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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6편 8절-13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줄 아나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8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유리나 유랑이나 방황이나 유리방황이나 모두 비슷한 말이다. 사람이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을 유리한다고 한다.
사람이 유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거지들이 밥을 얻어먹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유리하는 게 있고,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 재산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유리방황하는 게 있고, ‘어디 살기 좋은 곳이 없나?’ 해서 외국으로 나가서 살 곳을 찾아 유리하는 게 있고, 악도들에게 돈도 재산도 다 빼앗겨서 허탈감에 빠져 날마다 세상을 원망하며 팔자타령만 하는 유리가 있고, 전쟁이 나서 부모형제도 집도 다 잃고 유리방황하는 게 있고,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유리방황하는 게 있고, 죄를 짓고 잡혀서 죽을까봐 도망을 다니느라고 유리하는 삶이 있고, 옳게 바르게 살아보려고 옳은 것을 찾느라고 유리하는 삶이 있고, 하나님의 옳은 의를 따라 살다보니 이 옳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유리하는 삶이 있다. 여기서 진리성도 다윗은 몇 번째에 해당되는 유리냐? 마지막 거다.
유리방황이라고 할 때 가치가 없는 유리방황이 있는가 하면 다윗처럼 가치가 있는 유리방황이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가치 있는 유리도 있고, 가치 있는 눈물도 있다. 진리성도 다윗은 돈 따라, 세상 따라 살기 위해 유리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신앙 믿음을 사수하면서 이리 저리 도망을 다니며 유리하는 거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가 하나님 앞에 다윗 자기를 죽이는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유리하며 도망을 다닐 때 안타까움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느냐? 주님의 심정이 아니면 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거다. 아무나 따라올 수 없는 이 심정 참으로 고상하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책에 기록이 됐다는 것은 기억이 되어있다는 뜻이고, 또 기억을 하기 위해 기록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지키느라고 유리하는 다윗을 알아주신다는 거고, 다윗의 옳은 증거를 기억하신다는 거다. 다윗이 유리하며 흘린 눈물은 개인적인 팔자타령이거나,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눈물이거나, 원수를 갚지 못해서 한을 품은 눈물이 아니다. 다윗이 유리하며 흘린 눈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눈물이니, 이 눈물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눈물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눈물을 흘려봤느냐? 눈물을 흘릴 때는 가치 있는 눈물을 흘려야지 가치 없는 눈물을 흘리면 눈만 아프다. 진리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눈물은 가치가 있다. 좁은 길 생명 길을 가기 위한 눈물, 신앙절개를 지키기 위한 눈물, 죄를 이긴 눈물, 세상을 이긴 눈물, 이런 눈물들은 성령의 감화로 되는 눈물이다.
죄악의 도성에서 왕 노릇하며 죄를 짓는 자들의 삶보다 진리의 길을 걷다보니 박해를 받아서 유리되는 삶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기억이 되는 삶이다. 삶을 살아도 이런 삶을 살아야지 자기 생계유지 대책부터 먼저 세우는 이건 벌써 틀렸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 마음이 회개되지 않는다면 자기의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워지면 그 삶이 어떻게 되어나갈까? 진리기준, 주님기준으로 나올까, 아니면 자기 세상살이부터 장만해 놓고 예수를 믿을까?
9절: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이 기도에서 다윗이 하나님과의 친근감이 느껴진다. 다윗이 평소에 하나님과 인격적 밀착감 친근감이 없이 교만성으로 살았다면 하나님께 아뢴다고 해서 들어주시겠느냐? 그리고 원수들을 물러가게 해 주시겠느냐? 만일 이런다면 원수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할 것이고, 다윗을 더 박해하게 될 거다.
하나님을 누가 나타내야 하는 거냐? 본문을 통해 보면 다윗은 누구로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바라는 거냐? 다윗 자기로 통해서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는 누구로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면 하느냐? 그리고 또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당신이 나타나기를 원하고 계실까? 나다. 그러려면 나는 평소에 하나님과 친근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통해 당신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거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처럼 높여주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네가 진리대로만 살아봐라.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의사성, 자기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맡겨놓고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봐라. 그러면 하나님께 너의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길을 열어주신다. 이게 하나님의 인도고 진리의 인도다. 이런 사람을 박해하거나 헐뜯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눈에 보이도록 역사를 해 주신다.
진리성도 다윗의 원수가 누굴까? 첫째는 보이는 원수가 있는데, 다윗을 핍박하는 이방인들과 다윗의 동족들이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원수가 있는데, 성도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비진리적인 주장들이다. 그리고 다윗 속에 들어있을 수 있는 옛사람이 다윗의 원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눈에 보이는 원수가 있을 때 다윗으로서는 이스라엘은 살리고 이방인은 죽여야 할 텐데, 이들이 같이 붙어있으니 이방인만을 죽이기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방사상을 찾아 죽이는 게 참으로 힘든 거다. 기독자 속에 이방사상이 주격이 되어있을 때는 누굴 죽여야 하겠느냐? 참으로 어렵다. 기독자는 자기 속의 지식분별, 사상분별, 영분별을 바로 해서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려야 하기 때문에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이방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큰 문제인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악한 자들이 양의 가죽을 둘러쓰고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는 거다. 이게 더 심각하다. 성도가 영의 눈이 어두우면 이런 자들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정복을 당하고 만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질적인 면에서 영과 육에 속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일이 있을 때, 즉 선택을 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자타의 이룰구원에 손해를 보게 하는 것은 자기의 원수다. 자기의 이 원수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속에서 먼저 발견하는 게 급선무다. 그런 다음에 타의 속에 이룰구원에 대한 원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지식분별, 영분별, 사상 정신분별을 아주 세밀히 해야 한다.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우리는 원수관을 바로 가져야 할 것이고, 원수를 알았으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원수관을 바로 가지지 못한 채 기도를 한다면 어떤 기도가 나오겠느냐? 내용 면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기도를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영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올 수 없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 블레셋의 사상은 정 반대다. 이스라엘의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는 사상이고, 블레셋의 사상은 선악과를 먹은 사상이다. 그래서 성도가 육을 위해 기도를 한다면 이건 선악과 먹은 사상이기 때문에 원수를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불러들이고 자기가 원수와 합세하여 주님과 대적하는 일을 하게 된다. 성도가 비진리적 사상에 빠지지 않고 이룰구원을 잘 이뤄간다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인 줄 알아야 한다.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갇혀있을 때 보디발의 아내의 꾀에 붙잡히려는 순간에 요셉이 무엇이라고 기도를 했을까? 아무 기도도 안 했을까? 성도가 마음의 소원성을 품는 것, 그리고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소원성, 또는 안 하고자 하는 소원성 등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자 자기 마음에서 부르짖는 게 다 기도다.
다니엘이 사자 굴로 떨어지는 순간에 기도를 안 했을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무엇이라고 기도를 했을까?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에게 잡혔을 때 무엇이라고 기도를 했을까? 육신의 자연목숨을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기도를 했을까? 그들이 거짓된 사상으로 다윗을 심문할 때 자신이 그들의 유도작전으로 인해 신앙생명이 죽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안 했을까?
예수 믿는 자기가 다윗처럼 블레셋에게 붙들린다면 어떻게 할까? ‘육신의 목숨을 살려만 주신다면 내가 회개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겠습니다’ 이게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게 하나 있을 수 있다.
만일 가룟유다가 다윗처럼 블레셋에게 붙들린다면 돈을 버리고 회개를 할까, 아니면 ‘날 살려만 주면 스파이 노릇을 잘 하겠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나에게 돈을 많이 줘라. 돈을 많이 안 주면 나는 자살을 하련다’ 라고 할까? 어느 거겠느냐?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은 자기들의 원수의 자연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그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실컷 이용해 먹다가 결국은 죽여 버린다. 이방 불신세상은 돈이면 다 된다. 내가 돈이 있을 때는 상대가 내 편이 된 것 같으나 결국에 내 돈을 다 빼앗아 갈 자가 누구냐? 나에게 잘 해 주는 자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세상욕심을 위해 육신의 생각과 소원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면 결국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 같으냐? 차버린다. 생각을 해 봐라.
하나님 앞에 회개는 세상물질을 많이 가졌을 때 한다? 아니면 없을 때 한다? 아니면 항상 한다? 어느 거냐? 항상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을 목적으로 하고 사는 자가 물질을 많이 가졌을 때 회개를 한다면 왜 회개를 하는 거냐? 안 뺏기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모르시겠느냐?
10절-11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다윗이 이 말을 하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원수들이 물러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믿는 것만 아니라 그 분의 인격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말이다. 이런 신앙사상을 가지면 원수들을 정복하여 이기게도 하시고 원수들을 물러가게도 하신다. 이 사실을 무엇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내 속에서 옛사람이 원수처럼 올라올 때 내가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생각과 마음이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들어가면 어느 새 옛사람이 멀리 도망을 가는 것을 종종 체험을 한다. 이 싸움은 모든 영적 싸움을 이기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방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동원시켜서 이스라엘을 정복하도록 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움을 구하니 원수들이 물러가기도 하고 원수들을 정복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돕는다는 것은 무조건 물러가게 해 주고, 이기게 해 주고, 도와주고 하는 게 아니라 성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다. 이걸 교훈적으로 말하면 진리이치로 무장을 시킨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의 증인이 자기 집에 왔을 때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질까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물러가게 하는 거냐? 이렇게 되면 자기가 그들을 이긴 거냐?
아닌 말로 그 사람들이 열심히 말을 할 때 자기는 한 마디도 못하고 있다가 마음 속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기도를 했더니 그 사람들이 물러갔다고 하면 자기가 이긴 거냐? 이건 저질적인 믿음이다. 물론 끽 소리도 못한 채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는 것보다 조금 낫겠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이기는 것은 평소에 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말씀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가 그런 자들이 왔을 때 진리이치를 펼쳐서 그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게 이긴 거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말씀을 의지하는 걸 말한다. 말씀의지를 떠나서는 하나님 의지가 안 되는 거다.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창조의 주시요, 영원 자존자시요, 만능의 능력자시요, 창조물을 보존자시요, 역사의 섭리자시요, 신령계와 물질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인간은 다 이 분의 피조물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감찰의 대상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는 분이시다.
반면에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은 완전자가 아니요, 불완전자요, 스스로 불완전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자기가 자기의 마음도 못 다스리고, 미혹받기 쉽고, 유혹받기 쉽고, 병들어 죽기 쉽다. 사람은 아무 힘이 없다. 따라서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부모도 믿을 것이 못 되고, 자식도 믿을 게 못 된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처럼 믿게 되면 이 사람은 고통과 슬픔이 더 커진다.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섬길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앙 면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우러러보고 겁을 내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징계가 임하게 된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서운 게 아무 것도 없었느냐?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덤빌 테면 덤벼라’ 이 말이다 이런 사도바울이 누구를 더 무서워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이다. 누구를 더 사랑했겠느냐? 주님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주님이 어떻게 버리시겠느냐?
12절-13절;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다윗이 하나님께 뭘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느냐? 감사제를 드리겠다. 감사는 왜 하느냐?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주께서 다윗의 생명을 어디에서 건지셨다는 거냐? 사망에서 건지셨다. 이것은 성화구원에 대한 감사인데,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첫째는 기본구원에 대한 감사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에 대한 감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으로 된 역사요 은혜다. 이 기본구원에 대한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성화구원에 대한 감사다. 하나님 앞에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키 않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다.
우리는 조만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인 영원한 신령세계에 들어갈 존재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가 신적 지혜지식성에서, 신적 도덕성에서, 신적 능력성에서, 영모의 미모성에서 우리의 잘못과 실수로 인해 흠과 티가 없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 우리가 원수의 손에 포로로 붙들렸다거나, 사고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성령의 감화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나게 하시고, 비진리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진리의 생명 길 좁은 길로만 가게 하시고, 더 큰 잘못으로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편으로 견제를 하신다. 이것을 아는 자는 감사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성도가 이런 신앙의 삶의 산다면 이 사람의 삶 자체가 감사제의 생활이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감사제를 자꾸 물질위주 물질목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무슨 장사가 잘 됐다거나 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지’ 라고 하며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게 아니다. 이건 한쪽으로만 치우친 거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생활을 물질로 따지는 거냐? 한쪽으로 좁게만 생각하지 말아라. 기본구원이나 성화구원의 감사는 자기 삶 전체로 드리는 거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것을 생각해 봐라. 감사하지 않을 게 어디 있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