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시詩를 쓰시는 하느님
내 빈 뜨락에
찬바람 빙빙 돌면
냉이 민들레 제비꽃
구석구석 채우시는 분,
내 빈 방에
남루 걸쳐 있으면
바람 불어 송홧가루
슬슬 묻히시는 분,
내 빈 가슴에
먼지 쌓여 있으면
삽자루 쥐어 주시곤
땀방울로 씻어 주시는 분,
내 빈 뼛속에
한숨 쏘다니면
냇물소리 드높여
잎사귀 펄럭이게 하는 분,
내 빈 등짝에
햇빛 서성거리면
흰나비 몇 마리 보내
장다리꽃에서 놀게 하시는 분.
하느님의 시詩 읽기
하느님의 시를 읽으면 힘이 나지요
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하느님이
쓰시는 자연시自然詩 읽으면
저절로 안팎이 편안해 지거나
걷고 싶어지지요 하느님의 시는
만질 수 있고 흔들 수 있고
행과 행 사이를 다닐 수 있지요
삶아 먹거나 말려 먹을 수도 있고,
저장하거나 버려두어도
하느님의 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눈발로 날리거나 소나기로
우르르 달려가기도 하지요
다람쥐 갉아 먹거나 송사리
헤엄치고 다닐 수 있는
저녁이면 굴뚝에서 연기 솟고
별이 뜨기도 하는 하느님의 시詩,
어디서든 하느님의 시를 읽으면
저절로 싱싱해지지요
홑나물 두릅나물 무쳐 먹으면
손끝 발끝에서 냄새 나는 하느님의 시
하느님의 시는 심을 수도 있어
봄 여름을 지난 가을엔
고풀수록 맛있게 단풍들지요
지치거나 외로울수록 젖게 되지요.
하느님도 시詩를 쓰시다가,
사람의 얼굴에도 시를 쓰신다
들과 산에 춘하추동 돌아가며
바다와 대륙을 밀고 당기며
원생대에서부터 신생기 너머
지금도 층층이 쓰시는 바닥,
하루도 쉬지 않고 밤과 낮을 돌려
나이테를 얼굴마다 생기게 하시되
소나무에서 솔잎이 피듯
억새풀에서 억새가 나듯
그 살결대로 생겨나게 하신다
바람피우던 남자 여자는
쓴맛을 보약처럼 들게 하시지만
풀과 나무처럼 자기 자리
비바람 불어도 지킨 자에게는
백배의 열매를 달게 하신다
소금밭을 밀던 부부에게는
소금보다 흰 정이 들게 하고
호미 들고 평생 밭고랑 넘는
멀고 먼 산골 속 부부에게는
목화보다 흰 웃음 지어 주었는데,
요즘은 페인트처럼 화장하니
하느님도 시 쓰시기 어려워진
21세기 호모사피엔스의 얼굴
그래서 뼈에다 새기 실련가
아니면 낙엽에다나 쓰실련가.
감자꽃
아침부터 심심해서 우물이나 파내려가니
암반 쪼개고 들어가니 목을 축이는 눅눅함,
줄기를 뽑자 주기도문 니체아신경이
감자 꽃으로 거기서 웃는다
종일 말을 잃고 즐거움 잊어버린 우울
더듬어 동맥을 그곳에 묶으니,
이번엔 뼈가 마르고 핏줄도 말라버려
감자꽃이 핏빛이다 생피 웃음이다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데서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으면 피가 나는가
즐거운 고통이 그림자의 자세로 넓어진다
간간히 잎사귀에서 이슬 떨어지자,
감자 꽃이 저녁 기도를 한다
끝기도는 달그림자가 마당에 들어와서 한다.
폭설
안성으로 접어드니 폭설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차를 족족 잡아 세우곤 함박눈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말씀을 들었는지 자꾸만 미끄러지는 자동차
헛바퀴 돌면서 제 몸의 온도 틈틈이 높힌다
참을 수 없었는지 한꺼번에 말씀 하시는 하느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살 날것처럼 눈을 내리신다
산등성이 올라 무릎까지 쌓인 말씀 발목으로 읽는다
고라니 달아난 오솔길 가슴으로 복사複寫 한다
말씀으로 가득한 골짜기 캄캄하게 내리는 눈을
이리저리 묻혀 보지만 발바닥까지 막막한 말씀
차라리 굴러본다 뛰어 본다 사랑한다고 써 놓으신
나 좋다고 다시 쓰시는 폭설 햐, 말씀은 아득해서 좋아라!
먹어라
들판에 서면 이는 내가 차린 밥상이니
먹으라는 말씀 전기電氣처럼 쏘인다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도
오월이라 쑥쑥 돋는 새순 아니 말씀,
산에 가면 산도라지 취나물 고사리
소나무 박달나무 막막하게 솟는다
아침부터 애벌레는 잎사귀를 갉고
송골매는 핏덩이 찾으려 높이 난다
풀잎 나뭇잎 끝마다 맺힌 말씀이
떨어져 냇물이 되어 흐르는데
누구하나 나무라지 않는 산길이다
그럴수록 검어지는 숲속이다
나도 눈 가슴 머리 뼛속으로 먹다가
솔잎 씹으니 손톱발톱까지 시큰한 한 말씀
자두와 앵두를 통째로 물으면
물큰 쏟아지는 하느님의 핏물을,
삼키려다 단전丹田 아래 숨기면
시생대 원생대를 가로 질러 달려가는 소나기
말 못할 기도가 솟아나는 순간이다
묶여진 말이 기도가 되는 때이다.
하느님의 시詩
오랜만에 맛보는 하느님의 눈雪 시詩
하느님도 미안한지 조용조용 내리는 눈이다
맨발로 밟으면 시리도록 즐거운
손으로 뭉치면 단단해지는 시,
참새도 나뭇가지에 쓰인 단촐한 시에 앉아
건포도같이 쪼글해진 산수유를 챙긴다
아침 일찍 오른 남산 길로
읽지 않은 시가 나무 잎사귀에도 있다
까치는 한 귀퉁이를 뒤집어
몇 낱말 먹고는 감사한지 눈이 똥그래지고,
나도 녹기 전에 부지런히 읽어보는 시
하느님도 그러라고 부지런히 눈 내리신다
하느님과 내가 모처럼 한통속인 아침
다람쥐가 간간히 토씨에 발자국을 새긴다.
노동하시는 하느님
하느님도 심심하면 놀러 내려와
농부의 땀을 산바람으로
한숨 쌓인 노파의 눈물을
민들레꽃으로 닦아 주신다
논바닥 쩍쩍 갈라지면
태풍을 등짝에 지고와
장마 지게 하시고
알맞게 벼가 익도록 가을이면
햇빛을 뽀송뽀송하게 하신다
북풍이 쏘다니는 겨울엔
함박눈으로 풀뿌리 감싸시다
노부부의 굴뚝 연기는
분향 삼아 받으시는 것이다
하느님도 시詩를 쓰신다
나무마다 이파리 줄기 뿌리에
이름에 맞게 적으시다가
때에 맞는 색깔을 풀다가
지금은 상강霜降을 쓰시는 중이다
허나 가을도 결구에 들었으니
머잖아 들이닥칠 겨울에는
첫 눈발을 눈부시게 날리시겠지
끈 떨어진 연鳶처럼
연과 연 사이로
함박눈을 마구 퍼 부우시면
깊은 산골짜기 아궁이에
밤새 군불이 타고 있겠지.
마르코 수사修士
태능을 지나 몇 개의 배나무 밭을 돌면
불암산 무릎과 무릎사이 요셉수도원엔
강릉이 고향인 마르코수사가 있다
사십 년을 수도원에서 농사만 지은 탓에
하느님이 입혀주신 수단도
마르코 수사가 입으면
영락없는 농사꾼인 옷이 된다
듬성듬성한 옥수수 치아와
가을 햇빛이 푹푹 든 얼굴에
칡같이 울퉁불퉁한 손목과 발목
성가를 부를 때에는 막걸리 먹은 듯
툭툭한 목소리가 성당을 독차지 한다
황소고집이 있어
가끔은 동료들과 토닥여도
언제나 배나무 잎사귀처럼
짙푸른 그늘이 있는 수사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들락날락해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배나무 뿌리보다
바위를 쪼개고 깊이 내려 있어
바람 불어도 마른 적 없는
곁가지 부러진 적 없는 마르코 수사,
산이 접혀진 곳에 산삼이 있듯이
세상의 징검다리 건너 햇빛이 비치는
언덕에 오르면, 오늘도 샘처럼 그가 있다.
하느님도 창작을 하신다
언 땅을 밀고 복수초 피우다가
진달래 개나리 연작連作 하시더니
군데군데 벚나무 오디 열매를
행간에 숨겨 익게 하신다
황톳물 흐르는 산속
고라니 토끼는 운韻친 길로
돌아다니게 하시고
흰구름 슬슬 푸는가 싶더니
산머리부터 단풍 들게 하는
하느님의 시詩,
알밤은 엇박자로 떨어트리신다
여름 결구結句에 가을 묶다가
때로 첫 눈발 날리신다
해바라기 고추 벼 고구마 참깨
직각으로 들여다보면
하느님 땀방울이 배어 있어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먹고 마시고도 남는 하느님의 시,
산등성이 걸으면 물큰물큰
뼛속으로 채워지는 나무들의 이야기
구절초 무덤에 누우면
하느님의 시를 핏줄에 음각하는 햇빛,
솔가지 흔들릴수록 푸르게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