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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23:1-17절) 정금같이 되리라
많은 사람들 중에서“나”한 사람만 문제가 있고, 다른 사람은 모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며 소외감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별 이상 없이 살아가는 것을 좋아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성공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데, 한두 가지가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잘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조건들 중 단 하나만 결격사유가 생겨도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信仰)은 어떨까?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위기(危機)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평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이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입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용광로에 집어넣으셔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의 불순물을 골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더욱더 이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남들처럼 잘 살고 성공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중에서 우리를 골라내어 연단하셔서 흠도 티도 없는 정금 같은 신앙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갈등과 긴장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연단 받으면, 세상에서는 실패한 이상한 사람이 되는 반면, 하나님 앞에서는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연단을 받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잘난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잡석(雜石)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엄청난 갈등과 긴장을 어떻게 믿음으로 소화해야 하느냐? 가 오늘날 우리의 큰 숙제(宿題)입니다.
먼저 욥기 22장에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독(毒)에 찬 비난을 듣게 됩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들으면서 “욥이 과연 친구들에게 이런 식으로도 오해가 될 수 있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비난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까닭 없이 가난한 자의 물건을 담보로 잡고 헐벗은 자의 옷을 벗겼다”고 정죄(定罪)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은 이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엘리바스는 욥이 좀 더 적극적으로 어려운 자를 도와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즉 욥에 대해 너무나 많이 기대했던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평소에 욥이 아예 천사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이 엘리바스의 기대에는 훨씬 덜 미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하늘의 구름위에 가두어 놓고 혼자 하나님을 잘 안다고 설쳐 댔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은 단 한번 도 하나님의 능력을 구름 위에 가두어 놓은 적 없습니다. 즉 욥이 마치 자기만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자기만 가장 정통한 하나님의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들이 얼마든지 독선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엘리바스는 욥이 갑자기 심판받는 것을 보고 “노아 홍수 때 멸망한 사람들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즉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갑자기 망했던 것처럼 욥도 갑자기 망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인격적으로 연단된 사람이라도 도저히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 뒤에 엘리바스가 아무리 위로의 말을 했다 해도 이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참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욥의 답변을 들어보면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엘리바스에게 반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답변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기 전체의 주제가 나옵니다.
23:10절)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경제적(經濟的)으로, 신체적(身體的)으로, 심지어 사람들의 말로 연단된 후에 흠도 티도 없는 완전한 정금으로 나타날 것을 확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의 성공은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연단 받은 후에 정금같이 변하는 이것입니다.
Ⅰ.욥의 면담 요청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온 세 친구들과 고난에 대한 신앙적 대화를 나눈 후,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 직접 내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나서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 친구들과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도저히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즉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은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는 하나님의 대답인데,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 “옳다”대답하시면, 당장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당장 병이 낫고, 당장 어려움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참아라.”든지 “기도해 주겠다.”는 말밖에는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 “안다”고 가르치려고 들 때는 오히려 엄청나게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23:1-2절)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은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이것은 욥의 마음속에 친구들의 말에 대한 반발(反撥)심이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즉 욥은 친구들의 말을 계속 듣는 가운데 그들이 하는 말이 전혀 자신의 생각아나 상태를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망과 교훈을 들을 때, 그 사람이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한 마디 할 때는 그 사람의 말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그동안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끝에 가서는“정말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하다” 라고 인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잔득하고, 나와 전혀 상관도 없는 것을 상관이 있다고 우길 때는“이것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욥이 얼마 전 엘리바스가 자기를 그토록 오해하고, 독설(毒舌)을 퍼붓는 소리를 들었다면, 아마 화가 나서 엄청나게 긴 반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욥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엘리바스가 무엇이 다른가...?를.
엘리바스가 아직도 신앙을 희미한 가운데 더듬고 있다면, 욥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반박 대신 “자기 안에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 는 정도로 말하고, 엘리바스의 독설(毒舌)을 소화해 버립니다.
이것 자체가 그가 엄청나게 신앙적으로 성숙(成熟)한 것을 보여 줍니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서 독(毒)을 걸러 낼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는 말은 “내가 오늘 다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는 뜻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긴 논쟁도 하지 않겠다.” 뜻입니다.
그 이유는 각자에게 처한 신앙의 문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엘리바스는 엘리바스가 치러야 할 문제가 있고, 욥은 욥이 치러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욥은 엘리바스를 굳이 자기와 같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다른 사람을 나같이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수준의 문제가 있고, 나는 내 수준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 문제를 엘리바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욥이 엘리바스의 말을 다 들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욥은 2절)...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고만 했습니다. 여기서“재앙”은 욥이 해결해야할 숙제(宿題)를 말합니다.
지금 욥이 해결해야 할 숙제(宿題)는 단순히 탄식(歎息)하거나,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사거나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욥이“탄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끼리의 인간적 대화를 말합니다.
그는 당하는 어려움이 단지 친한 사람들이 찾아와 동정 어린 말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야단을 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떤 판정(判定)을 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욥의 놀라운 영적(靈的)성장(成長)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욥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당한 고난은 죄(罪)의 심판(審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鍊丹)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자신의 문제는 단순히 탄식(歎息)하거나 위로 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응답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생각의 전환(轉換)입니까?
우리는 대개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꾹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주위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고, 믿음의 연단(鍊丹)으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재앙(災殃)은 탄식(歎息)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응답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자져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욥은 잠시 하나님을 찾는데 혼란(混亂)을 겪습니다.
3-5절)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욥은 환란(患亂)을 당했을 때, 쉽게 사람에게 위로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끼리는 아무리 신앙이 좋은 친구라도 인간 이상의 위로를 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대체로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내 문제를 속 시원하게 말씀 드릴 수 있을까?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곧 여기에 있습니다.
즉 가장 힘들고 어려운 위기 중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위기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장식품(裝飾品)같이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열쇠들이 위기 때는 하나도 열쇠 구멍에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신앙에 불순물(不純物)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驕慢)과 거짓과 위선적(僞善的)이기 때문에 믿음의 열쇠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苦難)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이 벗겨지고, 말씀만 붙잡게 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씀이 하나님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마어마한 불속에 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육체(肉體)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절대로 이 몸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 할 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다 들어 주시며, 참으로 놀라운 응답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가치(價値)를 깨닫기 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불순물(不純物)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Ⅱ.정금같이 되리라
욥은 연단(鍊丹)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비해 다른 하나는 다정다감하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6-7절)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욥은 하나님이 가지신 두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큰 권능을 가지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내 말을 듣고, 나를 품에 안으시는 다정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앞에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큰 권능으로 우리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정다감하신 하나님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다 진지하게 들어주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祝福)인지 모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전부 챙겨 주고, 해결해주십니다. 어느 때는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고, 어느 때는 기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의롭다”고 하시기에 아무도 정죄(定罪)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해 혼란(混亂)을 겪고 있습니다.
9절)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즉 하나님은 내 앞에 계실까? 내 뒤에 계실까? 아니면 내 오른 편에 계실까?
욥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눈에 하나님은 결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일까?
예수를 잘 믿다가 어떤 큰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갑자기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은 줄 알지만, 감정적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캄캄한 어둠속에 빠져 있는데, 앞뒤 좌우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 자폐증(自閉症)입니다.
아이가 자폐증(自閉症)에 빠지면, 완전히 주위 세계와 차단됩니다. 오직 자신만이 어둠에 빠진 것 같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데, 옆에서 엄마가 아무리 “내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 고 해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아이들 중 24시간 엄마 손수건을 붙잡고 놓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와 싸울 때, 오직 삼백 명으로 십만 명이 넘는 군대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영적 자폐증(自閉症)에 걸려 버렸습니다.
그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완전히 어둠이 그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임을 알지만, 실제로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하나님께“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드온은 모든 신경이 마비되고, 오직 손바닥만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기드온의 기도를 들으시고, 양털에만 이슬을 내리시는데, 짜서 보니, 그릇에 이슬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기드온이 안심이 안 되니까 이번에는 삿6:39절)...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날 온 땅은 이슬이 보석(寶石)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보석(寶石)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때때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캄캄한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앞에도 보이지 않고, 뒤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른쪽에서도 느낄 수 없고, 왼쪽에서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 때 너무나 겁에 질려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재산(財産)이요, 보물(寶物)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어려움을 주신 이유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처음 어려움을 주셨을 때, 자기를 미워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버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또 믿음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분명하게 고난(苦難)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절)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분명히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금덩어리 보석(寶石)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것이 욥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순금(純金)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금광(金鑛)을 찾아서 캐 들어가야 합니다. 금광(金鑛)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광(金鑛)을 찾아도 금(金)은 곧바로 나오지 않습니다.
대개 금(金)성분이 들어 있는 원석(原石)을 캐냅니다. 금(金)원석(原石)은 금(金)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지, 순금(純金)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황금색(黃金色)이 나기도하지만, 실제로는 돌(石)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반지나 목걸이로 만들 순 없습니다.
이것을 순금(純金)으로 만들려면, 원석(原石)을 가루로 부수어야 하고, 불에 녹여 완전히 불순물(不純物)을 제거해야 합니다. 즉 완전히 녹여 형체도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때 드디어 찬란한 100% 순금(純金)이 만들어집니다. 이 순금(純金)을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기도 하고, 반지를 만들어 손가락에 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난 받고 연단을 받으면,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소망(所望)이 없어지게 됩니다. 때로는 너무나 초라해져서 도저히 이 세상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단(鍊丹)받는 성도의 특징은 겸손(謙遜)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슴 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이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보석(寶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곧 이런 순금(純金)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직(正直)하고, 순결(純潔)하며, 위선적(僞善的)이지 않고, 열정적(熱情的)인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목에 걸고 다니시며, 손가락에 끼고 다니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이 좋아서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의 연단(鍊丹)을 받느라고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병(病)으로 고생한 것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순금(純金)이 된 그 자체로 이미 보상(報償)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연단(鍊丹)을 받지 않으면, 잡석(雜石)같은 인생입니다.
잡석(雜石)같은 인생을 아무리 좋은 보석(寶石)상자에 넣어 고급 포장한다고 보석(寶石)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포장지은 좋지 않지만, 거대한 금(金)덩어리로 변해 있습니다.
우리는 몸뚱이만한 큰 금(金)덩이라고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도대체 돈으로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보석(寶石)같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존귀(尊貴)하게 하십니다.
결국 사람의 존귀(尊貴)한 여부(與否)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용에 의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담을 수 있는 최고의 내용물(內容物)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聖靈)을 부으셔서 언제나 천국(天國)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롬14:17절)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 세상을 혈기(血氣)나 의혹(疑惑)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늘의 능력과 지혜와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기도 응답을 주시고, 심령 부흥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심령부흥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이 심령부흥은 시대나 연령이나 지역을 초월해 최고로 아름답고, 복(福)된 것입니다. 노인(老人)이나 청년(靑年)이나 어린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심령부흥이 일어나는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福)된 곳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성도가 번쩍 번쩍 빛나는 순금(純金)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Ⅲ.욥의 확신과 두려움
욥은 지금 하나님의 손에서 순금(純金)으로 변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해 왔다는 것입니다.
11-12절)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엘리바스가 하는 오해(誤解)에 찬 말을 들었을 때, 일부는 사실이라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좋은 일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이기적(利己的)이었고, 때로는 자기 문제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선(善)한 일을 한다고 순금(純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믿는 자들보다 인격적(人格的)으로나, 다른 일에서 훨씬 더 훌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금(金)원석(原石)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보통 돌(石)보다 뛰어난 대리석 정도 되는 것입니다.
금(金)성분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희생적(犧牲的)이고, 모범적(模範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조금밖에 닮지 못해서 사람들 앞에 내 놓을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적 지위(地位)나 인격(人格)이 순금(純金)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순금(純金)으로 만드는 재료(材料)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와 자신을 볼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금방 순금(純金)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을 채울 때, 그렇게 기쁘고 감격스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흥분(興奮)의 순간이 지나고“나”자신을 보면, 어떻게 될까? 아직 변하기에는 너무나도 멀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즉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도 여전히 혈기(血氣)를 부리고, 거짓말 하고, 교만(驕慢)하고, 잘난 체 하고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는“나”자신을 볼 때, 과연 내가 언제 변할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또 내가 완전히 순금(純金)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연단(鍊丹)을 더 받아야 하는지? 가 두렵습니다. 즉 몇 년 동안 연단(鍊丹)을 받아도 사실 조금밖에 겸손해지지 못하고, 아주 조금 진살해질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100%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연단(鍊丹)을 더 받아야 할까? 이것을 생각하면, 낙심하게 되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진정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연단(鍊丹)을 받는다 해도 이 육체(肉體)를 갖고 있는 이상 100% 순금(純金)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100% 순금(純金)으로 연단(鍊丹)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100% 순금(純金)으로 만들려면, 우리는 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연단(鍊丹)의 10/1이나 100/1밖에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순금(純金)으로 만드 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감당치 못할 시련(試鍊)이 오지 않을까? 겁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하게 시험(試驗)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연단(鍊丹)하시고, 기쁨으로 고난(苦難)을 감당하게 하시지, 불평(不平)을 하면서 연단(鍊丹)을 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17절)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여기서“어둠”과“흑암”은 고난(苦難)으로 인한 절망(絶望)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고난 중에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과 절망은 잠깐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면, 오히려 이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한없이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됩니다.
롬5:3.5절)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는 세상의 육체적(肉體的)어려움만 생각하면, 너무나도 절망(絶望)스럽고, 불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면, 얼마나 뜨거운 지 그 모든 세상 어려움은 다 이기고 남는 힘을 얻습니다.
그러다가 또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낮아지면서 또 눈물로 기도하게 되고, 그러다가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만(驕慢)을 버리고, 위선(僞善)을 버리고, 거짓을 버리면서 더 겸손(謙遜)하고, 정직(正直)하고, 진실한 신자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의 성공의 독(毒)에 중독되어 있고 순금(純金)의 가치(價値)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치(價値)있는 것은 세상의 명성(名聲)이 아니라, 고난(苦難)의 용광로(鎔鑛爐)를 통과한 순금(純金)입니다. 하나님은 100% 순금(純金)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기뻐하고, 찬송하며, 잘 통과함으로 모두 100% 순금(純金)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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