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이 지나가니 지리산과 섬진강이 한결 고요해졌다.
밤바람 서늘하니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가 운다. 지난여름은 내게도 참으로 뜨거웠다. 열정적이었다. 지리산 입산 18년차의 촌놈 시인이 다섯 번의 사진 전시회를 마치고, 백두산까지 다녀왔다. ‘새의 눈’으로 섬진강을 내려다보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 ▲ 백두산 천지와 운무를 배경으로 피어난 호범의꼬리.
돌이켜보니 ‘그동안 나는 시에 걸맞은 사진을 찍은 것일까, 사진에 어울리는 시를 써왔던 것일까’ 궁금해졌다. 굳이 달걀과 닭의 우선순위를 따지지 않더라도, 육필의 졸시와 졸작의 사진인 ‘졸사’가 나름대로 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봄날의 그 산 그 숲속의 앵초 꽃밭 사진에는 지리산 입산 전에 쓴 졸시 ‘북극성’을 올리고, 푸른 밤안개의 현호색 사진에는 ‘족필’을 올렸다.
처음으로 직접 해본 손글씨 넣기 포토샵-. 시와 사진과 포토샵까지 독학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사실 말이 독학이지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이러고 놀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할수록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다. 포토포엠(PHOTO POEM) ‘현호색- 족필’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 큰 사진으로 걸고, ‘앵초- 북극성’ 등 네 가지 버전의 작은 액자 50개는 대구 독립영화전용관 55갤러리에 내놓았다.
특히 대구 전시를 마무리하며 청춘의 열정을 그대로 보여 준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들- 스승과 선배와 후배와 페이스북 친구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불경기의 시절에 사진도 ‘더블 완판’의 기록을 세웠다. 사진 전시로는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라고들 했다. 열악한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수익의 50%를 주기로 했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니 더없이 기뻤다. 역시 ‘시민단체 기금마련 전시’는 일반 갤러리와는 전혀 다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내 청춘의 도시 대구에 ‘돌아온 탕자’가 되어 참으로 오랜만에 질풍노도의 시절들을 떠올렸다. 다시 열정과 열망의 삶을 살게 하는 잔치 한마당이었다.
그리고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다. 반가운 이들과 ‘시인들의 사진전’ 뒤풀이를 신명나게 끝내고, 다음날 세검정의 어느 갤러리에서 ‘시노래 콘서트’까지 잘 마치고, 인사동 입구 강고은 시인의 카페 ‘무다헌’ 들렀다가 너무나 반가운 선생과 선배들을 만났다. 바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시인이자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백학기 형님, 박철 시인 등과 더불어 유쾌한 술자리를 가졌다. 백학기 형님은 이미 그날 초저녁에 신현림 시인과 더불어 세검정 행사장 아래 전주 삼거리식당에서 1차 술자리를 가졌다. 신현림 시인이나 백학기 시인은 대략 20년 만에 만난 듯하다. 고맙고 반갑고 또 생각할수록 더 고마웠다.
그날 저녁 정희성 선생과 얘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의 명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딱 맞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이 사진은 선생님 시에만 딱 맞는 것 같다”고.
그리고 부탁을 드렸다. 선생의 육필시를 받고 싶다고. 흔쾌히 수락한 선생님은 정말 그 이틀 뒤에 육필시를 사진으로 찍어 이메일로 보내왔다. 선생의 멋진 풍모에 어울리는 단아한 글씨체였다.
지난 1월 5일에 찍은 해질녘 섬징강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정희성 시인의 육필시를 사진에 올리고 직접 A2 크기 프린트를 했다. 내가 봐도 그럴 듯했다.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존경하는 정희성 선생에게 보내드릴 내 나름의 선물이었다. 사진전을 끝내고 잠시 숨을 고른 뒤 7월 27일부터 31일까지 4박5일간 백두산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아마도 내가 백두산에 가 있을 무렵에 사진액자가 배달될 것이었다. 정희성 선생은 섬진강을 들여다보고, 그 순간 나는 백두산 천지를 오래 바라볼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 ▲ 2 드론으로 항공 촬영한 지리산 하동 중기마을 모습. 3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피어난 바위구절초.
백두산 천지에 핀 호범꼬리 바위구절초
곧바로 가벼운 짐을 꾸린 뒤 백두산에 가기 위해 청주 공항으로 향했다. 경의선 열차가 이어지기 전에는 백두산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데다 벌써 오래전부터 백두산 야생화가 너무나 보고 싶었기에 대전의 벗 설산 김영기의 고마운 제안에 흔쾌히 동참하고 말았다. 지난해 설산과 함께한 황산 여행도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여름철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내게는 모두 소중한 풍경이니 백두산 날씨가 맑으면 맑아서 좋고, 흐리고 바람 불고 비가 내리면 그 또한 몽유운무화의 가능성이 높아지니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그토록 북한 땅을 통해 가고 싶었던 백두산! 2005년의 민족작가대회도 성에 안 차 가지 않고, 한반도 종단열차가 개통되기만을 기다려왔지만 어쩔 수 없이 비행기로 청주공항에서 연길로 날아가 백두산 천지에 두 번 올랐다. 허탈할 정도로 너무나 가까웠다. 청주에서 연길 직항로 2시간10분, 버스로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를 지나 셔틀버스 갈아타며 해발 2,000m고지 이상을 치고 올라 백두산의 북파와 서파를 오르는 데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대전의 ‘지리산 벗’ 설산 김영기와 함께한 백두산행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분단현실과 연변동포들, 그리고 급부상하는 중국의 현실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가 쏟아지는 북파의 백두산에서 포기할 때쯤 슬쩍 얼굴을 보여 준 천지가 너무나 고마웠고, 다음날 아침 폭우가 그친 뒤 서파로 올랐을 때 더 환하게 얼굴을 보여 주니 그야말로 감개무량 그 자체였다. 청명한 하늘이 비친 봄가을의 풍광은 아니지만 인증 샷을 찍었으니 여한이 없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사진으로만 보던 장백폭포를 보았다. 그런데 중국의 장백산은 우리의 백두산인데 장백폭포는 왜 백두폭포라 부르지 않는지 궁금했다. 물론 비룡폭포라는 멋진 말이 있기는 하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야생화 너머의 폭포사진을 담지 못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엄하기만 했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핀, 그것도 중국이 아닌 북한 영토에 피어난 호범꼬리와 바위구절초 등이 눈물겨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백두산의 절경을 다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동안 대세를 이루던 한국 관광객들보다 휴가철의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휩쓸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백두산은 발 디딜 틈 없는 만원이었다. 시간에 쫓기는 패키지여행의 한계도 있지만, 정해진 통행로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니 풍경이나 야생화 사진도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려웠다.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허용해 오던 백두산 트레킹을 제한하고, 통행로 이외의 곳은 출입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으니 백두산 보전의 측면에서는 정말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산인해의 중국인들이 백두산 예저기를 함부로 돌아다닌다면 어찌 되겠는가. 북한을 통해 남파로 오르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내려놓고 백두산 천지의 첫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리산의 옛 이름이 두류산 아닌가.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기운이 지리산에 이르니 나는 지리산에 살아도 날마다 백두산을 보고, 백두산의 기운을 받는 것이다. 섬진강 물을 보며 백두산 천지를 떠올렸다. 무더위 속의 지리산과 섬진강에도 가을처럼 푸르디푸른 하늘이 열렸다. 새벽바람이 서늘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니 입추가 지나고 있었다.
지난 8월 5일에는 경남 합천에 다녀왔다. 1박2일 동안 열린 ‘70주기 한국인 원폭피해자 추모제’ 및 ‘제4회 2015 합천 비핵·평화대회’ 참가 때문이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원폭피해자 가족들과 소설 <까마귀>의 저자인 한수산 선생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와 성황을 이뤘다. 나는 추모시 ‘마침내 때가 되었으니’를 낭독했다. 광복 70주년이자 원폭피해자 70주기, 그리고 얼마 전에 다녀온 북간도 명동촌의 고 윤동주 시인 70주기가 겹쳐 떠올랐다.
세상을 보는 눈은 참 여러 각도가 있다. 백두산에서는 해발 2,700m의 눈높이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야생화를 찍을 때는 그 꽃의 높이에 두 무릎을 꿇거나 더 낮게 얼굴을 흙 위에 바짝 붙여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일도 그렇고, 섬진강을 바라보는 일도 참으로 다양한 각도가 있다. 낮은 데서 올려다보거나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며 웃거나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 그 의미는 사뭇 남다르다. 그중에서 새의 눈으로 세상을 평평하게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꿈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다. ‘어른들의 장난감’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드론(무인항공기)이 내게로 온 것이다. 한여름 어느 날, 우리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냥 온 게 아니라 뜻밖의 놀라운 선물인 드론계의 황태자 중국 DJI사의 팬텀3 프로페셔널을 들고 온 것이다.
얼떨결에 덜컥 받기는 했는데 도대체 보답할 길이 막막했다. 겨우 내가 줄 것은 아크릴액자의 앵초 사진밖에 없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수원의 박모씨였다. 나는 그 아무 것도 제대로 해준 게 없는데, 정말 아무 조건도 없이 문득 이렇게 큰 선물을 내밀었다.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었다. 인생 똑바로 열심히 살라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