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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돌! 그 분의 손에 이끌린 삶으로
1978년 대학을 졸업한 후 수원 개척 역사의 모퉁이 돌로 쓰임 받겠다고 결단한 나는 어찌하든지 수원 개척 역사를 위해 수원에 있을 수 있는 꼬투리를 찾았다. 발령전이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은사님 내외분께서 산의초등학교에 산가 대치 임시강사(기간제 교사)를 해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수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6학급짜리 작은 학교였다. 1개월만 근무하는 거라서 수원에 사는 해근친구의 집에 함께 있기로 했다. 절친인 친구 집에서 함께 사니까 내 집처럼 편안하고 좋았다. 그 곳에서 박목자님이 인도하는 주 1회 성경공부에 친구도 함께 하였다.
주일에는 가정이 있는 박목자님이 청주에 가시므로 주일예배는 따로 없어서 수원중앙침례교회에 해근친구와 함께 나갔다. 주일 낮 대예배, 저녁예배, 청년예배, 수요예배 등을 다 참석하였다. 그 해 7월 8일 유명하신 김장환목사님의 집도로 침례탕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긍지를 지니게 되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찬으로 사는 것이 즐거웠다.
첫 기간제 교사 1개월 근무가 끝나고 바로 이어 다른 학교 두 군데에서 더 근무한 후 여름방학이 되자 원산도 바닷가에서 가진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영적인 고향 청주에서 주최하는 수양회라서 마치 고향에 간 것 같이 아늑하고 반가웠다. 그 수양회에 중학교 친구인 오**을 해근친구는 김**친구를 초청하여 참석했다. 친구들을 초청하여 참석하자 청주 동역자들은 우리를 무조건 푸근한 사랑으로 품어주었고 기도지원도 많이 해주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으며 행복했던 여름수양회가 끝난 후 9월 1일에 용인에 있는 학교에 정식 발령을 받았다. 수원 개척 역사를 섬기고자 결단한 것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것이라 생각되었다. 수원에서 출퇴근 할 수 있는 학교 그것도 용인에서 가장 크고 좋은 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자 지속적으로 개척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여름 수양회가 끝난 후 비전에 넘치는 우리는 수원 캠퍼스 개척을 구체적으로 시작했다. 직장에서 퇴근한 후 먼저 아주대에 가서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의 단을 쌓았다. 그 다음 벤치에 앉아 있거나 차를 기다리는 대학생에게 나아가 일대 일로 대화를 요청하여 성경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고 성경공부에 초대했다. 한 아담한 1학년 복학생을 꼬투리로 그렇게 학생들을 초대하고 또 초대하였다.
그해 9월 24일 수원 순복음 교회에서 양해를 구하고 방석 몇 개를 쌓아 강대상을 만들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10월 1일부터는 박목자님의 거처인 작은 창고 같은 자취방을 교회로 삼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곳은 장안문 근처에 있는 북수동이었는데 어느 캠퍼스와도 거리는 가깝지 않았으나 거기서 개척역사를 구체적으로 섬기기 시작하였다. 오** 형제는 유머 있고 재미있는 학생이었는데 우리가 주는 사랑을 잘 받았다. 얼마 있다가 자기 친구 최**형제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는 본인은 멀리 가버렸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차례로 인도하여 북수동 교회 예배와 성경공부에 초청하였다. 그 해 성탄예배에 친구, 직장동료, 대학생 등 17명이 참석하였다. 첫 해 그것도 막 시작한 시점에서 그렇게 모였다는 것은 성공적인 역사로 보였다. 그러자 박목자님은 성탄예배 후 나에게 “마리아”처럼 믿음의 여인이 되라고 크리스찬 네임을 “마리아”로 붙여주셨다. 권마리아로 불리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로 개척역사가 쑥쑥 잘 일어나리라 기대에 부풀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성탄예배에 참석했던 그들은 슬슬 각기 제 길로 갔다.
79년이 되어 주말부부로 사시던 사모님이 교사의 삶을 정리하여 사표를 내고 전담 수원 목자 가정으로 섬기고자 합류하셨다. 남수동에 위치한 마루(거실)가 비교적 큰 집을 가정교회로 얻고 이사하여 그 곳에서 계속 역사를 이어나갔다. 사모님이 합류하자 주일예배 고정 참석자는 셋에서 넷으로 증원되었다. 목사님 부부야 전임사역자로 오셨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을 뿐 고정 멤버 4명만 드리는 예배는 분위기가 웬일인지 무겁고 답답했다. 주 1회 말씀공부를 위해서 해근 친구 집에서 자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모임이 점점 식상하게 느껴졌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자라갔다.
영적으로 꽉 막혀있으니 속박된 느낌이었고 답답했다. 비전이 보이지 않는 신앙생활이 싫었다. 전도를 위한 모든 활동도 나를 얽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계속 사는 것이 점점 따분하고 싫어져서 남들처럼 완전히 떠나려고 마음먹었다. 6월에 서울에서 세계선교보고대회가 있어 참석할 사람들을 초청하다가 안 되자 난 포기하고 그냥 혼자 용인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후 1주일 동안 모든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해근친구가 나에게 학교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사모님이 직장에까지 찾아오셨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굳어진 마음을 조금 녹여주었다. 나는 십자가를 계속 지고 싶지 않은데 얼마 후에 있을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였다. “이 수양회를 계기로 완전히 이 모임을 떠나야지”하는 속생각을 숨기려고 형식적으로 등록했다. ‘떠나면 자유롭게 살 것이니 이번 한번만 부담 없이 열심히 섬기고 떠나자’라고 결심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참석한 그 수양회에서 십자가 말씀을 듣는데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아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깨 보니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고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여기저기서 울고 있었다. 모두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여 감격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 때 갑자기 나만 홀로 시험에서 낙방한 것 같아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수양회에 그냥 참석하고 떠나려던 나는 무슨 비밀이 있었을까 갑자기 궁금했다. 은혜 받고 환하게 변화된 분들이 부러워 마음을 고쳐먹고 그 다음부터는 귀를 쫑긋 세우고 설교 듣기에 것에 집중했다.
누가복음 22:19, 20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의 피를 흘려주셔서 그 모진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을 바라보는 눈이 비로소 열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어둠과 운명, 패배와 절망, 정욕과 세상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함입니다.”라는 설교말씀이 내 가슴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 고백하고 회개하면 ‘그들은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나보다’라고만 생각했다. 성실하게 살았고 도덕적으로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죄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다만 일방적으로 타인에 의해 성추행을 당한 것 때문에 죄의식을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회에서 받은 말씀을 통해 나는 운명, 어두움, 방황, 사망권세, 정욕적인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지 않고 살았던 교만이 죄임을 깊이 인정했다. 그리고 내 모든 죄를 대신 감당키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심령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주여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그 은혜에 젖었을 때 내 영안이 열리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 날 이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그렇게 귀중하게 보이고 바람과 구름과 푸른 숲과 모든 자연 경관이 너무 경이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다. 예수님께 장래를 맡기며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결단하고 직장 가까운 용인에 있는 오빠 집에서 거하기로 하였다. 고향 집에서 다닐 때보다 주와 복음을 위해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내가 신앙생활에 올-인하자 아버지가 나로 인하여 슬피 울며 한탄하셨다고 했다. 진학하지 말라던 학교 들어간 딸을 그래도 열심히 뒷바라지 했기에 졸업하여 돈 벌게 되면 부모님을 잘 섬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시간과 물질을 온통 교회에만 투자하니 섭섭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핍박하되 때리거나 학대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본인이 자살하겠다며 하루 종일 안주도 없이 깡 소주를 드시며 자학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속상하여 이 사실을 알리려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까지 쫓아 오셨다. 곧바로 아버지께 가보니 성경 공부한 자료 바인더와 성경책은 차마 마당에 던지지는 않으시고 다락 깊은 곳에 감춰놓으셨다.
그 때 내 마음에는 육신의 내 아버지가 아무리 나에게 겁을 주시며 핍박을 하셔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 믿었다. 내 믿음대로 아버지는 자살하지 않으셨다. 나의 신앙생활을 아버지를 통해 꺾을 수 없자 이제는 엄마가 내 직장의 교장선생님을 통하여 또 나를 대학가기까지 도와주셨던 은사님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도록 회유하셨다. 그러실수록 나는 오히려 확고해졌다. 내가 믿는 주님은 내게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이 됨을 확신하게 했다. 가족의 오해와 핍박가운데서 담대할 수 있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빛을 열심히 전해야겠다는 의지로 더욱 강해졌다.
그 후 교회를 수원시 팔달로로 옮겼고 몇 명 안 되는 성도들이 빚을 내어 전세금을 헌금하는 헌신의 역사가 있었다. 그 해 가을 후에 많이 헌신하게 된 이**님이 우리 모임에 오자 주일 예배가 7~8명대에 이르렀다. 조금씩 성장하지만 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특히 학생역사가 부진하였다. 우린 학생회 역사를 섬기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될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저녁마다 아주대 캠퍼스를 방문하여 성경공부제자를 찾고 찾았다. 학생들이 와서 성경을 공부하고 은혜를 받고 좋아하기는 하는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시점이 되면 자신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81년 1월 히브리서 11장을 암송하며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을 배우게 되었다. 정말 믿음이 필요한 때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으로 붙들게 되는 적절한 기회였다. 믿음의 선진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이 계신 성을 바라고 사모하였을 때 현실적으로는 장막에 거하면서도 믿음으로 살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후손들이 생기고 믿음의 역사가 계승된 것을 보며 은혜를 받았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확실하게 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처럼 살고자 결단하였다. 그 때 나의 크리스찬 네임을 “사라”로 고쳐주셨다. 믿음의 여인 사라와 같이 살도록 생의 방향을 주신 것이다. 열심히 전도의 열매를 맺고자 동생, 직장동료, 대학생들을 초청하고 성경공부로 섬기며 아주대 앞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넘치도록 헌신하여 매탄동에 전세로 교회를 얻어서 이사 오게 되었다. 그러자 아주대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 수가 있었다. 교회 식구는 천천히 늘어가고 있었다.
84년이 되었다. 나와 해근친구는 차분히 일대일로 학생들을 말씀공부로 섬겼다. 해근친구는 김**, 성**형제님들을 나는 이**, 김**, 엄**, 남**형제님들을 말씀으로 섬겼다. 여름수양회에 모두 다 참석 하였다. 주제 강의와 아침 은혜의 시간, 저녁 환상의 밤 시간에 이르기까지 내가 돕던 형제들이 말씀역사를 잘 섬겼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역사가 일어나자 감격스러웠다. 중심을 지키며 꾸준히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축복하시는 분이구나 생각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하며 행복한 것인지를 발견하였다.
그 수양회에서 나는 연극대본을 썼고 각 분반별로 파트를 나누어서 연극을 했다. 사마리아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참석자들이 즉석에서 연기도 잘 하였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참으로 긴장하였고 책임감도 많았지만 섬기는 은혜가 있었다. 어느 수양회에 참석하든지 십자가 메시지는 마음을 울리고 새롭게 역사를 섬길 힘을 얻게 했다. 나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의미를 새롭게 새기며 눈물로 더욱 주님만 섬기고자 결단했다.
수양회의 마지막 설교를 섬겼던 최**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21장)을 섬기며 우리 모임의 한 자매에게 정욕을 품고 인간적으로 사랑했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만 사랑하겠다고 결단하였다. 30~40명 참석했던 수양회를 통해 외적으로 내적으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수양회가 끝난 후 예수님의 부르심을 영접한 분들이 영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몇 가지 말씀공부로 마음을 다짐하였다. 그 후 여름수양회에 초청했던 분들을 계속하여 말씀공부로 섬기느라 더욱 바빠졌다. 매일 매일 말씀의 은혜를 나누니 신이 나고 기쁨이 가득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새 힘을 주시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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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열정 대댄하십니다.
방학을 만끽하며 심취하여 보았습니다. 즐거웠는데 다음 월요일엔 개학합니다.
수원 개척역사가 그렇게 시작되어 오늘의 수원 선교교회가 되었군요.
그때는 제가 군대에 가있던 시절이네요. 정말 마리아로 귀하게 사용하셨네요.
그 때 군대에 계셨군요
제가 근무하던 용인에 심방오셨던 적이 있으셨지요?
뭘 몰랐던 시절이긴 했네요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