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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
마가복음 4:21~25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제가 1984년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 개척교회의 중등부를 맡아 섬길 때가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 맨바닥에 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어 기도하였던 내용은 낮고 낮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난 현재 그 기도에 하나님은 정확하게 응답하셔서 무엇 하나 자랑할 수 없고 내세울 것이 없는 낮은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겸손하게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복 주고 복 주실 줄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한동안은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낮은 자리가 축복이고 은혜였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땅의 것 보다 하늘의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 겸손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 아래 놓여 있고 죄로 인하여 오염된 영혼의 특성인 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으로 겸손을 이루려 하는 것을 골2:18절에서는 ‘꾸며낸 겸손, 일부러 겸손’ 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어로는 ‘false humility’ 즉, ‘거짓 겸손’ 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 이룰 수 없는 겸손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환경과 여건을 통하여 이루도록 하는 귀한 선물입니다. 겸손을 이루기 위하여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따르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의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피조물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빛으로 나타날 때 교만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돌립니다만 겸손은 오직 주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하 귀한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믿음의 성도들을 빛으로 세우기 위하여 오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는 빛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는 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 중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천국 복음의 특성을 가르친 것이었다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등불의 비유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밝히고, 믿음의 성도들에게 나타날 빛의 역할에 대하여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막 4: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옥은 대부분 돌이나 흙벽돌로 지은 건물로서 문 외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안은 낮에도 어두웠기 때문에 등불로 어두움을 밝혔습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등잔 가운데 하나입니다. 토기로 되었고 납작한 모양인데, 여기에 올리브유를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등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사실 한글 성경만으로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등불’ 이란 헬라어 ‘뤼크노스λύχνος’ 앞에 ‘호 ὁ’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그 등불’ 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등불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특정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진리와 빛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일을 설명합니다.
등불에 이어서 ‘말’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사람이 타고 달리는 말이 아니라 곡물의 양을 재는 ‘말’(μόδιος 모디오스)입니다. 공동번역 한글 성경은 이 단어를 ‘됫박’이라 번역했고, 누가복음 8장 16절에는 ‘그릇'이라고 하였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clay jar’라고 하여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곡식 같은 것을 담아서 보관하는 그릇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켜지 않을 때는 등잔을 됫박, 혹은 그릇으로 덮어 두거나 평상, 즉 침상 아래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등경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라는 말씀으로 등불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죄의 어둠에 빠진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막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이 구절도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쉬운 말 성경에서는 “마찬가지로, 숨겨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이고,
다음은,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다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의 빛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살 때도 예수님의 빛으로 나를 점검하고 회개하여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도록 하셨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성도의 참모습이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이고,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자는 들으라”(막4:23)고 말입니다.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 의미의 3절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 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문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빛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말씀처럼 세상은 온통 어두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일은 빛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창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였습니다. 빛이 모든 만물의 우선이 되었습니다. 말씀과 빛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되어 차츰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운행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택하신 자녀들에게 빛을 베풀어 주셔서 주님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의 다스리는 자로 세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땅은 빛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출발 역시 빛 되신 예수님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창조된 하늘과 땅은 심판의 날이 지나고 없어지면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말합니다.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이 등불이 되어 다스리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믿음의 성도는 그 나라에 주인공으로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사람을 택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빛을 베풀어 주심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마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조용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천하의 사람들이 동서 사방 어디에서든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는 드러내 놓고 영광의 빛을 비추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주님과 더불어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아 왕 노릇을 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는 자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내게 비칠 때 반영하는 반사체입니다. 우리는 마치 달빛과 같은 사람으로서 달이 오직 태양 빛을 받아 반사되어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달이 가장 밝은 빛을 낼 때는 보름달일 때입니다. 보름달은 정면으로 태양을 마주할 때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내 안에 모실 때 우리는 가장 밝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가져야 할 열망이 있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내 안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흘러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성취될 때 우리는 빛의 속성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을 내 안에서 성취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 볼 때는 이런 환경에서는 울어야 할 터인데 믿음의 성도는 말씀에 의지하여 울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두 주전에 벽제 화장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 젊은 엄마가 자식을 잃고 목놓아 우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린 자식을 보내놓고 목놓아 울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들어가실 때 허다한 무리가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성문 가까이 이르러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죽은 사람은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은 극심한 아픔으로 산산이 찢기는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눅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라고 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울음을 멈추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는 신비의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면 어떤 슬픔도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임으로 영광의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말씀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염려가 들어오면 나 스스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감정의 죄를 십자가 앞에 내놓고 벗어나 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흐르게 한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죄 사함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벗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줘야 합니다. 막 4: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런 죄를 지을 때는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유튜버는 늘 정치인을 비판하고 욕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돌아보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이면 우선은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 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남의 허물과 죄를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나를 살펴보며 회개하여야 하고 죄를 짓고도 전혀 감각이 없는 그 사람을 위하여 대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복음의 능력이 내게서 흐르고 빛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막 4: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천국 복음이 내 안에서 흐를 때 점차 은혜의 깊이로 들어가고 넘치는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심령이 좁아지고 있는 것 까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빛의 자녀가 되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복음이 흐르도록 하십시오.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게서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복음의 능력이 흐르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