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 후 6년만에 당시 지중해 최고의 해군 국가인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게 된다. 그후 130년간이나 계속된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카르타고는 통상에 뛰어난 페니키아 민족이 세운 국가였다.. 당시의 로마는 지중해 속에서는 신흥국인 셈이었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그에 비해 로마는 그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두 나라의 통화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기원전 264년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무대가 된 곳은 부츠를 연상시키는 시칠리아섬이었다. 시칠리아섬은 서쪽 절반은 카르타고, 동쪽 절반은 그리스계 메시나와 시라쿠사가 지배하고 있었다.
카르타고가 섬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만약 시칠리아 전체를 카르타고가 차지하면 로마및 로마연합 모든 나라의 방위체제는 무너진다. 로마가 출병하게 된 것은 로마연합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포에니전쟁은 로마사에서 3분의2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로마사의 하일라이트 장면이다. 로마는 경제력이나 군사력면에서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했다. 카르타고에는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이 있었지만 로마는 단 하나의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은 시칠리아섬을 무대로 펼쳐진다.
전쟁 결과 로마가 승리하였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후 6년 간 로마는 팽창을 거듭하여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에스파냐 내 로마의 주요 동맹인 사군툼을 정복하면서 제 2차 포에니전쟁이 발발했다. 한니발이 이끄는 원정군은 육로로 남프랑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 기원전 218년부터 로마군을 공격하였다. 로마 방위망의 혀를 찌른 전대미문의 전술이었다. 한니발은 기습과 기만전술에 능한 명장이었다. 전쟁은 이탈리아반도 뿐만 아니라 스페인, 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고 부를만큼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대 한니발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군단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조종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2만명과 기병 6,000명으로 도합 2만6천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로마연합은 75만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한니발 군대는 용병으로 오합지졸의 군대에 지나지 않았다. 한니발의 나이는 불과 28세로 애송이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3년째인 기원전 216년 로마가 최상의 전투준비를 마치고 필승태세로 칸나에(Cannae) 전투에 8만5,000명의 대병력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한니발 용병군 5만명에 처참하게 대패한다. 이 전쟁에서 로마측 전사자는 7만명에 이르렀지만 한니발측의 희생자는 불과 5,500명이었다. 칸나에(Cannae)전투 패배 소식이 전해진 후 로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시민들은 경악했고 여자들은 광장에 나와 울부짖었다. 로마의 대군은 한니발 한 사람에 의해 괴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나에(Cannae) 전투는 2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계의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는 내용이다. 칸나에(Cannae)에서 한니발이 보인 전술의 묘는 기술면에서 볼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한 현대 육군의 사관후보생 조차도 배워야할 점이다.
한니발은 열세인 군대를 이끌고 로마의 대군을 무찌를 수가 있었을까. 한니발이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온 얘기는 유명하다. 현대의 전차에 해당하는 코끼리는 추운 이탈리아 반도에서 치러야 하는 이 전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기병의 활용이었다. 옛날부터 전쟁에는 보병은 보병끼리, 기병은 기병끼리 싸우는 것이 전법이었다. 육상의 전투에서는 병사의 수가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 상식을 뒤집은 최초의 인물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그 전쟁방식을 계승한 사람이 다름아닌 한니발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창안하고 한니발이 계승한 이 전법은 기병이 가진 기동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다. 기병이 가진 스피드를 최대한 활용해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거나 혹은 적진을 분산시키는 방법이다. 기병을 움직여 적진을 헝클어 놓고 거기에 보병을 투입해서 최종적으로 적을 포위하고 섬멸해 버린다. 이것을 실전에서 응용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실제 전투에서는 기대대로 움직여 주는 것도 아니므로 임기웅변식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이 명장이라고 일컫는 것도
'기병의 기동성 활용'을 축으로 하면서도 실제 전투에서는 기병을 보병과 맞붙게 하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보병을 적의 기병과 맞붙게 하는 등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기병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며 기마민족의 동맹국도 없었다. 이에비해 한니발군은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인과 갈리아인 등 기마에 뛰어난 민족이 기병으로 포함돼 있었다. 그대신. 로마는 중장비보병을 중시했다. 머리에는 철이나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상반신을 가리는 철제나 가죽제 가슴막이를 걸쳤고 같은 재료로 만든 정강이 보호대를 감았다.
이러한 방어용 기구와 함께 1,5미터인 타원형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무기는 검이나 창이었다. 창의 길이는 3미터였다. 창을 던지기도 하고 적을 찌르기도 한다. 이같은 장비로 무장한 중장비보병은 '백인대'라는 소대에 배속된다. 그리고 이 소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고대 로마를 무대로 한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백인대장'이다. 로마군단에서는 이 백인대장이 '군단의 척추' 역할을 한다. 로마의 군제에서는 대대장 이상의 장성급은 시민회에서 선임했으나 이 백인대장만은 중대안에서 투표로 뽑았다. 백인대장은 백인대의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 대표라는 역할을 지니고 있었다.
이 백인대장 가운데 상급 백인대장에게는 군단 작전회의에 출석이 허용되었다. 칸나에 전투 이후 한니발은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였다. 칸나에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로마군은 재편성하고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인 20개 군단을 투입한다. 로마의 군제는. 보통 사령관 한 사람이 2개 군단을 통솔한다. 20개 군단이라면 적어도 10명의 사령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는 한니발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조직력을 투입한다. 한니발은 수도 로마에 군대를 끌고 들어가지 않고 로마의 여러 동맹국 영토내에서 로마군과 결전하기로 하였다.
한니발은 부하들과 가깝게 지낼 수 없었지만 부하들은 한니발을 우르러고 따랐으며 도망치지도 않았다. 더구나 한니발 밑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로마처럼 시민병이 아니라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출신의 용병들이었다. 한니발은 군사와 전술면에서 천재였으며 진정한 지도자였다. 스키피오는 19세 때 칸나에전투에서 한니발의 싸우는 모습을 계속 관찰하면서 로마가 왜 이길 수 없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한니발을 이기려면 한니발처럼 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것이 성공의 열쇠인지 모른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의 등장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양상이 완전히 바뀐다. 천재대 조직의 전쟁으로 시종일관 해오던 것이 이제는 한니발대 스키피오의 싸움이 되었다. 전황이 로마에게 유리해지자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를 직접 공격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제1차포에니전쟁에서의 경험 등으로 스키피오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를 아프리카 방면 집정관으로 임명하였다. 스키피오는 당대 로마 장수 중에서도 걸출한 능력을 가진 젊은 장군이었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누미디아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으며 누미디아의 수도 카르타를 점령하였다.
한니발은 휘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북아프리카로 돌아오자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군대는 자마에서 만났고 여기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의 군대 규모는 로마군에 비하여 기병과 보병이 열세였지만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병사들만이 유일한 승부수였다. 로마군은 한니발군보다 질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이전과는 달리 기병전력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스키피오가 포위섬멸에 성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한니발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카르타고군이 결국 항복하면서 제2차 포에니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스키피오는 군단 사령관에 취임했을 때 약관 25세였다. 평시에 원로원체제에서는 지휘관은 커녕 공직에도 임명되지 못하는 젊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가 사령관에 오른 것은 장기간에 걸친 지구전으로 인해 지휘관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의 활약에 의해 로마의 패권이 동쪽은 소아시아에서 서쪽은 지브롤터해협까지 확대되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 체제에 큰 균열을 가져온다. 스키피오를 두둔하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립으로 스키피오 재판이 열린다. 구국의 영웅이라고 칭송할 만한 스키피오를 로마의 보수파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 숭배만큼 로마 공화정에서 위험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공화정이란 '영웅을 필요로 하지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제 2차포에니 전쟁 후의 로마 정치는 제1인자라는 칭호가 주어진 스키피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고 말았다. 이것은 로마에 있어서는 몹시 염려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보수파는 스키피오를 재판장에 끌어내어 로마의 정치를 개인의 소유물로 여긴다.고 탄핵하기로 하였다. 스키피오는 재판을 받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며 스스로 정치의 은퇴의 길을 택한다. 그로부터 몇년 지나 별장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종료된 후 로마의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더욱 격열해졌다. 그리고 원로원의 권위와 권력이 전쟁 전보다 더 강고해졌다. 원로원이 로마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제2차 포에니전쟁 종료 후 53년이 지나 제3차 포에니전쟁(기원전 149년-기원전 146년)이 발발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카르타고에게 스스로 도시를 파괴하고 해안에서 물러나 대륙으로 이동하라고 하자 무역을 하지 못하면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고 거부하자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군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4만명의 정예군과
오로지 돌, 나뭇가지, 맨손으로 맞선 카르타고는 결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쟁이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카르타고 함락되기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 함락 이후 도시를 무자비하게 철저히 파괴한 다음 생존한 5만명은 노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안에 남은 주민들은 아프리카에 강제로 이주하였다.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는 '패권국가'라는 자신의 현실에 잘 대응하지 못한 채 약 1세기 반에 걸친 긴 혼미의 터널이 돌입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