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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유족회조직배경 (제3편)▶
1. 한국전쟁과 휴전회담
1950년6월25일에 발발한 전쟁이다.유엔군(한국)과 조선인민공화국(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으며 제2차세계대전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대한민국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또는 조선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조속히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철저한반공주의를 지향하였던 이승만은 북진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지만 1953년 3월 5일스탈린의 죽음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소련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한미방위조약을 요구하였으며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중이었던 반공포를 석방했다. (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제거계획까지 수립하기도 하였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소련 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한다. 한국전쟁은 그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 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특히 이승만정권에의해서 남한에서 약130만명이상의 비무장 민간인이 집단학살된 사례는 세계전쟁역사상 유레를 찾아볼수없도록 참혹하였다.전후에 제기된민간인 학살문제는 한강 인도교 폭파,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보도연맹 학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등 ,부역혐의사건과 .민간인 학살사건과미군폭격으로 희생된사건등이 아직까지도 진실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유족들은 대한민국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속하고있다.
한국 전쟁은 미국과중국을 비롯해UN군이 참전하면서 제3차세계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북한은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인하여 민간인 약36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고있다.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전쟁 중 미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핌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한반도 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북간의 감정의 골은 깊이 자리매김되어 지금까지 적대관계를 이어가고있다.
6.25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체결 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고, 7월 26일 정전 협상의 대상과 의제에 대해 양측이 합의하였다. 휴전 회담은 총 575회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무리 되었다.
휴전 회담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군사분계선 확정 문제로 북한과 중국군은 38도선의 원상 회복을 주장하고 연합군은 현재의 군사 대치선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연합군 안으로 타결되었다.
둘째는 휴전 감시기구 설치 문제였다. 중립국 4개국으로 감시 위원단을 설치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연합군 측에서는 스웨덴과 스위스, 북한과 중국 측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추천하였다.
셋째는 포로 교환 문제로 이 문제는 18개월 동안 논란이 되었다. 연합군 측은 자유 송환을 북한과 중국 측은 강제 송환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자유 송환으로 결정되었다.
1953년 4월, 6개월 동안 휴회 상태에 있던 휴전 회담이 재개되었고, 6월에는 휴전 회담 최대의 난제였던 포로 교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1953년 7월 22일 군사 분계선이 확정되었고, 7월 23일 송환 포로 인계가 이루어다. 그리고 7월 27일 제159차 본회의에서 한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정전 협정 문서에 인민군 측 대표 남일 대장과 연합군 측 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이 서명하였으며 그리고 클라크(Mark. W. Clark) 연합군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각각 정전 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왔다. 수많은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고아, 남편 잃은 여인, 파괴된 고향산천, 그리고 고향을 떠난 온 실향민들, 이 많은 민족적 고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때 우리 민족의 아픔은 점차 희석되고 또 망각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세기란 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세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이자 중무장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분쟁의 위험이 가장 큰 지역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2. 이승만정권
대한민국 제1공화국(第一共和國)이승만정권은 1948년8월15일에 수립되어1960년 4.19민주혁명 붕괴되어 대한민국제2공화국이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된 첫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집권 여당은 자유당이었으며 이승만의 폭압정치가 12년간 계속되어 독재권력을 유지하기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국민을 탄압하고 억누르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던 암흑시대였다.
초기에는 국내 질서 확립과 일제강점기잔재의 청산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 이유로 1948년 9월에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가 만들어졌으나 이승만의 비호아래 친일 반민족적 경찰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강제해산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실패하였으며 광복과 동시에 들어선 미 군정은 효율적인 행정 처리를 위해 친일 반민족적인 인사들을 관료와 경찰에 대거 기용했고 이는 친일 반민족 전적의 인물들을 단죄하는 일에 있어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역할을 했으며 역사의과제로 남아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 시기에 좌,우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1948년에는 제주4.3항쟁 과 여수순천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는 미명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으며 자기를 반대하는 애국적인사들과 민중들을 반공의 덫을 씨워 압살하였다.정책의부재와 국정을 농단하는 모리배들과 유유자적하는 이승만에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고 지지기반이 취약하여 정권유자에 한계점에 도달하였으나 마침 그위기를 극복해준 면죄부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反共은 이승만장권의 전리품이었다.정부기관이니 관공서 학교.사회단체는 모두 반공이라는 구호로 채색되었고 포장되어 국민들은 제대로 숨도쉴틈도없이 반공전선으로 내몰았다. 반공포스터와 반공표어에 반공웅변대회에 반공국민총궐기대회에 동원되었고 반공혈서가 유행되었고 반공은 이승만정권하에서는 국민훈장과같은 역활을 하였다.
1950년5.30일국회의원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1951년11월30일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관제민의(官製民意)'를 동원하여 국회 의원을 위협하는 한편,5월25일에 국회 해산을 강행하기 위하여 부산과 경남.전남, 전북 등의 23개 시·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5월26일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는 한편,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 정헌주(鄭憲柱), 이석기 .서범석 , 임흥순 .곽상훈.권중돈 등 12명은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켰다.
반공을 앞세우고 빨갱이로 옷을 입혀버리면 국회의원도 법관도 아무런 저항을 할수없는 무단 공포정치가 이승만의 전매특허이었으며 이승만이 입버릇처럼 떠들어 대던 의회민주주의였다.
헌법도 이승만은 마음대로뜯어고쳤다. 부산 정치 파동(釜山政治波動은 1952년5월26일)은 이승만이 자신의 재선을 확실히 하고, 독재정권 기반을 굳히기 위해 한국전쟁중에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일련의 정치적 파행도 서슴치 않았다.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국회 의원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 (新羅會)가 주축이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발췌하고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마련했다. 7월4일 군경(軍警)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 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의 기반이 굳어졌다.
이 당시 헌병대가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끌고 사라지는 모습은 이 사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개헌안이1952년7월4일 국회에서 통과되고 7월7일 공포되도록 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대통령 선거 방법을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2년 8월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후보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장기독재철권정치의 서막이 열렸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1953년 에는 서울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954년5월2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다수를 차지한 자유당은이승만 의 영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을 일으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로 헌법개정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면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획책하였다. 이에 따라 독재 정치가 강화되고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1953년에는 서울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954년5월31일자유당이 장악한 3대국회가 개원하였고 11월27일, 사사오입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다.이떄 국무총리제도가 폐지되었다.
1952년 이승만이 제출한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가 부결하고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민중자결단, 백골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나타나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
반공전선의 일선에서 좌익세력의 색출에 혈안이 되있던 일본군 헌병오장출신 김창룡이 군부내 세력간의 갈등으로1956년 1월30일 암살되었다.이승만은 암살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을 직접찾아가 유해를 살펴본뒤담화를 발표 애도의 뜻을 표한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김창룡은 북한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한후 이승만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아 고속승진하여 육군특무부대지휘관(CIC)을 지내며 이승만의 수족노릇을 하였던 악명 높은 정보공작 전문가였으며 여순사건사건과 민간인학살에도 깊은 관여를 하였던 시대의 악질이었다.
심지어 그당시 반공검사로 자타가 공인하던 오제도(吳制道)검사까지 용공(容共)으로 몰아 제거할 것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시절의 군과 경찰출신들을 심복(心腹)으로 고용하여 자기의 정적들인 여운형,김구.조봉암선생을비롯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을 가차없이 암살하여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후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3대대통령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여당인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 은 서로 유세를 하는 도중에 민주당 초대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병사했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 후보를 마음대로 못바꿨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인 장면만 내세웠다.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에는 야당 후보인 장면이 선출되었다.
조봉암(曺奉岩)
그러나 자유당은 더 큰 권력을 원했고, 이기붕 역시 그러했다. 또한,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놀란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이로써 항일독립운동가인 초대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다.
3. 이승만정부시절의 사회상
아무리 건국초기라하지만 무질서와 혼란의 극치였다.해방공간에서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영구보존하기위하여 청산의 대상이었던 친일의 잔재를 쓸어내지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국가에 충성할수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서 장기독재정권의발판을 만들었으나 이승만 자신은 그 폐해가 자신에게 돌아올줄은 미쳐몰랐을것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제도나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의의 유물들이었고 청산하지못한채 왜색문화가 사회전체를 지배하여 누적되어있었고 미군정이 이땅에 뿌리를 내려 퇴폐향락문화가 미군을 통하여 상륙하여 혼란과무질서로인한 민족의정체성이 통째로 흔들거리고있었다.
무상경제원조를 받아 대미경제의존도가 심화되었고 외교또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자유국가 일변도에서 탈피하지 못한채 국민의 생활은 도탄에빠져 빈익빈 부익부 [貧益貧富益富]의현상은 극에 도달하였다.
언론탄압도 예외는 아니었다.
1959년2월4일자 경향신문 조간에는 무기명 칼럼 여적(餘滴)을 통해 다수결의 원칙과 공명 선거에 대한 단평이 게재되었다. 다수결의 원칙을 논하기 앞서 한국적 현실에서는 선거가 다수의 의사를 공정히 반영할 수 있느냐가 먼저 문제가 된다며, 선거가 이런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진정한 다수의 의사를 강제로 전달하는 폭력 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원론적이지만 뼈가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1인 장기집권 체제를 추구하던 이승만정부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정적인 장면의 민주당 신파 계열과 가까운 사이로 여겨져 자유당 정부의 눈총을 받고 있었는데, 이 컬럼으로 인해 편집국장 강영수 가 당일 연행되었다. 문제의 컬럼을 쓴 필자는 민주당 신파 소속 국회의원 으로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맡고 있던 주요한(朱曜翰)인 것으로 밝혀졌고, 결국 주요한과 이 신문사 사장 한창우가 기소되었다.
여적 칼럼이 도화선이 되어 경향신문은 다른 기사에서의 허위 사실 보도와 여적을 통한 폭력 선동 등을 이유로 묶어 그해 4월 폐간 명령에 이어 무기발행정지의 행정 처분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 탄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이승만은 자기가 씨워놓은 올가미에 자신이 그 덫에 걸려든 형상이되고말았다. 자신은 항일 애국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주위에는 친미(親美)와 반공으로 재무장한 친일 매국노무리들에게 포위되어 꼼짝 달싹할수없는 신세가 되었다.
귀가있어도 들을수 없었고 눈이 있어도 볼수없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할수없는 聾啞신세가 되고말았다.
독선과 아집으로 국정을 보살필수없는 늙은이가 살괭이와 같은 야수들의무리속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는 그들이 이중삼중으로 쳐놓은 영구(永久) 국부추대계획에 따라 움직일수밖에 없었다.그것이 바로 3.15부정선거였다.
3·15 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1960년 3월15일 국민들의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후보가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이기붕(李起鵬)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 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반공단체및 자유당소속 소속 정치 폭력배이정재.임화수등을 총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이승만)가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이기붕)가 아닌 민주당 후보 장면(張勉)가 당선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자유당 입장에서는 좋을 리 없었다. 한편으로 얼마 뒤 이승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법살(法殺)하였다.
張勉
물론 자유당의 위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기 시작하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서민들의 삶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승만 자신이 장기 집권을 위해 했던 무리한 개헌들은 결국 정치적인 부패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자유당에는 불리한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의 4선은 실패가 유력시되었고 급기야 1958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의석수가 불어나자 자유당은 한 층 더 불리하여졌다.
이런 식으로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자유당이 택할 수 있는 것(이승만의 4선을 위해)이라곤 오로지 부정 선거일 뿐이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이승만의 4선을 위해 계획을 짜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선거일을 바꾸는 것이었다.
원래 대통령 선거일은 1956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5월에 치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법으로 규정된 날보다 2달을 앞당겨 치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한다. 이것이 발단이었다.
두 정당(자유당,민주당)은 어떻게든 서로 이기고자 선거 운동에 몰두하였는데 상황이 1956년상황과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2월25일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물론 지난 대선 때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다).
그동안 자유당은 민주당과 대결해야만 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자유당은 이 틈을 노리게 된다.
이 틈을 노리게 된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3월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 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3.15 부정선거 증거물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 날인 1960년3월16일마산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3.15마산시위 )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되도 않는 말까지 꺼내며 폭력적인 진압을 강행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편 학생들까지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도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김주열(金朱烈)군
순식간에 이승만은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 치는 등 그야말로 몰락했다.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金朱烈(남원출신) 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자 시위는 격화되었으며, 이는 4.19민주혁명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4. 이승만정권과 피학살유족들의 삶
1945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전후를 해방공간이라 말하고있다. 이공간에서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무수한 양민을 학살하였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피해숫자나 공식적인학살원인을 정부차원에서 발표하지 않고있다.
다만 죽은자는 있고 죽인자는 없다. 아이러니한 한국의 한단면이다.오로지 죽은자들은 국기를 문란하게하고 사상적으로 좌익성향에 가깝다는 표면적인 이유가 죽음의 대상일수밖에 없었다고 일반적으로 단정해버린다.
지식인들과 양심적인 인사들마져 민간인 학살문제에 관하여 왈가왈부하는것조차도 자신의 사상에 용공인사로 낙인찍히고 분류될까보아 침묵의미덕속에서 헤어나지못하고있다.
오히려 살기위해서 양심을 속이고 반공인사로 둔갑하여 사회성공의 지름길로 활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이런 사회적환경에서 반공으로 치장(治粧)된 이승만정권하에서 졸지에 부모형제 어머니를 잃어야만했던 유족들의 삶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한마디로 동물이하의 삶이었다.살기위해서 아니 살아남기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아무것도 할수없었다. 국가와 사회가 유족들을 그대로 놓아주지를 않았다.
가옥과 재산은 주위나 친인척들에게 강탈당하기 일쑤였고 남편잃은 아녀자는 살기위해 남의後娶로 자청하였고 자식들은 친척집이나 지인들에게 맏겨져 천덕꾸러기와같은 냉대속에서 허허벌판에서 내동댕이쳐졌다. 거지처럼 구걸하였으며 머슴살이에 날품팔이와 구두닦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아원이나 식모살이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의무교육이었던 초등학교 입학의 수혜는 유족들에게는 달콤한 꿈에 불과하였다.
눈물마져 죄가되었던 암흑과 공포의시절에 펑펑 눈물한번 흘리지도 못하고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속에서 살이남기위해서 유족들의 삶은 한마디로 처참한 몸부림이었다.
더욱 유족들을 괴롭힌것은 정보기관과 일선경찰서가 유족들의一擧手一投足(일거수 일투족)을 감시관찰하여 유족들의 일상적인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공포감을 조성하여 각종시국사건에 연루시켜 희생양을 만들어도 저항할수있는 아무런 힘도없는 제3지대의 이방인 취급을 받는 희밍이 없는 미래가 유족들을 절망의 나락속에 빠트린 삶의 연속이었다.이들에게 무슨죄가 있단말인가.죄가있다면 이땅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을것이다.
權不十年花無十日紅이라 하였던가.
왕정시대의 국왕보다도 더 독재철권정치를 계속하여 國父로 행세하며 불로장생하는 그릇된 망령에 사로잡혀 노욕을 이기지못하고 백성들을 괴롭힌희대 (稀代)의 독재자 이승만정권도 서서히 기울어져감으로 숨마져 제대로 쉬지못하였던 백만피학살자 유족들에게도 한줄기 희망의 샘이 솟아오르고있었다.
(4편에 계속됩니다.)
첫댓글 <6.25 한국전쟁, 휴전 협정을 체결 하다>의 밑에
사진이 안 보이니, 볼 수 있게 좀 해주세요,,,
숨막히게 처절한 삶이 해방 공간에서 서광이 우리 민족에게도 빛이 되었으나
서광의 빛은 너무나 미약해 강자들의 손에 놀아 났다
굴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 독재자들 손에 오직 권력만이 있었기에 민초들은 눈물만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사의 한단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네요.필자님의 정성으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대국과 지도자의무능과 부패가 민중들에게미친 패악이 얼마나 무섭다는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필자님의 수준높은 식견과 글에 감사들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그리고 고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