지 못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혜문왕을 향해 외쳤다.
"조왕(趙王)께서는 우리 대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성 열다섯 개를 바치시지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이 핼쑥한 표정이 되어 인상여를 돌아보자, 인상여(藺相如)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진소양왕을 향해 요구했다.
"진왕(秦王)께서는 함양성을 바쳐 우리 대왕의 축수(祝壽)를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오늘 자리에서 도저히 조혜문왕을 제압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좌우 신하들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 자리는 두 나라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유쾌하게 서로 술잔을 나누도록 하라."
해가 기울면서 주연(酒宴)은 끝났다.
진(秦)나라 신하들은 역관으로 돌아오자마자 흥분한 어조로 진소양왕에게 아뢰었다.
"오늘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왕께서는 군사를 풀어 조왕(趙王)과 인상여를 잡아 끌고 가십시오."
이때 호위를 담당한 장수 백기(白起)가 나섰다.
"세작의 보고에 의하면 민지(澠池) 땅 30리 밖에 조(趙)나라 대군이 머물러 있다 합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오히려 천하 모든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풀이 죽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인상여가 있는 한 우리는 조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구나.
아예 이번 기회에 안국군의 아들 이인(異人)을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 화평을 맺어야겠다."
안국군(安國君)은 진소양왕의 아들이다.
이름은 영주(贏柱)로 세자의 바로 아랫동생이기도 하다.
그런 아들의 아들, 즉 손자를 인질로 보내겠다니 진(秦)나라 신하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평을 맺는 것은 좋으나 굳이 볼모까지 보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진소양왕(秦昭襄王)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지금까지 지켜본 바 조(趙)나라의 힘은 만만치 않소. 단시일 내에 그들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오."
"만일 우리가 볼모를 보내지 않으면 저들은 결코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오.
안국군의 아들 이인(異人)은 천한 여자의 태생이니 볼모로 보낸다 해도 우리에게는 손실이 될 게 별로 없소.
반대로 조(趙)나라는 감격하여 우리를 굳게 믿을 것이오. 그 사이 과인은 위나라와 한나라를 도모하겠소."
다음날 진소양왕은 안국군의 아들 이인(異人)을 인질로 내주고 조혜문왕과 화평조약을 맺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의 입이 크게 벌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로써 그는 떠나올 때의 침울함과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여기서 한 가지 미리 말하면, 이때 조혜문왕을 따라 인질이 되어 한단으로 간 안국군의 아들 이인(異人)은 후일 그곳에서 아들 하나를 낳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난세를 종식하고 천하 통일을 이루는 진시황(秦始皇)이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