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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1919년 3.1운동을 통해 우리민족은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렸습니다. 이 무렵,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무장 독립운동 세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국내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으로 이주해 그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대 서간도 삼원보 지역에 신흥무관학교, 북간도 지역의 서전서숙, 명동학교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기지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통해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독립군의 빛나는 승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3.1운동 이후 우리 독립군 부대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해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하는 무장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대한독립군은 혜산진과 강계, 만포진을 점령하고,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은 국내로 진격해 회령을 점령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에 일제는 만주의 독립군을 제거하고자 1920년 10월 '간도출병'을 단행합니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여단 규모의 군대와 시베리아, 북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까지 동원한 대규모 출병이었습니다.이 과정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한 두차례의 빛나는 승리가 바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입니다. 봉오동전투를 벌인 부대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군, 그리고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들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대파한 독립군 최대의 승리가 바로 청산리 대첩입니다.
1920년대 항일독립전쟁의 영웅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군,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등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승리 이후 만주의 독립군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독립군 연합부대를 구성했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독립군을 재정비하여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합니다.이전투의 총사령관은 서일총재 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장군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1881~1921)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군 출생이십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고,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을 조직해 단장에 취임합니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광단이 대한정의단으로 개편되고,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해 무장 항쟁을 기도합니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서로 통합되었는데 이 단체가 바로 김좌진 장군이 이끄신 북로군정서입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는데, 이때 서일 장군이 총재를 맡으셨습니다. 자유시 참변으로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된 후, 서일 장군은 이에 대해 책임을 느껴 두달 뒤 자결합니다. 독립기념관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리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적힌 서일 장군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대한독립군을 이끄신 홍범도(1868~1943) 장군은 평안북도 자성군 출생으로, 1895년 을미의병 때 강원도 철령에서 봉기해 의병 운동을 하십니다. 1907년 국내에서의 무력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로 건너간 홍범도 장군은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합니다. 그리고 1920년 최진동 장군, 안무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대첩에서도 일제를 맞아 승리합니다.이후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연합부대와 함께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합니다. 이 곳에서 독립군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 참변을 겪은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후 1930년대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시면서 자신의 일생을 그린 연극 '홍범도'를 관람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그곳에서 1943년 76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치십니다. 1962년 홍범도 장군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여생을 마치신 중앙아시아에는 지금도 우리 고려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소련 해체 이후 삶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우리 고려인 동포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
국민회군 사령관 안무(1883~1924) 장군은 본명이 안병호로,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안무 장군은 1900년에 대한제국군 진위대에 들어가 1907년 군대 해산때까지 교련관으로 근무하셨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안무 장군은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망명합니다. 안 장군이 독립군 부대에 투신하게 된 건 대한국민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입니다. 3.1운동 직후 간도에서는 종래에 결성됐던 간민회를 기초로 대한국민회가 조직됩니다. 방대한 조직을 거느렸던 대한국민회는 직할로 '국민회군'을 창설하는데, 안무 장군이 바로 국민회군의 사령관을 맡게 됩니다.청산리대첩 이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소련령으로 건너간 안무 장군은 독립군 재건을 위해 1924년 다시 간도 지역으로 잠입합니다. 그러나 용정시 모아산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된 안무 장군은 일본군의 기습 총격을 받습니다. 용정자혜병원에 입원한 안 장군은 치료를 거부하시면서 숨을 거두십니다.대하소설 '두만강'에서 안무 장군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한 작가 이기영은 '하늘에 사무친 유한은 구름 빛을 시꺼멓게 물들이고 땅 위에 거꾸러진 충혼은 피꽃이 붉게 피었더라'면서 조시(弔詩)를 남겼습니다. 고구려연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그는 20년대 간도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립군을 이끌고 일관성 있게 무장투쟁을 벌인 항일운동가"라고 평가했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진동 장군
최진동(1887~1941) 장군은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일찍이 만주로 망명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해 군무도독부를 설치합니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했는데, 이때 봉오동에 많은 토지와 재산을 갖고 있던 최진동 장군 3형제가 재산 헌납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최진동 장군이 총책임자인 부장, 안무 장군이 부관, 홍범도장군이 북로제일군사령부장이 되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십니다.자유시 참변이후 1923년 김규식 선생님 등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북간도 지방으로 돌아와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이후 최진동 장군의 삶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진동 장군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최진동 장군의 유해는 부인 최순희 씨의 유해와 함께 지난 2005년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 국립현충원에 봉안됐습니다. 당시 유해를 봉안해온 최진도 장군의 증손자 최학철씨는 "늦게나마 증조부님을 고국에 모시게 돼 기쁘다"며 "5살 난 아들이 크면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라고 얘기해주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
북로군정서군을 이끄신 김좌진(1889~1930) 장군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독립운동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 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왠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 김좌진 장군이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남긴 시입니다.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일본군을 대파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이후 다른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소련령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은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고 만주 밀산으로 돌아오십니다. 자유시 참변이후 만주 독립군이 3부로 재편되자 김좌진 장군은 신민부의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합니다. 일제가 미쓰야협정을 통해 만주 독립군 토벌에 나서자 김 장군은 3부 통합 운동을 통해 김동삼, 김승학 등과 함께 혁신의회를 결성하여 20년대 무장독립투쟁을 이끄시는 지도자로서 활동하시게 됩니다. 1928년 김좌진 장군은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 1월 주중청년협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됩니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김좌진 장군께서 사망하기 직전에 나기신 말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좌진 장군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합니다. 훗날 해방이 된 조국에서 김구 선생님은 김좌진 장군 추도사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두 차례의 비극, 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출병시켜 독립군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미 우리 독립군은 만주와 소련의 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한 뒤였습니다. 격분한 일제는 간도 지역의 화룡현, 연길현 등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것이 1921년의 간도참변(경신참변)입니다.
간도참변은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간도참변을 겪은 뒤 임시정부의 역할과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내부 구성원 간에 갈등이 벌어집니다. 간도참변 이후 우리 독립군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합니다. 총재에는 서일, 부총재에는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장군이 맡고 사령관은 이장녕 장군이 맡았습니다.대한독립군단은 만주에서의 독립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소련의 자유시(알렉세브스크)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소련군은 우리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우리 독립군은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소련군과 이르크추크파 공산당은 우리 독립군을 강제로 무장해제 시키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사실상 궤멸되게 됩니다. 이것이 독립군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는 자유시참변입니다.
끊이지 않는 우리민족의 독립무장투쟁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자유시참변에서 살아남은 일부 독립군들만 만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는 만주에서 다시 단체를 정비해나가면서 그 명맥을 이어나갑니다. 이로인해 20년대 중반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라는 삼(三)부로 독립운동 세력이 정립됩니다.1925년, 일제는 만주에서의 우리 독립군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중국의 동북군벌이었던 장쭤린과 미쓰야협약을 맺습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조건은 점차 악화되었고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이로서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3부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됩니다. 1930년대에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우리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군과 힘을 합쳐 항일독립운동을 계속 전개해나가게 됩니다.
첫댓글 우리 민족에게 다시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 후손들도 다시 이분들, 선조님들처럼 자신을 깨끗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