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제피로스' 무선 선풍기와 꽃집
제피로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와 저녁노을의 신 아스트 라이오스와의 사이에서 에우로스, 노토스, 보레아스 등과 함께 태어났다. 제피로스 4형제는 모두 바람의 신으로 어깻죽지에 날개가 달려 있고, 그들처럼 바람의 신이지만 지위가 높았던 아이올로스의 지배를 받았다. 제피로스 4형제를 총칭하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바람'이라는 뜻의 '아네모이"였다. 아네모이는 로마 신화에서는 벤티로 불렸다.
아네모이 중 에우로스는 동풍, 제피로스는 서풍, 노토스는 남풍, 보레아스는 북풍을 말았다. 에우로스는 겨울에 남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제피로스는 가장 온화하고 부드러운 초봄과 초여름의 미풍을, 노 토스는 늦은 여름과 가을의 폭풍우를, 보레아스는 가장 차가운 겨울바람을 관장했다. 로마 신화에서 에우로스는 불투르누스, 제피로스는 파보니우스, 노토스는 아우스테르, 보레아스는 아퀼로로 불렸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에게는 총 3명의 연인이 있었다. 그중 포르다게와의 사이에서는 나중에 아킬레우스의 마차를 끄는 명마로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었던 크산토스와 발리오스가 태어났다. 포르다게는 세이렌처럼 몸통은 새이고 머리는 여자인 괴조 하르피이아이 중 하나다. 제피로스는 또한 요정 클로리스를 놓고 형제 보레아스와 경쟁을 벌이다 결국 그녀를 납치하여 결혼한 뒤 꽃의 신 플로라로 변신시켜 주었다.
제피로스는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아미클라스의 아들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히아킨토스를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제피로스에게는 쟁쟁한 연적이 3명이나 있었으니, 태양의 신 아폴론, 형제인 북풍의 신 보레아스, 트 라케의 뛰어난 가수 타미리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결국 히아킨토스가 4명의 구애자를 놓고 심사숙고 끝에 아풀론을 선택하자 제피로스는 깊은 원한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피로스는 아폴론이 히아킨토스와 심심풀이로 원반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원한을 갚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적당하게 떨어진 채 서로를 향해 원반을 던지며 놀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다가 적당한 때를 골라 아폴론이 원반을 던지는 순간 곧바로 강한 맞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원반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거꾸로 날아가더니 히아킨토스의 정수리를 가격하여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사색이 된 아폴론은 의식을 잃은 히아킨토스를 팔에 안은 채 의술의 신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했다. 하지만 그래도 히아킨토스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아폴론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의 상처에 인간들의 상처에는 특효약인 신들의 음식 암브로시아를 발랐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의술의 신 아폴론도 운명의 여신들이 정한 히아킨토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히아킨토스가 숨을 멎자 아폴론은 자책하며 절규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도 인간이 되어 히아킨토스를 따라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 아폴론은 오열하며 히아킨토스의 시신을 안고 절대로 그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그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히아신스'라는 꽃을 만들어 냈다. 또한 그 꽃잎에 '아이, 아이'라는 그를 애도하는 통곡 소리를 새겨 넣었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등 유명한 화가들이 '제피로스와 플로라'를 주제로 즐겨 그림을 그렸다. 특히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에서 플로라는 아직 변신하기 이전의 요정 클로리스다. 그녀는 청색 피부에 청색 천을 두른 어떤 남자의 포옹을 피해 아프로디테에게 달려간다. 그녀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입속에서는 계속해서 장미꽃 송이를 뿜어내고 있다. 아마 그녀가 조만간 꽃의 여신이 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 청색 남자는 바로 바람을 일으키는 부풀린 볼로 보아 클로리스를 납치하려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다.
네이밍계에서는 바람의 신 아네모이 4형제 중 단연 제피로스를 선호한다. 우선 '제피로스플라워'와 '제피로스' 무선 선풍기가 있다. 제피로스가 바람의 신이고 그의 아내가 꽃의 여신 플로라이니 정말 잘 어울리는 네이밍이다. '제피로스'시계전문점도 있으며 주택 이름에도 '제피로스'가 붙어 있다. 또한 제주의 골프장 '제피로스 CC'는 정작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오픈 예정인 충주의 골프장 이름이 '제피로스'다. 제피로스는 가장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풍을 관장했으니 아마 그 골프장은 장차 그 덕을 톡톡히 보게 되리라. 서울 강남에는 골프장 회원권 거래소인 '제피로스'가 있다.
'플로라'는 꽃집 이외에도 카페, 노래방, 두피관리소, 피부관리소, 주택 이름 등으로도 쓰인다. 이불 커버와 침대 패드 전문업체 중에도 '플로라'가 있다. 총 23화로 이루어진 웹소설 제목도 '플로라'다. '플로라' 식물 전용 패드도 있다. '플로라'가 꽃의 여신으로 변하기 전의 이름 '클로리스'도 주로 꽃집이나 화훼농원 이름으로 쓰인다. '클로리스플 라워'나 '슈가클로리스'처럼 클로리스 앞과 뒤에 다른 말을 붙여 쓰기도 한다. '클로리스' 홍차 전문점, 화실, 카페, 주얼리 숍, 공방 등도 있다. 제피란테스라는 수선화과에 속하는 관상용 꽃 이름은 '제피로스'와 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안토스'가 합쳐진 것이다.
동서남북 바람의 신 4남매를 총칭하는 '아네모이'의 로마식 이름인 '벤티'는 라틴어인데, 이탈리아어로는 숫자 20이라는 뜻이기도하다. 그래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에서는 20온스, 약 591ml의 커피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쓰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커피 용량 '벤티'의 이름을 딴 '더벤티'라는 커피 전문점이 있다.
브랜드로 읽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
김원익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