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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九死一生)
아홉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을 이르는 말이다.
九 : 아홉 구(乙/1)
死 : 죽을 사(歹/2)
一 : 한 일(一/0)
生 : 날 생(生/0)
(유의어)
기사회생(起死回生)
만사일생(萬死一生)
백사일생(百死一生)
십생구사(十生九死)
사람의 목숨은 질기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자신이 선택한 경우는 아니지만 전쟁이나 테러에 맞닥뜨려지면 초개(草芥)와 같이 죽어나고, 반면 고통을 못 이겨 그만 살았으면 하는 환자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죽을 고생을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랴 라고 성경에서도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쳤다. 그래서 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이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성어는 목숨의 소중함을 말하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겨우 살아남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 역대로 충신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굴원(屈原)이 있다. 그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사람인데 이름은 평(平)이며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젊어서부터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내정과 외교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한 정적들의 중상모략으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멀어지자 낙향하여 울분을 토로한 장시 이소(離騷)를 남기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했다.
뒷날 굴원의 작품은 후인의 다른 글도 모아 초사(楚辭)에 수록되었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열전에 소개되고 있다.
성어가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보자. 아침에 바른 말하다 저녁에 쫓겨났다며 울분을 토한다. '그래도 내게는 선하다고 믿기에,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亦余心之所善兮, 雖九死其猶未悔).'
중국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여러 사람의 주를 단 문선(文選)에는 굴원의 시를 유량(劉良)이란 사람이 해설한다.
아홉은 수의 끝인데 충성과 신의, 곧음과 깨끗함이 내 마음의 선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면서 말한다. '이런 재앙을 만나 아홉 번 죽어서 한 번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않다(雖九死無一生, 未足悔恨).'
얼마 전 이탈리아 강진 때 사망자가 300명에 이르는 참혹함 속에서 구조된 10세 소녀는 천우신조였다. 해외 토픽에는 세 번의 테러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사나이도 있었고, 여객기 추락사고 때 무사했던 인도 남성이 사고 6일 후 10억 복권에 당첨된 행운 등이 보도돼 눈길을 모은 적도 있다.
또한 얼마 전 터키 쿠데타 때 우리 교민의 안전과 폐쇄된 공항에서 외교관의 주선으로 빠져 나온 여행객 30여 명도 하늘이 도왔음을 느꼈을 것이다.
구사일생(九死一生)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고 겨우 살아난다는 말로, 비슷한 말에 십생구사(十生九死)가 있다.
굴원(屈原)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詩人)이자 정치가(政治家)이다. 초왕(楚王)의 일족(一族)으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변론(辯論)에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활약(活躍)을 하였다.
회왕(懷王)의 신임(信任)을 얻어 삼려대부(三閭大夫:왕가를 다스리는 대부)에 올랐으나, 양왕(襄王) 때 모략(謀略)을 받아 두번씩이나 강남(江南)으로 쫓겨나는 수모(受侮)를 당한 뒤 우국시(憂國詩) 회사부(懷沙賦)를 남기고 멱라수(汩羅水)에 빠져 죽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굴평(屈平; 平은 굴원의 이름)은,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담아 이소(離騷) 한 편을 지었다.”
이소(離騷)의 제 6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선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이 구사(九死)에 대하여, 문선(文選)을 편찬한 유량주(劉良注)는 이렇게 말했다. “아홉은 수(數)의 끝이다. 충성과 신의와 곧음과 깨끗함(忠信貞潔)이 내 마음의 선하고자 하는 바와 같으니, 이 해(害)를 만남으로써 아홉번 죽어서 한번을 살아남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유량주(劉良注)가 말한 이 ‘아홉번 죽어서 한 번 살지를 못한다’에서 나온 말로 죽을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난다는 뜻이 된다.
구사일생(九死一生)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이자 이름난 시인 굴원은 학식이 깊고 글재주가 뛰어나 삼려대부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간신들에게 모함받아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뒤 굴원은 좌절과 방황 속에서 불행히 살다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평소에 충언을 빙자한 간사함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흐리게 해 진정한 충신들이 미움을 받는 현실을 미워했다. 그가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충정에서 지은 '이소'라는 글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긴 한숨 쉬고 눈물을 닦으며, 사람 일생에 난관이 많음을 슬퍼하노라
내 고결하게 살고 조심한다 했지만 아침에 바른말하다 저녁에 쫓겨났네
그래도 내 마음이 선하다고 믿어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
‘아홉 번 죽었다 살아난다’는 뜻의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이 글에서 비롯했다. 본래는 ‘구사무일생(九死無一生)’, 즉 아홉 번 죽는 동안 한 번도 살아남지 못함을 뜻하지만,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흔히 아홉은 수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니 아홉 번 죽는다는 것은 수없이 죽는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가능하다.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은 '여씨춘추' 별류편에 나온다.
노나라 사람 공손작이 '나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이것은 크나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장담한 데서 비롯됐다. 원뜻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지만, 오늘날에는 위기에 빠졌다가 다시 회생한다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삶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조금씩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고비는 주저앉는 자와 앞으로 나아가는 자를 가르는 지점이다.
꽃이 아름다운 건 견디고 피기 때문이고, 삶이 아름다운 것 역시 견디고 피기 때문이다. 고비다 싶으면 마음 한번 다잡고 다시 일어서자.
▶️ 九(아홉 구, 모을 규)는 ❶지사문자로 玖(구)와 동자(同字)이다. 다섯 손가락을 위로 펴고 나머지 손의 네 손가락을 옆으로 편 모양을 나타내어 아홉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九자는 숫자 '아홉'을 뜻하는 글자이다. 九자는 乙(새 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九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의 손과 팔뚝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고대에는 又(또 우)자처럼 사람의 손을 3개의 획으로만 표기했었지만 九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부러진 팔뚝까지 그린 것이다. 九자는 구부린 사람의 팔뚝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도 '팔꿈치'였다. 그러나 후에 숫자 '아홉'으로 가차(假借)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후에 肘(팔꿈치 주)자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九(구, 규)는 ①아홉 ②아홉 번 ③많은 수 ④남방(南方), 남쪽 ⑤양효(陽爻), 주역(周易)의 양수(陽數) ⑥오래된 것 ⑦많다 ⑧늙다 그리고 모을 규의 경우는 ⓐ모으다, 모이다(규) ⓑ합하다, 합치다(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아홉 겹으로 구중궁궐의 준말을 구중(九重), 많은 영토를 구유(九有), 아흔의 한자어를 구십(九十), 한 해 가운데 아홉째 달을 구월(九月), 나라의 영토를 구주(九州), 넓은 하늘을 구건(九乾), 아홉 마리의 소를 구우(九牛), 땅의 가장 낮은 곳을 구지(九地), 사방으로 곧게 십자로를 이루고 옆으로 여러 갈래로 된 도시의 큰 길을 구규(九逵), 맑게 갠 가을 하늘을 구민(九旻),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를 구미호(九尾狐), 아홉 층으로 된 탑을 구층탑(九層塔), 아득히 먼 거리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구만리(九萬里), 구멍이 아홉 뚫린 탄을 구공탄(九孔炭),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을 구절초(九節草), 아홉 마리의 봉황을 수놓은 베개를 구봉침(九鳳枕), 여러 가지 꽃무늬를 놓은 아름다운 장막을 구화장(九華帳), 아홉 마리 소에 털 한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으로 아주 큰 물건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물건을 이르는 말을 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번 구부러진 간과 창자라는 뜻으로 굽이 굽이 사무친 마음속 또는 깊은 마음속을 이르는 말을 구곡간장(九曲肝腸),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세상이 복잡하여 살아가기 어렵다는 말을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난다는 뜻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을 이르는 말을 구사일생(九死一生)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사회부연(死灰復燃), 이미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날것과 찬 것을 생랭지물(生冷之物),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생구불망(生口不網),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생기사귀(生寄死歸),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생사고락(生死苦樂),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생살여탈(生殺與奪),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