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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19일, 光州 ‘목포의 눈물’ 마음껏 불렀다
文淳太 소설가·광주대 교수
1997년 12월18일 자정, 전라도 사람들은 마침내 목이 터지도록 「목포의 눈물」을 외쳐불렀다. 이 노래는 신안군 하의도에서 뱃길을 타고 목포에 상륙, 영산강을 따라 광주 5·18광장에 이르렀고 다시, 무등산과 망월동 묘역으로 울려퍼졌다. 이제 「목포의 눈물」은 슬픔이 아닌 기쁨의 노래가 되었다.
그동안 이곳 사람들은 마음 졸이며 이 노래조차도 소리내어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날, 불안한 마음으로 아침부터 TV앞을 서성거리던 전라도 사람들은 자정무렵 승리의 미소가 김대중후보(DJ)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참으로 오랫동안 참아왔던 「DJ의 노래」이며 「전라도 애국가」라고 하는 「목포의 눈물」을 마음껏 불러댄 것이다.
개표 결과 승세를 완전히 굳힌 19일 새벽 1시. 신안군 하의도 DJ 고향 마을에는 2백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악을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같은 시간 목포역 광장과 광주 도청 앞 5·18광장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몰려 「목포의 눈물」을 합창했다.
이에 앞서 밤 12시10분 문화방송에서 당선유력 판정이 방송되자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변에는 1백여명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드디어 해냈다. 50년만의 정권교체,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믿습니다」 「경제가 뚫린다. 숨통이 트인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했다. 도청앞 광장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목포의 눈물」 「선구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고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을 연호했다. 새벽 3시 쯤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광주의 금남로와 충장로에 몰려들어 광주의 새벽 거리는 온통 감격과 환희가 파도처럼 넘쳤다. 충장로 우체국 앞에는 거리의 악사까지 등장했고 여기저기서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경상도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실수라도 할까봐 마음껏 술도 마시지 못했고 노래도 부르지 못했었다.
충장로에서 만난 한 퇴직교수는 마치 왕도(王都)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만큼이나 기쁜 역사적 사건이라고 했다. 가까이로는 군사독재 30년간의 소외로부터, 정여립(鄭如笠) 사건으로 호남인재의 차단,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더 멀리는 백제 멸망 이후 1천3백37년만에 처음 맛보는 참으로 가슴짜릿한 집단적 통한이 풀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노교수는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씨에게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바램이 있다면 경제회생과 이번 투표에서 나타난 동서분열의 갈등을 극복하여 민족대화합을 이루어달라는 것뿐이었다.
희번하게 동이 터오자 금남로와 충장로를 메웠던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 거리는 평화롭고 조용했다. 그리고 19일 아침부터 망월동 5·18묘역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대중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후광선생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의 승리이고 5·18민중항쟁 때 희생당한 민주영령들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5·18묘역에서 만난 한 유족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80년 5월,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김대중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계엄군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음을 상기시켰다.
아이 더 안 낳아도 돼
19일 새벽 거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민을 갈 필요도 없고 아이를 더 많이 낳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얏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헌테 무신 큰 혜택이 있겄는가라우. 그냥 그동안 맺히고 맺힌 우리들 한이 한꺼번에 싹 풀린 것만으로 족허다는 생각이구만요. 큰 기대도 안허요.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더도 말고 덜고 말고 우리 전라도가 푸대접 받지 않고 다른 지방허고 비교헐 적에 똑같이 대접받는 것 그것뿐이지라우』
도청 앞에서 잡아탄 개인택시 기사의 말이다. 그는 『대통령은 못내도 전라도 사람이 대통령하는 꼴은 보기 싫다』고 하거나 『준 것 없이 미워서 DJ는 절대 안된다』고 말한 경상도 사람들을 DJ가 진정으로 따뜻하게 아우르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전라도를 소외시켰지만 그 반대로 김대중은 오히려 경상도에 더 많이 신경을 써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대중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진짜 이기는 거 아니요? 승리한 사람이 쪼불쪼불허면 안되지라우. 더군다나 대통령인디…』
그러면서 그는 오늘밤 장사는 그만하고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서 당선축하 파티가 열리는 기사식당으로 가봐야겠다고 했다. 광주의 택시기사들은 DJ가 당선되면 모두 기사식당으로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축하파티는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92년 때는 술집에 『DJ가 당선되면 내일 술은 공짜』라는 알림쪽지가 붙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마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이들 택시기사들처럼 기사식당이나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날씨가 화창하자 18일 아침부터 기대와 초조감에 짓눌린 표정으로 투표장에 나갔다. 그리고 투표율이 80%를 넘을 것같다는 예보에 불안감은 더해졌다. 나들이도 하지 않고 TV앞에 앉아서 초조함을 달랬다. 투표마감직후 문화방송에서 김대중후보가 이회창후보보다 1%차로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 발표가 있자, 더욱 불안해졌다. 이곳 사람들은 그동안 여러 채널에서 입수한 여론조사 결과 DJ가 4~8% 정도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화방송의 여론조사 결과 발표이후 개표가 시작되었을 때, 이회창후보가 계속 1위를 차지하자 굳은 표정으로 탄식을 삼켰다.
『저번참 선거 때는 안될지 암시로도 찍었제만 요본에는 꼭 될지 알고 찍었는디 워쩌까잉. 요본에도 안되면 짠해서 워쪄』
밤 9시까지도 이회창 40.7%, 김대중 38.0%로 이회창 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6시 당선예측 보도를 듣고 김대중후보의 당선이 확실할 경우에는 도청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시민연대모임과 젊은이들은 10시가 되어도 TV앞을 떠나지 못했다. 출구조사 예측보도 직후 떡을 해가지고 도청 앞으로 나가기로 했던 어머니모임에서도 그냥 방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 무렵 거리는 마치 통금시간 시절의 밤거리처럼 조용했다. 자동차 통행도 한가했고 시내버스도 텅비었으며 택시도 빈차였다. 모든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았다.
10시 두 후보의 득표율이 처음으로 38.8%로 똑같이 나오자 처음으로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다시 이회창후보가 리드를 하자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잠시후부터는 10초간격으로 엎치락뒤치락 앞뒤가 바뀌자 환호와 한숨이 교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 12시10분, 문화방송의 윈윈(WINWIN) 시스템이 20여만표 차이로 김대중후보 당선 유력판정 보도가 나오자 아파트마다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고 하나둘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전라도 사람들 숨도 크게 쉬지 말자』
이날 목포와 광주에서는 특별히 당선축하를 위한 행사를 준비하지 않았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40%에 육박하던 선거초반에 경상도에 갔다온 전라도 사람들은 『광주 사람들이 충장로에서 대대적인 당선축하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더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찔끔했다. 그들 말의 뼈 속에 비아냥거림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민회의 선거본부에 전화를 걸어 충장로에는 아예 김대중의 현수막도 걸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을 하는 이모사장은 경상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울산에 사는 동업자에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울산의 동업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사장 앞으로 잘 부탁하오』라고 했다. 이 사장이 뭣을 잘 부탁한다는 거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DJ가 당선되면 이 사장 한자리 하는 거 아니가』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에 이사장 역시 찔끔했다. 울산 동업자의 말 속에도 가시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상도 친구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그리고 비록 경상도 출신 대통령후보가 없긴 하나 경상도 사람들의 정서는 92년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이것을 안 전라도 사람들은 말과 행동에서 경상도 사람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한껏 조심했다. 한나라당 김윤환 선대위원장이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지역감정을 부추겼을 때도 이곳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도 이번에야말로 전라도가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선거기간동안 IMF한파가 겹치자, 이곳 사람들은 『지금 경상도 사람들은 YS 잘못 찍어서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이 자기들 탓이라며 손가락을 잘라 쓰레기통에다 버려서 쓰레기통마다 손가락이 넘치고 있다』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만은 제대로 찍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이곳 사람들은 경상도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 숨도 크게 쉬지 말자면서도 이심전심으로 결속을 다졌다. 아무튼 호남표 결집 현상은 전남과 전북이 똑같았다. 전북 무주는 한나라당 황인성(黃寅性)고문의 고향이고 익산은 한나라당 김덕룡(金德龍)선대위의장 고향인데도 92년에 비해 전북의 DJ지지표 결집현상은 강하게 나타났다.
이심전심으로 언행 삼가
부정을 탈까봐 큰 소리로 웃지도 못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이번이 DJ의 마지막 도전인데다가 그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 마치 촛불을 켜고 밤길을 걷는 것처럼 불안했다. 기대는 선거 막판에 이르면서 이회창후보와 박빙의 차이로 좁혀지자 경계심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92년 대선때만해도 전라도 사람들은 타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공공연히 큰 소리로 DJ지지를 외쳤고, 반대하는 사람들과는 멱살다짐은 물론 주먹대결까지도 벌인 일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광주 한복판 식당에서 큰 소리로 한나라당 이회창지지발언을 해도 눈하나 흘기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광주에서는 그 흔한 선거폭력이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때 같으면 대학생들의 반(反)한나라당 시위가 있을법도 했는데 숨을 죽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시위막으랴, 선거분석하랴, 동향감시하랴, 바빴던 경찰도 손을 놓고 있었다.
지난 12월6일에는 울산에서 영호남문학인대회가 열려 호남지역에서도 1백명의 문인들이 참가했다. 이때도 광주사람들은 울산에 가는 문인들에게 절대로 경상도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언행을 삼가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대선에 대해서 아무말도 하지 말고 그냥 그들이 한 말을 듣고만 오라고 했다.
18일의 투표 시간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선거날에는 으례 오전중에 투표를 마치고 오후에는 등산을 하거나 나들이를 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전 투표를 자제하자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오전에 전라도의 투표율이 높으면 경상도의 기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여자들 계모임이나 동창회 모임, 혹은 아파트잔치의 노인정을 통해서 널리 유포되었다. 실제로 광주의 경우 18일 오후 3시까지만 해도 투표율이 전국 시도중에서 가장 낮았다.
거리에 나붙은 선거벽보 훼손에도 신경을 썼다. 12월10일 선관위에서는 대선후보 1천3백70개소에 대한 선거벽보훼손을 조사했다. 이회창후보의 벽보가 3백23곳이 훼손되었고 이인제후보 2백40, 김대중 75개소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이환의(李桓儀) 한나라당 광주시선거대책위원장은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이회창후보의 벽보가 훼손되지 않고 멀쩡한데 광주지역 이후보의 벽보는 훼손된 것이 너무 많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실 역시 지역감정을 조장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민들 스스로 벽보훼손을 막는 일에 나서기도 했다. 화순군의 경우 찢을 수 없도록 아예 벽보마다 비닐을 씌워서 부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선거 막판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돌발변수였다. 이회창후보가 직접 말한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유세 발언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엇보다 92년 부산복국집사건과 비슷한 일이 재발하여 경상도의 표가 이회창후보쪽으로 쏠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이 때문에 고흥 사람들은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회창후보의 장남 정연씨를 은밀히 감시보호하기도 했다. 만약에 정연씨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결정적인 악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남은 대선 무풍지대
이 때문에 16일 이회창후보가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 광주 거리유세를 결정하게 되자 시민들은 긴장했다. 언젠가처럼 폭력배를 동원하여 자작극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회창후보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광주유세가 별 탈 없이 끝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는 비행기로 광주에 도착, 1시간동안 광주에 머물렀다.
이때 국민회의측은 한나라당이 혹시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계란, 돌팔매, 밀가루세례 등 자작극을 연출할지 모른다면서 유세청중 1백명에 청년당원 등 4백명을 동원 이후보 경호대를 조직하여 돌발사고에 대비했다. 경호대들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현장상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비디오카메라를 휴대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호남지방은 처음부터 97년 대선 무풍지대였다. 대선기간동안 빅3 중에서 호남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2월3일 이인제후보가 전북에 3시간, 이회창후보가 16일 광주에 1시간 머무른 것이 전부였다. 공을 들여봤자 헛수고라는 것이었다. 선거운동기간 중에 유세는 하지 않더라도 5·18묘역에 한번씩 다녀갔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광주 사람들은 아직 5·18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새 대통령이 5·18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참배를 하지 않자, 결국 표에만 관심이 있고 민주화의 역사에는 무관심하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DJ도 광주유세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부 시민들은 국민회의 당사에 전화를 걸어 DJ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국민회의측은 호남에서만은 『조용하고 겸손하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DJ당선을 위해 선거열기를 극도로 자제한 이같은 분위기에서도 한나라당 광주선거대책본부에서는 청중없는 거리유세를 계속했다.
한나라당 광주선대위원측의 거리유세에는 많아야 1백명의 청중이 모였고 거의 손을 꼽을 정도로 한산하고 썰렁했다. 이환의 광주선대위원장은 이회창후보에 20%만 찍어달라고 읍소하다시피했고 조규범(曺圭範) 국민신당선대위장은 광주에서 이회창후보보다 1%라도 앞서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두 당의 후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호남사람들은 87년 대선때 김대중후보에 88.4%의 몰표를 주면서도 노태우에게 9.8% 김영삼에게 1.2%를 주었고 92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91.9%, 김영삼 4.3%, 정주영 2.3%를 주었다. 92년에 타후보에게 새어나간 것이 6.6%에 지나지 않았다. 92년 여당의 프리미엄을 업은 김영삼의 막강한 파워와 정주영의 금력과 현대의 조직력도 겨우 이 수준이었다.
따라서 97년에는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은 단 한표도 아쉬운 상황이어서, 이회창, 이인제후보에게 흘러들어갈 표는 합해야 5% 안팎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만큼 92년에 비해 이번의 결속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왜 DJ에게 몰표를 줬나
더욱이 이번 선거에서는 과거 여당의 「지역발전론」도 호소력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지역발전을 위한 후보들의 공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까지 대통령후보들이 호남에 와서 내세웠던 지역공약이 거의 실천되지 않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이번 선거를 이성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은 것이었다. 역사적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박탈감과 소외감, 허무감, 절망감이 누적되어 「집단적 희망」사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광주, 전남시민단체협의회와 대구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 2백여명은 12월7일에는 광주에서 14일에는 대구에서 각각 합동으로 모임을 갖고 거리캠페인과 스티커부착 등반대회를 열고 두 지역의 화합을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 행사마저도 극히 조심스럽게 관망하는 자세였다.
그렇다면 전라도 사람들이 왜 그토록 DJ당선에 집단최면에 걸린 것처럼 매달리는가. 왜 이들은 놀라운 결속력으로 87년 대선 88.4%, 92년 91.9%의 몰표를 쏟아부었고 이번에는 그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가. 이 신비한 상승력의 괴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들은 DJ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가. 92년 패배 때 이제 그만 DJ의 환상과 허무주의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하면서 눈물로 DJ와의 슬픈 결별을 이야기했으면서도, 왜 다시 이렇듯 더 많은 몰표를 쏟아부었는가. 이들의 절망은 무엇이며 희망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개발에 대한 소망때문도 아니다. 특정지역의 패권주의로 인한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도 아니다. DJ의 그늘 밑에서 출세라도 해보기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이제 전라도 사람들은 인재등용이나 지역개발의 소외감 따위는 입에 올리기도 싫어한다. 오히려 이들은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경상도쪽에 애정을 쏟아 동서지역감정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이들이 이렇듯 간절하게 DJ의 당선을 바라는 것은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절망감 좌절감 허무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들은 거듭된 좌절감 때문에 5·18때만큼이나 삶이 무력해지고 말았다. 거듭된 절망감 속에는 DJ에 대한 막연한 원망과 허탈과 고독과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다.
호남에도 희망의 햇살이
사실 92년 대선에서 호남사람들은 DJ가 꼭 당선되리라고 믿고 91.9%의 몰표를 쏟아부은 것은 아니었다. 92년 대선이 끝난 다음에 모 지방지의 여론조사에서 「확실하게 당선될 줄 알고 투표했다」가 32%인 반면에 「당선 안될 줄 알고」가 36%로, 당선 불가능 예상 비율이 더 높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오랜 지역패권주의가 호남소외를 낳았고, 세차례의 대통령선거 때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대리인에게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호남사람들의 일종의 한풀이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쩌면 호남사람들은 대통령 선거때 선거 결과를 승패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은 92년과 달랐다. 처음부터 여론조사 결과가 DJ우세로 나왔기 때문에 이번만은 당선확신을 가지고 몰표를 던졌다. 호남사람들이 더욱 절박하게 느낀 것은 이번이 아니면 「호남대통령」은 앞으로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향후 몇십년 동안에 DJ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인물이 없다고 생각한 데서 이들의 절박감은 더했다.
그러나 호남사람들이 DJ에게 몰표를 던진 것을 지역감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단순히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그에게 몰표를 쏟아부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성의 문제이며, 그 역사성은 문제의 소재가 어떤 지방과의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부당한 지배권력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19일의 태양이 떠오르자 광주의 거리에는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았고 시민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1997년 12월19일의 태양은 유난히 눈부셨다. 이제 호남에도 찬란한 희망의 햇살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DJ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만약 그마저 실패할 경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에 군부독재와 같은 보다 독재적인 방식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린 것처럼, 제2의 박정희를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가 이 지역에 대해 특별히 잘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역사 속에서 그가 꼭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리라고 믿고 있다. 그는 선거 유세 때 자신이 「위기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겠다고 했다.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등을 밟고 건너가라고 했다. 정말 위기의 강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하고 믿을 수 있는 마지막 고통의 다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첫댓글 참여정부도 어느정권보다 더 훌륭한 업적으로 성공한 정부로 남기를 바랍니다. 민주개혁세력이 한데 뭉쳐서, 독재를 그리워하고, 유신향수에 젖어 옛날로 회귀하려는 물꼬를 막아야만 합니다. 이 글을 읽다보니 새삼 가슴이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