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Pick] 메밀소바
메밀의 맛은 신기루 같다. 통 메밀을 씹으면 보리와 같이 서늘한 곳에서 자라는 곡식 특유의 짙은 금속성 맛이 난다. 글루텐이 없는 메밀로 면을 뽑으면 찰기가 없어 뚝뚝 끊긴다. 이런 메밀의 성질로 메밀소바는 식감보다는 향으로 먹는다고 말해야 맞는다.
문제는 이 향을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제분과 반죽, 성형, 삶기 과정을 거치며 원래 가지고 있던 향이 날아가기 쉽다. 냉면을 비롯한 막국수가 그러하듯 메밀소바 역시 차갑게 식혀 먹기에 향이 더더욱 가라앉는다.
경기도 이천 '우동선'의 들기름소바(위)와 자루소바./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를 막으려면 각 과정이 간소하고 빨라야 한다. 햇메밀을 열이 적게 발생하는 맷돌에 넣고 적은 분량을 나눠서 갈아낸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적은 양을 반죽해 손님에게 내면 된다. 전형적으로 말만 쉬운 예다. 하지만 먹는 사람 입장에서 음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름의 초입, 아무 생각 없이 차가운 국수를 후루룩 삼켜 버리면 그만이다.
소담한 분위기에서 점심나절 소바 한 그릇을 가볍게 해치우기에는 서울 성수동 ‘가조쿠’가 좋다. 작은 간판 아래 문을 밀고 들어가니 훤히 열린 주방과 윤이 나게 닦여 있는 원목 테이블, 한쪽에 마련된 제분·제면실이 보였다.
소바는 따뜻한 것, 차가운 것 두 부류로 나눠 메뉴에 올렸다. 쓰유(가다랑어포를 우려낸 진한 간장)에 면을 찍어 먹는 자루소바가 먼저 도착했다. 면에 남은 물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면의 색깔은 하얀 빛에 가까운 회색이었고 각진 단면에 어수룩한 빈틈이 없었다. 농도가 짙은 쓰유에 면을 조금 담갔다가 입에 넣었다. 메밀 특유의 구수한 향기가 수더분한 인상을 줬다면 쓰유의 짙은 농도와 염도는 맛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쓰유를 엷게 푼 육수에 면을 담고 무와 쪽파, 와사비(고추냉이), 튀김가루를 올린 냉소바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담음새였다. 차가운 육수에 담긴 소바는 조금 더 찰기가 있었다. 상큼하고 시원했다. 자루소바는 소바 그 자체 맛에 집중해 여백이 많다면, 냉소바는 옛 민화처럼 공백도 거침도 없이 꽉꽉 채워지는 맛이었다.
봉천동에 가면 성수동만큼이나 뜨거워진 젊은 거리가 있다. 이른바 ‘샤로수길’이라 하여 낙성대와 서울대입구를 가로지르는 골목에 새로운 가게들이 몰렸다. ‘낙원의소바’는 샤로수길 끝에 자리했다. 전직으로 메밀제분회사를 다녔다는 주인장이 새로 문 열었다.
메밀도 좋지만 돈가스를 빼놓고는 이 집을 말할 수 없다. 마치 산적처럼 등심 사이에 파를 끼워 넣어 튀긴 ‘네기카츠’는 자칫 느끼해지기 쉬운 돈가스의 맛에 변주를 줬다. ‘통모짜카츠’는 얇게 편 돼지고기 안에 모차렐라 치즈를 넣고 튀겼다. 이 메뉴는 방송을 크게 탄 후 돈가스 집에 가면 흔히 보이는 종류가 됐다. 차이는 치즈의 질. 이 집 것은 모차렐라가 가진 신선한 우유의 향이 선명했다.
본론으로 넘어가 소바를 보면 쓰유에 찍어먹는 자루소바가 메인에 올랐다. ‘특자루소바’를 시키면 보통 먹는 가는 면과 이탈리아 파스타 탈리아텔레(tagliatelle)처럼 넓적한 면이 함께 나온다. 색은 조금 짙은 편이고 찰기도 적당히 느껴졌다. 쓰유는 한국식으로 푹 찍어 먹기 좋게 대접에 담았고 맛은 짠맛보다 단맛이 강했다. 넓적한 면은 식감이 투박했지만 그 덕에 라자냐같이 씹는 맛이 있었다.
남쪽으로 길을 돌려 쌀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에 가면 ‘우동선’이 있다. 텐동, 우동, 카레, 규동에 소바까지 아우르는 메뉴 구색이 괜찮을까 싶지만, 손님들이 음식을 받는 속도나 타이밍이 정확했다. 아내가 튀김을 하면 남편은 소바를 뽑고 딸은 정리를 했다. 그러다 머리를 박박 민 아버지가 밀린 설거지를 하면 딸이 대신 주방에 들어가는 멀티 플레이 덕분이었다.
푸짐하게 튀김이 올라오는 텐동도, 이를 밀어내듯 강한 탄력을 지닌 우동도 인기가 좋지만 주인장은 은근 소바에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새로 개발했다는 들기름 소바는 면 위에 직접 짜낸 들기름과 참깨, 김, 얇게 썬 파를 올렸다. 면은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이었다. 먹기도 전에 들기름의 강한 풍미가 코를 파고들었다. 담담히 표정을 숨긴 메밀면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 들기름을 만나니 향이 증폭됐다.
자루소바는 넓은 채에 받쳐 얌전히 나왔다. 주인장이 직접 훈연해 만든 가쓰오부시(가다랑이포), 멸치 등을 우린 쓰유는 방금 핀 꽃처럼 향이 살아 있었다. 그 쓰유에 아기 목욕 시키듯 면을 잠깐 담갔다 빼내어 입에 넣었다. 전분 없이 메밀 100%를 썼다는 면은 메밀밭에 온 듯 향기가 흐드러졌다. 산들바람에 실려오듯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 맛과 향이 조금씩, 한 방울씩 혀에 닿는 것 같았다. 그 우아한 맛은 작고 작은 차이를 긁고 긁어 모아 만든 태산 같은 맛이었다.
#가조쿠: 냉소바 9000원, 자루소바 1만원, (02)466-2177
#낙원의소바: 네기카츠 1만원, 특자루소바 1만1000원. (02)882-3010
#우동선: 자루소바 1만2000원, 들기름소바 1만2000원. 010-5544-1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