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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재판을 청한 바울
행 25:1-12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행 25:1-12 / [가이사에게 상소한 바울] 베스도는 새로 총독이 된 지 사흘 뒤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2)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곧 베스도에게 면회를 청하여 바울의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3) 그들은 바울을 당장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도중에 잠복해 있다가 그를 죽일 계획이었다. 4)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고 자기도 곧 돌아갈 것이니 5) 바울을 고발하려거든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같이 가서 그곳에서 재판을 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6) 여드레인지 열흘인지 지나고 나서 가이사랴로 돌아간 베스도는 그 다음날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7) 바울이 법정에 들어서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무거운 죄목을 들어 고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하나도 증거를 대지는 못하였다. 8) 바울이 항변하였다. `나는 유대인의 율법을 어긴 일도, 성전을 더럽힌 일도 없고 로마 정부에 반역한 일도 없습니다.' 9) 그러자 베스도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내 앞에서 재판받을 생각은 없소?' 하고 물었다. 10-11) 바울이 대답하였다. `싫습니다. 나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가 무죄하다는 것은 총독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일 내가 사형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면 나는 죽음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죄하다면 각하든 어느 누구든 간에 나를 이 사람들에게 넘겨 죽게 할 권리는 없습니다.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12) 베스도는 배석판사들과 협의한 후에 `좋소. 당신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계속 감옥 가두어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총독은 보르기오 베스도로 교체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음모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신임 총독 베스도의 등장(1-5) 신임 총독 베스도는 부임한 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관할지역의 유지들에게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를 만난 유대 지도자들은 대뜸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해 달라고 다시 고소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이송되는 길목에서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련한 총독 베스도는 유대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고 바울을 보호합니다. 굳이 바울에 대해 고발하려면 절차대로 당신들이 가이사랴에 와서 고발하라고 합니다. 베스도 덕분에 바울은 위기를 넘기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신임총독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으려느냐(6-9) 베스도가 주재하는 재판이 가이사랴에서 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거창한 죄목으로 바울을 고발했지만 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무죄이므로 석방하면 됩니다(25). 그런데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내 앞에서 재판받을 생각은 없는지 묻습니다. 베스도가 유대 고위층 인사들의 첫 청탁을 거절한 것을 부담스럽게 느꼈는지 아니면 유대지도자들과 일주일 이상 함께 하면서 처음 마음이 약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유대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울을 죽이려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10-12) 베레스 총독은 흔들리고 유대인들의 압박은 거세어지는데 중에 바울의 지혜의 대답은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른 로마시민의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베스도의 입장에서 유대인들 앞에 명분을 세우면서도 바울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로마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을 살해하려던 유대인의 음모는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너머 바울이 로마에 가서 예수를 전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적용: 베스도는 바울에게 결국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여기서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에게서 배울 지혜의 선택과 그 지혜의 답변 내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행 23:11)?
리더자는 어떤 상황과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공에만 목적을 두고 있으면 안 됩니다. 때로는 고난과 실패의 강도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진짜 리더가 되고 싶다면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25:1
도임한 지 삼일 후에 - '도임한 지'(* , 에피바스 테에파르케이아)는 직역하면 '도(province)에 발을 올려 놓은 지'가 된다. '에피바스'(* )는'발을 올려 놓다'는 뜻의 '에피바이노'(* )의 제2부정 과거형이고 '에파르케이아'(* )는 '도'(都)를 뜻하는 후기 헬라어 단어이다. 결국 통치할 땅에 발을 올려 놓는 것으로 취임을 표현한 것이다. 베스도는 58-60년경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경 사망하기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삼일 후에'라는 표현은 제3일째를 가리키는 유대적 어법이다. 그러니까 베스도 신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를 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새로운 곳에 처음 부임한 베스도로서는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하는 것과 지역의 유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였고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으므로 그곳부터 방문한 것이다.
=====25:2
대제사장들과...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대제사장은 파비(Phabi)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가 벧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대 제사장직을 계승하게 하였기 때문이다(Jos, Angiq., XX, 179<iii, 8>,194<viii, 11>, 196<viii, 11>).그의 임기에 대해서는 탈무드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이 각각 다른데 전자에 의하면 10년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의하면 베스도 통치 기간에 아그립바 2세가 대제사장직을 다시 이스마엘에서 요셉으로 교체시켰다 한다. 요세푸스에 따른다면 이스마엘의 재임 기간은 2년이 채 못되는 셈이다. 한편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형은 전임자(前任者)들까지도 포함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종신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는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전직 대제사장들도 동일한 명칭으로 불리었고 그 위치가 존중되었으므로 통상 이들을 같이 부를 때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바에 대해서는 산헤드린의 영향력있는 회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15절). 한편 신임 총독이 관할 지방의유력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상례(常例)라는 사실을 잘 알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하여 다시금 바울을 공격하고 나섰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잡아죽이려는 의지가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는, 그들이 무려 2년이 지나도록 바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25:3
베스도의 호의로...죽이고자 - 대제사장들 이하 산헤드린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바울을 죽일 수 없음을 확인한바 있으므로 불법적으로 살해하려 한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악용하여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되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경우 자객을 매복(埋伏)시켰다가 중간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25:4
베스도가...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 베스도는 결코 호락호락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어쩌면 전임자인 벧릭스가 베스도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개요를 일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그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첫째,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는 만큼 그가도주할 염려는 없다. 둘째, 베스도 자신이 '미구(未久)에'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이므로 굳이 바울을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구'(* , 타케이)는 '빠른'의 의미인 '타코스'(* )의 여격 단수형으로,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빨리 나아감을 뜻한다.
=====25:5
유력한 자들은...송사하라 - '유력한 자들'은 15절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보며(Overbeck), 그 의미는 '책임있는 대표자' 정도로 이해된다. 베스도는 그들의 재판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면 그들 중 책임있는 대표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호송해오자면 여러 면에서 번잡스러우며 또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법정에 구류되어있는 자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 데려와 재판한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으로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게된 셈이다.
=====25:6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기간에 대해 헬라어 성경(사본)들 가운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예컨대 트리니티 성서 공회(The Trinitarian Bible Society)에서 발행한 헬라어 성경에는 '10일 이상'으로 되어 있고(more than ten days, RSV), 화란의 네슬알란드 성경(Nestle-Aland)에는 '8일 혹은 10일 이상을 지내지 않고'라 되어 있다(notmore than eight or ten days, RSV). 전통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 본문처럼 '8일 혹은10일'을 지지한다.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 베스도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시작되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판만 세 번(22:30;24:1-22) 받는 셈이 되었고 또한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을 또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25:7
유대인이 둘러서서...증명하지 못한지라 -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며 그러한 분위기로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 내용은 더둘로의 것에 비해(24:5, 6) 더 새로운 것이 없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중한 죄목으로 송사(訟事)하였으나 단 한 가지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다. 특히 이 소송사건이 무려 이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 내용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증인을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로써 모함하려 하니 증인이없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5:8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아니하였노라 -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을 집약적으로 종합하여 반박하고 있다. 율법이나(21:21), 성전(21:28)은 유대인들과 관계된 것이고, '가이사에게'라 함은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반란자, 또는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고 말한 것(24:5)에 대한 요약적 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단언은 유대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바울의 변론을 반박하지 못하였다. 한편 '가이사'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2-44)의 속명(俗名)이었으나,그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Octavianus)가 B.C. 27년에 로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가이사는 황제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참조로 역대 가이사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1)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2) 디베료(14-37) (3) 칼리굴라(37-41), (4) 글라우디오 (41-54)(5) 네로(54-68) (6) 갈바(68-69) (7) 오토(69) (8) 비텔리우스(69) (9) 베시파시아누스(69-79) (10) 티투스(79-81) (11) 도미티아누스(81-96) (12) 네르바(96-98) (13)트라야누스(98-117) (14) 하드리아누스(117-138).
=====25:9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심문을 받으려느냐 - 원고측과 피고의 진술을 다 들은 베스도는 즉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증명되었고(7, 8절), 따라서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베스도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만약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지동자들의 반감을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임(赴任) 초부터 유대의 지도자들과 부딪쳐 그들의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통치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총독 관할 지역의 주민들이 총독에 대한 불평을 황제에게 고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 고발을 당한 총독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스도는 이런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5:10
가이사의 재판 자리...행한 일이 없나이다 -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가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재판대 앞에선 이상 끝까지 가이사의 재판을받아야 하는 것이지 로마 시민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유대의 산헤드린에 서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의를 거절하는 의미에서 이 사실을 확인시킨뒤 자신의 무고함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무고함을 총독베스도 역시 잘 알고 있음을 비교급 '칼리온'(* , '더 잘')을 써가며 진술한다.
=====25:11
만일 내가...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 이는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요세푸스가 피고의 입장에서자신을 변호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抗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3절;23:14-16). 로마 시민은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세네카(Seneca)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us)등의 영향으로 선정을베풀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善政)을 베풀던 시대였던 것으로보인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가고자 했언 자신의 희망과(19:21).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소명923:11)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Robertson).
=====25:12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 '배석자'(* , 쉼불리온)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을 가리키며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다(Haenchen).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陪席者)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다. 지금 이들이 상의한 것은 바울의 항소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연 바울에 대한 고소가 중대한 것인가의 여부가 논의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대한 소송건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바울을 반란 죄로 고소하였고(24:5),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 많이 작용하였던것으로 보이며(9절 주석 참조),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넘김으로써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 설 교 >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
김경년 목사 / 행25장 1~12절
얼마전 어떤 집사님께서 좋은 책을 선물로 주셔서 잘 읽어보았습니다. 요즘 서점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베스터셀러는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후속으로 ‘내 인생을 바꾼 긍정의 힘’ 실천편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내용 가운데 오늘 말씀과 관계가 있는 부분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큰 그림을 보라’입니다. 내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에 맡기는 사람이 진정 현명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모습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때 가장 활발하게 일하신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라. 참지 못하고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하면 오던 복도 달아날지 모른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에 맡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현명하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방법이 상식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큰 그림을 보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 계획에 참여할 다른 사람이 준비가 덜 됐을 수도 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바꾸셔야 할 때도 있다. 모든 조각이 하나로 합쳐져야 하나님의 완벽한 때가 오는 법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상황을 조정하고 계신다. 우리가 느끼거나 보지 못해도, 10년 전이나 상황이 마찬가지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어떤 어둠의 세력도 하나님을 막지 못한다. 정한 때가 되면 어느 누가 방해해도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고야 만다. 오늘을 온전히 사는 비결은 하나님의 시간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조각을 하나로 맞추고 계신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계신다. (중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의 그림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림이 완성될 것입니다. 큰 그림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울을 2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오자 유대인들이 벨릭스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바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스도에게 여러 가지로 간청도 하고 압력도 넣어서 어찌하든지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베스도가 부임하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재판에 관한 문제를 다시 제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를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길에 숨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고, 또한 바울의 사명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며칠 후에 가이사랴에 내려간 베스도는 재판 자리에서 바울에게 묻습니다(9절).
이렇게 묻자, 바울은 10절에서 대답합니다.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왜 이토록 로마에 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비록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에 가고자 했던 분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3:11절 말씀에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이것은 주님이 직접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고, 결국은 로마를 통해 세계 복음화를 이루고 싶었습니다. 즉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삶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바울의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바울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소송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성전을 더럽히고, 로마 황제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고소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공회 앞에 재판을 받고, 가이사라에서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으면서 감옥에서 2년의 세월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빨리 로마에 가야하는데 소송사건에 휘말려 감옥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말하면서 굳이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인간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잠언 16:9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삽시다.
J. I. 패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미래에 대해 알려 주신다거나, 한 번에 한 걸음 이상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한 번에 다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알려고, 사업의 성공 여부를 알려고, 내 계획과 뜻이 성취여부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를 알려고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사주팔자를 보고, 점 쾌를 보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재판을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죄인이 되어 재판 받는 일은 고난이요, 고통입니다. 죄인이 당하는 모욕과 멸시천대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판을 통해서 바울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내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운 목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환경에 처해 있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내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십니다. 즉 재판을 통해서 바울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일로 답답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범사에 때가되면 결정하게 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답답해하는 문제들 하나님께서 결정하게 해주시므로 여러분들이 계획과 뜻이 더 좋게 이루어지도록 그 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함께 한 한국인 자매가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자매입니다. 한국 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맹인 성악가된 그녀는 예수를 믿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난 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뒤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남산에 올라갔다가 맹인 부부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너무나 다정했습니다. 남편이 지팡이로 길을 두드리며 갔습니다. 그런데 멀리 두드리지 않고 한 걸음 앞에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길을 잘 찾아서 걸어내려 오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고,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누구입니까?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입니까? 아니면 가아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문제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얽히고 섞여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주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이 계획을 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이사 베스도 아그립바 그리고 바울.
양향모 목사 / 행 25:1-12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를 여타종교들과 같이 역사의 한 구석에서 몇몇 사람들이 연구하여 만들어서 서서히 발전되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역사 한 구석에서 시작된 종교들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여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면서 이 땅에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주셨고 마음껏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알게 하신 최소한의 규칙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그로인해서 영원한 생명도 잃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행복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하는 이 복음의 도는 그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다시 구원하시기 위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세계 역사의 중심에서 우리 기독교는 시작되고 전개되어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중심은 성경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사역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교회를 통해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는 오늘날 역사의 중심입니다.
세계 역사 속에는 많은 강대국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강대국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세운 나라들입니다. 강대국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이 되고 때로는 침략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움도 받기도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강대국들을 통해서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는 역할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세계 강대국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많은 일들을 감당한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성경의 기록들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라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후에 일어난 독일이나 영국이나 미국 등의 나라들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특별한 나라들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서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나라입니다.
요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 부분은 로마가 세계를 통치할 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갈 때까지 로마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크게 쓰임을 받은 나라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끝부분에 특별히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가이사, 베스도, 아그립바에 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이 사람들 모두가 역시 로마와 관계된 사람들입니다.
가이사, 베스도, 아그립바
1. 로마의 황제 가이사
주전 100여년 경에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 가이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라고 하고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라고 읽습니다. 가이사, 카이사르, 시저 다 같은 이름입니다.
이 가이사의 후손들이 로마 황제가 됨으로서 그 가문의 성인 가이사가 황제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그 가문의 성이 아니라 황제를 호칭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가이사의 대를 이은 황제들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 '가이사 아구스도'(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전국에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 고향에 가서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로 호적 하러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였고 선지자가 이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의 왕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나심이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다는 것과 선지자가 예언한 베들레헴에 나시게 함으로서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음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가이사 자신은 사람들이 다 각자 호적을 하게 만들어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는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를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다섯 해라고 했습니다. 이 디베료가 '디베료 가이사'(티베리우스)라는 로마 황제입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11장 27절 이하에는 안디옥에서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이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글라우디오가 글라우디오 가이사(클라우디우스)라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성경에 그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대에 네로라는 사람이 로마 황제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사악한 사람으로 이 사람이 기독교를 핍박하여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한 로마 황제도 있었습니다. 콘스탄틴이라는 로마 황제는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기독교가 세계만방에 전파되는 일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2. 황제의 도시 가이사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이사라’라는 도시는 가이사의 도시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로마는 강대국이 되어서 많은 나라들을 점령하고 곳곳에 그들의 통치를 위한 도시들을 건설하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유럽, 소아시아를 비롯한 중동지역과 아프리카 북부 지방을 점령하여 점령지를 도로로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도로들을 건설하고 주요 거점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에 걸쳐서 전도여행을 한 모든 도시들이 로마의 점령국들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바울은 로마가 점령한 나라들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라는 나라를 사용하신 증거들입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로마의 속국이 되게 하시고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악한 일로 때로는 선한 일로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3. 총독 베스도
로마황제 가이사는 각 점령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서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지역에 파송된 여러 명의 총독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장본인입니다. 본인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고 석방하려고 했으나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키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수천 년 동안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성도들 입에 오르내리며 악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가 만나고 있는 벨릭스입니다. 벨릭스도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사도 바울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서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복음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벨릭스의 뒤를 이어서 베스도가 총독으로 왔습니다. 베스도도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끝까지 유대인들에게 내어주지 않고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도록 해준 사람입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석방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4. 분봉왕 아그립바.
로마가 통치할 때 이스라엘 지방에는 분봉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총독을 파송해서 나라를 다스리기도 했지만 분봉왕을 세워서 정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분봉왕은 헤롯의 가문에서 대를 이어서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인 권세는 총독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으로서 위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유대교로 개종하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무시하는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자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 사실을 알고 그냥 가버리자 그 지역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헤롯 안디바가 유대 분봉왕이 되었는데 그 형제의 아내를 취했다가 세례요한에게 지적을 받자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심문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이 왕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절에 등장하는 아그립바라고 소개된 사람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이들은 유대의 분봉왕이었지만 로마황제에 의해서 임명되었기 때문에 친로마적이었고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재판
오늘 본문 말씀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의 일로 시작합니다. 베스도가 부임한지 삼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자신이 다스릴 나라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유대교 지도자들과 만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거기 있던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이 다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지난번 벨릭스 총독이 있을 때 고발한 것과 똑 같은 것을 가지고 다시 고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 더 요구하기를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재판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재판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하면 바울의 죄가 밝혀질 것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고발하는 내용이나 작전이나 다 지난번에 써먹은 그대로를 가지고 다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바뀌었으니까 새로 부임한 총독이 자기들에게 선심을 쓰고자 원하는 대로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 총독은 이미 전임 총독에게 그런 정보들을 전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작전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가이사랴에 와서 다시 고발을 하면 재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쯤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돌아온 베스도가 바울을 다시 재판대 앞에 세우고 그를 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중대한 일로 바울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이 뭘 고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의 답변을 보면 아마도 지난번 고발한 내용과 같은 것을 가지고 고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고발에 대해서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만약에 바울 자신이 죽을죄를 지었다면 당당하게 죽을 것이지만 죄가 없는데 죽을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꾸 여기서 재판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가서 최후의 재판을 받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를 한 후에 바울의 제안대로 로마로 가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이런 재판 과정들은 그것을 통해서 로마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은 앞으로 300여년 후인 주후 313년에 있을 로마 황제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을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고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기 위한 엄청난 일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일은 이런 역사를 통하지 않으셔도 또 이런 인간들을 동원하지 않으셔도 간단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들어서 천국에 데려다 놓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각 사람이 보고 깨닫고 스스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입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 그냥 누군가가 쓴 허구의 소설이 아니며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계획대로 진행하시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이런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를 보고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버리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종교를 통해서 얻는 기득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살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를 부리고 기독교를 반대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거부했습니다.
로마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호감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세상의 돈 출세 같은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욕심들을 얼마나 많이 버리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있는 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 복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이 세계 역사의 중심이며 이 복음을 믿는 일과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세계역사의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역사 속에서 실패한 인간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그런 모습들을 우리의 모습에서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시고 구원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서금석 목사 / 행 25장 1~12절
고대 아테네에서 의회가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의회가 진행되는 도중 한 의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독수리에게 쫓기던 작은 새 하나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안긴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의원은 새를 바닥에 팽개쳐 죽게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이 일제히 그를 규탄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에 몰린 새를 보호하지 못하는 의원이 어찌 불쌍한 서민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는 이런 정치가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이곳저곳에서 그를 규탄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의원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그 의원은 만장일치로 의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찮은 미물인 작은 새 한 마리라 할지라도 이를 아낌으로써, 자신의 위신보다는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돌볼 줄 아는 자만이 참된 정치가의 자질이 있음을 알았던 아테네 의회의 결정이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하는 것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헛된 이상을 꿈꾸며 백성들의 안위는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려 하고 있습니까? 정치가뿐입니까? 사회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따르는 몇몇 사람들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 진리를 감추고 자신만 살고자 안간힘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대 아테네 의회의 결정이 생각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과정입니다. 먼저, 총독 베스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베스도는 총독 벨릭스의 후임으로 AD 58-60년경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 사망하기까지 총독으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이 베스도 총독은 의롭고, 정직하였으며, 좋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이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이 재판받는 장면입니다.
1절 말씀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베스도는 총독으로 부임한지 삼 일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삼일 만에 갔다고 하지만, 사실 베스도 신임 총독이 예루살렘 방문을 매우 서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만을 쉬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베스도 총독이 왜 이리 급히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관할 구역을 탐방함으로써 지역의 유지들과 친분 관계를 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루살렘이란 곳의 중요성이 베스도 총독으로 하여금 삼 일 만에 예루살렘을 찾게 한 주된 이유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의 수도였습니다. 더욱이 종교적인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정치적으론 상당히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서는 결코 예루살렘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에 방문하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총독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총독이 오니, 당연히 지역의 유지들로써 마중을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목적은 바울을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베스도는 지금 신임 총독으로 예루살렘으로 방문하여 그곳의 유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민족의 유력자들을 만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 민족의 유력자들은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 참으로 끈질기고 지독하지 않습니까? 바울을 죽이려는 열정이 보통이 아닙니다. 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지도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찌 보면, 바울에 대한 악한 심정도 수그러질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이 무엇입니까?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는"
한 마디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까? 가이샤라까지 가는 길이 멀어서였습니까? 아니지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자객을 매복시켜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하자는 요청을 받은 베스도 총독은 두 가지 이유는 말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니 도주할 염려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이제 곧 내가 가이사랴로 떠날 텐데, 굳이 바울을 불러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써는 바울이 위험한 죄인도 아닐뿐더러, 바울이 직접 로마 시민권을 내세우며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했기 때문에 산헤드린 의회에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어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정 고소하려고 한다면, 같이 가이사랴로 가서 고소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에 대한 재판은 베스도 총독의 제안대로 가이사랴에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약 10일 정도 머무른 후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리고 베스도 총독은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튿날 바울을 고소하고자 했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을 불러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오게 하여 재판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을 죽이겠다는 오직 한 가지 신념으로 이번에는 더둘로와 같이 유능한 변사를 대동하지 않고 직접 많은 사람들이 손수 와서 송사에 앞장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에게 위협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바울의 죄에 대해서 고소하고 나서면 바울이 위축될 것이고 베스도 총독은 분명히 자신들을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분명 바울이 죄인임을 말하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재판은 시작되었고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이 고소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바울의 죄목에 대해서 분명한 증거를 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2년이나 학수고대했지만, 여전히 바울의 죄목을 입증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된 내용을 가지고 바울이 유죄임을 증명하려고 하니 그것이 되겠습니까? 2년이나 시간이 흘렀으니 증인을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모함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니 거짓이 거짓을 낳을 수 밖예요.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가 끝나자, 이번에는 바울이 이에 대해 변론을 시작합니다.
8절 /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이 바울의 변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에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유대인의 율법도 범한 적도 없고 성전에 이방인과 함께 들어가 성전을 더럽힌 적도 없고 더욱이 반란을 꾸며 가이사에게 누를 끼친 적도 없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바울로서는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바울은 자신은 로마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가이사의 법정에서 재판받기로 했으니 굳이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재판 역시 판결이 보류되는 것으로 재판을 종결되고 대제사장들과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음모 역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두 가지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베스도의 재판
우리는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받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재판 자체에 대해서 두 가지 면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재판의 긍정적인 모습이며, 두 번째는 재판의 부정적인 면입니다.
1. 긍정적인 면
베스도 총독 앞에서의 재판은 사실상 바울에게는 매우 불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스도 총독은 새로 부임해 온 총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유대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벨릭스 총독도 중앙으로 소환된 이유가 그의 폭정으로 인해 유대 민족 지도자들과 갈등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제 잘못하면 베스도 자신 역시 그의 총독 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단 관할 지역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중앙 정부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와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베스도가 쉽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의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이점은 우리가 베스도 총독에게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 대한 재판을 가이사랴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은 그가 일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즉, 베스도는 만약 이 재판이 그토록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할 것이라면 당연히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가이사랴의 재판장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의 결정으로 인해 일단 바울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 지도자들이 매복시켜 놓은 자객들에 의해 분명 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것이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2. 부정적인 면
그러나 베스도의 재판에 한 가지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아마 이전 총독 벨릭스로부터 바울에 관련된 이야기도 모두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설사 베스도 총독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재판 과정 중 송사를 하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 그 어느 누구하나 바울이 죄를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죄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 모두가 거짓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재판관으로서는 석방시켜야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여러분! 왜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석방하는 것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습니까?
9절 /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유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베스도 총독은 신임 총독으로서 자신이 유대 민족 지도자들에게 분명 환심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와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유대인들의 요청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의 이런 제의에는 그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민족 지도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베스도 총독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정치가로써 백성들로부터 환심을 얻어내기 위해 진실마저 외면하는 그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사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 많습니다. 지도자로써 환심을 얻기에만 급급하지 진실을 지키려는 마음은 약한 지도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 민심에만 관심이 있지, 정말로 지킬 것은 지키고 말할 것은 말해야 하는 사람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조금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반면, 올곧게 목적을 이루고자 진실된 모습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은 존경은 하지만, 그리 사랑 받지 못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거부감이 생깁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거짓의 담을 쌓아갑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 진실을 말하고 진실된 삶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더욱 진실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사회. 명분이 진실보다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병폐입니다. 명분도 중요하겠지만, 진실 앞에서 명분만을 강조하는 것은 작게는 개인을 망치는 것이며, 크게는 한 나라의 미래가지 망치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명분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 위에 세워가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베스도 총독처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명분이 여러분의 한계를 긋고 있습니까? 한계를 뛰어넘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울의 형편
베스도 총독이 새로 부임하여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총독 벨릭스에 비하여 사실 훨씬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베스도 총독은 비교적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 결과 바울은 이번에도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생활했는데 그래서 마음과 몸이 지쳐있는데, 이제는 현명한 총독이 와서 풀려날 것만 같은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로써는 충분히 원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언제 석방되어 로마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감옥에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만 합니까?"라며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무엇입니까? 사실, 바울은 상당히 지쳐있었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은 바울로 하여금 몹시 심신을 지치게 했습니다. 때로는 가진 모욕을 당했고,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도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변화 받기 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쳐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축복이었습니다. 바울의 열정을 아셨던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만히 두면 제 스스로 지쳐 쓰러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으로 바울이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시간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하나님의 세심한 은혜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지금 당장 석방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년 동안이나 바울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다시 한번 송사를 했던 사람들이 바울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 두겠습니까? 아마 자객을 매복시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죽이려고 온갖 힘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나가서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에도 가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복음도 증거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바울에 대한 재판이 석방으로 판결되지 않은 것,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만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역경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도 합니다.
고난의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에이! 난 정말 운도 없어. 매일같이 힘든 일만 생겨"하며 절망하고 낙심하십니까?
그러나 성도라면 내게 닥쳐오는 고난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여행해 보셨습니까? 스케쥴에 맞춰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진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케쥴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때로 스케쥴대로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즐길 줄 압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할 필요 없습니다. 왜요? 주님께서 모든 고난과 역경까지 이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 아닙니까? 믿음이 고난을 축복으로 변화시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하십니까? 풀무불 앞에서도 담대했던 그들이 기억나십니까? 죽음 앞에서도 담대했던 그들의 믿음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도 마음 속에 새겨져 고난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결국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까지 가게 되지 않습니까?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짧은 지혜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가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2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재판하자는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였던 베스도 총독 역시 정치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다만 유대 민족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시선이 중요합니까? 어느 곳에 시선을 맞춰 살아야 합니까? 베스도는 하나님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사람의 시선을 따르는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는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고 나의 하나님 그분의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찬양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세상의 시선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 속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누리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베스도처럼 말입니다. 재판관이라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무죄라면 풀어주었어야죠! 바울의 신상에 위협이 있다면 보호조치를 내려 석방했어야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없는 죄까지 뒤집어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시선만을 중시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풍조 때문 아닙니까?
베스도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시선에 사로잡히지 않고 민심을 얻으려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바울이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만을 보았다면 하나님만은 기뻐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까? 사람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진실만을 말하는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진실만을 붙잡고 나가시는 삶을 사시길 축원의 말씀드립니다.
바울의 상소
행 25장 1~27절 / 정용섭목사
페스도의 재판
펠릭스의 뒤를 이어 부임한 페스도 총독은 자신의 업무를 매우 신속하고 불편부당하게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고위 관리였다. 사도행전의 저자에 의하면 일단 그렇게 묘사된다. 부임한지 사흘 만에 그가 초도순시 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대사제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다시 바울을 고발하면서 바울의 신병을 요구한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는 간청이 오늘 본문의 설명처럼 바울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니면 바울을 더 이상 로마법이 아니라 율법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바울 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만은 분명하다. 페스도가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들이 이렇게 닦달하면 어느 정도 통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을 수도 있다.
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에 대한 페스도의 반응은 그가 원칙주의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페스도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구를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우선 바울이 가이사리아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은 바울의 신병이 이미 로마 정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내줄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더구나 페스도는 예루살렘 순시를 이제 곧 끝내고 다시 가리사리아도 돌아갈 예정이었다. 만약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온다면 페스도의 일정을 바꾸거나 아니면 페스도가 재판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일을 페스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은 고발인들이 가리사리아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페스도의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논리성이 확보되어 있었는데, 이런 조치는 앞서 그의 선임자 펠릭스에게 바울을 호송한 예루살렘의 파견대장 글라우디오 리시아가 내린 조치와 똑같다.(23:23-30) 드디어 신임 총독의 주재로 바울의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길게 잡아 총독이 부임한지 14일 만에 열린 재판이라는 건 지난 2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바울의 재판이 페스도 덕분으로 속도를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누가는 재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이렇다 할 긴 설명이 없다. 유대의 대표자들은 여러 죄목을 제시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대지 못하였다.”(7절) 고발자들의 주장은 간접 화법으로 진술되는 반면에 이에 대한 피고인 진술은 직접 화법으로 다루어진다. “나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카이사르에 대해서 아무 잘못도 한 일이 없습니다.”(8절) 양측의 공방이 끝나면 재판관의 선고가 내리기 마련인데 웬일인지 페스도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대신 바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대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 내 앞에서 이 사건에 관한 재판을 받는 것이 어떻겠는가?”(9절) 누가의 판단에 따르면 페스도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페스도가 일전에 예루살렘을 순시할 때 그들이 이런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속사정을 살핀다면 페스도의 이 질문은 곧 바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의미인지 모른다. 물론 페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관할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바울의 신병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건 결국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결정적인 근거는 총독의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
바울의 첫 마디는 이렇다. “나는 지금 카이사르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한번 짚은 것처럼 바울의 운명은 두 질서 앞에서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었다. 유대의 종교질서는 그를 위험에 빠뜨렸으며, 로마의 정치질서는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이후(21:27-36) 이런 긴장은 계속되었다. 바울을 종교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의도를 꿰뚫어 본 바울은 총독에게 로마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입을 연 것이다. 카이사르의 법정에 선 사람은 유대교의 압력에 굴복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 사람들의 고발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11b)
바울이 지금 이렇게 총독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이유는 그의 신상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감지되었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느냐, 하는 총독의 질문이 바로 그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유대 대표자들의 고발이 있는 뒤에 바울의 피고인 진술에 율법, 성전과 더불어 ‘카이사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도(8절) 중요하다. 11a절의 진술에서도 역시 우리는 바울의 비장미를 느낄 수 있다. “만일 내가 무슨 법을 어기거나 죽을죄를 지었다면 사형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낀 바울은 이제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이렇게 선포한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 본문은 페스도 총독이 선고를 내리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바울이 상고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분명히 선고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누가는 왜 총독의 선고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고, 질문 형식으로 암시만 했을까? 사도행전의 일관된 생각은 로마 정부와 기독교의 우호적인 관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바울의 유죄선고를 노골적으로 기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이런 텍스트의 행간에서 바울이 감지했을 생명의 위협을 읽을 수는 있다. 오죽 했으면 그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했겠는가?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이 카이사르에게 상소한 사건은 매우 복잡한 법적인 문제와 연관된다고 한다. 상소를 제기했다는 건 실제로 바울이 총독의 선고를 거부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을 대표로하는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로마 정권과도 상당한 갈등관계에 접어든 셈이다. 물론 이런 속사정을 텍스트는 숨기고 있다. 또한 아무리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총독의 뜻을 반대하면서까지 상소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역사적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카이사르에게 상소하기까지에 이르는 이 재판과정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처한 비상사태를 부각시키기 위한 누가의 추측보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지는 대목으로 인해서 신앙적인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역사적으로 비평하면 결국 아무 것도 남을 게 없는 거 아닌가, 하고 염려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담과 염려는 덜어놓아도 좋다. 성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설령 그 손가락에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달을 가리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에게 정작 요구되는 것은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볼 줄 아는 해석학적 능력이다.
바울의 상소 선언을 들은 페스도는 배석판사들과 협의한 후에 상소를 허락한다. 이런 묘사로만 본다면 페스도는 분명히 바울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사건 처리에서도 그는 바울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사도행전을 자신의 저술 목표에 맞도록 진술해야 할 누가의 고충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는 바울의 신변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판정을 내린 사람이,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페스도였지만, 누가는 그를 끝까지 호의적인 사람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바울의 무죄를 증언해 주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성실한 관리로 남아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구체적인 실정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은 누가로서는 글쓰기 구성의 모순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했다. 다만 유대교와 로마정부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목에서만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 사도행전 저술 목표는 달성되는 셈이다.
아그리빠 왕과 베르니게
누가는 이제 바울에게 보여주는 페스도 총독의 호의와 위기에 빠진 바울의 정당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특이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빠와 한 살 어린 누이 베르니게(라틴어 발음으로는 베로니카)이다. 베르니게는 첫 남편이자 숙부인 칼키스의 헤로데가 죽자 오빠 아그리빠의 집에서 살았다. 이들 사이에 근친상간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지역의 왕이었던 아그리빠는 신임 총독을 예방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페스도는 바울 재판 건을 아그리빠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은 앞의 진행에 대한 요약인데, 특이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19절) 아그리빠는 바울 사건에 관심을 보였고, 심문 일정이 다음날로 잡혔다.
본문 23-27절은 로마의 공식적인 재판 분위기를 그럴듯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그리빠와 베르니게는 왕을 상징하는 장신구를 비롯해서 정식 예복을 차려 입고 많은 고위 인사와 더불어 재판정에 들어섰다. 그러자 페스도 총독은 근엄한 어조로 심문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바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사실과 상소하기 위한 죄목을 얻기 위해서 아그리빠 왕 앞에서 다시 심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미 끝난 재판을 단지 상소문의 죄목 사항을 얻기 위해서 다시 재개한다는 게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바울의 정당성과 페스도의 진정성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페스도의 진술에 특이한 단어가 나온다. 우리말 성서에는 21,25,26절에 각각 똑같이 ‘황제’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성서 26절의 그 단어는 ‘퀴리오스’(주)이다. 26a절은 이렇게 번역되어야한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나의 주님에게 아뢸 만한 확실한 자료는 하나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로마황제에게 사용된 것은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였다. 지금 누가가 기술하고 있는 이 심문은 네로(재위 54-68) 시절이라고 한다면, 결국 누가는 도미티아누스 시절의 용어를 네로 시대의 용어로 소급해서 사용한 셈이다. 근친상간의 장본인인 아그리빠 왕을 등장시킨 것과 더불어 용어의 소급 사용은 사도행전 집필자가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결정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5장이 끝나면서부터 사도행전 이야기의 주도권은 바울에게 완전히 넘어간다. 아그리빠 왕과 대신들 앞에서 바울은 피고가 아니라 설교자로 나서게 되며, 로마까지의 여정에서도 바울은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한다. 바울의 운명에 관해 마음을 졸이며 글을 읽던 독자들의 인내심이 여기까지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누가는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끌어나간다. 그 길목에서 마지막 엑스트라 역할을 한 사람이 곧 페스도 총독이었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행 25장 1~12절 /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들어가는 말]
제가 감기에 걸려서 코가 막히고 콧물이 나오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오래 전에 감기에 걸려 목이 쉬어서 거의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도 했는데, 오늘은 목소리가 잘 나오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목소리도 안 좋고 코를 계속 풀기도 하니까 몸이 상당히 안 좋은가 보다 하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몸은 아프지가 않습니다. 콧물만 나오고, 거의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오히려 며칠 전 몸이 많이 안 좋았을 때는 목이 굉장히 아파서 침만 삼켜도 아팠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기침도 나지 않고 콧물도 안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보셨다면 아픈지 모르셨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몸이 안 아픈데도 증상이 보이니까 훨씬 아프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도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겉으로 안 좋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목회편지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별 증상이 안 나타나며 겉으로는 할 일을 다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 썩어 있으면 훨씬 더 심각한 상태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였고 예수님은 그것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예배를 드리자마자 나가면서 막 싸우는 것을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멱살을 잡고, 예배를 하고 나가는데 큰소리를 지르며 싸웁니다. 예배를 마치고 공동의회 등 회의를 하면서도 막 싸웁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럼 도대체 방금 전 드린 예배는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방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가면서 멱살을 잡고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럼 그 예배는 도대체 무슨 예배였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금방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예배를 해도 왜 그렇게 되는가?
우리가 성경 전체를 볼 때, 예배를 하기는 하지만 거짓 예배자들이 있고 참된 예배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거짓 예배자들이 나오고 참된 예배자가 나옵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신임 총독 베스도와 유대 종교지도자들 (1-5절)
1)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베스도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1절)
신임 총독 베스도가 유대 지방 제12대 로마 총독으로 부임합니다. 베스도는 판단력, 행정력, 지도력 등 모든 면에 걸쳐 이전 총독이었던 벨릭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에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먼저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 일 후에” 갔다고 되어 있는데 3일째 되는 날 갔다는 겁니다. 신임총독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처음 도착한 날이 첫째 날이고, 그 다음날이 둘째 날, 그 다음 날이 셋째 날 즉 ‘삼 일째’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랴에 도착하고 나서 다음 날 하루만 쉬고 예루살렘 방문을 갔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의 거리는 당시 배를 타고 최소한 열흘 이상 항해해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열흘 이상 배를 타고 왔다면 사실 배 멀미도 했을 것이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지금 크루즈처럼 큰 배나 좋은 배도 아니고 바람에 따라 노를 저어 가는 배인데, 열흘이나 왔는데도 불구하고 황제의 명을 받아서 온 베스도는 결코 편하지 않은 여행길이었겠지만, 하루만 쉬고 가이사랴에서 6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현지로 방문을 간 것입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도 만나고 사정을 확인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는 벨릭스와 달이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2절)
베스도 총독의 예루살렘 방문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높은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 장로들 등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울을 고소합니다. 신임 총독이 왔으니까 할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가장 먼저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금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한 번 해달라고 하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 아주 집요하게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암살단을 매복시켜놓았다가 그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이 암살단이 누구입니까? 2년 전 벨릭스가 있을 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입니다. 그 사람들이 2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2년 동안 살아 있는데 어떻게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겠습니까? 맹세를 할 때 잘해야 하는데 함부로 했습니다. 슬쩍슬쩍 먹으면서, 어쨌든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하며 있었습니다.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자기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말을 꺼내놓았지만 지키지 못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계속 진행합니다. 어쨌든 이들의 목표는 오직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해달라고 요청해서 오게 되면 중간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고 합니다.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4-5절)
총독이 처음 부임하면 자기가 부임한 지역의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웬만하면 들어주겠지만, 베스도는 여기서 뭔가를 간파한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기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밀리면 자기가 여기 있는 동안 힘들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약간의 기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옮겨달라는 그들의 집요한 요청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야단치는 게 아니라 정중하게 거절하며, 그 이유도 좋습니다. ‘왜 여기서 해야 하는가? 이미 가이사랴에 잡혀 있으니까, 당신들이 그리로 와서 거기서 재판하자.’라는 겁니다.
2) 변화되지 않은 거짓 예배자들
이것을 보면, 지난 23장과 24장에서 나온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처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소요로 로마 천부장이 그를 잡아서 요새에 잡혀 있었는데, 그때도 40여 명의 암살단원들, 바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그 사람들이 안토니오 요새와 산헤드린 공회 사이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을 옮길 때 급습해서 죽이겠다는 암살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똑같은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천부장 루시아가 그것을 막고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바울을 이송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종교지도자인 장로들이 더둘로라는 사람을 고용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가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지금 24장과 25장 사이는 한 장 차이지만, 기간은 2년이라는 시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2년이라는 긴 기간이 지났는데도,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년 전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암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똑같은 악한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럼 다른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표현이 있는데, 2절에서 ‘대제사장’이라고 하지 않고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한 명입니다. 그리고 임기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아론의 후손들 중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서 대제사장직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때는 딱 한 명밖에 대제사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대제사장’이라고 단수로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잡히실 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요 18:3)이라는 식의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 땅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지만 권력자에 따라서 대제사장을 교체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는데 교체를 당하게 되니까 이전 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때는 장인인 안나스가 대제사장이었다가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3장과 24장에서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그가 벨릭스 총독 말기에 13절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아나니아가 이스마엘로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임총독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는 대제사장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들”로 표현한 겁니다.
아나니아도 이스마엘도, 계속 바울을 고소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마엘도 이름만 안 나왔다 뿐이지, 2년 전에 더둘로와 함께 와서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발할 때 “장로들”(24:1)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나 오늘의 본문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다시 고발할 때,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대제사장들”(2)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2년이 지났지만,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매일 각종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일주일에 한 번만 제사를 드렸다 해도, 1년이면 50번 이상이고 2년 동안이면 100번 이상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일주일에 두 번씩 제사를 드렸다면, 2년 동안 200번 이상 제사를 드린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난 2년 동안 그렇게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그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악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2년 전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바울을 증오했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고발했고, 2년 전과 똑같이 의로운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몰래 암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식적으로는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고발하는 척하면서 바울이 오는 길에 죽이려고 매복하여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로마제국의 법을 바울이 어긴 일이 없기 때문에 총독 법정에 가보아야 바울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재판하기 전에 그냥 중간에서 몰래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악합니까? 자기들도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단지 미움 때문에 또 증오 때문에 중간에 매복하고 있다가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들이 무슨 깡패 두목들입니까, 조직폭력배 우두머리입니까? 이들은 대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고, 산헤드린 공회원(지금으로 하면 국회의원)입니다. 최고로 높은 그 사회의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놀라운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입니까? 그런데 이 최고의 종교지도자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있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겠습니까?
이들은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제사를 집행하고 백성들을 인도하며 영적지도자로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함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사 즉 예배를 드렸어도, 성전에서 드린 그 수많은 예배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의미한 종교적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3) 나는 거짓 예배자인가, 참된 예배자인가?
사실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이 말씀을 볼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금방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아니지만, 저처럼 몇 십 년 교회 다닌 분들, 태어날 때부터 다닌 분들, 어릴 때부터 다닌 분들은, 이런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화석화이고, 화석화를 넘어서서 완전히 악하게 된 것입니다.
2년이라는 기간이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지난 2017년 12월 첫 주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부터 지금까지 2년 동안 주일예배에만 꼬박 참석해도, 우리는 100번 이상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 100번 이상 예배를 드렸는데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2년 전에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던 사람을 혹시 지금도 계속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더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2년 전에 하던 어떤 불의한 방식의 일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또 2년 전에 남을 험담하고, 있지도 않은 것으로 나쁜 말을 하던 것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면, 그럼 100번 이상 드린 우리의 예배가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였을까, 우리는 정말 자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예배를 2년이 아니라 몇 십 년을 드린들 과연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이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정말 심각하게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면 됩니다. ‘나 자신이 예배를 이렇게 드리면서 뭐가 변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이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특히 저처럼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예배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예배가 살 때 삶이 변화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일주일 동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환경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제대로 은혜 받지 못하고 제대로 말씀을 붙들지 못하고 그냥 삶 속으로 나간다면,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여기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자신의 삶 속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며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공 예배에서 성공할 때 개인 예배에서도 성공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핵심은 단순히 은혜 받는 게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헌신과 결단입니다.
옛날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예배를, 우리는 이렇게 마음껏 아무 때나 드릴 수 있게 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나아와 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살아온 것, ‘내가 이렇게 열심히 잘했습니다.’ 아니면 ‘잘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하는 것을 다 들고 나와서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다 왔습니다.’ 하며 드리는 겁니다.
헌금함에 헌금을 넣을 때 돈만 넣는 게 아니라, 헌금봉투를 넣으실 때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일주일 동안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참 잘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면 ‘해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해보겠습니다.’ 하는 그 마음을 여기에 넣어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한 가정이 넣은 것을 함께 모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돈만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삶을 바치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만약에 그런 예배를 우리가 매주 드린다면 어떻게 이런 모습이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설교만 듣거나 성가대의 찬양만 들으며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보는’ 게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예배 본다’고 하는데, 예배를 보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얘들이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나 보자.’라고 하십니다. 예배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배 봤다.’라고 하는 말은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이니 아주 조심해야 할 말입니다.
예배는 보는 게 아닙니다.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특히 말씀 한 가지를 붙들며 ‘하나님, 제가 이번 주에는 정말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며 나가서 살고, 그 산 것을 가지고 돌아와 드리면서 다시 한 번 말씀 붙들고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또 돌아와서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이런 것이 반복된다면 2년 동안 100번의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삶이 변하지 않겠습니까? 삶이 변하지 않으면 이상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예배에 아무리 많이 참석했어도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면,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면, 예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예배를 제대로 안 드린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여기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거짓예배자였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랑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라고 하며, 율법을 하나로 줄이면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롬 13:9). 사실 그 이웃 사랑 안에 하나님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삶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게 없다면? 남을 해코지하지 않았고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안 한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피해를 안 준 것이 끝이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또 한 번 하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을 예배 때 결단하는 겁니다. 결단하고 나가서 살고, 와서 또 결단하고 또 나가서 살고, 또 오고 그러는 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와 개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항상 그렇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살고 와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또 받고 결단하고 나가서 또 살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또 드리고, 또 결단하고 나가 살고 와서 또 드리고... 바로 이겁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삶은 이렇게 형식적인 종교주의자처럼 되지 않고 참된 예배자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참된 예배자 바울 (6-12절)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6절)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8일을 머물고 가이사랴로 되돌아갑니다. “팔 일 혹은 십 일”이라고 했는데 큰 상관은 없습니다. 오가는 날수를 다 합치면 10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8일 정도 있었습니다.
이때 여러 가지 접대도 받고 중요한 사람들도 만나고 그랬기 때문에, 열흘 정도 만에 예루살렘 방문과 시찰을 끝냈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유대 총독은 돈이 되는 자리로 유명했습니다. 서로 가고 싶은 자리였고, 그래서 벨릭스 같은 사람이 돈을 많이 챙긴 겁니다. 바울에게서조차 돈을 챙겨보려고 하다가 갔습니다.
베스도도 돈을 챙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그가 열흘 만에 가이사랴로 돌아왔다는 것은 베스도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대제사장들과 유력한 사람들이 베스도와 같이 가이사랴로 갑니다. 거기서 베스도가 말한 것처럼 바울을 고발하려고 같이 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바로 호출합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7절)
총독이 오라고 하니까 바울이 법정에 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이번에는 2년 전과 달리 웅변가 더둘로와 같이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해보니까 괜히 돈만 썼지 된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관두고 자기들끼리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왔지만 이때도 똑같이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한 것이 분명한데, 그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어떤 증거도 대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제국 법이건 유대 종교법이건, 어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고발 내용은 다 모함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답변할 기회가 주어지자 단호히 자신을 변호합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8절)
성경에는 ‘아니하다’라는 표현이 유대인의 율법, 성전,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 세 가지에 대해 다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성전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가이사(황제)에 대해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7절에서 이들이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한 내용이 주로 이 세 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다. 성전을 모독했다. 황제를 모독했다.’ 등의 세 가지 범주로 바울을 고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이사’ 또는 ‘카이사르(Kaisar)’를 영어식으로 ‘시저(Caesar)’라고 합니다. 이 말이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황제를 시저라고 불렀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기 후계자로 점찍었던 양아들이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원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어보려고 하다 암살당했고,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Augustus)이고, 바로 그가 예수님 태어나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고향에 가서 호적하라고 한 가이사 아구스도입니다. 그로부터 ‘카이사르’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9절)
여기서 베스도는 벨릭스와 비슷하게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베스도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그냥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바로 그때 바울을 불러왔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고, 사실은 베스도가 굉장히 수가 높은 겁니다. 이 사람이 정치적으로 오히려 벨릭스보다 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의 단호한 진술을 들으면서, 베스도는 딱 보고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지금 유대 총독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됩니다. 따라서 바울의 무죄를 알지만, 유대인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달래주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은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입니다. 그러니까 베스도는 굉장한 고수 정치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0-11절)
지금 베스도가 예상한 대로 바울은 자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자기 제안을 거절했다고 베스도가 바울에게 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 말이 베스도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는가 하면,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와 그 전 벨릭스 등 총독과 로마군이 로마 시민을 지키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2절)
여기 “배석자들”이라고 나와 있는데 일종의 배심원단입니다. 법률 전문가와 총독 자문단이 총독 재판 때 항상 함께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그들과 상의한 다음에, 로마 시민인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입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까 가이사에게 갈 것이다.” 그것이 로마 시민의 권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야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네가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 교회에게 써서 보냈던 로마서를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가이사랴에서의 재판보다 훨씬 오래 전에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방문하기를 여러 번 원했는데 가지 못했다. 내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들이 모은 구제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스페인으로 가면서 여러분에게 들르겠다.’
로마에 가야 하는데 2년 동안 못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2년 동안 바울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주님, 과연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로마로 가야 하는데 왜 여기 이렇게 잡혀 있는 것입니까?’ 벨릭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데,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기도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스도가 부임했을 때 바울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로마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갑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 로마 시민은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그러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결론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날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로마로 가는 길을 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받고 자기도 일하며 선교비를 마련해서 선교 사역을 했고 이곳저곳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로마도 가야 하는데, 이렇게 잡히지 않고 평소 같았으면 또 자기가 비용을 마련하고 선교비를 받으면서 로마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돈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해줍니다. 이런 길이 있는데 왜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들이 지켜주면서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2년 사이에 풀려났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풀려나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 군인들이 지켜주면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2년 동안 바울이 어떻게 극복하고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해, 그의 편지들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서 감옥에 갇혀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1).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썼다면, 로마 감옥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4-6)
로마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감사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나중에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가이사랴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바울은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늘 아뢰며, 늘 기도하며 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면서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이 가이사랴 감옥이든 나중에 로마 감옥이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 어려운 기간을 버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참된 예배자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견디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가는 말]
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단순히 이렇게 예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주 이렇게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만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정말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붙들며 결단하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러한 참된 예배자로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비록 바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아무리 예배 행위를 많이 해도,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 예배나 형식적인 예배로밖에 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우리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함으로 염려하지 않고 간구하며, 하나님께 늘 아뢰며,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행 25장 1~27절 / 박성환목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고 잘 아는 성경 구절 중에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어떤 성경 사본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 기쁘고 즐거운 일들 뿐만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온 지난 날들을 뒤돌아 보면, 이 말씀이 진리이구나라고 깨닫게 되고 고난을 통해서 나를 연단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만, 막상 내가 현재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을 때는 감사와 기쁨 보다는 한숨과 원망,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 모든 것이 순탄할 때에 믿음 생활 잘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군인들이 평상시에 훈련을 열심히 해야 전쟁때에 실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믿음의 성도들은 평안의 시기에 기도와 말씀안에서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해야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고난과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찾아 오신 부활의 주님은, 핍박자 사울을 변화시켜 전도자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그에게 주신 새로운 인생의 사명은 “내 이름(예수 그리스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는” (행 9:15)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를(예수 그리스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되는” (행 22:15)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전한 말)
그런데 복음 전도자 바울의 미래는 평탄하고 화려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대로 바울이 걸어가야 할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6)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에 로마 선교의 비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후에 로마로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행 19:21) 그리고 고린도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로마서 1:10 에서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로마 수비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밤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하)
로마 선교의 비전은 그의 심장을 뛰게 하였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고,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지만 바울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로 인도하실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 의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결코 짧지 않는 2년의 시간은 바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기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게 된다면 그들은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바울을 살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고려해 볼때 바울에게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부(헤롯궁) 감옥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소요가 잠잠해 질 때 바울은 군사들의 호휘를 받으며 로마행 배를 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고난의 시간과 환난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가이사랴 2년간의 감옥 생활처럼, 요셉도 억울하게 2년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요셉은 함께 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정확히 해석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삼일만에 전직을 회복하였지만, 풀려나면 자신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전하여서 옥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는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립니다. 2년이 지난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자, 그 때 비로소 2년전 감옥에서 만난 히브리 청년, 요셉이 생각나서 요셉을 바로에게 꿈을 해석할 사람으로 추천합니다.
2년간의 시간은 청년 요셉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2년간의 시간은 요셉에게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시편 기자의 기록처럼 요셉은 감옥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말씀으로 연단받고 있었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감옥에서 말씀으로 연단받은 요셉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큰 인물(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고난이라는 풀무불(용광로)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간들을 견디어 내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고난의 용광로를 거쳐야만 우리안에 있는 불순물들이 제거됩니다. 우리안에 자리잡고 있는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조급한 마음, 염려, 불신앙의 지꺼기들이 말씀의 불로, 성령의 불로 태워집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 받는 내용과 취임 문안 인사 차 방문한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베스도 총독이 죄수 바울의 사건을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 (25:1-12)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벨릭스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시리아인들 간에 발생한 분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벨릭스를 이어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사람이 보르기오 베스도였습니다. 베스도는 2년 뒤 재직 중에 죽게 되지만, 당시의 여러 기록을 보면 전임자 벨릭스와 후임자 알비누스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공정한 지도자였습니다.
부임한 지 삼일 후에 신임 총독 베스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그들로부터 지역 통치에 협조를 구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울에 대한 고소건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신임 총독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끌어내고자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공정한 베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자기가 멀지 않아 가아사랴로 떠날 예정인데, 유력한 몇 사람이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바울을 정식으로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의 소송 절차는 세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기소자가 고소를 공식화하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적절한 공식적 고소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통치권을 갖고 있는 사람 자신’이 그것을 들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총독이 소송을 심리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8-10일이 지난 후 신임 총독 베스도 심리로 정식으로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는 베스도가 앉아 있고, 고소인(검사) 자리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고석 자리에는 변호사 없이 바울 혼자 앉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를 대지 못하자, 바울이 스스로 변론을 시작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종교적인 이슈) 가이사에게나(정치적인 이슈)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바울의 주장이 정당함을 알면서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에게 되묻기를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느냐”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전임자 벨릭스에 비해서 비교적 지혜롭고 공정한 사람이기는 했느나, 그 역시 로마 정부의 관료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의와 진리를 따르기 보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베스도나 벨릭스,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했던 빌라도 모두, 진리와 공의를 버리고 사람들의 호소와 여론을 따랐으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관심을 기울인 정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용기있는 지도자, 용기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부와 지지하는 사람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진리와 공의를 따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의식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세상속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의 메세지를 던져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내가 핍박받더라도 진리와 공의를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진리와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나는 당당히 성경의 진리를 따르겠다는 다짐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 머뭇 거리거나, 두 다리를 걸치고 나에게 유익한 것만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뭐라고 하던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언제나 복음 앞에서, 진리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종교 법정에서 심문을 받느니 차라리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상소)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지방 속주 법정에 가지 않고 상급 법원인 로마 법정에 호소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구체적으로 ‘provocatio’라는 것인데, 이 제도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즉결 처벌이나 강제 집행이나 고문을 하는 것으로부터, 비공개적인 혹은 공개적인 체포로부터, 그리고 이탈리아 바깥에서 치안 판사가 실제적인 재판을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이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듣고 배석자들과 상의한 후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유부단하고 사악한 벨릭스가 통치하던 2년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바울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자, 비교적 합리적이고 공정한 새로운 총독 베스도의 손을 빌어 로마 군인들의 호위 아래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일하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구약 에스더서에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민족 멸절’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드드개와 에스더, 이방왕과 신하들을 사용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열방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 선 바울 (25:13-27)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과 버니게가 신임 로마 총독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시사랴에 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행 12장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처음에는 작은 영토을 다스렸으나, 나중에 갈릴리 호수 북쪽과 북서쪽 여러 도시들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그에게 성전을 돌보는 일과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한 버니게는 그의 누이였는데, 그녀는 불과 13세에 자기 삼촌인 칼키스 헤롯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칼키스가 죽자 자기 동생 헤롯 아그립바 2세와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인사하러 왔을 때, 그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 베스도는 벨릭스로 부터 물려받은 바울의 소송 사건을 끄집어 냅니다. 유대 지역과 유대인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헤롯 아그립바 왕으로 부터 판결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 사건에 대해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합니다.
1) 바울은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소하여 넘긴 사람인데, 그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재판)하기를 청하였으나, 로마 시민인 바울을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피고인의 변명- 내어주는 것이 로마법에 합당치 않아 자신이 재판을 심리하게 되었다.
2) 원고들의 주장을 들어보니 피고의 범죄함을 입증할 만한 증거도 없고,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았 있다고 (부활 증거) 바울이 주장하는 것을 문제 삼아 고발함.
3)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 받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가이사에게 호소하겠다고 함.
베스도의 말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 중 한가지는 바울이 유대인들로 부터 고발당한 것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반역을 꾀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 즉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당시 중범죄자들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으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삼일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제자들에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 말을 전해듣고,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하고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할까 두려워 경비병들을 고용하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24시간 지키게 하고 큰 돌로 입구를 인봉하여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죽은지 삼 일째 되던 안식일 후 첫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8:11-15에는 경비병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이 계략을 꾸민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 소식이 가져다 줄 엄청난 충격을 예상한 그들은 장로들과 의논한 후,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말하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자기들이 잘 때에 시신을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28:15)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군인들이 퍼뜨린 거짓말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주장은 사실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았다고 말하면 거짓이지만, 산 자를 살았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만 5백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초대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영원한 소망이요 믿음의 근거입니다.
바울이 고발당하고 목숨을 걸기까지 전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구원자)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진실함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죽을 육체도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셨을 때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로마 총독들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장차 로마에 가서 로마 관료들과 왕실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영적인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의 긴 시간을 보낸 이후 베스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마침내 로마로 가게 된 바울과 함께 하시고, 그의 삶의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가 처한 모든 처지와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울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
박종광목사 / 행 25장 1~12절
오늘 이 시간에는 먼저 스위스의 목회자 칼빈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장로교단의 설립에 있어서 우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했던 칼빈을 기억해야 합니다. 칼빈은 원래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유능한 법학교수가 되어 명성을 떨쳤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패로 일관된 중세 로마 카톨릭에 대적하여 개혁주의 사상을 전 세계에 심은 거물급 인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었지요. 하나님만 알고 계셨던 듯 싶습니다. 사실, 칼빈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개신교 인사로 활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굉장히 신중한 인물이었고, 조용하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시대의 급격한 조류에 휘말리게 되었지요. 그가 절친한 대학 총장의 취임사를 써준 것을 계기로 카톨릭 진영에서 서신에 남겨져 있는 그의 개혁주의 사상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칼빈은 쫓기는 몸이 되었고, 마침내는 기욤 파렐이라는 분의 추천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이 당시 제네바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분위기 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길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욕설과 폭력, 고함소리들로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제네바는 무법천지여서 온통 무질서한 것들과 쓰레기, 혼잡한 것들로도 꽉 찼습니다. 칼빈은 이런 곳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했고, 그의 신학과 법학 사상을 통해 제네바 시의 질서와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 너무 엄격한 그의 방식에 반기를 드며 칼빈을 쫓아내고자 하는 움직임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자료를 보면 거기에는 당시 제네바 시민 일부가 길거리에 다니는 개를 보고 ‘칼빈’이라는 이름을 붙여 조롱했다고도 합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칼빈이 제네바 시에 오기 전 자유 분방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칼빈이 자기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옥죄이기 때문에 그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의 선동으로 인해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목회를 중단하고 스트라스부르크라는 지역으로 옮겨가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제네바시의 재 청빙을 받고 제네바로 돌아가 그곳에서 숨이 멎을 때 까지 사역을 합니다. 제네바 시의 사람들은 칼빈이 떠난 후, 비로소 칼빈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무질서하고 무법하게 살았던 과거로 돌아가면 좋을줄 알았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이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칼빈을 청빙해온 것이지요. 그리하여 칼빈은 제네바에서 다시 목회를 재개하고 칼빈의 지도하에 제네바는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가며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특별히 이 제네바는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목회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등지에서 개혁사상을 가진 이들이 칼빈을 찾아가 이곳에서 목회를 배우게 됩니다. 제네바는 일종의 신학교 같은 역할을 하게 된 셈입니다. 그 중에 한 명,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낙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장대하며 목소리도 나팔소리 같았다는 이 존 낙스는 이후 스코틀랜드에 돌아가 장로교단을 설립하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장로교는 스코틀랜드 뿐만 아니라 신대륙으로 넘어가 미국 개신교 진영의 주류를 이루었고, 구한 말 한국에 전파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이런 흐름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하에서 이루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이고, 우연과 우연이 겹쳐진 현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사실은 다 하나님이 깊은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돈만 밝히고 직무에 태만했으며 잔인하기 그지 없었던 벨릭스가 해임되고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임명됩니다. 벨릭스는 2년 동안 바울을 가이사랴에 구금해 두고 재판하는 것을 계속 미루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총독 베스도가 부임했는데, 그는 전임 총독과 비교하여 역사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베스도는 무엇보다 자신의 직무에 대해 굉장히 성실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나와 있지만, 그는 부임한지 단지 사흘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말에 대해 전에도 한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보통 유대에 총독으로 파견된 로마인들은 수도인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시선에서 예루살렘은 쾌쾌묵은 옛 성읍이고, 수많은 돌들과 유대인들로 바글 거리며 각종 향내와 종교적인 연례행사 등 자신들의 문화로 볼 때 결코 적응하기 쉬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들은 수도 예루살렘에는 천부장만 남겨두고, 자신들은 65마일 떨어진 해안도시 가이사랴 신도시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정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가끔 예루살렘을 올라가곤 했습니다. 오늘 베스도가 부임하자마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벨릭스 총독 때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사안들을 처리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던 베스도는 벨릭스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부임과 동시 신속하게 사안들을 처리하는 부지런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베스도를 부임시킴으로 유럽 전도를 위한 시동을 거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가운데 통치자들이 바뀌게 되고 멈추어졌던 선교의 시계가 다시 작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성실하고 현명한 베스도를 총독으로 부임 시킨 것입니다.
베스도로 인해 2년 동안 진척이 없었던 바울 사건은 다시 열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2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면 이제 좀 잊을만도 한데 유대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의 높은 사람들은 여전히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실패했던 그 방법들을 다시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암살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베스도의 호의를 입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요청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이 베스도란 인물은 전임 총독 벨릭스와 다른 유형으로 이렇듯 부임 초기부터 적극성을 보이는 것을 보니 자기들의 청을 들어줄 수도 있을 거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길에 사람들을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한 가지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반복적인 일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울은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유대인들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마귀의 졸개입니다. 지금 교회는 복음 전도사업으로 계속해서 번창하고 부흥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그런 교회를 무너뜨릴려고 계속 음모를 꾸미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보면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있었던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들을 교육할 때 성경 다음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을 역사로 보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각종 이단과 사이비들은 새로운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사를 찾아보면 과거에 있었던 오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들이 겉 모습과 이름만 바꾸어서 계속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미 성경에 나온 사단의 전략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2년 전과 동일한 전략으로 바울을 죽이고자 했고, 이는 하나님이 사용하는 베스도에 의해 그 자리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대해 그럴 수 없다 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가이사랴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고발할 것이 있으면 가이사랴에 내려와서 하라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을 보호하는 이런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 베스도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에 있어 열심을 가졌고 잘 해볼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는 자신의 총독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로마 당국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9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이게 인간 베스도의 본 모습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호의를 입는 정책을 펼쳐 민심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 편이 아닌 바울의 편에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순간 베스도를 붙잡아 바울을 보호하는데 사용하신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2년이 지난 후 다시 열린 재판에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기에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요청에 대해 베스도는 자기를 보좌하는 배석자들, 곧 법에 관한 전문가들과 상의하고 난 후 곧바로 응답을 줍니다. 이 응답은 “좋소, 당신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로 가시오.”라는 허락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이제 로마로의 선교의 길을 여는 하나님의 손길이 더욱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사흘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바울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곧장 응답을 주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가는데 팔일이나 십일이 걸렸습니다. 6절에 나와 있지요 그리고 나서 가이사랴로 내려간 이튿날 재판자리에 앉아 바울의 출석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난후 가이사의 상소를 바로 그 재판의 자리에서 인정합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어떻게 얼마나 신속하게 이 땅에 임하는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2년이라는 기다림과 바울을 통해 로마에서 새 일을 시작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이 긴 인내를 통하여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이야기들을 우리 삶으로 끌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항상 성경 강해를 할 때 말씀드리는 바지만, 성경에 나온 모든 사건들은 성경이 기록된 그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보며 오늘 우리의 삶에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의 성장과 부흥도 이런 인내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너무 더디고 아무 열매도 없이, 주일학교가 무너지고, 청년들과 직분자 층이 얇아진 상황이지만, 이 인내의 시간을 통해 어느 한순간에 성장과 부흥의 시간이 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좀 더 세밀히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단락에 대한 강해는 마쳤지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구금된 2년 동안 어떤 생각으로 지냈을까요? 지난 시간 말씀드렸지만 이 시간들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1차,2차,3차 전도여행으로 인해 지친 심신을 회복하는 시간이었고, 둘째는 신학을 정비하는 시간이었으며, 셋째는 곧 있을 로마에서의 선교를 위해 준비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구금되기 전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이로인해 바울은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진행되어져 갈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여기서 죽지 않을 것과 반드시 로마에 갈 것을 확신하는 그런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이 있다 하여 현실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 걱정들이 모두 떠나갈까요? 사실 삶에 대한 정답이 있어도 그 정답이 어떻게 풀려질지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증언할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감옥의 밥을 먹는 것을 피하든지, 고문을 당해 불구로 로마에 갈지, 그리고 그 로마에 당도하는 과정에 어떤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지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답은 있지만 과정은 모르는게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과 우리 모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통해 또한 성령의 확신을 통해 우리가 걸어갈 길의 최종역이 어디인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우리는 바울처럼 이미 약속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내 자신과 주변의 많은 일들로 인해 근심하기도 하고 걱정과 불안, 염려 가운데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던 바울, 그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했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별다른 일들을 하지 못한 채 2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만 할 때 말입니다. 설령,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어 나름대로 힘과 노력을 기울여 봐도 아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내 가운데 자신의 자리와 마음을 지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헤럴드 부시넬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위대한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때때로 단순한 인내가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힘이 되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손과 발로 꼭 무엇을 해야지만 하나님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와 마음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감옥에서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내 가운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의 저의 상황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몸담았던 한국대학생선교회 졸업생 송년 부흥회가 해마다 12월에 있었습니다. 제가 캠퍼스 연락책을 맡아서 모든 졸업생들에게 연락을 했었는데, 지지난해는 단 2명이 왔습니다. 저랑, 다른 졸업생 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 졸업생은 올해는 오지 않으면서 절더러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고 오세요’하면서 문자를 주었습니다. 이 분은 왜 안왔을까요? 작년에 와서 보니 졸업생들이 너무 오지 않아 소위 뻘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이곳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다른 일에 시간을 보내며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그 다음해 몇 분이 왔을까요? 다섯 분이 참석했습니다. 2명에서 많이 늘어난 것이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또 아무리 해도 별 소용이 없을 때, 자리와 마음을 지키기만 해도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헤어지기 전 참석한 분들에게 선배로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오지 않을 때 10년이 넘게 이 자리를 지켰다. 내년에도 우리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가 인내하면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올 것이다.’ 교회를 위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믿음으로 있는 자리만 지켜도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 전도의 자리 그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그 일을 통해 이 교회 가운데 큰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행 25장 1~25절 / 신성종목사
오늘은 9절에 있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전에 YS를 보면 국민들의 여론에 굉장히 민감해서 여론의 방향을 조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국정원과 경찰청의 정보과와 군대의 보안사외에도 아들을 통한 정보 수집을 많이 했습니다. 네 부분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여론이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최근 노 무현 대통령도 보면 국민들의 여론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 사용하는 것 보면 한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사용하면서도 이메일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정치는 국민에게 아첨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론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치가가 여론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 가를 찾아야 합니다.
사실 일반 국민들의 마음은 변화가 많습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키려고 했을 때 다수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예를 해방시키려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옳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 당했지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국민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옳은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베스도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가였습니다. 베스도는 유대 총독으로 이년동안 임직한 후에 죽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이고, 통치기간에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를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베스도란 총독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과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베스도는 총독 직을 맞자마자 제일 먼저 [유대인들과 유화적인 관계]를 원했습니다(행25: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놀라운 것은 24:27절에 보면 “벨릭스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둘다 정상적인 정치가들입니다. 당연히 국민들의 여론의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정치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가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순위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해결되고 그 후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 갖도록 해야 순서상 옳습니다. 그래야 역사적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빌라도도 예수님이 무죄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하려다가 타협하던 나머지 결국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환심만 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스도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순위를 잘못 택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를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지난번 4.15 선거를 보니까 한나라당의 박근혜 의원은 광주와 대구에 먼저 들려 선거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고, 열린 우리당의 정동영 의원은 기자들과의 대담으로 언론에 호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정치인들의 수법입니다.
그러나 일단 선거가 끝나면 어깨에 힘주고,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또 정치인들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선순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먼저 갈데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 먼저 가야 합니다.
기도부터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부터 들어야 합니다. 그 후에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 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누가 건축한지 아십니까? 세 번째는 성전은 헤롯이 건축했습니다.
그가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에돔 족에 속하는 이두메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쯤만 유대인이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데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외식을 했고, 정치적 목적으로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외식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를 바로 해야 합니다.
2. 베스도는 [정의를 구현]하기를 원했습니다(25:4-5절).
“그 사람에게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바울을 법정에 세워놓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암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종교인들의 위선과 기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정당을 만드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비록 기독교 정당에 속한 사람이 소수라 해도 기독교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파장은 너무도 커서 기독교전체의 이미지에 큰 해악을 끼치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그 기독교 정당을 기독교 전체와 연관시키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의 종교인들이 이런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구현이 어떻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더 뇌물을 많이 먹고,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의 구호만 외쳐서는 안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거짓 죄목을 씌웠습니다. 종교가 생명력을 잃으면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해집니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꽃이 백합입니다. 특별히 부활절 때에는 이 백합꽃을 많이 꼽습니다. 저도 백합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백합 꽃이 썩으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냄새가 고약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보다 신자가 썩으면 더 냄새가 고약합니다.
여러분 자유당 시절을 잊으셨습니까? 3.15부정 선거를 누가 앞장서서 했습니다. 기독교인인 이 기붕과 그의 심복인 집사 최 인규 내무부 장관이 앞장섰던 것입니다.
3. 베스도는 마침내 [불의와 타협]하고 말았습니다(9절).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느냐” 고 물었습니다.
타협은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에서도 잘 나타난 사탄의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4:9절에 사탄은 말했습니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너에게 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원칙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믿음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타협할 것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문제나 영적인 문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타협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는 타협해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정치에서는 항상 대화와 타협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은 서로 대화하고 타협할 줄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4. 베스도의 영적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바울의 말을 듣고 싶다고 했을 때 베스도는 즉시 그러자고 응답했습니다.
종교적 관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취미에 불과했습니다.
종교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취미삼아 들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그립바나 베스도나 말씀을 들었지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변화는 언제 일어납니까? 생명을 걸고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취미가 아닙니다.
종교는 생명입니다. 주일에 와서 설교를 듣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는 종교가 취미가 된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취미가 아니라 생명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사람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당국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침묵하라,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사도행전 5:29절에 보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대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그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2) 인간이 말하는 정의란 시대마다, 장소마다 변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영원토록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선도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넘어졌을 때 우리나라의 관습은 일으켜 세워야 좋은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부모도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냥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의존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감옥에 간 사람들 가운데 습관이 달라서 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화가 나면 너 죽어 하고 말한다고 그것이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것이 바로 감옥에 갈 정도의 협박이 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야 너 참 예쁘구나 하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성폭력이 되어 감옥에 가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관습이나 선의 표준은 시대마다, 장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3) 세상에는 타협할 것과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타협할 수 없는 것은 생명문제, 신앙문제, 구원문제, 교리문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일들은 서로 대화를 통해서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은 서로 타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고, 학생들이 선생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고,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윗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맺는 말]
베스도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 놓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의를 원했고, 비교적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인 관심이 부족했고,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환심을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25:19절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멸시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눈을 밝게 뜨게 하여주옵소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지 하게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