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Caucasus) 산맥은 길이 1,100km, 폭 160km이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러시아의 서부 시스코카서스의 엘브루즈(5,642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 외에 5,000m급의 산들이 4개가 더 있다.
코카서스는 지구에서 가장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코카서스는 소비에트연방이었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의 단일민족국가로 구성된다.
- ▲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에서 바라 본 산악마을 스태판츠민타 전경.
- 코카서스에는 세계의 유명한 장수마을 중 하나인 조지아 메스티아(Mestia) 지역의 위시굴리(Ushguli)가 있다. 대부분의 장수마을은 해발 1,000m 이상의 고원지대에 위치해 맑고 건조한 공기와 청정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장수촌 사람들의 생활상에는 친밀한 가족관계, 좋은 친구와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며 소박한 자연식(현지의 음식)을 섭취하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국토의 38%가 산림지역으로 코카서스산맥이 기온의 변화를 막아주어 고산지대를 제외하고는 연중 온화한 날씨이다. 옛날부터 러시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소아시아의 무역로로도 번성했다. 그래서인지 조지아는 기원전 8C 전부터 이미 그리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고 페르시아제국, 마케도니아왕국, 로마제국, 터키, 몽골 등 끊임없는 외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티무르의 공격은 산속까지 집요하게 침략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더 깊숙이 높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마을마다 높은 곳에 망루를 건설하게 되었다. 잦은 외침으로 고단했던 삶은 종교의 힘에 의지하여 기독교(동방정교)는 조지아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 ▲ 1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젠 국경의 데이빗 가레지아 수도원 단지. 아제르바이젠과의 국경문제로 분쟁이 있는 곳이다. / 2 가레지아산 정상에는 수십 개의 동굴 기도처가 있었다. 그중 한 곳의 프레스코화. 주변의 자연물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로 그린 벽화로 색감이 온화하다. / 3 아바노패스에서의 점심식사.
- ▲ 가레비 마을의 망루들.
- 코카서스산맥 깊숙한 아바노패스 넘는 여정
트레킹에 앞서 아제르바이젠과의 국경에 있는 데이빗 가레지아 수도원(David Garejia Monastery Complex)을 방문했다. 수도원 본원 외에도 뒷산 능선에는 수십 개의 동굴 기도처가 있었고 한때는 6,000명이 넘는 수도승들이 그곳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능선의 동굴들에는 자연소재를 이용해서 그린 독특한 프레스코화가 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조지아인들의 깊은 신앙심에 감동을 받았다.
조지아는 와인의 원산지로도 유명하여 2013년 우리나라 김치가 유네스코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됨과 비슷한 시기에 조지아 와인제조법(Qvevri)도 등재되었다. 와인으로 유명한 테라비에서 트레킹을 위한 부식과 일주일 분의 빵 30개를 구입해 차에 실었다. 장작불로 갓 구워낸 데다스퓨리(Dedas puri : 엄마의 빵)는 이내 차안을 빵 냄새로 가득 채웠다. 조지아인들이 먹는 간식 추르츠켈라(포도즙을 달여서 안에 견과류를 넣고 소시지 모양으로 말린 것)도 구입했다. 투세티(Tusheti)로 가는 길 입구에서 양봉하는 아저씨로부터 야생 꿀도 구입했는데 이것 또한 트레킹 하는 동안 우리의 에너지원이 될 것이다. 손가락으로 찍어 꿀맛을 시식해 보니 입 안 가득 야생 꽃 향이 진하게 퍼졌다. 몇 년 전에 맛보고 반했던 파키스탄의 야생 꿀맛에 견줄 만했다.
우리가 일주일간 걸었던 길은 세나코(Shenako)에서 샤트리(Tusheti Nature Reserve~Kazbegi Planned National Park)까지였는데 코카서스산맥 중에서도 깊숙한 곳이어서 차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곳으로 아바노패스(2,926m)를 넘어야 했다.
산길로 접어들자마자 도로는 본격적으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여행이 처음인 여고동창 은주의 눈빛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지나가는 차량들은 거의 없는데 지쳐 보이는 트레커 한 명이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여분의 좌석이 없어 거절했지만 걱정되었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다시 거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고장 난 차가 한 대 있었다. 쇼타(산악가이드)와 지마(트레킹가이드)가 거들었지만 연장 규격이 맞지 않는다고 그냥 왔다. 지나가는 차량이라고는 우리뿐인데 걱정이 되었으나 우리가 점심 먹었던 장소가 아스라이 멀어질 때 쯤 다행히도 그곳에 차량 다섯 대가 멈춰서 쉬고 있었다. 저 다섯 대 중에는 맞는 연장 사이즈가 있을 것 같았고, 혼자 수도승처럼 걷던 트레커도 차를 얻어 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져서 안도가 되었다. 만일 차를 얻어 타지 못한다면 그는 밤을 나기 위해 서둘러서 동굴이라도 찾아봐야 할 것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차량 이동 거리는 많이 걸렸고 산길만 2시간 30분 넘게 달려 세나코마을에 도착했다. 숙소는 옥상에 예쁜 테라스가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아직 목재의 촉촉함과 침엽수에서 나오는 독특한 휘발성 향이 남아 있는 새로 지은 테라스에는 붉은색 해먹이 걸려 있었다. 그곳에 누우니 세상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내부는 네팔에서 흔히 보았던 분위기와 비슷한 식당과 침실로 꾸며져 있었다. 저녁은 빵, 가지요리, 샐러드, 말린 시금치볶음, 고기를 다져서 스테이크처럼 익힌 것 등이 정갈하게 나왔다.
쇼타는 티빌리시(Tblisi)까지 다시 가야 해서 황급히 돌아갔다. 지마가 조지아 전통술 차차(ChaCha)를 한 잔씩 권했다. 이탈리아의 그라파나 불가리아의 라키아 같은 증류주인데 와인의 본산지인 조지아가 자랑하는 술이다. 후박색의 브랜디를 두 번 증류해 맑은 색을 낸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
- ▲ 1 세나코에서 다틀로 가는 길 / 2 다틀로에서 만난 양떼.
- ▲ 3 다틀로마을. 집집마다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있다. / 4 아순타패스 가는 길. / 5 크바히디에서의 야영.
- 온갖 야생화 발길에 채이지만 눈은 호사 누려
밤새도록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내렸다. 아침이 되어도 비는 그치지 않아 우비를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트레일은 마을의 앞길을 따라 우측으로 가는 넓은 길로 걷기 좋은 길이었다. 야생의 목초지가 넓게 펼쳐졌고 온천지에 야생화가 만발해 있었다. 중간 중간에 말뚝을 세워 놓은 듯 1m가 넘는 키가 큰 노란 꽃은 우단담배풀같았다.
세나코마을 꼭대기의 아담한 교회는 차츰 멀어져 갔고 30분 정도 걸으니 산 아랫길로 이어지는 곳에 아담한 마을이 또 하나 나타났다. 지마는 길을 가리키며 마을을 지나 계속해서 가면 러시아(체첸)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국경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느낌이 들어 잠시 흥분되었다.
비는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리고 급경사의 산길로 들어서자 길은 험해졌다. 만일 우리끼리라면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이어서 비아패스(Via pass)를 지나서 디클로(Diklo), 치고(Chigo)마을을 통과해 오늘 목적지인 다틀로(Dartlo)마을까지 가야 했다. 깊은 산속 마을을 통과할 때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코카서스의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침엽수 줄기에는 온통 산신령의 수염같이 생긴 지의류(틸란드시아)가 덮여 있어 숲 전체를 비취빛의 정글을 만들어 놓았다. 깊은 숲에서 나오면 야생화 들판이 펼쳐지곤 했는데 보랏빛의 갈퀴나물, 미나리아재비같이 생긴 앙증맞은 노란 꽃, 작은 얼굴의 벌노랑이, 장구채등이 아기자기하게 피어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발에 치여 미안했지만 눈은 더 없는 호사를 누렸다.
시야가 트인 산중턱에 이르니 겹겹이 겹쳐진 산 능선들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었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람의 발걸음 한 걸음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반대쪽으로 빙하물이 흐르는 다틀로마을 입구 개천 변에 야영지가 보였다. 마을 쪽에서 트럭이 짐을 가득 싣고 강 쪽으로 가더니 폐기물을 모두 강에 버렸다. 몇 년 전부터 여행을 같이해 온 친구인 혁래와 나는 설마하고 바라보다가 실망스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쓰레기들은 아마도 체첸 쪽으로 흘러 갈 것이었다.
야영지에 도착하니 지마가 나를 부르며 식당텐트는 시끄러울 수 있으니 되도록 멀리 치라며 텐트 두 동을 놓고 갔다. 네팔에서 온갖 서비스를 받으며 다닌 습관으로 버릇이 나빠진 혁래와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직접 텐트를 쳐야 했다.
다행히 은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텐트 치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며 얼른 서두르자고 했다. 우리 셋은 텐트를 설치하고 드러누웠다. 첫날부터 힘든 산행을 하고 나니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행히 날은 개었고 양치기가 수백 마리의 양을 몰고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와 일주일간 같이 이동할 말의 주인 레조는 말의 긴 갈기를 연인의 머리를 만지듯 애정 어린 눈빛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투명한 햇살 아래 푸른 초지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서 개천변 초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청년 트레커가 우리를 반기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어디서 본 듯하기도 하여 우리도 인사를 했다.
길은 좋았지만 이 구간도 거리는 멀었다. 먼저 도착한 은주와 텐트를 설치하고 있는데 혁래가 트레커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아까의 젊은 트레커인데 아순타패스를 넘고 싶은데 내일부터는 마을이 없으니 더 이상 게스트하우스가 없을 것이고 길도 모르니 동행할 수 있을까 해서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바노패스 넘던 날 히치하이크하던 그 청년이다. 그래서 점심 먹을 때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낯이 익었었나보다.
이름은 루이이고 베를린에서 온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동행하기로 했다. 마침 지마는 독일에서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잘해서 그 청년과 독일어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아침이 되자 우리 일행은 한 명이 더 추가되었고 마침 야영장 옆에 있는 초소에 들러 퍼밋을 받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맞은편에서 오는 트레커들을 만났다.
둘째 날은 기레비(Girevi)에서 야영을 했고 셋째 날은 크바히디(Qvakhidi)에서 야영했다. 힘든 날이 연속되었다. 수량이 많아진 빙하 물을 맨발로 건너고 개천가의 암벽도 탔다. 아슬아슬하게 허물어져가는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드디어 아순타패스를 넘는 날이 되었다. 거친 습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든 일정에 지루하기도 하고 지쳐 있었는데 마침 전망 좋은 곳에 양치기 천막이 나타났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자 반기면서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했다.
그들이 건네준 터키식 커피는 생각 외로 맛있었고 내친김에 말을 타고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부탁했다. 그들은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고 우리는 코카서스의 고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지마와 루이는 우리를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길지 않은 시간을 이용해 원주민들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치기 아저씨의 쉘터(Shelter)에서 잠시 쉬었던 덕분에 오름 짓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혁래도 우울한 기분이었는데 다시 즐거워졌다고 했다. 여행은 사람들을 만나서 작은 정이라도 나누는 것이 좋은 경치를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면이 아닐까 생각된다.
계곡을 건너 아순타패스(Atsunta Pass)를 향한 급경사의 모레인지대는 거대한 장막이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더니 드디어 완경사의 길로 접어들면서 고개가 보였다. 고개에는 우리 일행 말고도 세 명이 더 있었다.
마지막 구간의 경사진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기다리고 있던 트레커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주었다. 아순타패스는 히말라야의 고개처럼 룽다(경전이 쓰여 있는 헝겊)나 타르초(오색의 헝겊)가 없으니 화려하지는 않았다.
레조(말주인)가 넓적한 점판암 하나를 들고 와서 칼로 이름을 새기라고 했다. 우리 셋의 이름이 완성되자 레조는 네팔의 마니석(경전을 새긴 돌)을 쌓듯이 정성껏 그것을 올려놓았다.
맞은편에서 올라 온 세 명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고 우리일행은 야영지로 향해 1,000m를 내려갔다.
이틀 밤을 식당텐트에서 잔 루이는 아침이 되자 샤트리(Shatili)까지 가기 위해 아침을 먹고 먼저 출발했다. 우리는 천천히 여장을 챙겨 또 다시 급경사의 길을 600m 정도 내려가서 마지막 야영지에 도착했다.
일찍 도착한 야영지에서 지마와 레조는 땀을 흘리며 나무를 해왔다. 덕분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었다. 불이 꺼질 때 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은주는 오늘도 별을 볼 것을 기대했다.
- ▲ 아순타패스를 넘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들 / 트레킹 여정
- ▲ 1 마지막 야영지 알도티 / 2 아순타패스를 넘는 사람들은 점판암에 칼로 이름을 새겨 돌탑을 쌓은 후 하산한다.
- 망루는 산악마을 사람들의 긴장된 삶의 흔적
트레킹의 마지막 날은 망루(Watching Tower)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게 되었다. 샤트리로 가는 길에 지나가는 차량마다 태워주겠다고 했다. 일행이 있다고 사양을 했더니 복숭아를 먹으라고 건네주고 갔다. 정말로 친절하고 자상한 조지아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점심은 야생화가 만발한 천변에서 먹었다. 우리의 짐을 잘 옮겨 주었던 말들도 이파리와 꽃을 구별하지 않고 한데 섞어서 잘도 씹었다. 음식과 휴식공간을 특별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참 좋은 운반 수단이었다. 이제는 다 굳어버린 빵에 통조림도 더 이상은 못 먹겠어서 먹는 둥 마는 둥 좀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오후 3시쯤 샤트리에 도착했다. 망루의 게스트하우스 문은 잠겨 있고 빈집에는 댕그랗게 전화번호만 달려 있었다. 텐트의 입구 문이 작아 고생했는데 이곳의 현관문도 작아서 불편했다. 지마는 계속 머리를 부딪치면서도 현관문을 작게 만드는 것은 적이 침입했을 때 집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목적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집과 집은 나무다리로 위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망루는 전쟁 때 대피장소로 또는 물건 보관 장소로 쓰였는데 사다리를 이용해서 오르내리다가 적이 오면 사다리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산악 마을 곳곳에 있는 수많은 망루들은 과거에 긴장하고 살았을 산악마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사의 흔적이었다. 망루의 발코니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레조는 말을 끌고 왔던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일이면 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남겨진 우리는 시야가 트인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셨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맥주 맛을 보는 날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트레킹 마지막 날, 밤새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오더니 오전 내내 비가 왔다. 마을은 집집마다 게스트하우스를 짓느라고 한창 공사 중이었다.
우리를 태우러 쇼타가 다시 왔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스테판츠민다(Stephantsminda)로 향했다.
스테판츠민다는 카즈베기산(Mt.Kazbegi·5,033m)을 등반하거나 트레킹, 또는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Gergeti Trinity Church)를 가려는 사람들이 묵는 마을로 알프스로 치면 프랑스의 샤모니(Shamonix) 같은 곳이었다.
차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전날 하루 종일 운전으로 피곤했을 쇼타를 더 자도록 하기 위해 걸어서 가기로 했다. 1시간 30분쯤 걸어서 올라가니 대초원이 펼쳐지고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가 능선의 끝자락에 반듯하게 서 있었다. 조지아하면 대표적으로 나오는 사진에 등장하는 교회이다.
설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눈이 녹아서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없다. 트빌리시(Tbilisi)로 가는 길에 교회 몇 군데를 더 들렀는데(Ananury Monastry, Mstketa Town, Svetitskhoveli Cathedral, Jvari Monastery) 어느 교회에서든지 머리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치마를 입어야하는 예의를 갖춘 복장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교회는 건물과 망루가 같이 지어져 있었고 교회 안은 대체적으로 소박했으며 신도들은 각자의 아이콘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 ▲ 3 아순타패스. 왼쪽부터 루이, 민혁래, 김미리, 레조, 최은주, 지마(가이드) / 4 스태판츠민타의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 ▲ 즈바리고개(2,379m)에서 바라본 스태판츠민타 가는 길.
- 어머니의 품 같은 코카서스
코카서스산맥의 극히 일부 지역을 여행하고 그곳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다녔던 다른 산맥들과 비교해 본다면 아름다움과 편리함, 접근성에서는 알프스에 뒤질 수도 있고, 장대함이나 규모면에서는 히말라야에 못미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카서스는 가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야생적인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거친 산악의 모습보다는 겹겹이 포개진 능선의 부드러움에서 조지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엄마의 빵’(Dedas puri) 같은 훈훈하고 넉넉한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망루들도 이곳만의 특징으로 그때 당시 수시로 감시를 하고 힘겹게 살았을 옛날 사람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지아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고 음식도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특히 농후한 맛의 가지요리와 샤슬릭(장작구이 꼬치요리)의 진한 맛은 지금도 여운이 남아 있다.
가족들이 나를 보더니 고생했을 줄 알았는데 건강해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청정한 코카서스의 자연환경이 나에게 준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