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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때/ 정읍사 문학상 최우수상/ 장금식 물이끼 같은 물때다. 집중적으로 내린 장맛비의 폭격에 마음을 드러낸 색. 막지 못한 비바람, 부조화와 불균형의 연결고리에 마지못해 끼어있는, 못내 아픈 풍경의 색이다. 진하고 연한 초록과 거뭇거뭇하고 우중충한 초록 바닥이다. 자연 속, 큰 바위틈에 낀 녹색 이끼를 보면 절벽 모습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까, 신의 조화라며 감탄을 연발할 텐데. 단독주택 시멘트 바닥 마당에 낀 물때는 미와 조금 거리가 멀다. 지우고 싶다. 깔끔한 성격 때문이 아니고 색에 대한 어떤 편견 때문에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여주기 싫은 내 상처의 환부 같아서다. 그러나 추하고 보기 싫은, 흉한 것에서도 미를 찾아내는 예술가도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뜻 보면 흙 마당에 웃자란 잔디 같다. 추함이 있어야 미가 돋보이고 가시밭길을 지나 봐야 험난한 통과의 의미를 아는 이치니까. 그래도 이런 바닥을 보면 닦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장마철이면 이삼일에 한 번씩 물때를 벗긴다. 손님이 오기라도 하면 익숙하지 않은 마당에 미끄러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어서다. 집주인인 나는 조심하면 되지만 무엇보다 미관이 지저분한 게 걸려 온 힘을 기울인다. 오른손 왼손 번갈아 닦고 물 호스로 씻어내린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한다. 바닥이 규칙적으로 깎아 놓은 듯 평평하면 청소도 수월할 텐데 그렇지 않아 힘들다. 살짝 파인 곳도 있고, 조금 봉긋한 곳도 있어 서로 다른 높낮이의 바닥은 가지런하지 못한, 힘없는 내적 절규가 만들어낸 요철 문양 같다. 거무죽죽한 물때가 그려놓은 지도는 동그라미도, 세모도, 네모도 아닌 정형화된 어떤 모양이 아니다. 항아리 주변이나 화분 주변엔 물의 마찰이 더 많았던지 물때가 짙다. 옴폭 들어간 곳도 물이 고인 탓에 물때의 겹이 두껍고 시선을 돌리게 한다. 자꾸 보고 있으니 얕은산, 높은산, 살짝 가파른 구릉, 낮은 언덕, 높은 언덕, 집 근처 동산을 한곳에 그려놓은 등고선 같다. 시공간의 차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비비대다가 그만둔 인생들의 집합소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그들의 발자국이 남긴 흔적, 생의 지도 같은 것이다. 두께나 색의 명도나 채도에 따라 삶의 상처가 깊고 얕음을 보여준다.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의 차이만 있는 암울한 내 처지의 현주소 같다. 늘 평지에서 오밀조밀한 반경만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던 삶이 가파른 언덕에서 헉헉거리는 안쓰러움으로 바뀌어 가끔 자기연민에 빠진다. 남편을 잃은 후, 내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마저 공황 상태에 빠져 정신병원 도움을 받아야 했다. 병원에 홀로 두고 헤어질 때, 복도에서 둘이 끌어안고 한없이 목놓아 울던 그 날, 나 홀로 집에 돌아와 고통의 문을 닫고 싶어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통곡하던 그 날, 갑작스레 맞닥뜨린 현실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보겠다고 목 빼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 날, 그 마당이라 더 그렇다. 재난은 겹쳐오고 아픔과 슬픔이 폭우 내리듯 내 앞을 가로막던 그때 그 마당이다. 마음 깊은 곳까지 축축함을 말리지 못한 지가 2년이 넘었다. 목젖까지 차오른 물기를 다 삼키든지 한 줌 물기 없이 완전히 말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객관화하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지려나. 숨 가쁜 삶의 언덕에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디며 이제 한 발자국씩 내려가고 싶다. 조금 상황이 좋아졌다고, 잠을 조금 잘 수 있다고 안도하면 발을 헛디딜까 두렵기도 하다. 다시 이중의 고를 겪게 되면 재생의 힘은 아득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안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라는 안희연 시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의 시어 하나하나에 기대고 싶다.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 처절한 풍경에 위안을 주는 시다. 아픔과 빈 둥지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남은 세 식구가 이리저리 헤매며 에둘러 제 길을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흘렀다. 시인의 말대로 시간은 반으로 접혀있고 한참 지나고 보니 다른 풍경이 되어있다.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고뇌의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내리막길엔 조금의 여유가 생긴다. 길옆의 푸른 잎과 날아드는 나비를 본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린다. 하늘도 우울한 색이 아니고 새파랗다. 처절함과 비참함을 걷어낸 고유한 색이다. 푸른 잎도 나비도 새도 하늘도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하니 잃어버림에 대한 다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물때를 반쯤 청소했다. 상처의 반은 지워진 듯하다. 빨리 해치우자는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고통을 잠시 잊은 듯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하며 청소된 부분을 본다. 허리를 편다. 손에는 벌써 물집이 생겨 찌르는 듯 알알하나 자국 없는 안경을 낀, 얼룩 없는 거울 앞에 선 듯 기분이 맑아진다. 청소한 쪽과 남은 쪽의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남은 절반도 서둘러 지워야겠다 싶어 다시 호스와 솔을 들고 빡빡 더 세게 문지른다. 물때 지우기는 보기 싫은 내 아픔 같아 한 것이지만 얕은산을 지나 구릉을 넘고 헉헉거리며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삶을 마주한 듯, 고통의 시간을 절반 이상을 접은 듯한, 씻는 과정의 씻김굿인 셈이다. 상처로 쌓인 때도 같이 쓸어냈을 것 같다. 어둠과 아픔을 회피하진 않았고 그저 시선을 돌리기만 한 것 같은데 어두컴컴한 진초록 물때가 내 삶을 조명하고 어둠이 밝음을 안내해주었다. 일그러져 보였던 바닥이 평평하게 보인다. 비틀거리던 감정을 추스르고 감정에 얼룩진 물때 벗기느라 굽혔던 허리 다시 올곧게 편다. 흔들리던 마음을 조금씩 땅바닥에 붙여가며 이제 시간을 반의반으로 접는 연습을 해야겠다. 마당의 질감이 발바닥에 착 붙는다. 여름 장마가 가을에 시간을 내줄 무렵이면 바람이 낙엽을 내 마당에 소복이 옮겨놓을 것이다. 얼룩진 생의 질곡을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듯이. 앞산이 마당을 내려다본다. 숲에서 지저귀던 새들이 내 마음 마당에 포르르 날아든다. 초저녁달 그림자를 품은 마당은 저녁 햇살을 숙연히 받아들인다. |
결로현상/ 장금식
싸한 바람과 냉기 어린 욕실이다. 외부와 맞닿은 내부 벽면과 천장 쪽에 몽글몽글 수증기 방울이 수없이 맺혀 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벽면 표정 읽기가 못내 성가시다. 벽이 우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서러운가. 보는 내가 서러운가. 올려다보니 물방울이 눈물방울로 보인다.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 생기는 결로현상이다.
생길 때마다 닦아주지 않으면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아닌 물방울. 닦아도 조금 지나면 내 수고를 비웃듯 벽이 축축하다. 차가운 것이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이 떨어지며 부서져 바닥에선 모양 없이 그냥, 물이다. 언뜻 두려운 공포감이 스친다. 물방울이 쌓이면 엄청난 물이 고이고 급기야 욕실을 채우고 나서 거실까지 넘어오면 어떻게 감당하나. 혼자 해결해야 할 짐이 버거워진다. 겨울 욕실 풍경엔 끈적한, 축축한, 흩어진, 온기 없는 공간의 설움이 배어있다. 게다가 환기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꽃을 피워 여기저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벽은 밖을 받아들이지 않고 왜 거부하는가. 그러면서 약간의 미련 때문인지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사람을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영원한 송별을 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다. 겉으론 ‘인생무상, 죽고 사는 게 뭐 별건가’ 운운하며 철학을 말하듯 담담하게 얘기하나 속은 그렇지 않다. 그럴수록 더 그리움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내면의 나와 외면의 나, 둘의 온도 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다. 겨울이 끝나고 봄꽃이 내 마음을 환히 밝혀도 안구가 습한 건 여전할 듯하다. 보이지 않는 나를, 내 감정을 자꾸 은폐하려 하면서 방황한다. 외면은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인다. 둘의 관계는 장맛비 내릴 때 나뭇잎으로 막힌 배수로 같다. 빗물이 빠지지 않아 지상에서 회오리치듯 거칠게 회전하는 것처럼 헛돌기 과정의 연속이다. 내면의 혼란은 외면에 소리치며 빠져나가려 하나 소통 없이 서로 존재의 모호함만 확인한다.
거울에 내면을 비춰보나 화면에 나타내 보이기 싫은지 거울 뒤로 자꾸 숨는다. 겉과 속이 서로를 의심하는 게 날로 커지며 환기 없는 갑갑한 공간을 만든다. 내적 소극성과 외적 진솔함의 대립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말할 상대가 없다. 내가 나를 밀어낸다. 인력의 원리를 사용해도 결로를 막을까 말까 한데, 척력으로 밀어내니 더욱 심하다.
남편과 사별 후 2년이 지났다. 딸은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옮겨 편히 지내라고 진즉에 내보냈고, 아들에겐 독립할 나이가 됐으니 혼자 나가 살아보라고 최근에 내보냈다. 그게 내 진심이었을까, 의심도 가지만 일단 나 홀로 살겠노라고 저질렀다. 최근까지 함께 살던 아들마저 독립시키니 첫 한 달 동안은 안절부절 혼란과 불안이 거듭돼 눈물로 지새웠다. 아들딸이 ‘엄마, 괜찮아?’하고 물으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너무 편하고 좋다’고. 겉과 속이 다른 나의 말과 행동은 어쩌면 자신을 스스로 배신한 부정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방학 때면 남편과 늘 여행만 다녔던 내가 이제 홀로, 외로이, 더욱 셀프 외로움의 처소를 지키는 지킴이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나에게 이득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진절머리나게 외로운 감정 끄나풀 하나만 남는다. 아들딸을 실제 심리적 추방까지 하고 자신마저 내쫓고 어두운 감정 카테고리에 가두어버리니 내적 외적 두 자아는 쉼 없이 충돌한다. 왜 그렇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눈물을 빼야 하는지. 어쩔 수 없었어. 자식들도 다 각자 인생을 살아야 하니 마냥 어미가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화장실 문턱에서 다시 욕실 내부를 바라보며 습기 가득한 공기에 화들짝, 문을 닫아버리며 거실에 주저앉는다. 외부에 집중하자고 말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린다. 내가 나를 잠식할 수도 있겠구나. 흐릿한 두려움이 작은 장벽이 될 수 있을까 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 닦기에 혼신을 기울인다. 무의식의 나만 존재하면 내가 하나일 텐데 둘의 내가 나를 괴롭힌다. 둘 사이 진실이 없어 소통 부재로 결로현상을 점점 키운다. 볼수록 자기연민과 삶의 비루함에 지친다. 어찌 보면 뽀송뽀송한 벽과 환한 빛 비춰주던 옛날이 그리워 그럴지도 모르겠다.
두 명의 나를 해체하는 방법, 결로 없애기. 나를 무화無化하는 방법은 뭘까? 죽은 남편을 불러올 수 없다. 내보낸 자식을 도로 불러들일 수도 없다. 사진첩을 꺼내 품에 안고 그리움의 세계로 빠져드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거실의 따뜻한 기운을 화장실 벽면과 마주하게 해주면 눈물방울이 줄어들려나. 아이들에게 그냥 힘들다, 외롭다, 아프다 등 있는 그대로의 날 감정을 보이면 괜찮을까.
아니야. 고개를 흔든다. 내면의 습하고 축축한 감정 차단용으로 남편이 떠오르면 바로 기도와 명상을 하면 낫겠지. 이것도 아니야. 기도하면 자꾸 잡념이 들어와 집중이 안 된다. 환기를 자주 해볼까. 문을 온종일 열어놓듯 나를 활짝 열면 겉과 속마음의 온도 차가 줄어들까. 추워도 문 열고 바깥으로 나가면 기분전환이 되고, 육체는 정신에 정신은 육체에 서로 빈 곳을 채우며 상부상조할 수 있으려나.
결로를 막을 방법이 이론상으론 여러 개가 있다. 그 모든 게 아직 몸과 마음으로 들어와 체화되지 않는다. 애도의 시간이 충분치 않은지, 아예 결로를 제거하고 싶지 않은지 어떤 것이든 섣불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외부의 내가 내부의 힘을 뺏고 내부의 내가 외부의 힘을 앗아 가더라도 내적절규만 있을 뿐, 수긍이 힘들다. 슬프게도 나는 내가 나의 경계선을 정하지 못한다. 어수선함의 카오스가 내 집이고 내 욕실이다. 결로를 막으려 애쓰기보다 당분간 결로와 함께함이 더 나을 것 같다. 결로, 이슬 맺힘이라는 뜻처럼 몽글한 서정, 긍정의 신호를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 감정이 더욱 단단해지기까지는 두 개의 나로 살아야 할까 보다.
앞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가슴에 파고든다. 바람이 세지고 가슴은 웅크린다. 골이 진 가슴 사이사이 그리움과 슬픔이 다 삭혀질 때까지 결로는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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