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과 우리말 / 강원 정선 아우라지
아우내와 아우름
두 물줄기가 아우른대서 나온 이름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릿골 동백이 다 떨어지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잠깐 님 그리워
난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게.
('아우라지 아리랑' 중에서)
아우라지 아리랑
아우라지 물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을 속삭이던 처녀 총각이 있었다. 어느 날 강물의 양이 크게 불어 만나지 못하자, 두 연인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로 읊었단다. 이것이 바로 '아우라지 뱃사공아---'로 시작되는 '아우라지 아리랑'이다.
이 민요는 나루를 사이에 두고 처녀 총각이 자기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처녀가 먼저 아우라지 뱃사공 아저씨에게 싸릿골 동백이 다 떨어지기 전에 나루를 건너 달라고 하면 총각도 덩달아 잠시잠깐 님 그리워 못 살겠다고 마음을 전한다.
정선의 아우라지 나루에서는 이제는 거의 관광 목적으로 배가 움직인다. 강 양쪽 사람들이 이 나루를 이용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나루는 옛날에는 정선 고을에서 강릉 고을로 가려면 꼭 건너야 할 나루였으나, 지금은 큰길이 다른 곳으로 나 있어 이 나루를 이용할 일도 별로 없게 됐다.
솔내와 골지내가 아우러진 아우라지
'아우라지'는 강원도 정선읍에서 북동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와 유천리 사이이다. 남동쪽의 골지천(骨只川)과 북쪽의 송천(松川)의 두 갈래 물이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합수머리이다. 나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여량리의 가구미 마을과 유천리의 버드내 마을이다.
여량리의 아우라지는 조양강을 이뤄 영월로 흘러간 뒤 남한강의 상류가 된다. 폭이 좁아 겉보기엔 얕아 보이는 아우라지는 실상은 꽤나 깊다. 물이 적을 때도 깊이가 5m를 웃돈다. 지금도 나룻배가 다니지만 강물 위에 매어놓은 쇠줄을 손으로 당기면서 배를 움직여 오간다. 주로 관광용으로 이용되는데, 옛날에는 삿대나 노를 저어 건넜던 곳이다.
아우라지는 주민들이 천렵 장소로도 많이 이용하였다. 산 곱고 물 맑은 남한강 천리길 물길을 따라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터 아우라지 나루에선 각지에서 모여든 뗏사공들의 아리랑 노래가 끊이지 않았었다.
인근 동네 처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던 아우라지. 동네 처녀들이 머릿기름의 원료로 쓰이는 올동백이 유달리도 많았다던 근처 상원산 싸리골로 가려고 찾아들었다던 아우라지.
그러나, 지금은 나루터의 한옆에서 앰프 장치만이 요란하고, 그 소리 따라 강물이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잔잔히 여울져 흐를 뿐이다.
아우라지로 흘러드는 두 냇물
아우라지로 흘러드는 골지천은 '골지내'라고 부르던 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골지'는 강원도 사투리로 '골짜기'를 뜻한다. 이 내는 두타산(頭陀山)에서 발원해서 삼척의 하장면과 정선의 임계면을 거쳐 흐른다.
아우라지로 오는 또 하나의 냇줄기인 송천은 폭이 좁아 '솔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로 옮겨간 이름이다. 솔내. 한자로는 송천(松川). 그래서 ‘소나무 숲을 흐르는내’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좁은 내’라는 뜻이다. '솔'은 '작음'의 뜻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아우라지'는 이처럼 골지내와 솔내의 두 물줄기가 아울렀다고 해서 붙여진 땅이름이다.
·아울(竝)+지=아울아지
'아우라지'에서 '지'는 아무 뜻도 없는 지명형 접미사다. '골짜기'라는 뜻의 '골지', '산이 있는 곳'이란 뜻의 '둠지'처럼 '지'는 땅이름의 뒷음절로 잘 붙는다. '지'는 격음화해서 '치'가 되기도 해서 ‘아우라치’라고 하는 땅이름도 있다.
물이 아울러 '아우라지(아오라지)'로 된 땅이름은 전국에 여러 곳 있다. 강원도만 해도 이 정선군 외에 홍천군 두촌면 철정리의 아오라지, 같은 군 내면 중방대리의 아우라치, 철원군 서면 도창리의 아우라지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물이 아우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천안의 아우내도 친척 땅이름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는 충남 천안시 병천읍 일대를 흐르는 냇줄기 이름이다.
이 '아우내'란 이름을 들으면 꼭 '작은 내'라는 뜻의 이름 같다. '형과 아우'의 그 '아우'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내'는 우리말의 '아우른다'는 뜻과 '내'란 말이 합쳐져 나온 이름이다. 즉, 두 줄기의 내가 아울러서(합쳐져서) 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아우른내'의 준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벌 가운데서 '치랏내'와 '잣밭내'의 두 물줄기가 합해져 나온 이름이다. '치랏내'는 '칡밭의 내'라는 뜻의 '칠앗내'의 변한 이름으로, 한자로는 '갈전천(葛田川)'이고, '잣밭내'는 '잣나무밭 사이의 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백전천(栢田川)'이다.
물줄기가 합쳐진 주위는 너른 벌판. 그 벌판 한 모퉁이에 큰 마을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 이름 역시 아우내. 한자로는 병천(竝川)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행정구역상의 이름은 천안시 병천읍 병천리이다. 한자의 '병(竝)'은 '아우를병'자로, 한데 아우름을 뜻한다. '아우르다'의 비슷한 말로는 '어우르다'나 '어울리다'가 있다. '아우르다'는 뜻이 들어간 땅이름으로는 '아우내' 말고도 강원도 정선 땅의 '아우라지', 탄광으로 유명한 북한 함경북도의 아오지가 있다.
병천의 아우내 마을은 그 일대에서는 가장 큰 마을. 예부터 5일장이 섰는데, 장날이면 이웃 고을인 청주, 진천, 안성, 천안읍내까지에서도 삼사십리 길을 걸어 이곳으로 장을 보러 왔다.
일제 강점기 초중반인 1919년, 이곳 아우내 장터에선 큰 사건이 터졌다. 그 해 음력 3월 1일, 근처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만세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벌판 한가운데서 여러 물줄기가 아우른 아우내처럼 지방민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모두 아울러 힘차게 독립을 외치며 일본에 항거했다.
그 날은 아우내장터의 장날이라 장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 앞에서 누군가가 선창을 하자, 사람들은 미리 받은 태극기를 허리춤에서 꺼내어 모두들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앞으로 무리를 지어 나아갔다. 온 세상이 떠나갈 듯한 만세 소리. 행진하는 군중들의 수는 더욱 불어났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총칼을 휘두르며 이를 저지하였으나, 만세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이끈 사람은 유관순 열사였다. 당시의 나이가 불과 16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애띤 처녀였다.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 열사는 그 해의 양력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도 이러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서 그 일대 관청의 우리 한국인들을 찾아 협조를 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은밀히 만나 약속을 하는 등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갔다. 그리고, 음력 2월 그믐날 밤, 아우내 마을의 뒷산인 매봉 산마루에 올라가 다음날의 만세 운동의 신호로 횃불을 올렸다.
결국 그 다음날인 음력 3월 초하루, 이 아우내와 만세 운동 장터에선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일본 경찰의 손에 피를 흘리고 죽거나 다쳤으며, 이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는 일본 경찰에 붙들려 가 감옥에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당했다.
이곳 아우내 장터에서는 해마다 양력 3월 1일이면 유관순 동상 앞에서 기념식을 올리고, 그 전날인 2월 그믐 밤이면 당시의 큰일을 기념하는 봉화제(烽火祭)가 열린다.
생가터 뒤에는 유 열사가 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던 '만마루'가 있고, 근처엔 독립 운동 전에 자주 넘어다니던 까치고개와 개목고개도 있다. 서원(書院)이 있던 서원말, 말처럼 생긴 말바위, 들 가운데 마을인 너븐들 등이 이 일대의 땅이름이다.
독립운동의 숨결을 간직한 아우내 냇물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기름진 들을 적시며 흐르고 있다. 그래도 이곳이 옛날 장터라고 자랑이라도 하는가? 마을엔 꽤나 오래 됐음직한 가게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당시의 모습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라도 쓰듯이.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옛날과 같은 번화한 장터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아우내'라는 이름은 두고두고 우리 겨레의 가슴에 남아 선혈들의 얼을 기리는 이름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아우른다는 뜻의 이름이 많아
아우내나 아우라지와 비슷한 땅이름에 '아울지'와 '아우지', 등이 있다.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북한의 '아오지'도 두만강의 지류들이 아울러서 붙은 땅이름이다.
지금은 '아우르다'가 '어우르다'의 작은말이지만, 이 말은 옛말 '아올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옛말 '아올다'의 부사형은 '아오로' 또는 '아올'이다.
'아오로(아올)'는 지금의 말의 '아울러'가 되어 '여럿을 한데 합하여' 또는 '여럿을 함께'의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올다'가 변한 지금의 말 '어우르다'는 '여럿을 모아서 한 덩어리나 한 판이 되게 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선 '어우르다' 같은 말 대신 '합하다' 같은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해 나가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경기도 파주의 교하(交河)도 아우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교하라는 말 자체도 두 줄기의 큰 강이 서로 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때의 이곳 땅이름은 '어을매(於乙買)'였다. 이 이름 역시 '물이 아우름'을 뜻한다. '어을'은 '어울다(아우르다)'의 뜻이고, '매'는 '물'을 나타낸다. 물이 합쳐지는 곳의 의미로 보아서는 아우라지나 아우내의 친척 땅이름에 해당한다.
두 물이 합쳐진다는 뜻의 두물머리
1974년 5월,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의 한강에 팔당댐이라는 큰 댐이 하나 생겼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과 하남시 천현동(배알미리 근처) 부근을 가로지르는 댐인데, 한강 본류에선 유일의 다목적 댐이다.
한강 물줄기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이 댐은 1966년 6월 착공, 무려 8년의 긴 공사 기간 끝에 준공되었다. 워낙 큰 공사여서 당시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울 한강에 물난리를 막기 위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팔당 지역에 이 댐을 건설하게 된 것이지만, 부족한 전기를 더 생산하고, 수도권 상수원의 확보와 관광자원 개발의 목적도 있었다.
이 근처에는 두물머리나루(양수리.兩水里), 소내나루(우천.牛川)와 움앞나루가 있었다. 두물머리나루는 마재 앞의 나루이고, 소내나루는 옛 광주군 남종면 우천리 소내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남양주시 조안읍 능내리의 움앞나루는 광주시 동부읍으로 건너가던 나루였다.
두물머리에서 ‘두물’은 두 물줄기를 뜻하는데, 하나는 북한강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강이다. 이 두 줄기의 강물이 합쳐 흐른다고 해서 두물머리이고 한자로는 양수(兩水)인 것이다.
아우라지나 아우내와 이름은 다르지만, 물줄기가 합해 흐른다는 점에서는 서로 친척 이름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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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말
-어울림 어우름 어울리다 어르다(어르고 달래다)
* 친척 땅이름
-합수(合水) 충남 천안시 광덕면 신흥리
-합수(合水) 경북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두물나드리 강원 양구군 방산면 고방산리
2022년 8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