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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30
9월26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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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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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OrIfjFfk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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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죽음의 그림자는 새로운 생명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코헬렛은 열흘 붉은 꽃 없고, 달도 차면 기울듯이,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장엄한 한 편의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 11장 9절, 12절)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월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코헬렛은 온 몸으로 절절히 체험했겠지요. 저자는 그러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건네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이들어 늙고 나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자신의 인생과 그 인생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라고 당부합니다. 또한 그 모든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므로 감사히 받아들일 것을 강조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백번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들어 골골하니 그 아무리 좋은 풍경도, 그 어떤 산해진미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나 영적생활 역시 젊은 시절에 그 맛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좀 더 나이들면 기도를 시작해야지!’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별로 못봤습니다.
나이들어갈수록 기력도 떨어지고,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면 기도도 힘들어서 못합니다. 그러니 기도를 미루지 말고, 한살이라도 젊을 때 본격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깊은 맛을 들이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급격한 노령화 탓인지,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산부인과나 산후조리원 같은 간판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근근히 마을을 지켜오시던 주민들도 점점 노쇠해지셔서, 동네 전체가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격으로 코헬렛은 불행한 날에 만나게 될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날은 희망이 사라진 노년기를 상징합니다. 파괴된 집은 노년기에 맞이할 고통을 의미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의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을 생기를 잃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는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트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기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코헬렛 12장 3~5절)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라는 표현이 어찌 그리 제게 ‘확!’ 와 닿는지 모릅니다. 한 며칠 허리가 삐끗해서 거동이 많이 불편했었는데, 오르막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노쇠한 어르신들이 하루 하루 얼마나 힘겹게 견뎌내시고 계시는가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한 인간이 수명을 다해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노화와 그로 인한 고통들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장애를 겪기도 합니다. 심연의 고독과 소외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헬렛은 노화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들, 이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여행 가방을 쌀 시간입니다.”
나이 들어간다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시작의 서곡이기 때문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렛 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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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묵상동영상)
https://youtu.be/h2z5jxbrT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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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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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44-45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주님께서 사람들의 잔인한 손에 넘겨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예고를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들,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서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하신 분이고,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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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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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서정적인 가사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 존 덴버(John Denver)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존 덴버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Sunshine on My Shoulder'를 들었습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불렀던 ‘Perhaps Love’도 기억납니다. 안타깝게도 비행기 사고로 50대 초반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아! 그의 노래 중에 ‘Today'도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 중에 ‘오늘이 바로 중요한 순간이고, 지금이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순간입니다. 오늘 나는 웃고, 울고 노래 부르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과 사랑을 주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오늘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오늘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2020년 9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였고, 잔디밭에 물을 주기도 하였고, 오랜만에 야영도 하였습니다. 십자군 이야기, 신을 위한 변론과 같이 꽤 긴 책들도 읽었습니다. 가까운 퀸즈 한인 성당의 미사도 도와 드릴 수 있었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은 매주 주일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감사드리며 산다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 재우셨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넘겨지고, 박해를 받고, 죽을 것이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은 아직 오직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지금 처한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최악이 아직 오지 않았다.(The worst is yet to come)’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나쁜 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걱정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넘겨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모함과 질시를 받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최선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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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랑의 씨튼수녀회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님]
<현인들의 지혜>
때로 노학자의 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리도 최신 현안 문제에 대해 지혜롭게 답할 수 있을까 탄복하게 됩니다. 인생의 경륜이 모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를 주나 봅니다.
최근 피에르 신부님의 <하느님… 왜?>(샘터, 2006)라는 책을 읽었는데 “영원한 질문에 답하다”라는 부제처럼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서였습니다.
95세 노인의 생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참신한 생각으로 사제들의 독신과 결혼, 여성 사제 문제, 동성애자들의 결혼과 입양 문제, 교황의 선출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명료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용기 있게 발언할 수 있는 것은 평소 단순하고 욕심없이 생활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줄기를 세울 줄 압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진보’다 ‘보수’다 하여 틈만 나면 연령별, 계층별, 지역별로 편을 가르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새것과 옛것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들의 지혜가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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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드님이 자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본래 사람의 아들인 저는 사람의 아들이 아닌 양, 다른 차원의 존재인 양 착각을 하고 행세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당신 스스로 사람의 아들로 자처하십니다. 아니 완전하게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육화하시어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릴 때부터 사람의 손에 넘겨지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잘못해서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것처럼, 꼭 그렇게만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폭력에 의해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지만 삶아먹든 잡아먹든 알아서 하라고 인간의 처분에 맡기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것은 그분의 사랑 때문이지 우리의 폭력 때문이 아닙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우리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셨다면 그분의 죽으심은 봉헌도 사랑이 아닌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육화에서부터 사람의 손에 넘겨지신 수난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을 관통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육화케 하고 인간의 그 어떤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의 아드님이 당신 스스로 그 신적 본질을 버리고 인성을 취하시게 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신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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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병환 요한 신부님]
<하느님 아들이신 분의 수난은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수난은 제자들에게 알아듣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왜 사람들의 손에 죽으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또 다시 당신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잠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수난 예고에 대해서 알아보자.처음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루카 9,22) 제자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들이신 분의 죽음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 수난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신 신성을 믿게 하시려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시어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시면서 당신 수난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게 해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셔서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한테서 악령을 쫓아내셨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 감탄했다. 이러한 때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실 거라는 말씀이었다.
복음을 보면 이때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이처럼 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 있어 왔다. 하느님의 종들인 많은 예언자들이 그러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하느님의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인간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이는 하느님의 뜻이다.
제자들은 당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깨닫지 못했으나 훗날 성령이 오신 뒤에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다.
하느님 아들이신 분의 수난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으면서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난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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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양심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시(Sociopathy), 우리에게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수는 어떻게 될까요? 학자들은 그 수를 전체 인구의 4%로 즉, 25명당 1명에 이르는 것으로 봅니다.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의 수치가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도덕적 불감증이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다는 생각,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생각, 내가 받을 사랑에는 민감하면서 남에게 베풀 사랑에는 무감각한 것 등등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아주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곁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만 모두 큰 상처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한 번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반복된 행동으로 이런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앞차가 속도를 내지 않고 있으면 막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앞차는 규정 속도를 지킬 뿐인데도,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내는 것에 전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양심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푸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쌓이고 쌓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준비시키기 위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거룩한 변모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혼란에 빠져 잘못 생각하는 제자들은 수난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마셨으며, 바로 옆에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표징들을 끊임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면서, 정작 가져야 할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곁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이 정도였는데, 우리는 어떠할까요? 더욱 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의 사랑이 아닌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되면서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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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힘>
죽음의 힘이 얼마나 센 지를 ‘천국의 문’ 봉안당을 운영하면서 더 크게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을 개장해서 모신 팔십 대 후반의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80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본인도 팔십 대 후반의 나이로 이제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안치 예식을 하면서 눈물을 터뜨리십니다. 아이 같이 소리를 내어 우시면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십니다. 죽음이 얼마나 힘이 센 지를 이 모습을 보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에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생깁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고, 이렇게 힘이 센 죽음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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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억하라, 사랑하라, 찬미하라>
-늘 창조주 하느님을, 파스카 예수님을!-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오늘 제1독서 맺음말입니다. 오늘로서 세차례에 걸친 제1독서 코헬렛도 끝납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납니다. 시작과 끝이 똑같습니다. 코헬렛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입니다. 희망이, 비전이, 꿈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이니 인생을, 젊음을 말껏 즐겨라 권고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창조주는 꼭 기억하라 하십니다. 공감이 갑니다만 웬지 허전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여라.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코헬렛은 젊은이에 대해 충고한 후 늙음과 죽음의 현실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늙음과 죽음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생각있는 젊은이나 늙은이라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 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되돌아간다.”
너무 어둡습니다. 허무의 짙은 구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쁨과 희망이, 찬미와 감사가 없습니다. 삶은 허무가 아니라 찬미입니다. 계속되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약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할뿐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찬미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찬미가, 하느님께 감사가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파스카의 예수님이 답입니다. 창조주 하느님뿐 아니라 파스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허무가,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허무가 아니라 충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 마지막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궁극의 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이 간략한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우리는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기에 충분히 이해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젊어서나 늙어서나,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결코 허무의 어둠이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젊으나 늙으나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충만한 일상입니다.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입니다.
하여 허무가 답이 아니라 충만이 답입니다. 회색빛 우울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찬미가 답입니다. 기억만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하여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미사뿐입니다. 우리의 심중을 대변하는 바오로 사도의 두 말씀을 나눕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바로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이자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인 코헬렛에겐 이 기쁨이, 기도가, 감사가 없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없는 현실주의는 허무주의로 귀착되기 마련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코헬렛의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이 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허무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허무’란 단어는 제가 집어 넣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구원 선물 둘이 영원한 생명, 하늘 나라의 실현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과의 일치를 실현시켜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생명의 사랑 충만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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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주님의 무엇인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합당한 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저를 위해 죽으셨고, 저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는‘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아빌라의성녀 데레사는“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과 성령없이 예수님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마태16,17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기 위해 항상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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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영광의 순간에 마치 찬물을 끼얹으시는 듯합니다.
"귀담아들어라."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립니다.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승승장구하리라는 제자들의 욕망을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업적은 한갓 인간의 찬사나 호평에 있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간에 있다는 걸 반복해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9,45)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모릅니다. 물리적인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지금의 영광이 계속 쭉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이대로라면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은 물론 자기들의 입지도 탄탄히 보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으로 들뜬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하지만 복음사가는 무지의 탓을 온전히 제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의 무지한 상태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한낱 인간이 알아낼 재간은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그 뜻을 감추셨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직 그들이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제자들은 지금 스승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에 들떠 있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진동을 미세하게나마 감지를 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뭘까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묻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답을 두려워할까요?
사람은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나름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실존적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그 불안에 얼만큼 관심을 기울이느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불안이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그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요. 뭔가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미세한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는 어쩌면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숙명같은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허무를 외치는 코헬렛 저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2,6)
오늘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자주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 찬란한 젊음의 때에, 무사태평 아무 걱정 없을 때에, 행복에 겨울 때에, 누리고 즐길 때에, 힘과 재물이 넘칠 때에, 세상 부러울 것 없을 때에, 잠시 멈추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시는 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억은 인간이 자신의 허무와 약함을 인정하고 삼가며 옷깃을 여미게 해 줍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존을 깨닫게 되니까요.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
이것이 기억해야 하고 삼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모든 인간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니까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과학적 의학적 연구와 시도가 있고 죽음을 겪기까지 받는 돌봄에 질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예외없는 현실입니다. 죽음은 재산, 성별, 학식, 신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지금 행복의 순간을 지나고 있건, 고통의 때를 지나고 있건 우리 모두가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세상도 좀 더 겸허해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지금 당장 제자들을 깨우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그들이 무릎을 치며 하느님 계획을 깨닫게 된 단초가 되었기에 복음서가 이를 기록한 것이지요. 훗날 스승의 수난 예고가 현실이 되었을 때, 이 기억은 그들에게 놀람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가 결국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온전한 순종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이 나 아닌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자칫 허무주의를 낳기도 하지만, 바로 그 타자이신 절대자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맡기는 신앙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신앙은 더 견고한 희망이 되고 더 열렬한 사랑이 됩니다. 축배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한뼘씩 더 자라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떤 처지에서나 주인이신 분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영광과 더불어, 그분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도 떠올립시다. 이 기억 안에는 이 험난한 지상 순례길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쥐고 계신 분 앞에서 겸허히 삼가며 온전히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오늘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벗님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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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병이 있는 곳에 약도 있다니까요
예수님이 고쳐주신 병자들 중 38년이나 병석에 누워 있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 된 이 병자는 삶에 대한 의욕이 대단하여 데려다 줄 사람이 없는데도 자기 혼자 베데스다 연못에 가려한 사실만 봐도 삶에 대한 의지의 강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지 않는 이유는 바로 삶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이 지긋지긋하여 그만 끝내고 싶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여 내팽개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18세기의 목사이자 약물학자였던 에드워드 스턴은 “조물주는 병이 있는 곳에 병을 고치는 약을 마련해 놓았다.”라고 했습니다. 열대지방에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들이 사는데, 그곳에 ‘키나’라고 하는 약용식물이 같이 자라고, 영국은 풍토가 음습해서 사람들이 신경통에 잘 걸리는데 그곳에서 자라는 버드나무 껍질 속 ‘살리실산’이라는 성분이 해열 진통작용을 하는데 살리실산으로 만든 약이 바로 아스피린입니다.
북극 원주민 에스키모인들은 쌀과 채소가 없어서 바다 생선과 육류로만 먹는데도 뇌졸중, 심근경색 등 성인병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등푸른 생선이 불포화 지방산을 포함하고 있어서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환경에는 그곳에 맞는 약들이 있듯이 우리가 사는 인생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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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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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이 우매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그렇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아무리 알아들으려 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은 믿음의 순명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한 구절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우리를 텅 빈 상태로 머무르게 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쳐주고,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기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또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따르고 나서야, 우리는 말씀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막의 마카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곧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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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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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본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이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성이 드러나는, 부활의 본질이 드러나는 기적사화 앞에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이나 제자들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공관복음(마태오.마르코.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과 연관시켜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본질이고,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감추어져 있는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의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죽음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반드시 한 번은 꼭 만나야 하는 죽음! 이 죽음 앞에서 "허무로다 허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나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본질을 잘 믿으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의 죽음이 허무하게 다가오지 않고, 기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지금부터 잘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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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3QA4Aepw3w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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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넘어지고
넘겨지며
이 가을은
새로이 익어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 삶의
약함을 만나는
시간이다.
약함이
있는 곳에
강한 구원도
있다.
약함에
눈 감지
않는 것이
은총이다.
주님께서도
당신 약함을
나누신다.
가장 약한
모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끈다.
약함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넘겨지시는
아픈
사랑이다.
당신 먼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하느님께
무엇 하나
맡기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넘겨지심으로
하나가 된다.
넘겨지는
사랑으로
우리는 또
이 고개를 넘는다.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넘겨지시는
주님의
연약함을 통해
배운다.
사랑은 서로의
약함까지 언제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함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고
약함의 이름으로
간절한 사랑을
청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서로의 약함이
은총이며
감사이다.
단숨에
넘을 수 없는
이 신앙의 고개를
나의 약함과 함께
오늘도 앞으로
걸어 나간다.
모두의 약함은
넘겨지시는
주님을
향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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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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