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품성 가운데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분의 “연민”의 마음이다. 즉 불쌍히 여기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백성들도 연민과 동정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단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죄인들을 자신을 닮은 몰인정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웃과 친척과 심지어 가족의 고통을 못 본 체하고 무시하게 만든다.
아벨을 쳐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가인은 시치미를 떼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항변했다. 이것이 죄악에 빠진 인간의 몰인정함이다. 신명기 22장 1~3절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신 22: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신 22: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 (신 22: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신 22: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이웃의 고난을 못 본 체하는 몰인정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거리가 멀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다. 예수의 제자들은 몰인정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고 열심 있게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인가 아닌가 그 사람이 이웃과 동료들에게 나타내는 연민과 동정의 정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동정의 사람이다. 그분은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벧전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가장 종교적이면서 가장 신앙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마음에 연민과 동정의 정신이 사라진 사람들이다. 종교 행위를 위해 마땅히 나타내어야 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지나쳤다. 그러나 그들이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치료해주고 후하게 친절을 베풀었다. 이것이 본 장에서 말하는 연민과 동정의 정신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일어난다. 종교적 행위로써 연민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이 그 마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몰인정한 사람, 자신만을 최고로 여기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들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의 마음이 그 마음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우리는 세상의 아우들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가인의 길을 간다는 것이 과연 합당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기를 좋아할 것이요, 우리의 감사 예물을 그분께 드리기를 좋아하고 주를 위하여 일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바로 그 일이 빛이 될 것이다. 주를 위하여 우리는 고통과 수고와 희생도 각오할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그분의 갈망을 우리도 갖게 될 것이다. 그가 느끼셨던 것과 같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우리 마음에도 일어날 것이다.”(청지기, 197)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을 우리도 배우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동정과 친절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우리도 갖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임하여 주옵소서 자신만 알고 자신 밖에는 없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에 예수의 마음, 예수의 심장을 이식해 주소서 우리도 그렇게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히 임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