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나 지석(誌石)에 새길 글을 스스로 지은 분은 꽤 많다.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은 스스로 만사(挽詞)를 짓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으며, 백낙천(白樂天)은 직접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과 묘지명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자찬 묘지명을 남겼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스스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근심 가운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에 근심이 있었네. 조화를 타고 일생을 마치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오?[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라고 하였으며,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도 직접 묘표(墓表)를 지어, “맹자(孟子)의 말씀을 매우 좋아하여,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며 합치되는 바가 없이 살다 죽을지언정,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에 맞춰 살면서 남들이 선하다고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자**에게 끝내 고개 숙이고 마음을 낮추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양의 경우도 꽤 유명한 자찬 묘비명이 있다. 1925년 『인간과 초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는 내용의 묘비명을 죽기 전에 스스로 지었다. 동서와 고금을 넘어 자찬 묘비명을 남긴 분들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관조가 놀랍다.
미수(眉叟)는 미수(米壽)를 누리기도 했거니와 글도 많이 남겼다. 『기언(記言)』은 본집만 67권인 데다가 별집도 26권이나 된다. 미수 스스로도, “내가 『기언』을 지어 스스로 반성하였는데 말이 많으면 유익할 것이 없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하였다. 그중에 큰 것을 들면 「자서(自序)」가 2편이고 정사(政事)를 논한 것이 30편이니 말이 너무 많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미수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권의 「자서」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이 자찬 묘비명은 「자서」를 축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았던 분이 고종(考終)을 앞에 두고 132자의 짧은 글로 자신의 일생을 관조한 것이다.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네.”라는 미수의 자명(自銘)은, 행한 것은 말과 일치하지 못했고 말한 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겸사이겠지만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물론 선현이라고 해서 언행일치가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군자는 그 말이 그 행실을 지나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君子恥其言而過其行.]”는 공자의 말씀도 이런 이유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100세 시대니 120세 시대니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고인(古人)이라면 무덤에 들어갔을 나이에 다시 환갑의 나이만큼을 덤으로 더 살게 될지도 모른다. 스스로 묘비명을 지어 후세에 남길 엄두를 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캄캄한 밤길을 지팡이를 두드려 가며 걷는 듯이 살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게 보편적인 우리네 인생이다. 훗날 스스로 묘비명을 짓지는 못하더라도 덤으로 얻은 삶을 위해 미수의 묘비명을 지금 나의 좌우명으로 삼는 것은 어떨지 싶다. “말은 행동을 덮고 행동은 말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자!”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다 보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노라는 회한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래야 미수가 후인을 경계한 보람도 있을 것이다. 증자(曾子)가 “새가 죽으려 할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에는 그 말이 선하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하였으니, 미수가 묘비명을 자찬하면서 후인을 경계한 말이 어찌 선하지 않았겠는가?
**이 세상에 …… 여기는 자 : 공자(孔子)가 향원(鄕原)을 묘사한 글로, 《맹자》〈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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