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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행복한가 - 행복의 개념과 우리의 현주소
행복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한때 사람들은 인간의 한 가지 욕구를 설명하고자 다음의 단어들을 사용한 적이 있다.
‘창녀, 악마, 키메라(Chimera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공의 괴물), 생지옥.’
그렇다면, 사람들이 위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나타내고자 했던 인간의 욕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정답은 행복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행복은 요동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고문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너무나도 정확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냉소적인 극작가 버나드 쇼는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행복으로 가득 찬 평생이라니! 그 누구도 그런 고약한 상황을 참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거야말로 생지옥이 아니겠는가?” 애석하게도 한국 사회에서도 행복은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제력과 행복도 간 격차
한국 사회에서 행복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모습은 국제연합(UN)에서 2016년에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만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림 1). 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된 156개국 가운데 58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조적으로 세계은행(WB)이 2016년에 발표한 세계 각국의 국내 총생산(GDP)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GDP는 약 1,500조원으로 세계 11위를 기록했다(그림 2). 이러한 결과는 한국이 국가의 경제력과 국민의 행복도 간 괴리가 매우 심한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 사회가 경제적 가치보다 행복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왔음을 보여준다.
행복에 대한 대중의 오해
한국 사람들이 은연중에 경제적 가치보다 행복에 대한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은 행복에 대한 오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에 관련해서 가진 편견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 행복은 이기적인 것이라는 믿음이다. 어떤 이는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한다면 이기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기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감을 선사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행복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본성상 이타적인 것이다.
둘째, 불행이 창의성을 낳는다는 믿음이다. 일부 사람은 불행한 사람들이 더 창의적인 작품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영혼이 고통의 바닷속을 헤매는 경험을 거쳐야만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에 관한 심리학 연구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 작품은 불행감 속에서가 아니라 불행감을 행복감으로 전환할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행복한 사람은 우둔하다는 믿음이다. 어떤 이들은 행복과 우둔함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기도 한다. 미국의 소설가 포터(Eleanor H. Porter)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낙천주의자 폴리애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난한 목사의 딸인 폴리애나는 양친을 잃고 숙모 집에서 살게 되는데, 순진무구한 소녀의 행동은 독신 생활로 얼어붙었던 숙모의 마음을 녹여 마침내 집안에 화기를 되찾아준다. 그리고 폴리애나는 마찬가지 태도로 마을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바꾼다. 포터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 뒤로 폴리애나는 낙천주의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낙천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우리는 폴리애나라고 부른다. 폴리애나 식의 낙천주의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름다운 것이 되고, 올바르지 않은 것도 올바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식의 낙천주의가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된 뒤로, 지혜로운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이러한 믿음과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 불행한 사람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지적으로 더 유연하고 창조적이며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또 행복한 사람들은 현실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에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좌절을 더 잘 극복함으로써 위기 상황을 더 잘 타개해 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대책도 효율적으로 더 잘 찾아낸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경제력과 행복 수준 간 괴리를 좁히는 데는 사회적인 많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행복에 관한 편견을 줄이고 정신건강 교양의 형태로 행복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추는 것도 꼭 필요하다. 이때 국가적인 행복도에 관한 지표뿐만 아니라, 한 국가에서 개인의 행복도를 평가하는 지표도 유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카네만과 디턴의 논문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들은 행복과 소득 간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을 하면서 행복한 삶의 조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 걸쳐 무선적으로 표집을 한 1,000명의 주민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가 왼쪽 그림에 제시되어 있다(그림 3).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행복한 삶과 소득의 관계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소득을 ‘삶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도’로 정의하면, 그림 3처럼, 행복은 소득에 정비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면에 행복을 긍정 정서를 경험하고 삶의 문제들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면, 소득이 일정 수준까지는 행복감을 높이는 데 기여할지라도, 한계 효용의 문제를 나타내게 된다. 다시 말해, 아무리 소득이 올라가더라도 더는 행복감이 증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소득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행복의 요소마다 차이가 있었다. 긍정 정서와 우울은 약 7천만 원, 그리고 스트레스 문제는 약 5천만 원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일부 영향력이 지속하기는 할지라도, 사실상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소득은 저소득층의 정서적인 고통을 가중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에서 하위 10% 저소득층(월 가계소득 115만 원 미만)은 하위 25% 이상의 소득층(월 가계소득 345만 원 이상)보다 이혼, 홀로 되는 것, 신체적 질병, 역경 등에 따른 정서적 고통을 더 심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복한 삶의 조건
카네만과 디턴의 연구 결과는 개인이 행복의 문제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만일 자신의 삶에 대해 평가했을 때 ‘만족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011년 갤럽 국제조사기구(Gallup International Association)에 가입된 57개국의 조사기관이 협동으로 전 세계 만 19세 이상의 남녀 5만 2,287명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한국인 가운데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52%였고, ‘행복하지 않다.’는 응답은 8%, 그리고 ‘행복한 것도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가 38%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한국인의 절반 정도는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만일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스트레스에 자신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오늘을 기준으로 지난 3년간 감기에 걸린 횟수를 헤아려보기 바란다. 감기에 걸리는 원인은 ‘감기 바이러스’와 ‘스트레스에 따른 면역력 저하’이지만 그 가운데 스트레스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감기 바이러스에 노출된 채로 생활하지만, 면역력이 유지되는 한 감기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경우, 일 년에 평균적으로 2회 정도 감기에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지난 3년간 6회 정도 감기에 걸렸다면, 평균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치를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감기에 더 많이 걸렸다면, ‘스트레스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서의 행복’은 평균보다 더 적게 경험하는 것이 된다.
대조적으로 평균보다 감기에 덜 걸렸다면, 그만큼 행복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내 상태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삶에 만족하는 동시에 스트레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자 심리학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갤럽의 자료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득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응답하는 경향이 있는 동시에 종교생활을 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응답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높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종교생활이 현실 세계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지혜로운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우둔한 사람이 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행복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동시에 즐겁게 생활하고 역경에 좌절하지 않으며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 이미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행복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행복’은 오늘날 시대적 물음이다. 그만큼 우리는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새해를 여는 이 시점에‘ 행복’을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은 어두운 시국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2016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어제나 내일은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 있는 시간이지, 실제 시간이 아닌 까닭이다.
이렇듯 실제 시간이 지금 이 순간뿐이라면, 지금의 행복이나 불행을 결정하는 것 또한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말은 곧 나의 행복은 너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마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한국인의 행복지수
‘한국인의 행복’을 말할 때 보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를 비교한 수치를 제시한다. 한국의 행복지수는 OECD 35개국 가운데 행복지수가 29위다(2016년기준). 또한 자살률은 1위,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최하위다.
사실 행복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 행복의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객관적 기준으로 이를 측정한다는 말인가? 물론 행복에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면도 있다. 이는 사회적 요인이 개인적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행복지수의 요인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분석에 주목해 보자. 김문조 교수(고려대학교 사회학과)는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지연·학연의 관계주의와 현세 기복주의 ·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 의식에 영향을 준다고 발표한 바 있다(‘문화의 안과 밖’, 2014년 12월 20일 강좌).
그는 한국인의 습성은 자기 식구를 우선시하는 혈연 중심의 관계주의와 현세주의,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통의 대가를 되돌려받기를 갈망하는 배상주의라는 삼중 나선형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세 심성적 특성은 (아는 이들) ‘끼리끼리’, (살아생전에) ‘빨리빨리’, (챙길 수 있는 한) ‘많이많이’라는 의태어 속에 잘 담겨있다고 한다. ‘빨리빨리, 많이많이’라는 심성은 자신을 숙고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그저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학벌과 부, 명예가 행복의 비교 기준이 되어, 많이 갖고 출세한 이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 그들을 쫓아가려고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도 한국인이 지닌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제시하는 행복관보다 세속적 행복관을 그대로 자신의 행복의 척도로 삼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새해에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이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혼자서만 행복해질 수 없다. 끼리끼리 행복해지는 것도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진정 행복해지려면 ‘함께’ 행복해져야 한다. 지난해에 우리 앞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은 자신의 실속만을 챙기고 끼리끼리 행복해지려 했던 이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끼리끼리 잘살아보겠다고 꼼수를 쓰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다른 사람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부터
새해는 지난해보다는 조금 더 행복한 한 해가 되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부터 행복의 전달자가 되어보면 어떨까?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 내 주변에 긍정적인 시선과 말을 건네는 작은 노력을 시도해 보자.
먼저 가까운 가족부터 말이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는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아이들에게는 “사랑한다. 고맙다. 잘했구나. 미안하다.” 등의 말을 먼저 건넴으로써 긍정적인 씨앗을 내 주변에 뿌려보는 것이다.
인간 뇌세포 속에는 경험과 역사로 말미암아 기억된 것이 저장되어 있다. 이 저장된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행복도 훈련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긍정적인 말을 하면 내 안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쌓이게 되면서, 자연히 마음에 평화와 행복감이 차오른다.
다른 이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덕분에 내 마음이 행복해진다. “감사해요. 사랑해요. 용서합니다.”라는 긍정적인 말들을 자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행복의 씨앗에 물을 주는 일이기에 그렇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 여우가 싸우고 있단다. 하나는 선(기쁨, 평화, 사랑, 자비)이고, 하나는 악(화, 질투, 욕심, 건방짐, 열등감, 우월감, 자만, 거짓)이란다.” 그러자 손자는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럼 할아버지, 어느 여우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녀석이 이기지.”
나는 과연 어떤 여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내가 먹이를 준 녀석이 결국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모든 게 습관 들이기 나름 아닌가? 내가 하루하루 주는 먹이에 따라 자신의 습관도 그 방향으로 강화된다.
우리의 마음은 일종의 밭이다. 그 안에는 기쁨, 사랑, 즐거움, 희망과 같은 긍정의 씨앗도 있고, 미움, 절망, 시기, 두려움과 같은 부정의 씨앗도 있다. 내가 상대에게 거칠게 말하면 내 안에 있는 분노의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다. 거기에 자꾸 물을 주면 분노의 감정은 점점 더 커진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고, 미움이나 시기 질투 또한 눈덩이처럼 증폭되기 마련이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은 화를 푸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너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라. 그리고 도움을 청하라. 나는 지금 고통스럽고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우는 아이를 달래듯 화를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화를 돌본다는 것은 호흡이나 보행을 통해 화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 에너지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의 에너지는 크기 때문에 당장 화를 표출해 버리면 크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우리는 흔히 “내 옆에 오지 마. 당신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말해버리면 결국 상대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우리는 자신이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불화를 멈출 수 없다. 불화의 씨앗은 도처에 있고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잠재되어 있다.
우리 안에 타인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 분노를 지니면 지닐수록 그 적대감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어두워지고 만다. 행복해지려면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되돌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 머무는 것
인간의 마음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는 원숭이처럼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다니며 열심히 무언가를 찾지만,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한다.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을 다잡으려면 조용히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실 앞에 고요히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온갖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마음에 고요히 흐르는 평온함을 맛보곤 하지 않았던가?
그 평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께 머무르는 것에서 비롯함을 말해준다. 그분께 마음을 의탁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변화무쌍한 역사 속에서도 비교적 덜 흔들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잘 말해주고 있다.
“마음의 평화를 통하여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평화는 무엇보다 먼저 한 개인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사랑과 이해, 남을 위하는 마음이 평화의 근본이라고 믿는다”(틱낫한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 참조).
[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2017년 새해를 맞으며 「경향잡지」의 모든 구독자와 가족에게 인자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의 은혜가 풍성히 내리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 이유는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실 때 주님의 행복 유전자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우리는 서로 복을 빌어줍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모르는 사람에게도 복을 빌어주는 이유는 우리 안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의 축복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면서도 우리는 누가 복을 주시는 분인지 밝히지 않은 채 말합니다. 중국 식당에는 ‘복(福)’자를 써넣은 등을 거꾸로 달아놓는 관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복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복을 내려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만복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지어내실 때 인간이 행복해지도록 계획하고 실행하셨습니다. 모든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짐승의 이름까지도 사람이 부르는 대로 정하게 안배하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성품을 성경을 통해서 종합하면, 첫째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원치 않으십니다. 악은 다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근성을 지닌 악마는 매사에 불행을 일으키는 장본인입니다. 원조의 경우에도 악마는 행복을 누리는 아담과 하와를 불행의 도가니에 잡아넣었습니다. 부부가 서로 미워하게 만들며, 형제끼리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자연도 인간에게 반항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악마가 하느님의 반대편에서 인간의 불행을 획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펼치시고 멸망의 구렁텅이에 깊이 떨어진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구원자로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받들어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셨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복을 내리셨습니다.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교환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려오시고, 인간이 올라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이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아가시고, 인간이 살아나도록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이 우뚝 서게 만드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당신의 자녀, 곧 아들과 딸이 되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로 우리는 행복을 되찾게 되었으니, 행복의 출처는 분명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그런 이유에서 원조의 죄를 ‘복된 탓(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 많이 내린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선택받은 죄인입니다(MISERANDO ATQUE ELIGENDO).”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 곧 선하심의 은혜로 은총의 나라에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진실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두 번째 성품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거짓을 모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 하라고 가르치시며, 그 이상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악마는 거짓을 일삼습니다. 인간을 유혹하여 행복을 잃게 만드는 화려한 거짓을 만들어냅니다. 진실은 순수하기 때문에 요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짓은 화려하고 요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초대하십니다.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진리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도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처음 뵙고, 기적적인 고기잡이를 보았을 때 예수님 앞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우리가 진실하게 스스로의 부족함과 미약함을 고백할 때 우리는 행복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 죄나 허물 또는 약점을 고백하는 사람은 새 삶의 은총을 받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런 이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1요한 1,8-9).
성인들은 회개한 죄인들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막달레나 등 수많은 성인성녀는 행복의 비결을 깨닫고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성인이 없고, 아무리 막중한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죄인은 없다.”라는 말이 꼭 맞습니다.
아름다우신 하느님
하느님의 세 번째 성품은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가톨릭 성가」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하느님의 아름다운 본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느님 안에 내재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부모님의 사랑 안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빠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참행복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확실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르치는 스승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 가운데 참된 행복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참행복의 여덟 가지 단계라고 일컬어지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은 많은 교부들의 가르침 안에 인간의 행복의 선언문 역할을 합니다.
성 치프리아노 교부는 세상의 헛된 행복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추구하는 참행복에 관하여 좋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락탄시오 교부는 진정한 행복은 육신의 쾌락이나 지상의 재물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성 바실리오 주교는 지상의 모든 행복,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물 또는 지위 등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선한 양심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행복과 불행을 분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의 놀라우신 은혜를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악인들의 행복과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사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실 선물인 ‘복’이었습니다. 그 포장지는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고난’이 단단해서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또 잘 벗겨지지 않아 포장용으로 제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포장지만 보고는 고난을 싫어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참된 복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지상의 죄와 결부된 즐거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오 교황님은 더러움 속에 즐겨 살며 지내는 사람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의 달콤함을 결코 맛보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과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시편 2,12)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인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 32,1-2)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은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잠언 3,13-14).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행복이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곧 다스리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루카 14,15; 묵시 19,9 참조).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 24,46)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주님께서 마련하신 이 행복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속합니다(마태 5,3-10 참조).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꼭 닮은 사람들로서, 그들 안에 하느님의 품성, 곧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아름다우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가 참행복의 길을 걷도록 지혜와 힘을 주시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하며 노래합시다. “내 생애의 모든 것 알고 계신 주님, 내 생애의 모든 것 살피시는 주님! 어디에 앉아있어도, 당신 함께 계시며, 어디를 걸어가도 살피시는 주님! 내 생애에 모든 것 당신께 드리니 받아주시옵소서!”
참행복의 의미를 알려주시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주시며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길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걸어가는 행복을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