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화대학 강의는 내게 첨부터 좀 어리둥절이었다. 몇 분 늦게 강의실에 들어간데다가
기대하고 간 강사가 김리나 선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입구의 학예사에게 물어보니
지난 주에 이미 통지해준 대로 강의순서가 좀 바뀌었단다! 지난 주 낙산사 답사에 참가하지 않은
덕분으로 빚어진 일이다.
화면에서는 정선의 <금강전도>가 보이고 한창 강의가 시작되어 진행중이었다.
이미 너무도 유명해져 익숙해 보이기도 하는 겸재 정선의 이 그림!
처음 보는 박은순 교수는 중년의 덕성여대 교수다. 능숙한 말솜씨에다 내내 힘을 잃지 않는 목소리가
그림을 보는 재미를 이끌어나갔다. 강의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알맞게 설명을 섞어넣으며 내용을 채워
구성해가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런 진행 때문에 그림 하나하나에 시선을 집중하다 보면 강의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흐름이 다소 덜 강조되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박은순 교수는 간송미술관에서부터 이어진 진경산수화나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한 연구와
별도로 '금강산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학위를 한 연구자였다. 이는 그녀가 뉴욕 주립대에 가 있을 때인
1997년에 <금강산도 연구>(일지사)란 책으로 발간되었다. 강원도가 가진 자연 문화자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꼽는다면, 비록 지금은 북한땅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인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회화사적으로 가장 포괄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바로 이 교수인 것이다. 강의중에도 말한
바이지만 미술사학 분야에서의 이런 연구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근래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이런 점들을 눈여겨 보며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좀 더 대중용으로는 <금강산 일만
이천 봉>(2005년/보리)이란 책도 냈다. 오늘 보여준 대부분의 그림과 대체적인 내용은 바로 이 책을
강의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 책은 구성이 금강산의 승경별로 짜여 있어
서술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근래에는 또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2010년/돌베개)란 책을 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열정적인 중년의 여류 미술사학자라고 할 만하다.
'금강산도'를 주제로 한 이런 강의는 따라서 매년 기획되고 있는 관동팔경전만이 아니라 국립춘천
박물관에서 대단히 유의미한 강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교수는 금강산을 3번 가보았다고
하였고, 그림과 사진을 함께 대조하며 실경을 그린 산수화와 비교해 보도록 해주었다. 그러면서
시대별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들과 작가들의 화풍이 어떻게 다른지를 포인터로 화면을 지적하며
구체적으로 설명해나갔다.
금강산은 고려 때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왔고, 18세기 이후 금강산 여행이 유행이 되고 금강산도도
많이 그리게 되었다. 그것이 남겨진 그림들로 봐도 해방 전까지 이어져 왔고, 이후 남한에서도 변관식
등의 화가들에 의해 계속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아다시피 18세기의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금강산 그림을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수 남겼던 대가다. <금강전도>만 해도 평생 5점을 그렸다. 실경이라기보다 '진경'이란 말은 화가가
풍경을 보고 주요하다고 여긴 대상을 포착하여 그리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한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겸재는 화면에 음양의 우주적 조화를 담아 내금강의 모습을 응축하여 한 화면에 구성해 보여준 것이다.
진경산수화 혹은 겸재 정선은 국립춘천박물관이 생기던 처음부터 다뤄왔던 중요 주제이기도 하다.
첫 개관전시도 전국에 흩어져 소장된 보기 힘든 진경산수의 대작들을 대거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유수한 전시였고, 그 전시포스터로 쓰인 그림이 바로 겸재의 <단발령망금강>이었다.
철원 쪽에서 금강산을 향하는 도정으로,
"금성을 지나 창도와 신안, 통구현에 도착하면 이제 거의 금강산 입구에 다다른 셈입니다. 산세가
험해지는 통구에서부터 30리쯤 더 가면 높은 산마루 고개인 단발령에 이르게 됩니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옥 더미가 쌓인 듯 첩첩이 포개진 만 이천 봉의 장관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집니다. 황홀
하고 신비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그만 머리를 자르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 하여 단발령이란
이름이 생겨났답니다."(위 책의 설명)
겸재의 그림에서 짙게 그린 가파른 육산을 구비구비 힘들여 오른 흰옷의 사람들이 마루턱에 당도하여
저 멀리 허공중에 떠 있는 듯 희게 조망되는 금강 연봉을 바라보는 감격이 극적으로 전해져온다. 처음
대하는 장관의 감격은 물론이고 이제부터 그 장관 속으로 들어간다는 흥분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아, 우린 언제나 저곳에 가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 포스터 그림은 판넬에 표구하여 몇 년간이나 서당에 걸어놓고 오가는 사람들과 함께
실컷 보았던 터였다. 박물관의 문화강좌 초기에는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님도 오셔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1월임에도 모시두루마기 차림에 부채를 드시고 강단에서 한복 입기를 주장하던 뚝심이
지금도 기억에 아련하다. 아마 춘천이 근대 초기 의병의 진원지였던 고장이고 그들의 주장이 바로
단발령과 복식변경을 반대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신 것이 아닐까, 당시는 그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강의에서는 정선 이후 강세황이나 김홍도 이인문 정수영 김하종 등의 주요 그림을 샅샅이 보여주며
화풍이 어떻게 개성화되고 달라졌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위는 강의중에 휴대전화로 살짝 찍은 장면이다. 바로 단원 김홍도의 화풍에 서양의 원근법이 적용된
모습을 김홍도 자신의 두 그림으로 비교해 보여준 것이다. 왼편은 화성능행도 중의 한 폭으로 맨 위가
서장대 모습인데, 거기가 주석이므로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그려졌다. 반면에 오른편 그림은
서장대를 성밖의 뒤편에서 조망한 그림으로 서양식 원근법이 적용된 그림이다. 이런 원근법은 그의
총석정 그림에도 남아 있다고 하였다.
정조의 후원으로 금강산 그림이 그려졌기에 이런 서양화법의 적용은 왕이 그렇게 그리도록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용주사 불화에 음영이 들어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정조 사후 이런
서양화법은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이처럼 솔깃하여 들은 내용들이 여럿이었으나, 마지막으로 보여준 해강 김규진(1868~1933년)의 그림
으로 강의 스케치를 마치고자 한다. 해강이 52세 때 순종의 명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1920년경의 창덕궁
희정당 벽에 붙인(부벽화) <금강산만물초승경(金剛山萬物肖勝景)>과 <해금강총석정절경(海金剛叢石亭
絶景)> 그림들이다. 보기 드문 왕실 회화 대작을 감상해보자.
(위는 클릭해서 보면 크게 보이고, 문화재청 사이트에 있는 사진이다.)
오늘은 더위 때문인지 군데군데 빈좌석도 좀 보였다. 다소곳이 듣기만 하는 청중들이 강의가 끝나고도
아무런 질문이 없자 사회를 보던 박물관 직원이 질문을 하였고, 그러자 청중에서 질문도 나왔다.
지난 20세기 말 어느 신문사 미술관에서 금강산 관광을 한 현대작가의 작품까지 모아서 <몽유금강>이란
전시를 열었던 적이 있었다. 남북의 왕래가 크게 개선되거나 통일이라도 되면 아마 국립춘천박물관이
나서서 크게 판을 벌여야 할 주제가 바로 금강산 전시가 아닐까 싶다.
※ 강의중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중인 <강세황전>을 보고 위대한 화가의 존재에 감동을 받았다는 언급으로 간접적이나마 그 소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주는 일정이 변경되어 강좌 없이 결강주랍니다.
첫댓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를 않습니다..
강의를 보고 듣고 이를 모니터링으로 남긴다는것도 쉽지 않은일인데 이처럼 내용을 세세히 관찰하고 주석한 모니터링 글을 보기는 쉽지않다는 생각입니다..
강의를 듣는 이상의 감흥이 밀려옵니다.. 좋은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단발령' 부분을 수정하여 첨가하였습니다.
일일이 다 쫓아다니지 못하는데 이런 수고로움에 감탄 입니다^^
견문 많이 넓히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