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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
Science and Art
과학적 세계관은 특정한 인간관을 상정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상화된 과학자는 철저히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식 생산은 이상적으로 다음과 같다.
과학자는 질병 같은 어떤 미지의 현상을 만나고, 하나의 가설을 구성한다.
그 다음에 그는 반복 가능하고 여타의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별적 단계들로 구성된, 방법론적
으로 제어된 과정을 통해서 이 가설을 정당화하거나 거부한다.
이 방법을 정초한 사람은 데카르트인데, 그는 우리가 최소한 한 번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의심하며,
거기서부터 합리적으로 정당화되는 새로운 과학을 확립한다고 넌지시 주장했다.
그 다음에, 이상화된 과학적 방법으로, 완전히 중립적인 가설을 통해서 세계관을 발달시켜야 한다.
취해야 할 모든 단계는 이런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 지식의 영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입장은 이상적인 것일 뿐 아니라 허구적인 것인데, 우리는 후속적으로 전개되는 이론에
비추어 항상 정당화되지 않은 어떤 것, 그리고 심지어 정당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한다.
과학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지금까지 추동하는 데카르트적 이상은 우리의 믿음들 각각이 과학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가설인 것처럼 과학과 합리적 사유에 접근한다.
그런데 우리 믿음들의 대부분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데이트를 하면서 데이트 상대가 서서히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확신할 때,
우리는 과학적 가설을 구성한 다음에 이것이 맞는지 여부를 방법론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글쎄,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런 조사는 모든 데이트들의 절대적 다수의 성공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추정하
건대 단 한 번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고찰이 정치적 상황이나 미학적 상황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현 세대의 연구자들이 인간 생활의
그런 영역들을 이른바 우리 뇌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인 것처럼 조사하지 못하게 위협하지는 않는다.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감상에 수반되는 신경적 과정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안되었다.
이것은 지지할 수 없는 형태의 구성주의를 가정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예술이 형태 인식
―이전에 인간들이 동물계에서 벌인 생존 투쟁에 마침 도움이 된 자연적으로 선택된 습관의 현실화―의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예술의 질이 우리의 우연적인 감각적 감상 인자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햄릿>,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베토벤의 교향곡, 또는 여러 시기에 걸쳐 전개된 피카소
작품의 발달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교한 지능 검사가 아닌데, 그런 검사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모양이나 수열을 인식하는 데 정말로 더 뛰어날 것이다.
예술 작품의 의미는 우리가 그것이 아름답다고 깨닫는다는 사실에서만 추구되어야 한다는 관념도 거부
되어야 하는데, 특히 그것은 관객, 독자 또는 청자들의 내부에서 어떤 신경 자극들이 촉발되어서 그것이
아름답고 깨닫는다는 오도된 관념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견해들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9세기와 20세기에 나타난 다양한 분파에서 예술을 다루는
다양한 이론들의 분야에 속하는 거의 모든 작업에 의해 반박되었다.
물론, 비슷한 견지에서, 특정한 색상 형태들을 조사하거나, 또는 우리 인간들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외관상 움직임의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형태들을 조사하여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경 체계에서
배선된 구조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예컨대,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나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의 양식
적 양태들을 이해하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외관상 움직임이 우리 뇌에서 배선된 구조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어떤
목적에 유용할 것이지만,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정말로 향상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속하는 한 특정한 회화를 좋아하는지 여부, 그것이 물리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끄는지 여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좋은 느낌이 드는지 여부가 이 시대에 속하는
그의 작품의 실제적 의미에 대해 부차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것이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가 귀결되는 것일 것이라는 관념은 추함과 왜곡의 미학 덕분에
현대 미술에 의해 기반이 약화되는 관념이다.)
피카소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미술사에 관한 지식, 창의적 상상력 그리고 새로운 해석들에
대한 개방성의 조합이다.
이런 층위에서, 피카소를 이해하는 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잠을 잘 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나 화랑에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능한 기회에 현대 예술은 과학적 세계관에 반하는 것으로 판명된다는 테제를 입증
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심미적 운동과 각각의 예술가는 예술적 생산이 결국 자연과학적 과정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예를 들면, 제프 쿤스(Jeff Koons)의 하이퍼-팝 문화 오브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었더라면 만들어지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런 오브제들은 예술가의 창의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자체의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기술의 결과물이다.
내 입장을 약간 더 구체화하기 위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행위 회화" 작품들 가운데 하나,
예를 들면 1949년 작 <넘버 8(Number 8)>을 살펴보자.
일견 그것은 채색된 배경 위에 물감을 튀긴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이 회화의 의미를 망라한다면, 이 시기에 그려진 폴록의 모든 작품들은 결국 동일할 것이고,
그래서 기껏해야 어떤 주관적 의견을 갖고서 어느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자신의 느낌에 대한 인과적 배경을 조사하기 위해 신경과학적 방법들을 채용함으로써 이것을
약간 객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폴락의 핵심을 완전히 놓친다.
행위 회화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실제 회화이기도 하다.
특히 이것은, 행위 회화가 대단히 특정한 동학을 갖추고 있고, 그래서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들로 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그리고 단순히 그것이 아름답다고 깨닫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색상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정색에 집중하여 그것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인상이 명멸하기 시작하며, 검은 점들과 무작위적인 선들이 유의미해지고 움직이
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자신의 시각을 바꾸어서 녹색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데, 또는 배경을 강조하여 다른 방향으로
그림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상징적 회화를 밝히기 위해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회화는 그것의 의미가 드러나도록 정돈된, 캔버스 위에 칠해진 색상들이다.
어떤 회화를 이해하는 것은 예술적 의도의 표현으로서 색상의 동학을 이해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폴록에 의해 일반적으로 가정되어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폴록은, 어떤 예술 작품을 읽을 때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나아가는지 보여주는, 이른바 메타
회화를 제작했는데, 우리는 미술사에 대한 자신의 배경 지식과 자발적인 통찰에 호소하여 얻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과 논의하게 되는 다양한 해석들을 고찰하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색상들의 궤적들을
따라가면서 다양한 층위들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그래서 폴록의 회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위,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에 직면하게
한다.
또한 그것들은 예술가의 행위를 회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에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행위 회화들이다.
이런 이해 과정은 결코 완전히 자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다.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의 자유는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을 경험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가정들과의 대면을 포함
한다.
그런데 이것은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에 의해 구상된 대로의 철학
적 해석학의 요지인데, 예술 작품은 우리 오성의 양태들을 드러내고, 그래서 자기 이해에 기여한다.
개인적 결단이나 정치적 결단, 또는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순전히 생물학적이지도 않고 수학적
으로 서술할 수도 없으며, 완전히 자의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취향의 문제도 아니다.
예술 작품의 의미가 관객의 눈에 놓여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다.
이런 견해는 예술 감상의 요건을 결여하고 있는 우군가에 의해서만 옹호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 현존의 의미가 거의 모든 영역들에서 무시될 수 있다고 시사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주, 즉 자연과학의 대상 영역와 동일한 특권적인 사실 구조의 존재를 믿기 때문
이다.
우주는 의미에 관한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이해에 관한 우리의 가정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술 작품과 인간의 의도적 행위의 순전한 현존은 이미 과학적
세계관에게 하나의 불가사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류를 화성에 정착시키겠다는 최근의 악몽 같은 "마스 원(Mars one)"의 시나리오에
요약된 욕망, 즉 의미를 회피하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권역에 거주하고자 할 때에만 불가사의한 것일
뿐이다.
프랑스 가수 카미유(Camille)가 자신의 아름다운 노래에서 서술하듯이, "화성은 아무 재미도 없다."
십구 세기 초에 이른바 독일 관념론자들(가장 두드러지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과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칸트의 구성주의를 비판적으로 거부하면서 의미에 대한 이해를 철학의
핵심에 위치시켰다.
그들은 그들이 정신[가이스트(Geist)]이라고 지칭한, 이해되어야 할 의미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가정
했는데, 독일 언어에서 인문학이 그것에 이름을 빚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은 그저 심적이거나 주관적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그것은 인간
오성의 의미 차원을 가리킨다.
이 차원은 인문학에 의해 탐구되며, 탈근대적 구성주의에 의한 정신의 성급한 거부와는 대조적으로,
정신을 회복시키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십 세기의 몇몇 프랑스 철학자들, 무엇보다도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정신"이라는 낱말은
정치적으로 수상한 범주이고 잠재의식적인 전체주의를 가리킨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폴록, 호머,
또는 <자인펠트(Seinfeld)>의 일화를 이해하기를 단념하도록 설득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상이한 방법들로 접근 가능하고 다양한 방식들로 이해될 수 있는 상이한 의미의 장들이 존재한다.
로망스 어군에 대한 연구는 물리학이나 자연과학과 꼭 마찬가지로 객관적이고 진리 속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나 이탈로 칼비노를 이해하고 싶다면 필요한 일이다.
소설에서도 자체의 의미의 장을 구성하는 관절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소설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도
대각선적 술부들에 포함될 수 있다.
정말로 그것을 무시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정신 속에 고유하게 덜 실재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순전한 무정신성(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대로)은 정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거나 그저
억압하고자 하는 불안한 시도에서 자체를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으로,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성에 대한 왜곡된 지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 속에서 우리는 가설들의 구성과 그것들을 실험적으로 입증
하거나 아니면 반증하는 후속 활동에 의존한다고 가정한다.
이런 유형의 시행착오 절차들은 유용하지만, 모든 경우에 적절하지는 않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인간과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주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데, 우리는 정신 또는 의미를 이해
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알게 된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의 유명한 해석학 철학자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에 의해 주목받게 되었는데, "이해
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
많이 인용되는 이 문장은 <진리와 방법>이라는 가다머의 주저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예술
작품의 의미와 인간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전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방법 없는 진리(이것이 그 책에 대한 더 좋은 제목이었을 것이다)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진리 추구
는 아무 방법도 없이 진척되는데, 이것은 그것이 자의적이거나 완전히 무차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호하게 규정된 "과학적 방법"의 구상된 의미에서의 방법을 좇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동료 인간들을 이해하지 않는데, 우리가 이미 채택하고 있는 뛰어
난 오성 형식들에 관한 한 그 방법은 나쁜 선택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업 파트너의 뇌에서, 또는 기업 전체에서, 또는 심지어 나라에서(예컨대 여러분이 영국의
수상이라면) 일어나는 신경 연결들을 파악하려고 해보자!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인간들에게 불가능하고 결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꽤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자유롭다는 사실―이것은 바로 그들이 항상 예측 가능한 형태들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점
을 의미한다―로 인해 정기적으로 짜증날 뿐이다.
우리가 동료 인간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 성격의 표현이고, 우리 성격은 결코 우리의 식습관, 수면
습관, 짝짓기 습관의 촣합에 불과하지 않다.
성격 자체는 훨씬 더 예술 작품과 유사한데, 오래 전부터 현대 회화 또는 현대 연극은 우리가 자신의
화가라고 넌지시 주장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창조성이다.
창조성, 상상력 그리고 독창성은 성격의 징표들이고, 그래서 그것들은 인문에서도 자연과학에서도 제거
될 수 없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독창적인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예전에 이렇게 적었다.
시대 정신은 자연과학의 사실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실일 것이고, 이 정신은 세계의 어떤 양태들
―시간에 독립적이고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을 현시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런 양태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려고 노력하며, 이렇게 시도하면서
그는 자신이 작업하는 양식의 형식들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두 과정, 즉 과학의 과정과 예술의 과정은 매우 다르지 않다.
수 세기 동안 과학과 예술 둘 다 우리가 더 멀리 떨어진 실재의 부분들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수단인
인간 언어를 구성하며, 상이한 예술 양식들뿐 아니라 정합적인 개념들의 집합들도 이 언어 속에서
상이한 낱말들이나 낱말들의 집단들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세계관의 실패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신격화하여 그것을 서툴게 이해된 종교의
수상한 이웃으로 만드는 비과학적 관념에 놓여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과학적 신무신론은 하나의 종파인데, 그것은 모든 의문들(수학의 언어로 제기
된다면)에 대답하는 객체(우주)와 더불어 모호하게 규정된 개념, "과학" 또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종교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종교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난 오백 년 동안 전개된 신학의 역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대성과 그것의 정언 명령
들이 대체로 신학적 형태들에 의해 추동되는 방식을 알 수 있을 것인데, 그것들의 세부 내용은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나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에 의해 강조된 적이 있다.
과학은 세계관을 성취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것―분자, 일식, 소설의 한 행, 또는
논증의 논리적 실수―이라면 무엇이든 설명할 뿐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우리가 또 다시 실재에 가까이 가고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사람은 정신으로 움직인다.
정신을 무시하고 우주만을 바라본다면, 사실상 인간적 의미와 접촉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현대 허무주의는 비과학적 오류, 즉 사물 자체를 우주 속 사물과 혼동하고 다른 모든 것은 생화학적으로
유발된 환각일 뿐이라고 단순히 상정하는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환영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과학적인데, 기껏해야 <그녀(Her)>, <루시(Lucy)> 또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같은 최근의 영화들처럼 과학 소설이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닥터 후(Doctor Who)>를 애호하지만(예전에 리처드 도킨스가
출현했더라도), 그것을 우리의 문제들다(시리아의 전쟁 또는 더 일반적으로 중동의 갈등 같은)을 해결할
임박한 현실로 오인하지 않는다.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Why the World Does Not Ex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