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집(渼湖集) 김원행(金元行)생년1702년(숙종 28)몰년1772년(영조 48)자백춘(伯春)호미호(渼湖), 운루(雲樓)본관안동(安東)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이재(李縡)의 문인으로서 노론(老論) 낙론(洛論)을 대표하는 산림학자(山林學者)
渼湖集卷之十八 / 墓表 / 學生姜公墓表
昔當丙子虜難。有縣監姜公恰。痛天朝淪喪冠屨倒置。遂與三四同志。潔身遠遁。隱於太白山中。終身不肯出。子孫因居焉。縣監之子曰諱鄗。孫曰諱再弼。是娶李氏。退陶先生五世孫而爲察訪希哲女也。以肅宗庚申生公。諱元一。字一元。幼有氣。十歲。聞仁顯王后出宮。奮曰。使我而長者。當爭以死。聞者奇之。旣長。聞尤菴先生之風。心悅之。言議抗厲不苟。自經辛壬士禍。益發憤無所顧忌。嶺素多凶論。或以危禍恐之。終不撓。及戊申賊起。公與承旨羅公學川。謀擧義兵。因賊平而止。然由是其黨愈憚之。
公雅慕吾先祖淸陰先生。至是倡言先生道德節義如日星。且吾州。先生之首陽也。此而無先生廟。卽首陽可無祀伯夷也。且爲一方正士趍。以消亂萌。其不在此乎。廟成。羣不逞大噪毁撤之。公痛甚。
足北上。將聞于上。而又爲其徒在朝者所沮。悒悒而歸。
自是杜門自靖。其發於吟咏簡牘者。皆此事也。丁丑正月十八日卒。葬于所居法川坤坐原。公事父母甚孝。侍疾。藥餌粥飮。不委婢僕。必躬煮以進之。數十年如一日。前後居憂三年不入內。朝夕哭奠。未或不一參。其篤於內行。又如此。公之世出晉州。高句麗兵馬元帥以式之後。自縣監公以上累世。冠冕蟬聯。史不絶書。配鄭氏。學生諱涉女。丈巖先生諱澔其叔父也。有子泂。女適朴師協。又子溶。女爲權德任妻者側出也。泂男榰。女長適成秀柱。次適金正根。次適李克漸。朴男玄源佐郞。余嘗遊嶺南。一再遇公於人座。雖老矣。喜飮酒談辨若無人。可知爲負性帶氣人也。今其孤請余墓文。書此而使歸刻焉。銘曰。
觀於所好。可知其人也。是可以銘。不可使泯也。
미호집 제18권 / 묘표(墓表) / 학생 강공 묘표〔學生姜公墓表〕
옛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현감(縣監) 강공 흡(姜公恰)이 천조(天朝 명(明)나라)가 멸망하여 상하(上下)의 위치가 전도된 것을 통탄하여, 마침내 서너 명의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지조를 지키고자 멀리 피하여 태백산(太白山)에 은거하고 종신토록 나오지 않고자 하였는데,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현감의 아들은 휘 호(鄗)이고, 손자는 휘 재필(再弼)이다. 이분이 이씨(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씨는 퇴도(退陶 이황(李滉)) 선생의 5세손이자 찰방 희철(希哲)의 따님으로, 숙종 경신년(1680, 숙종6)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원일(元一), 자는 일원(一元)이다. 어려서 의기(義氣)가 있어서, 10세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출궁(出宮)되었다는 것을 듣고, 격분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내가 어른이었다면 응당 죽기를 각오하고 쟁론하였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자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이미 장성해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풍도를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여, 말을 할 때 고상하고 엄정하게 하며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겪은 뒤로는 더욱 격분하여 꺼리는 바가 없었다. 영남(嶺南)은 평소 흉론(凶論)이 많은 지역인데, 혹자가 화를 당할 수 있다고 공에게 겁주었지만, 공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무신년(1728, 영조4)에 흉적들이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공은 승지 나공 학천(羅公學川)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는데, 흉적들이 평정됨으로 인하여 중지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그 무리들이 공을 더욱 꺼려하였다.
공은 평소 우리 선조 청음(淸陰) 선생을 흠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창하기를, “선생의 도덕(道德)과 절의(節義)는 해와 달처럼 찬란하다. 우리 고을은 선생에게 있어서 수양산(首陽山)과 같은 곳이다. 이러한데도 선생의 사당이 없는 것은 곧 수양산에서 백이(伯夷)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한 지방의 선비들의 추향을 바르게 하여 난역(亂逆)의 싹을 소멸시키는 것이 이 일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었는데,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크게 소란을 일으켜 사당을 훼철(毁撤)하였다. 이에 공이 몹시 통탄하여 행장(行裝)을 꾸려 북으로 올라가서 장차 상께 아뢰고자 하였는데, 또 조정에 있는 그 무리들에게 저지되어 울적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두문불출하고 자숙하며 지냈는데, 공의 시와 편지에서 드러난 것이 모두 이 일이다.
정축년(1757, 영조33) 1월 18일에 공이 졸하였다. 공이 거주한 곳의 법천(法川) 곤좌(坤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부모를 매우 효성스럽게 섬겨서, 편찮은 어버이를 간호할 때에는 약과 죽 등을 비복(婢僕)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몸소 달여서 올렸는데, 수십 년을 하루같이 이처럼 모셨다. 전후로 부모상을 치를 때에는 3년 동안 내실(內室)에 들어가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곡(哭)을 하고 전(奠)을 올릴 때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집안에서의 행실에 돈독한 것이 또 이와 같았다.
공의 세계(世系)는 진주(晉州)에서 나왔는데, 고구려(高句麗) 병마원수(兵馬元帥) 이식(以式)의 후손이다. 현감공(縣監公) 이후로는 누세에 걸쳐 높은 벼슬아치가 이어져서 사책(史冊)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학생(學生) 휘 섭(涉)의 따님으로, 장암(丈巖) 선생 휘 호(澔)가 그 숙부이다.
아들 형(泂)을 두었고, 딸은 박사협(朴師協)에게 출가하였다. 또 아들 용(溶)과 권덕임(權德任)의 처가 된 딸은 측실(側室) 소생이다. 형(泂)의 아들은 지(榰)이고, 첫째 딸은 성수주(成秀柱)에게 출가하였으며, 둘째 딸은 김정근(金正根)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이극점(李克漸)에게 출가하였다.
박사협의 아들은 좌랑 현원(玄源)이다.
내가 일찍이 영남을 유람할 적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자리에서 공을 한두 번 만났었다. 공은 비록 연로하였지만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담론을 나눌 때에는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여기에서 타고난 성품이 호기(豪氣)를 지닌 분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공의 아들이 나에게 묘문(墓文)을 써주기를 요청하였기에, 이렇게 써서 그로 하여금 돌아가 비석에 새기도록 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것을 살피면 / 觀於所好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네 / 可知其人也
이런 분이라면 명을 남길 만하니 / 是可以銘
인멸되게 해서는 안 되네 / 不可使泯也
[주-D001] 강공 흡(姜公恰) : 1602~1671.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이다. 부친은 강윤조(姜胤祖)이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0년(인조8)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제릉 참봉(齊陵參奉), 세마, 부솔, 산음 현감(山陰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홍우정(洪宇定), 심장세(沈長世), 홍석(洪錫), 정양(鄭瀁) 등과 함께 태백(太白)의 춘양동(春陽洞)에 은거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불렀다. 1858년(철종9)에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정민(貞敏)으로 증시(贈諡)되었다.[주-D002] 인현왕후(仁顯王后) : 1667~1701. 숙종의 계비로,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1년(숙종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1689년(숙종15)에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을 원자(元子)로 봉하고 세자(世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상소하여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ㆍ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으며, 장희빈의 간계로 인하여 그를 폐서인하여 출궁(出宮)시켰다.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숙종20)에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ㆍ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閔黯)ㆍ김덕원(金德遠)ㆍ권대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 1701년(숙종27)에 원인 모를 질병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주-D003]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년(경종1)과 1722년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獄事)로, 신축(辛丑)ㆍ임인(壬寅) 두 해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하며, 일명 임인옥(壬寅獄)이라고도 한다. 1721년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辛丑換局)과, 다음해 목호룡(睦虎龍)이 이른바 노론 및 후일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 측근 인물들의 경종(景宗) 시해 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壬寅獄事),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박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인하여 당시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가 모두 사형을 당하였다.[주-D004] 무신년에 …… 이르러서는 : 무신란(戊申亂)을 가리킨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실각 당했던 노론(老論)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노론 사대신을 무고하였던 소론(小論)의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이 죽음을 당하자, 그 여당(餘黨)이 기회를 엿보던 차에 영조 3년(1727)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1728) 3월 이인좌(李麟佐), 김영해(金寧海), 정희량(鄭希良)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실제 반란군을 지휘한 남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또는 ‘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당시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에 퍼져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제휴함으로써 일어났다.[주-D005] 나공 학천(羅公學川) : 1658~1731.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사도(師道), 호는 창주(滄洲)이다. 영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나수종(羅壽宗)이며, 통덕랑(通德郞) 나수성(羅壽星)에게 입양되었다. 1682년(숙종8)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지평, 정언,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7년(영조3)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자 나이 칠십을 이유로 극구 사양하다가 좌승지ㆍ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때 영남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관(北關)사람들이 그를 난적(亂賊)으로 몰아 파직시키자,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난이 평정된 뒤 1729년 다시 병조 참지가 되었다.[주-D006] 청음(淸陰) 선생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이며, 미호의 5대조이다. 1636년 예조 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安東)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청음집(淸陰集)》 등이 있다.[주-D007] 우리 …… 곳이다 : 수양산은 백이(伯夷)가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은거하면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곳이다. 백이는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고,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인조가 청(淸)나라에 항복한 이듬해인 1636년(인조14) 2월에 안동(安東) 풍산(豐山)으로 내려가 학가산(鶴駕山)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가 은거 생활을 시작하여 1640년(인조18)에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淸陰集 淸陰年譜 卷2》 강원일(姜元一)은 당시 경상도 봉화(奉化)에 살고 있었는데, 봉화는 풍산과 가깝고, 김상헌의 행적은 백이와 비슷하다고 여겨서 이렇게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광태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