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북쪽이자 호암산
북쪽 자락 소나무 숲에 둥지를 튼 삼성산성지는 용산 새남터, 합정동
절두산성지(合井洞 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의 하나로 1839년 기해
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처단된 프랑스 천주교 신부 3명이 안장된 곳이다.
이곳에는 제2대 조선교구 주교인 라우젠시오 엥배르<1797~1839, 조선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와
모방 신부로 잘 알려진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1803~1839, 조선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
, 그리고 자코브 오노레 샤스탕<1803~1839, 조선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사사당(沙斯當)>
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으로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라우젠시오 엥배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는 1797년 프랑스 뷰슈뒤론 데파르트망에서
태어나 1819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1820년
마카오로 건너가 활동했고, 1830년에
청나라 사천성(四川省) 부주교로 승진되었다가 1837년 제2대 조선교구 주교(主敎)로 임명돼 그
해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조선에 잠입했다.
1838년 서울로 들어와 천주교 영업과 교세 확장에 매진했으며, '범세형'이란 조선 이름까지 만
들었다. 허나 1839년 수원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21일 이곳에 묻힌 2명과 나란히
망나니의 칼
을 받아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그는 조선 신도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한양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에게 넘겼는데, 이것
이 1958년 프랑스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諡福, 천주교 신앙에 모범을 보이며 죽은 이를 복자(福者)의 반열로 추대하는 것,
복자는
교황청에서 추대함>되었고,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에 의해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를 받았다.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은 1803년 프랑스 바시 출생으로 1831년 파
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신학교에 들어갔다.
1832년 청나라 사천성으로 가던 중, 조선교구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와 조선으로 가기로 하고
압록강까지 왔으나 국경 감시가 심하여 만주
마가자(馬架子)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가
병사하자 1835년 겨울, 삿갓에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잠입, 정하상의 안내로 서
울에 들어와 영업을 하면서 '나백다록'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1837년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을 보냈으며, 기해박해 때 충청도 홍성(洪城)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
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 103명 순교자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자코스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은 1803년 프랑스 마르쿠에서 출생, 1826년 디뉴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었다. 1837년 조선교구 주교의 서품을 받고 앵베르와 서울로 잠
입했으며, '정아각백',
'사사당'이란
조선 이름을 만들었다.
그 역시 서슬 시퍼런 기해박해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충청도 홍성에서 체포되었으며, 새
남터에서
처단되었다. 1925년 로마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순교자 103인의 하나로 추대되었다.
그들이 처단되자, 목은 하늘 높이 효수되고 유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
었다. 이에 발끈한 박바오로 등 신자 여럿이 시신을 수습해 신촌 뒷산인 노고산(老姑山)에 안
장했으며, 1843년 박바오로가 삼성산에 있는 그의 선산(지금의 삼성산성지)으로 몰래 옮겼는데
아들인 박순집(朴順集, 1830~1911, 세례명 박베드로)에게만 무덤 자리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에
게는 절대 비밀로 부쳤다.
이후 천주교가 공인되고 순교자에 대한 시복이 이루어지자 박순집이 교구에 이 사실을 알렸고
1901년 10월 21일 유해를 발굴하여 원효로(元曉路)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긴 다음, 11월
2일 명동성당(明洞聖堂) 지하묘지로 안장되었다.
1970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 신부의 회고를 바
탕으로 프랑스 신부가 묻혔던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그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
기남 대주교(大主敎),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삼성산순교자성지(三聖山殉敎者聖地)
기념비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89년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 임야 16,000평을 사들여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된 3명의 유해 일부를 가져와 무덤을 만들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무덤 북쪽에 삼성산성당을 세워 이곳을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애지중지 하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 윤필대사
(尹弼大師)가 삼막사(三幕寺) 자리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하여 유래된 오래된 이름인데,
(또는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나옹선사, 지공대사가 수도했다고 함) 천주교에서는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연유로 삼성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허나 근거는
없으며
불교와 관련해서
유래된 이름이 맞다. |
삼삼한 소나무 숲에
묻힌 삼성산성지는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예수상, 프랑스 신부의 무덤, 성
모마리아상, 예수의 고난을 표현한 조그만 석물, 그리고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
여럿이 전부이다. 천주교 성지라기보다는 누구나 편히 안길 수 있는 자연공원 같은 아늑한 분
위기로 순교자성지 기념비와 무덤 주위를
돌며 기도를 하는 신도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곳은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한적하기 그지 없으며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고 있고, 도
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공기가 청정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기에는 딱 좋다.
호암산(삼성산)에 널린 명소의 하나로 간단히 둘러볼 만하며, 2011년 11월에 전구간이 뚫린 관
악산 둘레길과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통과한다.
참고로 관악산둘레길은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관음사,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약수암, 삼성산
성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연결되는 13km의 장대한 산길로 서울시의 야심작인
157km 서울둘레길도 이 구간의 신세를 징하게 진다. (사당역~석수역 같은 구간을 이용함)
※ 삼성산성지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 5522(A)번 버스를 타고 삼성산성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1,9호선 노량진역(1,2,8번 출구를 나와서 한강대교 방면으로 가면 정류장 있음)에서
152, 5517번 버스 이용
*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관악산둘레길과 서울둘레길이 성지 옆을 지나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7-14 |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관악산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호암산폭포, 석수역, 서울대 방면으로 이어지고, 서울둘
레길 또한 그 길에 숟가락을 얹히며 같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이어진 산길(관악산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으로 난 평평한 길은 난곡(蘭谷)과
독산동으로 통하며, 서쪽은 호압사와 시흥2동 벽산아파트로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
첫댓글 자세한 안내 감사합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늘 새로운곳을 소개시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서울시내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그저 보는것만으로도 행복하네요.
서울에 멋진 곳이 은근 많습니다. 동경이나 북경, 호치민, 뉴욕, 파리, 로마보다도 많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