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한 자아 - 아래의 글은 영국 아큐멘(Acumen) 출판사의 '헤레틱스(Heretics)' 총서의 한 권으로 출판된 매리 미즐리(Mary Midgley)의 책 고독한 자아: 다윈과 이기적 유전자(The Solitary Self: Darwin and the Selfish Gene)(2010)의 서론을 옮긴 것이다. 미즐리는 이 책에서 부당하게 과학의 권위를 등에 업은 하나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기적 개인들 간의 경쟁 자체를 신성시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뒷받침한다―로서의 신다윈주의적 세계관의 가면을 벗긴다. 191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도덕 철학자 매리 미즐리는 과학, 윤리학, 그리고 동물의 권리에 관한 저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78년에 자신의 첫 번째 책 야수와 인간: 인간 본성의 뿌리(Beast and Man: The Roots of Human Nature)(2010)의 서론과 결론을 옮긴 것이다. - 책 뒷표지에 실린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고독한 자아>에서 저명한 철학자 매리 미즐리는 인간의 동기를 이기심으로 환원시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우리의 도덕적 기질의 본성을 탐구한다. 미즐리는 최근의 신다윈주의적 사유의 "이기적 유전자" 경향 같은, 인간의 동기들에 대한 일방적 인 단순한 설명은 계몽적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비현실적이라고 적절하게 그리고 설득력이 있게 논증한다. 그는 그런 간결함은 인간 심리에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즐리는 찰스 다윈의 원전으로 되돌아 가서 현재 다윈주의로 제시되는 환원적 개인주의가 어떻 게 다윈이 아니라 더 넓은 홉스주의적 계몽 사상의 전통에서 파생되는지 보여준다. 그는 진화생물학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이 자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문화적 부가물임을 밝힌다. 미즐리는 영웅적인 독립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윈이 이해했듯이, 우리는 서로 상호작용하고 우리가 매우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는 복잡한 생태 계들과 상호작용하도록 구성된 지구의 유기체들이다. 우리들에게 유대는 제약일 뿐 아니라 생명선이다. <고독한 자아>는 다윈에 대한 유의미한 다시 읽기이고, 진화과학의 최근 연구에 대한 중요한 중화제이며, 과학, 종교, 심리학, 그리고 윤리학의 논쟁들에 대해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차례 서론 1. 사이비 다윈주의와 사회적 원자론 2. 배경: 홉스에서 R. D. 랭까지의 이기주의 3. 도덕의 자연적 원천 4. 이성을 따르기 5. 다윈의 새로운 빗자루 6. 자아의 이상한 모험 결론: 더 넓은 시각 ――――――――――――――― 서론 사회적이라는 것에 관하여 이 책의 중심 주제는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다윈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데, 현재 그는 오늘날의 풍조인 이상한 과격한 형식의 개인주의의 원천으로 널리 간주되고―또는 비난받고―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그런 신조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사실상 인간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들은 그것과 정반대였다. 그 견해들은 우리를 함께 묶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과 두려움, 그런 자연적 느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갈등들을 중재하려고 시도하는 방식들에 중점을 둔다. 많은 사상가들 이상으로, 다윈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갈등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전적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의 견해들은 신다윈주의라는 오늘날의 단순한 독단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오늘날 상당한 다윈의 권위와 영향력이 그의 것이 아닌 견해들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개인주의에 관한 기록을 바로잡는 일이 가치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것 외에, 오늘날 개인주의가 우리에게 실제적인 어려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 주제가 통째로 우리에게 중요하다. 개인주의가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한 성취로서 수용된, 우리 시대를 인도하는 이상이지만, 그것은 서로 다른 여러가지 형식을 띤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개인주의를 사람들이 서로 구별되며 모두 개별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도움이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정치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고립은 고독과 의미 상실로 향하곤 한다. 게다가 서로 다른 개인들은 서로 다른 목표가 있기 때문에 해방을 위한 운동들은 혼란스러워진다. 자유무역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자유롭지 않는 조건을 산출할 수―자유로운 주택 건설은 거주하기에 끔찍한 도시들을 산출할 수―있지만, 사방에는 온통 개인들이 있다. 기타 등등. 이와 같은 충돌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어떤 개인들이,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요소들이 우선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개인주의 이외에 다른 원리들을 계속해서 적용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종류의 자유를 선호하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개인주의로 간주되는 것에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현재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업적인 것인데, 자유경쟁, 자유기업, 사업의 탈규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것에 대한 철학적 뒷받침은 필경 널리 퍼진, 저항할 수 없는 우주적 힘으로서의 자연선택 에 대한 다윈주의적 믿음일 것이다. 신다윈주의적 이론가들은 자연선택이라는 이 힘을 진화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심층적인 사회적, 물리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불가사의들에 대한 최종 설명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경쟁이 우주의 핵심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를 지배한다고 추측되는 유전자들 사이의 고삐 풀린 야만적 경쟁이다. 이것이 리처드 도킨스가 '다윈주의적 생명관'이라는 대담한 부제가 붙어 있는 자신의 책 <에덴의 강(River Out of Eden)>에서 인간의 운명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한 전망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근본적으로 아무 설계도, 아무 목적도, 아무 선악도 없으며 맹목적인 무자비한 무관심만 존재할 뿐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예상해야 하는 바로 그런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 DNA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으며 알지도 못한다. DNA는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물론 이것은 상세한 과학적 논제가 아니라 하나의 신화로 여겨지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그것이 중요 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와 같은 인상적인 신화들을 먹고 자란다. 결국 <공산당 선언>과 <요한 계시록> 같은 생생한 문헌들은 대부분의 철학적 저작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나는 신다윈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더 온건한 진술들보다 오히려 도킨스의 표현들에 집중했는데, 그것들의 바로 그 극단성이 그것들을 유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강한 색채는, 더 모호하게 표현될 때 사용하기 좋은 것으로 통용되는 관념들의 충격적인 함의들 을 뚜렷히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관념들은 공격받곤 했지만, 더 신중한 약화된 형식들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널리 공유 되고 있다. 도킨스의 수사법에 얼굴을 찡그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의 세계관의 많은 부분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그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운명론이다. 그것이 냉담한 운명의 인물에 의해 노예화된 무력한 인간들에 관해 제시하는 드라마는 물론 새롭지 않 으며, 그런 모든 신화들처럼, 그것은 무의미함뿐 아니라 실제적인 불길한 의미―적극적인 압제자의 현존― 를 전달한다. 현재의 판본과 관련된 새로은 것은 그 이야기를 위해 제공되는 등장인물과 후원자 목록뿐이다. 이제 운명론은 그저 그것에 대한 찬반의 이유들이 있는 다른 태도들 가운데 가능한 하나의 철학적 태도가 아니라 과학의 어마어마한 권위의 뒷받침을 받는 하나의 사실로서 제공된다. 그것이 불러내는 우주적 불량배는 이제 이교도 신이 아니라 하나의 화학물질, DNA인데, 우리 자신의 세포들의 일부인 DNA는 우리 행위의 진정한 원천―여타 유기체들처럼 우리도 그것의 지배를 받는 볼품 없는 로봇에 불과하기 때문에―으로서 환기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동기는 무조건의 이기주의, "이기심"이다. 이 이야기는 구별되는 두 종류의 환원을 조합하는데, 하나는 인간 사회를 별개의 고립된 개인들로 분할 하는 사회적 원자론이고, 나머지 하나는 각 개인을 자신의 신체의 단위들로 분할하는 물리주의적 환원이다. 이런 두 전략은 반드시 연결되는 듯 보이지는 않는데, 사실상 그것들은 거의 양립할 수 없다. 그것들을 함께 혼합함으로써 매우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가 산출되지만, 그것들이 공유하는 환원적 성질 때문에 사람들은 둘 다 과학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함께 고려하면, 그것들은 모든 인간 행위가 불가피하게 이기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불가피한 운명의 메시지는 자유로운 선택이 여전히 가능하다거나, 또는 어떤 약간 자연스러운 이타 주의적 동기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도킨스의 간헐적인 주장에 의해 상쇄되지 않는데, 이런 진술들은 그의 논증의 나머지 부분과 매우 대립적이어서 그것들은 명백히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아편으로서만 부연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 신조는 포괄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양한 이기주의 물론 그런 포괄성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토머스 홉스(1588-1679)는 삼 세기 전에 모든 행위는 이기적이라는 동일한 주장을 개진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봉건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사람들에게 종교 전쟁에 그들의 생명을 바치라고 말하는 기사도라는 귀족주의적 윤리에 대한 항의―으로서 이것을 주장했다. 홉스는 사람들이 이것을 행하기를 그만둘 만큼 충분히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합의 사회를 구성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실제로 사람들이 이미 전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바로 그 실용적인 부르주아적 항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개인주의로 성장한 씨앗을 뿌렸으며, 그것으로 인해 개인들이 실제로 억압당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방식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획기적인 관념이 그러하듯이, 그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하여 마모를 견뎌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매우 흔히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항상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점을 재빨리 파악했다. 우리가 그랬다면 이기적이라는 단어는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타주의 외에도, 대체로 인간 행위는 아무 생각이 없거나 사실상 자기파괴적이다. 그런데, 이런 명백한 사실 이외에, 전쟁이 줄어들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인적 삶에 주의를 더 기울이기 시작함에 따라 사유의 초점이 공적인 문제에서 사적인 문제로, 즉 "이해관계"―외형상의 수익이나 이익― 에서 벗어나 삶 자체의 질을 향해 점차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신중함보다는 자율에, 진정한 경험에, 그저 다른 사람들의 예를 좇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예언자는 홉스 또는 제레미 벤담 같은 쾌락 이론가가 아니라 니체였는데, 이런 문제들에 관해 그가 제시한 서로 어긋나는 여러 통찰로 인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바쁘다. 그러므로 이기심과 자기성취의 의미―그리고 자기 자체가 실제로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 전체가 홉스 시대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가신 것으로 판명되었다. 자기를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오랫동안 소란스러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윈처럼 오늘날 우리도 사실상 우리의 동기가 복잡하며 갈등들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그런 갈등들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단순한 포괄적인 동기 이론도 이것에 크게 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다윈주의자들이 이런 어려운 점들을 전부 무시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포괄적인 형식으로 그저 보편적인 "이기주의"로서의 자기중심주의를 재도입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들은,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계약의 체결을 갈망하게 하는, 자신의 안전에 관한 각 개인의 불안에 중점을 두기 위해 이것을 택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은, 영원하고 치료할 수 없는 것, 즉 우주의 기본 유형으로서 경쟁 자체를 전적으로 강조 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것에 대해 그들이 선호하는 심상은 대체로 상업적이거나 군사적이거나 범죄적이다. 성공적인 시카고 갱단처럼 우리의 유전자들도 대단히 경쟁적인 세계에서, 어떤 경우에는 수백 만 년 동안, 생존해 왔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유전자들의 어떤 성질들을 예상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유전자들에서 예상되는 지배적인 성질이 무자비한 이기성이라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이기성은 대체로 개인 행동의 이기성을 초래할 것이다[그리고 이것에 대한 어떤 가능한 예외도 무시할 만하다] ...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난다. 이런 결론이 인간 동기에 관한 명시적인 이론으로서 공표되었다면 매우 인상적인 듯 보이지 않았을 것 이다. 여기서 그것이 나쁜 심리학이라기보다 그저 또 하나의 은유로서 통용되는 까닭은 이런 논의가 공식적 으로는 결코 동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생물학 수업, 즉 유전자와 자연선택의 작동에 관한 해설 이란는 점이다. 독자들은 물리과학의 일반적인 아우라에 너무 겁을 먹어―진화의 거대한 내막을 알도록 교육받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깊은 인상을 받아서―일반적인 주제들에 관한 명백히 빈약한 사유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자연선택은 드라마가 필요없다 그런데 과학 자체는 실제로 이 신화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생물학자들이 자연선택을 이런 식으로 극화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생물권에서 경쟁은 협동보다 더 우세하지는 않다. 실제로 그것은 불가피하게 덜 우세한데, 많은 협동이 이루어져 개별 경쟁자들이 형성되고 나서야 경쟁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알려져 있듯이, 우리 세포 내의 엽록체와 다른 소기관들은 한때 거의 확실히 별개의 존재들, 즉 그것들은 세포들의 내부에서 번성했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내부 오케스트라에서 자체의 악기를 연주하게 된 별개의 생물체들이었다. 그것들은 사회적 삶이 그것들에게 적합하다고 깨달았는데,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도 적합하다. 게다가, 우리 내장에서 서식하는 미생물들과 우리 육체의 나머지 부분에서 서식하는 미생물들 사이 또는 현화 식물과 수분 매개체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협동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경쟁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작정하고 있는 예언자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이것은 교활한 위선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그들의 신화 만들기 의도가 확실히 명백해지고 그들 자신의 동기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들은 사실들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한 특수한 해석, 즉 과학의 일부로서 특권화되지 않는 채, 나머지 사유의 맥락 속에 위치한 그것 자체의 층위에서 정당화될 필요가 있는 해석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상 그들의 견해는 정말로 과학이 아니라, 자체 관념들을 강화하기 위해 과학적 상상을 활용하는 일종 의 일반적인 사유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시계장치라는 상상에 의해 지배된, 뉴턴 시대의 기계론적 사유와 흡사하다. 물론, 그런 사유는 여러가지 점에서 유용하였지만, 그것의 한정된 상상 때문에 그것은 점점 더 호도되었 는데, 특히 물리학에서 그랬다. 그런데 이런 불필요한 극화 이외에,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신다윈주의에 더 핵심적인 것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진화에서 자연선택의 역할은 그 자체로 크게 과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경쟁은, 단순한 논리적 이유 때문에, 즉 어떤 여과기도 그것에서 흘러 나오는 것의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발생의 유일한 이유일 수가 없다. 여과기는 커피 찌꺼기를 거르지만, 그것이 커피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비슷하게, 우리가 보고 있는 복잡한 생물체들은 다른 형태들을 제거한 여과기들뿐 아니라 내적 원인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자기조직화―생물들의 실체 내부에 존재하는 일련의 적극적인 경향들―이 이런 새로운 형태 들을 산출하는 데 필요하다. 유기체들은 저런 식이라기보다 이런 식으로 형성되도록 구성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복잡하여, 그것을 행할 시간이 무한히 있었더라도 시행착오만으로는 이런 작업을 결코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이언 굿윈은, 개미들이 모두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움직이고 일제히 사이좋게 쉬는 개미 군집의 사례를 고려하면서 이것을 지적했다. 자연선택이 부화실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활동 유형의 기원을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 그것은 생물학적 형태의 기원처럼 자기조직화의 일례이다. 어떤 생물학적 형태도 그것이 선택될 수 있기 전에 자발적으로 발생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며, 과학의 작업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는 유전자들의 무작위적인 변화의 결과로서 새로운 형태들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이 당연히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유기체들의 관찰된 유형들과 형태들이 알려진 특성들에서 어떻게 생성되는지 여전히 묻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것들이 가능한가? 복잡계 이론은 기원의 문제를 다루는데, 형태를 생성시키는, 복잡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의 유형을 서술함으로써 한 가지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일리야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땅제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1984)에서 설명했듯이, 무기체적 세계와 유기체적 세계 둘 다에서 새로운 유형들은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개미 군집이나 생물체 같은 복잡한 전체들은 전체로서 행동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특성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별개의 부분들에 관한 지식에서 추론될 수 없 을 것이다. 사실상 이 개미들은 소수일 때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가 불어날 때 어떤 시점에서 그것들은 모두 일제히 행한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식으로, 작은 부분들의 행동에서 유추함으로써 대규모의 행동에 관해 이론화하는 환원 주의적 사유는 일반적으로 믿을 만하지 않거나 과학적이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해석적 방법이 다윈의 관념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현재 우리와 관련된 사례에서 그것은 이중적으로 우리를 호도한다. 심리학적 중심 주제들에 관해 그것은 전적으로 다윈의 메시지를 왜곡한다. 그것은 다윈이 인간 행동에 관해 실제로 행한 철저히 사회적인 분석을 무시하며, 그가 오늘날 널리 퍼진 조잡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지지했다는 점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으로, 진화의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다윈의 견해로부터의 일탈은 덜 격심하지만 여전히 심각하다. 사실상 다윈은 자연선택이 매우 중요하며, 그것이 진화적 변화의 주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유일한 원인일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른 원인들이 있다고 확신했으며, 그것들이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신다윈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연선택을 우주에 널리 퍼져 있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부풀리게 만든 그런 종류의 열광은 그에게 이질적이었고 그의 이름으로 선전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그것은 진화론자들의 다음 과업이 될 필요가 있는 것, 즉 자기조직화의 작동을 이해하는 것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린다. *** 이런 논의는 명백히 중심 주제들의 전경 위에 펼쳐진다. 분류될 필요가 있는 대량의 서로 다른 논증들―형이상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타 등등―을 신다윈주의가 이미 뒤섞어 놓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논의는 이것을 행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이것을 행하는 일에 대해 신다윈주의 예언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중심 주제들은 정말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직 우리 시대의 강박적인 전문화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실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다윈주의가 기술하는 관계와 전적으로 다르며 사실상 훨씬 더 흥미롭다. 내가 이것에 관한 책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했을 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길거나 아니면 그저 매우 짧은 풍경 묘사이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나는 재빨리 풍경 묘사를 선택했지만, 이것 때문에 책을 요약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었는데, 서로 다른 중심 주제들이 여러 방식으로 연결되고 다른 절로 매끈하게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 이다. 사실상 나는 내게 중심 문제―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 본질을 어떻게 간주하는지―인 듯 보이는 것의 주위를 돌거나, 오히려 그것들을 향해 계속 나선형으로 돌았으며, 그리고 이것을 행하면서 나는 동일한 중심 주제가 다른 맥락에서 나타날 때 그것을 반복적으로 만나곤 했다. 그것에 대한 사과와 함께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대충 요약된다. 처음 두 개의 장에서는 개인주의의 의미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가 제시되고, 인간의 사교성의 중요성에 관해 다윈이 실제로 작성한 글이 신다윈주의의 분리주의적 신조와 대조된다. 다윈은 인간 지능의 발달이 어떻게 우리 종의 대단히 복잡한 범위의 사회적 감정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갈등들을 나타낼 뿐인지를 강조했으며, 그리고 사회, 특히 도덕 안에서 이런 갈등 들을 다루는 방식들을 점차로 제안했다. 그는 그런 도덕의 한 표현으로서 "이기성"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뿐 아니라 E. O. 윌슨의 <사회생물학> 및 비슷한 사고 방식를 지닌 다른 사람들의 많은 문헌에서도 다윈이 아니라 홉스주의적 사회적 원자론이라는 더 넓은 배경 전통에서 유래된, 이기성에 관한 매우 단순한 개념이 사용되고, 그것이 인간들의 행동을 비롯하여 모든 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제시된다. 2장에서는 이것이 개인주의의 최근 역사와 어떻게 들어맞는지 논의하는데,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의 시대 동안 다양한 이기주의적 사유 노선들이 그 신조를 점점 더 극단을 향해 추동하도록 어떻게 수렴되었는지를 특별히 언급한다. 그 다음에 생존 투쟁에 관한 이런 호전적인 이기주의적 해석에 대해 일찌기 T. H. 헉슬리가 기여한 점이 언급되고, 다윈의 견해와 이른바 그의 추종자들의 견해 사이의 차이점들이 특히 두드러진 집단선택에 관한 논쟁들을 논의함으로써 2장이 끝난다. 3장과 4장에서는 다윈의 접근방식이 느낌과 이성이 거의 대립적인 것―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별개의 대안적 능력―으로 흔히 취급된 전통적인 철학적 논쟁들로부터 어떻게 유용한 변화를 제공하는지 논의된다. 그 논의는, 합리성이 느낌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서로 다른 종류의 느낌들을 결합하는 기법으 로서 나타나는, 더 사용하기 좋은 다윈의 모형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런 시각이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특히 인간들과 다른 동물들의 관계에 관한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관념들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해한다. 다윈은 다른 사회적 동물들의 생활에 이미 친근한 질서와 협동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사실상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지적하고, 그래서 우리 자신의 "동물적 본성"이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대체로 종 차이는 "종류가 아닌 정도의" 차이라는 그의 진술은 정말로 불쾌하게 환원적인 것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니체가 중요한 개인주의 예언가였지만 도덕의 진화에 관해 다윈의 견해와 상당히 가까운 견해를 어떻게 견지했는지 특별히 언급된다. 마지막 두 개의 장에서는 진행된 논의 전체에 의해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총괄하여 정리되며, 그것들과 관련하여 이제 출현하는 인도하는 실들이 한데 모인다. 이런 문제들은, 내가 제시했듯이, 세 가지 주요한 종류의 문제들―형이상학적, 생물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문제―이다. 형이상학적 문제 우선, 신다윈주의자들의 자신만만한 선언들에 이끌려, 우주의 의미에 관한 방대한 주제를 고려하자. 도킨스와 피터 애트킨스 등은 우주란 사실적이고, 과학적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다윈주의적인 것으로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생물권―또는 때때로 우주 전체―은 무의미하다고 간주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근거는 그것이 그들이 일종의 우연, 또는 자크 모노가 서술했듯이, 복권일 뿐이라고 제시하는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최초의 3분>의 마지막에 서술했듯이, "이것은 압도적으로 적대적인 우주이다 ... 우주가 더욱 더 이해가능한 듯 보일수록 또한 그것은 더욱 더 무의미한 듯 보인다" 고 결론짓는다. 그렇지만 다윈은 전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의 꽤 소박한 기독교를 버렸지만 여전히 우주적 질서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질서를 정신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초월적인 것에 관한 의문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확실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이런 견해는 우리의 능력들이 대체로 더 평범한 용도들을 위해 진화했다는 생각과 잘 들어 맞는다. 그런데 또한 그의 잠정적인 태도는, 우주적 질서에서 출현하고 있는 우연의 일치점들―아무 이유도 부여 될 수 없는, 우주 상수와 관련된 것들과 같은 전적으로 특정한 배치들―에 감명받는 오늘날의 많은 물리 학자들의 태도와도 잘 들어맞는다. 이것들은 대단히 일어날 성싶지 않는 듯 보이는 사실들이지만, 그것들이 없다면 생명, 또는 사실상 물질 세계 전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과학자들―상당히 격렬하게 세속적인 일부 과학자들을 비롯하여―이, 우주가 무작위 적임에 틀림없다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적이나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결국 무작위성은 도대체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일은 추론의 문제라기보다 기질과 지적 성향의 문제이다. 생물학적 문제 브라이언 굿윈과 사이먼 콘웨이 모리스 같은 과학자들은, 제리 포더 같은 철학자들과 더불어, 자체 구성에 있어서 유기체들도 자연선택과 명백히 무관한 적극적인 경향들을 나타낸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이런 사유를 전개했다. 사실상 그런 경향들은 자연선택이 적용되는 원료를 제공하는 데 필요하다. 돌연변이만으로는 원료 전부를 생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기체적 층위에서도 결정 형성과 같은 일에서 나타나는 자기조직화―자연적 창조성―는 유기체적 형태의 명백한 여러 특징들을 분명히 설명하며, 더 미묘한 것들에서도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듯 보인다. 진화 도중에, 유기체들은 어떤 명백한 기계적 이유도 나타나지는 않지만 자연적으로 선호되는 듯 보이는 어떤 형태들에 반복적으로 수렴했다. 이것은 진화에서 외부로부터의 선택이 흔히 가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선택 자체는 사실상 복권과 매우 흡사하지 않는데, 돌연변이에 의해 제공되는 우연의 요소가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이해가능한 연속성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권은 실제로 대단히 인공적인 문명의 산물이지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기체적 세계뿐 아니라 무기체적 세계에서도, 물질 자체가 저런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는 경향을 지니는 듯 보인다.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생기를 불어 넣는 내재적 신이라는 전통적인 신학적 관념이 이것과 완전히 양립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데 십칠 세기 모형의 어떤 외재적인 제작자 신도 필요하지 않다. 그 문제에 대한 다윈 자신의 견해는 이런 관념에 상당히 가깝다. 그는 자연선택이 진화에서 변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연선택이 보편적인 설명 원리라고 결코 제안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다른 진화적 원인들이 탐구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행함으로써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하고 있다. 심리적 문제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동기라는 중요한 주제로 되돌아 간다. 이기주의는 진화에 관한 이론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뒷받침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한 다음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기주의의 두 가지 형식―홉스주의적 형식과 니체주의적 형식―을 살펴보고, 그것들 자체의 견지에서 그것들의 장단점을 고려한다. 이런 두 가지 사고방식은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형식의 개인주의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것들 각각은 몇 가지 대단한, 영원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만 둘 다 사람들이 도덕적 예언자로부터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 보편적인 지침을 주지 않았다. 그것들 각각은 특수한 시대의 과잉과 남용에 주의하도록 발명되었다. 홉스는 십칠 세기에 사람들을 종교 전쟁에 몰아 넣은 자기 희생의 찬양이 틀렸음을 밝히기 위해 이기심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평화를 유지하고 여러분의 사회를 강화하라.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럽게 죽기보다 안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체는 부르주아적 교훈이 철저히 학습된 이후에 도착했다. 그는 그것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고 이해했고, 그래서 그는 십구 세기 삶의 현실 안주적인 기만성을 폭로 하기 위해 고독과 자기 주장을 찬양했다. 이런 두 가지 항의는 확실히 필요했으며, 둘 다 여전히 가치가 있다. 둘 다 현재 개인주의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그것들 사이의 충돌이 보여주듯이, 그것들 각각은 도덕적 풍경의 일부일 뿐이지 전체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시대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 결론 더 넓은 시각 이 책에서 우리는 매우 단순한 해답이 있을 수 없는 천 한 가지 이유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핵심은, 다윈이 지적했듯이, 무분별하게도 자신의 다양한 동기들 사이의 충돌을 의식하게 된 사회적 동물은 결코 삶이 직설적이라고 깨닫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서로 다른 목적들을 조화시키는 작업이 항상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단순성을 찾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십칠 세기 사상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것이 최종 진실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그 작업의 일부를 우리 스스로 행해야 할 것이다. 내게는 다윈의 탐구가 여기서 정말 도움이 되는 듯 보인다. 그것은 동물의 맥락에서 출발해지만, 인간적 성질들을 다른 동물들의 성질들로 단순히 환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특수한 인간적 어려움과 성취를 제대로 다룬다. 그것은 갈등의 인식, 자기 지식의 증가로 인해 우리 조상들이 점차로 알게 되었음에 틀림없는 동기의 충돌들, 다른 동물들도 경험하지만 그것들은 다소간 순간을 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만 경험하는 충돌들에 중점을 둔다. 여기서 우리의 어려움―그리고 우리의 큰 축복―은 우리가 훨씬 더 긴 시간의 조망 속에서 산다는 점이다. 더 장기적인 우리 기억은, 다윈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그저 불활성의 저장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 하는 논평자인데, 잊는 것이 더 나은 것들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킨다. 이것은 타자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현전하고 항상 고려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계속해서 서로 영향 을 미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흔히 고독이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전적으로 고립된 존재들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는 개별적 존재이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런 두 조건 사이의 상호작용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기쁨 대부분과 우리의 문제 대부분을 함께 얻게 된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업무를 위해서 우리는 집단들을 필요로 하며(연극, 예배, 가족, 축구나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악을 생각하자) 그런 집단들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홉스가 매우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소망이 솟구쳐서 절대적 우선성을 요구 하는 때도 있다. 이런 요구들의 균형을 잡는 것이 모든 인간 문화에서 핵심적인 과업이다. 사실상 우리의 삶은 일인무들의 집합이 아니라, 크기가 매우 다양한 집단들이 연기하는 일련의 동작들 가운데서 일인무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엄청나게 뒤얽힌 대규모의 춤이다. 거리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에 항상 어리둥절했던 나는 1945년 5월에 트라팔가 광장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전쟁의 종식을 경축하면서 이 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발견했을 때, 나 스스로 집단들의 다양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동심원들이 그냥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그것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면서, 돌아다닌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때때로 고독한 행위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이것은 때때로 올바른 것 으로 판명될 수 있다. 특별히 그것은 청년들, 특히 십대들에게 일어나는데, 그들이 최근의 니체 이후의 개인주의적 선전이 대체로 겨냥해 온 대상이다. 그들은 흔히 일인무를 필요로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결국 그들을 새로운 집단으로 귀속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이런 다양한 단계가 교대로 일어나야 하며, 그것들은 흔히 예측할 수 없게 일어난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 경험의 풍요로움을 구성하게 된다.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는 고독과 사교성에 대한 욕구 사이의 흔히 투덜대는 대화가 계속 진행되고 우리 삶의 자산의 필수적인 일부를 이룬다. 그렇지만 지난 삼 세기 동안 서양인들은 대체로 이 대화의 개인주의 쪽에 집중했다. 탁월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위해 계속 외쳤고 그것을 얻어내곤 했다. 우리는 많은 일인무를 원하지만, 삶은 자체의 일반적인 도착성으로 인해 여전히 여느 때처럼 복잡하다. 이기주의적 노선에 따라 삶을 단순화한 홉스와 니체 같은 이론가들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심리학적 진실 을 말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전제 군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우리 본성의 여러 측면들이 더 현실적으로 수용되는 더 넓은 맥락 속에 놓을 필요가 있다. 성숙함에 관하여 가장 명백하게 이것은, 최근의 정치적 사유와 경제적 사유에서 나타나는 경쟁에 대한 강조가 유해한 신화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 진화에 관한 이른바 과학적 이야기는 환상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 뒤에는 인간의 삶에서 독립의 중요성에 관한, 계몽주의에 핵심적인, 더 일반적인 관념, 성인이라면 항상 나름대로 자율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관념―외부의 누군가로부터 도움이나 영향을 받는 것은 유치하다고 하는―이 놓여 있다. 우리 문화 속의 이런 목소리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을 비인격화해야 하고,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기독교 사상이 이미 그랬듯이, 이교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자연 세계와 동족이며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 혈족적 유대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아니면 신에 사회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래서 완전히 자유롭고, 자기창조적이며, 외부로부터의 어떤 고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되라고 말한다. 샤르트르가 서술하듯이, 인간은 그가 스스로 구성하는 것일 뿐이다 ... 그런 자기 투사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 는다 ... 인간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의도하는 것일 때에만 실존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원하기 또는 의지하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현재의 우리로 만든 후에 내리는 의식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 또는,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독립에 대한 가장 엄밀한 시험이다." 이 자유로운 자아가, 스스로를 보존하려고 노력할 때, 그것이 단지 본래의 것의 상당히 불가사의한 파편이 될 때까지 축소된 듯이 보이는 방식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샤르트르가 이해했듯이, 이 소중한 파편은 소망을 포함할 수 없는데, 소망은 외부를 향해 뻗으며 호르몬 같은 물리적 원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외부 원인들에 의해 산출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을 흔히 인용하지 않지만, 오래 전에 <윤리적 유인원(Ethical Primate)>에서 이것에 대해 쓴 글이 내게 여전히 옳은 듯 보인다. 오늘날 과학적 결정론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여전히 수용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가 이런 위협으로부터 도덕적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 했던 것보다 그것을 훨씬 더 급진적으로 축소시킬 수 밖에 없다. 홍수에 처한 가구주들처럼, 그들은 위층으로 계속 움직이며 점차로 더 낮은 층들을 사용하지 못 하게 된다. 더욱 더, 자유로운 것이 더 이상 전일적 자아가 아니라 그것의 내부에 있는 별개의 존재자인 듯 보인다. 칸트가 이 과정을 시작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 그런 자유로운 자아를 위협하는 요인들은 이제 그렇게 많이 외부의 폭군들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본성의 잔류 부분인 듯 보인다. 그러므로, 자유가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진정으로 성인인 인간은 자신을 이런 내부의 성으로 축소시켜 외부 세계로부터 어떤 영향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성인 상태에 관한 매우 기묘한 관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인다움은 전일적 인간으로서 조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것, 자신의 다양한 동기를 의식하고 그것들 모두를 결합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고 가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분별있게 행하기 위해서는 활력뿐 아니라 감수성도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철저히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것으로부터의 영향을 열렬히 받아 들이도록 요청한다. 그 세계도 하나의 전체―우리가 일부를 이루는 더 큰 전체―인데, 우리는 선택된 그것의 파편들만 다룰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이라는 춤은 영원히 진행될 더 큰 춤 속의 한 동작일 뿐이다. 계몽주의 시대 동안 전개되었던 십칠 세기 사상에 의해 고무된 배타적인 종류의 인간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능을 물질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체 목적을 위해 물질을 착취하고 식민화하도록 요청받은 별개의 것, 더 고등하고 외재적인 것, 이질적인 영적인 종족으로 여겼다. 또한, 상당히 두드러지게도, 이런 내향적 접근방식 덕분에 그것의 원천이며, 오늘날의 공식적인 유물론적 사조에서도 그런 전통의 자연 세계에 대한 무시를 지속시킨―사실상 그것을 심화시킨―영혼이라는 종교적 개념이 생존했다. 자연을 비인격화하면서, 확실히 이런 배타적인 종류의 인간주의는 신화들의 한 집합을 더 현실적이지 않 으면서 훨씬 더 파괴적인 다른 한 집합―물리적 세계를 우리에 의해 전유되기에만 적합한, 사소하고, 생명이 없으며, 무가치한 물질, 즉 주체들이 없는 객체들의 죽은 세계로 그리는 가공의 심상―으로 대체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깨닫지도 못한 채 피해를 매우 많이 입혔으며, 우리가 파괴하고 있었던 것과 우리 자신의 연속성에 관해 결국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논의된 그런 종류들의 개인주의는, 우리의 사회생활과 정치생활을 왜곡할 뿐 아니라 이런 피해 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하는 데 있어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다. 매리 미즐리(Mary Midgley)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